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중국정사외국전

천자가 신독국(身毒國)을 찾게 하였으나 곤명에게 막혀 통할 수 없음

  • 국가
    서남이(西南夷)
원수(元狩) 원년(전122)에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대하(大夏) 주 001
각주 001)
大夏 : Bactria;Bactriana. 기원전 246∼기원전 138. 힌두쿠시(Hindu Kush)산맥과 아무다리아(Amu Darya)강 사이, 즉 오늘날의 아프카니스탄 북부에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 페르시아어에서는 Bākhtar, 아랍어와 인도어에서는 Bhalika로 표기한다. 기원전 126년 張騫이 방문하였을 당시에는 大月氏의 침입을 받아 왕국이 망한 뒤였다고 한다. 「大宛列傳」에서는 大夏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大宛의 서남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정착생활을 하여 성곽과 가옥을 가지고 있으며 대완과 풍속이 같다고 하였다. 또, 대군장(大君長)은 없지만 때때로 성읍에 작은 우두머리[小長]가 세워지고, 그 군대는 약하고 싸우기를 두려워하지만, [사람들은] 장사는 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월지가 흉노의 압박으로 서쪽으로 도망쳐 와서 그들을 점령하고 모두 臣屬시켰다고 하였다. 그 인구는 대략 100여만 명이 되고, 그 도읍은 남시성(藍市城)인데 시장이 있어 각종 물건들을 판매하며, 그 동남쪽에는 신독국(身毒國)이 있다고 하였다.(『史記』 卷123 「大宛列傳」 第63, 3164쪽).
닫기
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왔는데, 대하에 있을 때 촉(蜀)의 포(布)와 공(邛)의 죽장(竹杖)주 002
각주 002)
邛의 竹杖 : 『集解』;“韋昭가 말하기를, ‘邛縣의 대나무이며, (공현은) 蜀郡에 屬한다.’고 하였다. 瓚이 말하기를, ‘邛은 山의 이름이다. 이 대나무는 그 마디가 길고 속이 실하여 지팡이를 만들기에 좋다.’라고 하였다(韋昭曰 : 「邛縣之竹, 屬蜀.」 瓚曰 : 「邛, 山名. 此竹節高實中, 可作杖).
『考證』에서는 ‘蜀布’와 ‘邛竹杖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蜀布는 蜀 지방에서 나는 布이다. 邛竹杖은 邛 지방에서 나는 대나무 지팡이이다. 大夏는 「匈奴傳」에 보인다. 梁玉繩이 말하기를, “『史記』·『漢書』의 表를 살펴보면, 張騫이 元朔 6年(전123) 3월에 列侯에 封해졌는데, 그렇다면 필경 元狩 元年(전122)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大宛傳」을 고구하면, 張騫은 匈奴 가운데 구류되어 있다가, 左谷蠡王이 그 太子를 공격하여 자립하고 국내가 어지러워지자, 도망하여 漢으로 귀환하였다. 「匈奴傳」으로 그 사실을 추적해보면 元朔 3年(전126)의 일이니, 장건이 元朔 3년에 귀환하였다고 하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7).
닫기
을 보고 그 들여온 곳을 알아보았었다. [그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동남쪽의 신독국(身毒國) 주 003
각주 003)
身毒國 : 『集解』;“徐廣이 말하기를, ‘어떤 이는 字를 ‘竺’이라고도 적는다. 『漢書』에서는 바로 이르기를, ‘身毒’이라고 하였지만, 『史記』의 한 판본에서는 ‘乾毒’이라고 적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駰이 살피건대, 『漢書音義』에서 말하기를, ‘一名 ‘天竺’이라고 하는 것은 곧 浮屠胡 이것이다.”라고 하였다(徐廣曰 : 「字或作 ‘竺’. 漢書直云 ‘身毒’, 史記一本作 ‘乾毒’.」 駰案 : 漢書音義曰 「一名 ‘天竺’, 則浮屠胡是也」). 『索隱』; “身의 音은 捐이고, 毒의 音은 篤이다. 다른 판본에서는 ‘乾毒’이라고 적었다. [東晉 사람 蔡謨가 지은] 『漢書音義』에서는 一名 ‘天竺’이라고 하였다(身音捐, 毒音篤. 一本作 「乾毒」. 漢書音義一名 「天竺」也).”
『考證』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王先謙이 말하기를, “『集解』에 따르면, 『史記』의 한 판본이 身毒을 乾毒이라 적었다고 했다. 顔師古는 이르기를, ‘捐篤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살피건대, 捐篤은 마땅히 捐毒이라 적어야 하며, 西域의 國이지, 天竺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漢書』 「西域傳」에 보인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7). 결과적으로 身毒은 인도를 지칭하는 말이며, 『史記』 「大宛列傳」 역주의 해당 注가 그 내용이 자세하다.
닫기
으로부터 오는데, 수천 리는 족히될 터이지만, 촉(蜀) 상인이 파는 것을 얻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어떤 이에게 듣기는 공(邛)의 서쪽으로 2,000리 정도에 신독국이 있다고 했다. 장건이 이를 근거로 조금 과장하여 말하기를, 대하한(漢)의 서남쪽에 있는데, 중국을 흠모하나, 흉노가 그 길을 막고 있는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진실로 촉(蜀)을 통하면, 신독국에 이르는 길은 편하고 가까우며, 이익만 있을 뿐 해가 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천자(天子)가 마침내 왕연우(王然于), 백시창(柏始昌), 여월인(呂越人) 주 004
각주 004)
『考證』에서는 『漢書』에는 “有利” 두 자가 없고, 楓·三本에는 “柏始昌·呂越人等” 7字가 없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8).
닫기
등에게 영을 내려 서이 서쪽 사이로 몰래 나가 신독국을 찾게 하였다.주 005
각주 005)
「大宛傳」에 따르면, 왕연우(王然于), 백시창(柏始昌), 여월인(呂越人) 등이 武帝의 명을 받아 실제로 身毒國道를 찾아 나선 시점은 張騫이 신독국도를 찾을 것을 건의한 뒤 한참 뒤로 보인다. 즉, 일러도 南越이 멸망한 기원전 111년 이후의 일이어야 한다. 『史記』 「大宛列傳」은 명확하게 신독국도를 찾기 위한 사자 파견을 남월 멸망 이후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한은 이미 월(越)을 멸망시켰으므로 촉(蜀)과 서남이(西南夷)들이 모두 떨면서 관리[를 파견해 줄 것]과 입조(入朝)하기를 청했다. ……이에 백시창(柏始昌)과 여월인(呂越人) 등 일년에 십여 무리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들 처음 [설치된] 군을 나서서 대하에 가려고 했으나 모두 곤명에게 막혀서 피살되고 재물은 빼앗겼으며, 끝내 대하와 소통할 수 없었다. 이에 한은 삼보(三輔)의 죄수들을 보내고, 파촉(巴蜀)의 병사 수만 명을 [합하여], 곽창(郭昌)과 위광(衛廣) 등 두 장군을 파견하여 곤명이 한의 사신들을 방해한 것에 대해 공격하도록 해서, 수만 명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아서 갔다. 그 후에 사신을 보냈는데, 곤명이 다시 노략질하니 끝내 소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북도(北道)로는 주천에서 대하에 이르고 사신들도 이미 많아져, 외국에서는 한의 재물이 날로 넘쳐나서 그 물자를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史記』 卷123, 3170 ~ 3171).” 이 기사와 『사기』와 『한서』의 여타 기사들을 종합하여 보면, 신독국도를 찾는 작업과 미막 등의 복속, 滇王의 入朝, 益州郡의 설치와 확대 등은 거의 동시에 추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월의 멸망, 야랑과 서이 평정, 신독국도 개통 추진, 노침과 미막의 멸망, 전왕의 입조, 신독국도 개통 시도의 실패의 순서로 일이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漢書』 「西南夷傳」에서 신독국도 개통 작업이 4년여 만에 실패했다고 밝힌 것을 보아도 더욱 그러하다. 위 『史記』 「大宛列傳」 기사가 지적하였듯이 ‘북도’의 개통으로 그 필요성이 감소한 뒤, 아마도 기원전 105년 益州郡 昆明의 반란과 곽창 등의 진압실패 이후 포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신독국도 개통 자체는 실패하였지만, 漢은 이 과정에서 昆明의 지역인 益州郡의 西部지역을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닫기
전(滇)에 이르렀는데, 전왕(滇王) 상강(嘗羌) 주 006
각주 006)
嘗羌 : 『集解』에서“徐廣이 말하기를, ‘嘗’은 어떤 판본에서는 ‘賞’이라고 적었다(徐廣曰 : 「嘗, 一作 ‘賞’).”라고 하였다. 『考證』은 『漢書』에서는 嘗羌을 “當羌”으로 적고 있음을 지적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8).
닫기
이 끝내 잡아두고, 대신하여 길을 찾기 위해 서쪽으로 보낸 것이 10여 무리였다. 한해 남짓 지나 모두 곤명에게 막혀주 007
각주 007)
『集解』에서 “如淳이 말하기를, 昆明에게 길이 막혔다(如淳曰 : 「爲昆明所閉道」).”라고 하였다.
『正義』 ; 昆明은 지금의 嶲州 南쪽에 있었는데, 昆縣이 이것이라고 하였다(昆明在今嶲州南, 昆縣是也).
닫기
끝내 신독국과 통(通)할 수 없었다.

  • 각주 001)
    大夏 : Bactria;Bactriana. 기원전 246∼기원전 138. 힌두쿠시(Hindu Kush)산맥과 아무다리아(Amu Darya)강 사이, 즉 오늘날의 아프카니스탄 북부에 고대 그리스인이 세운 나라. 페르시아어에서는 Bākhtar, 아랍어와 인도어에서는 Bhalika로 표기한다. 기원전 126년 張騫이 방문하였을 당시에는 大月氏의 침입을 받아 왕국이 망한 뒤였다고 한다. 「大宛列傳」에서는 大夏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大宛의 서남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에 있고, 정착생활을 하여 성곽과 가옥을 가지고 있으며 대완과 풍속이 같다고 하였다. 또, 대군장(大君長)은 없지만 때때로 성읍에 작은 우두머리[小長]가 세워지고, 그 군대는 약하고 싸우기를 두려워하지만, [사람들은] 장사는 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월지가 흉노의 압박으로 서쪽으로 도망쳐 와서 그들을 점령하고 모두 臣屬시켰다고 하였다. 그 인구는 대략 100여만 명이 되고, 그 도읍은 남시성(藍市城)인데 시장이 있어 각종 물건들을 판매하며, 그 동남쪽에는 신독국(身毒國)이 있다고 하였다.(『史記』 卷123 「大宛列傳」 第63, 3164쪽).
     바로가기
  • 각주 002)
    邛의 竹杖 : 『集解』;“韋昭가 말하기를, ‘邛縣의 대나무이며, (공현은) 蜀郡에 屬한다.’고 하였다. 瓚이 말하기를, ‘邛은 山의 이름이다. 이 대나무는 그 마디가 길고 속이 실하여 지팡이를 만들기에 좋다.’라고 하였다(韋昭曰 : 「邛縣之竹, 屬蜀.」 瓚曰 : 「邛, 山名. 此竹節高實中, 可作杖).
    『考證』에서는 ‘蜀布’와 ‘邛竹杖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蜀布는 蜀 지방에서 나는 布이다. 邛竹杖은 邛 지방에서 나는 대나무 지팡이이다. 大夏는 「匈奴傳」에 보인다. 梁玉繩이 말하기를, “『史記』·『漢書』의 表를 살펴보면, 張騫이 元朔 6年(전123) 3월에 列侯에 封해졌는데, 그렇다면 필경 元狩 元年(전122)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大宛傳」을 고구하면, 張騫은 匈奴 가운데 구류되어 있다가, 左谷蠡王이 그 太子를 공격하여 자립하고 국내가 어지러워지자, 도망하여 漢으로 귀환하였다. 「匈奴傳」으로 그 사실을 추적해보면 元朔 3年(전126)의 일이니, 장건이 元朔 3년에 귀환하였다고 하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7).
     바로가기
  • 각주 003)
    身毒國 : 『集解』;“徐廣이 말하기를, ‘어떤 이는 字를 ‘竺’이라고도 적는다. 『漢書』에서는 바로 이르기를, ‘身毒’이라고 하였지만, 『史記』의 한 판본에서는 ‘乾毒’이라고 적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駰이 살피건대, 『漢書音義』에서 말하기를, ‘一名 ‘天竺’이라고 하는 것은 곧 浮屠胡 이것이다.”라고 하였다(徐廣曰 : 「字或作 ‘竺’. 漢書直云 ‘身毒’, 史記一本作 ‘乾毒’.」 駰案 : 漢書音義曰 「一名 ‘天竺’, 則浮屠胡是也」). 『索隱』; “身의 音은 捐이고, 毒의 音은 篤이다. 다른 판본에서는 ‘乾毒’이라고 적었다. [東晉 사람 蔡謨가 지은] 『漢書音義』에서는 一名 ‘天竺’이라고 하였다(身音捐, 毒音篤. 一本作 「乾毒」. 漢書音義一名 「天竺」也).”
    『考證』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王先謙이 말하기를, “『集解』에 따르면, 『史記』의 한 판본이 身毒을 乾毒이라 적었다고 했다. 顔師古는 이르기를, ‘捐篤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살피건대, 捐篤은 마땅히 捐毒이라 적어야 하며, 西域의 國이지, 天竺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漢書』 「西域傳」에 보인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7). 결과적으로 身毒은 인도를 지칭하는 말이며, 『史記』 「大宛列傳」 역주의 해당 注가 그 내용이 자세하다.
     바로가기
  • 각주 004)
    『考證』에서는 『漢書』에는 “有利” 두 자가 없고, 楓·三本에는 “柏始昌·呂越人等” 7字가 없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8).
     바로가기
  • 각주 005)
    「大宛傳」에 따르면, 왕연우(王然于), 백시창(柏始昌), 여월인(呂越人) 등이 武帝의 명을 받아 실제로 身毒國道를 찾아 나선 시점은 張騫이 신독국도를 찾을 것을 건의한 뒤 한참 뒤로 보인다. 즉, 일러도 南越이 멸망한 기원전 111년 이후의 일이어야 한다. 『史記』 「大宛列傳」은 명확하게 신독국도를 찾기 위한 사자 파견을 남월 멸망 이후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한은 이미 월(越)을 멸망시켰으므로 촉(蜀)과 서남이(西南夷)들이 모두 떨면서 관리[를 파견해 줄 것]과 입조(入朝)하기를 청했다. ……이에 백시창(柏始昌)과 여월인(呂越人) 등 일년에 십여 무리를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들 처음 [설치된] 군을 나서서 대하에 가려고 했으나 모두 곤명에게 막혀서 피살되고 재물은 빼앗겼으며, 끝내 대하와 소통할 수 없었다. 이에 한은 삼보(三輔)의 죄수들을 보내고, 파촉(巴蜀)의 병사 수만 명을 [합하여], 곽창(郭昌)과 위광(衛廣) 등 두 장군을 파견하여 곤명이 한의 사신들을 방해한 것에 대해 공격하도록 해서, 수만 명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아서 갔다. 그 후에 사신을 보냈는데, 곤명이 다시 노략질하니 끝내 소통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북도(北道)로는 주천에서 대하에 이르고 사신들도 이미 많아져, 외국에서는 한의 재물이 날로 넘쳐나서 그 물자를 귀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史記』 卷123, 3170 ~ 3171).” 이 기사와 『사기』와 『한서』의 여타 기사들을 종합하여 보면, 신독국도를 찾는 작업과 미막 등의 복속, 滇王의 入朝, 益州郡의 설치와 확대 등은 거의 동시에 추진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월의 멸망, 야랑과 서이 평정, 신독국도 개통 추진, 노침과 미막의 멸망, 전왕의 입조, 신독국도 개통 시도의 실패의 순서로 일이 진행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漢書』 「西南夷傳」에서 신독국도 개통 작업이 4년여 만에 실패했다고 밝힌 것을 보아도 더욱 그러하다. 위 『史記』 「大宛列傳」 기사가 지적하였듯이 ‘북도’의 개통으로 그 필요성이 감소한 뒤, 아마도 기원전 105년 益州郡 昆明의 반란과 곽창 등의 진압실패 이후 포기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신독국도 개통 자체는 실패하였지만, 漢은 이 과정에서 昆明의 지역인 益州郡의 西部지역을 개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6)
    嘗羌 : 『集解』에서“徐廣이 말하기를, ‘嘗’은 어떤 판본에서는 ‘賞’이라고 적었다(徐廣曰 : 「嘗, 一作 ‘賞’).”라고 하였다. 『考證』은 『漢書』에서는 嘗羌을 “當羌”으로 적고 있음을 지적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8).
     바로가기
  • 각주 007)
    『集解』에서 “如淳이 말하기를, 昆明에게 길이 막혔다(如淳曰 : 「爲昆明所閉道」).”라고 하였다.
    『正義』 ; 昆明은 지금의 嶲州 南쪽에 있었는데, 昆縣이 이것이라고 하였다(昆明在今嶲州南, 昆縣是也).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 장건, 왕연우(王然于), 백시창(柏始昌), 여월인(呂越人), 상강(嘗羌)
지명
대하(大夏), 대하, 촉(蜀), 신독국(身毒國), 촉(蜀), 신독국, 대하, 한(漢), 촉(蜀), 신독국, 신독국, 전(滇), 신독국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천자가 신독국(身毒國)을 찾게 하였으나 곤명에게 막혀 통할 수 없음 자료번호 : jo.k_0001_0116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