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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몽(唐蒙)이 파촉(巴蜀)과 함께 야량(夜郞)을 개통하고 군현을 설치함

  • 국가
    서남이(西南夷)
건원(建元) 6년(전135)에 대행(大行)주 001
각주 001)
大行 : 『漢書』 「百官公卿表」에서는 大行을 귀순한 蠻夷를 담당하던 典客을 개칭한 것으로 보았는데, “典客은 秦官으로 귀순한 蠻夷들을 담당하며, (屬官으로) 丞이 있다. 景帝 中 6년(전144)경에 大行令으로 불렀고, 武帝 太初 元年(전104)에 大鴻臚로 이름을 바꾸었다. 屬官으로 行人 譯官 別火 3令丞 및 郡邸長丞이 있다. 武帝 太初 元年에 行人을 大行令으로 고쳐 불렀고, 別火를 처음으로 두었다(『漢書』卷90上 「百官公卿表」 第7上, 730쪽).”라고 하였다. 顔師古는 景帝 中 2년(전148) 諸侯王이 죽거나 列侯가 처음 봉건되어 취국할 때는 大鴻臚가 諡·誄와 策을 올리게 하고, 列侯가 죽거나 諸侯의 太傅가 처음 관에 제수될 때는 大行이 諡·誄와 策文을 올리게 한 조치에 관한 「景帝紀」의 기사에 注를 달면서, “大鴻臚는 본디 명칭이 典客이며, 나중에 고쳐 大鴻臚라 한 것이다. 大行令은 본디 명칭이 行人이며, 바로 典客의 屬官인데, 나중에 고쳐 大行令이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일이 귀하고 무거울[尊重] 경우에는 大鴻臚를 파견하고, 일이 가볍고 천한[輕賤] 경우에는 大行을 보내는 것이다. 이 本紀의 글에 따르면, 景帝는 이미 典客을 고쳐 大鴻臚라 하였으며, 行人을 고쳐 大行이라 하였다. 그런데 「百官公卿表」에서는 여전히 景帝 中六年에 典客의 이름을 바꾸어 大行令이라 하고, 武帝 太初 元年에 大行令의 이름을 바꾸어 大鴻臚라 했으며, 行人의 이름을 바꾸어 大行令이라 해다고 했다. 이는 마땅히 表의 오류이다.”라고 하였다(『漢書』卷5 「景帝紀」 第5,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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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王恢) 주 002
각주 002)
王恢 : 西漢의 將軍이다. 燕나라 사람으로 여러 차례 邊吏를 지낸 까닭에, 胡, 즉 흉노의 일에 밝았다. 建元 元年(전140)에 匈奴가 화친을 청하였을 때, 大行의 職에 있으면서 韓安國과 조정에서 논쟁을 벌여 화친에 반대하였다. 元光 元年(전134) 馬邑 사건으로 武帝의 질책을 받자,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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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동월(東越)을 공격하자, 동월은 그 왕 영(郢)을 죽여 [항복의 의사를] 알렸다.주 003
각주 003)
「東越列傳」에 따르면, 東越은 곧 閩越이다. 閩越에 대한 출격은 閩越이 ‘天子의 職約’을 어기고 함부로 南越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벌어졌다. 東越王 郢을 죽이고 항복한 이들은 왕의 弟 餘善과 相 및 그 宗族들이었다(『史記』 卷114 「東越列傳」 第54, 29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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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는 군사적 위세를 바탕으로 파양령(番陽令)주 004
각주 004)
番陽 : 『正義』에서 番의 音을 ‘婆’라 하였는데(番音婆), 이를 좇아 ‘番陽’을 파양으로 읽었다. 『考證』에서는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番陽은 「地理志」에서 鄱陽이라 적었는데, 漢의 縣 이름이다. 豫章郡에 屬하며, 지금의 九江府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4). 『地名大辭典』에 따르면, 番는 春秋시기 楚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秦代에 番縣을 설치하였다. 이후 西漢代에 番縣을 番陽縣으로 바꾸었으며, 豫章郡에 속하게 하였다. 그 治所는 지금의 江西省 波陽縣 동북의 古縣渡鎭이다(史爲樂, 2005 : 2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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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몽(唐蒙) 주 005
각주 005)
唐蒙에 관하여는 여기 「西南夷列傳」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가장 자세하며, 다른 사서에도 서남이 개척과 관련하여 언급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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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내 남월(南越) 주 006
각주 006)
여기에서의 南越은 國名이다. 남월국은 기원전 203年부터 기원전 111年까지 중국의 嶺南지역에 존속한 고대국가이며, 國都는 番禺(지금의 廣州 市内)에 있었다. 그 疆域은 오늘날의 중국 廣東, 廣西 두 성의 대부분 지역과 복건, 호남, 귀주, 운남의 일부 지역과 베트남 북부를 포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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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넌지시 일러 깨우치게 하였다. 남월당몽에게 에서 나는 구장(枸醬)주 007
각주 007)
枸醬 : 『集解』; “徐廣은 ‘枸’는 ‘蒟’라 적기도 하며, 音은 ‘窶’이다’라고 하였다. (裴)駰이 살피건대, 『漢書音義』에서 말하기를, ‘枸木은 穀樹와 유사하고, 그 잎이 뽕나무 잎과 같다. 그 잎을 사용하여 醬을 담그면 시면서도 맛있는데, 蜀人은 珍味로 여겼다(徐廣曰 : 「枸, 一作 『蒟』, 音窶.」 駰案 : 漢書音義曰 「枸木似穀樹, 其葉如桑葉. 用其葉作醬酢, 美, 蜀人以為珍味」).”라고 하였다. 『索隱』; “(枸는) 蒟이다. 살피건대, [晉人으로 『漢書音義』를 지은] 晉灼은 音이 矩라 하였다. 劉德은 이르기를, ‘蒟樹는 뽕나무와 같은데, 그 열매(오디)의 길이가 2 3寸이며 맛은 시다. 그 열매를 취하여 醬을 담그면, 맛있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蒟는 樹에서 나므로, 木이 아니다. 지금 蜀 지방에서는 家마다 蒟를 내는데, 열매가 뽕나무의 오디와 비슷하고, 맛이 매운 것이 생강과 유사하며, 시지 않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잎을 취한다.’라고 하였다. 이 注는 또 이르기를, 잎이 뽕나무 잎과 비슷하지만, 아니라고 하였다. 『廣志』에서는 이르기를, ‘色이 검고 맛이 매우며, 기를 가라앉혀 허기를 느끼게 한다(식욕을 돋운다).’라고 하였다. 窶는 求와 羽의 반절이다(蒟. 案 : 晉灼音矩. 劉德云 「蒟樹如桑, 其椹長二三寸, 味酢;取其實以為醬, 美」. 又云 「蒟緣樹而生, 非木也. 今蜀土家出蒟, 實似桑椹, 味辛似薑, 不酢」. 又云 「取葉」. 此注又云葉似桑葉, 非也. 廣志云 「色黑, 味辛, 下氣消穀」. 窶, 求羽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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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대접하였다. 당몽이 들여온 곳을 물으니, 말하기를, “서북쪽 장가(牂柯)로부터 오는데, 장가강(牂柯江) 주 008
각주 008)
牂柯 : 『正義』; “崔浩(北魏 사람, 381 ~ 450)는 이르기를, ‘牂柯는 배를 매는 말뚝이다.’라고 하였다. 常氏(東晉代 常璩)는 『華陽國志』에서 이르기를, ‘楚 頃襄王 때에 莊蹻를 보내 夜郞을 쳤는데, 군대가 且蘭에 이르러, 江岸에 배를 대고 步兵戰을 벌였다. 夜郞을 멸한 뒤에, 且蘭을 배를 댄 말뚝이 있는 곳이라 하여 곧 그 이름을 고쳐 牂柯라 하였다.’라고 하였다(崔浩云 : 「牂柯, 繫船杙也.」 常氏華陽國志云 : 「楚頃襄王時, 遣莊蹻伐夜郞, 軍至且蘭, 椓船於岸而步戰. 旣滅夜郞, 以且蘭有椓船柯處, 乃改其名為牂柯」).”
任乃强은 『正義』에서 인용한 『華陽國志』에서 장교와 장가를 연결시킨 부분에 대하여 『南中記』를 지은 譙周의 오류이며, 상거가 이를 무비판적으로 채용한 결과라고 하였다. 譙周가 南人으로부터 牂柯郡 이름의 유래에 관한 전설을 듣고 莊蹻의 入滇 설화에 부회하였다는 것이다(任乃强, 1987 : 233 ~ 234). 『考證』에서도 ‘장가(강)’에 관하여 설명을 붙이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楓 三本에는 牂柯 아래 “江” 字가 있다. 王念孫이 말하기를, “牂柯 아래 마땅히 ‘江’字가 있어야 한다. 道는 ‘從’의 의미이며, 서북쪽 牂柯江으로부터 오는 것을 말한다. 『索隱』 판본에 ‘道牂柯江’ 네 字가 나오고, 『漢書』, 『漢紀』 모두 ‘道西北牂柯江, 江廣數里’라고 적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라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牂柯江은 지금의 盤江이며, 『水經注』에서는 溫水라 칭하였다. 雲南 曲靖府 북쪽 霑益州 境內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阿迷州 동쪽에 이르면, 꺾여 동북쪽으로 흘러 八達江이 되는데, 속칭 混水河이다. 羅平州 동쪽 경계에 이르면 돌아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貴州 興義府 남쪽을 지나면 또 동쪽으로 北盤江과 합류하니, 곧 『水經注』에서 말하는 存水이다. 南·北盤江이 만나서 합류하면 비로소 牂柯江의 이름이 있게 되니, 대개 興義府 지역이 곧 漢武帝가 세운 牂柯郡이다. 따라서, 酈氏는 물이 牂柯郡 且蘭縣을 거친다고 말하고, 그것을 일러 牂柯水라 하였다. 牂柯江이 당시에는 牂柯郡 남쪽 일대만을 專稱하여 말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바야흐로 강 전체를 總稱하는 이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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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넓이가 수 리(里)이며, 번우성(番禺城) 주 009
각주 009)
番禺城 : 南越 趙佗의 수도로 지금의 廣州 시내로 비정된다. 番禺縣은 秦始皇 33년(전214)에 南越지역을 점령한 뒤 설치한 것으로 南海郡의 치소가 되었다. 현재의 廣東省 廣州市에 비정된다(史爲樂, 2005 : 2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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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로 나옵니다.”라고 하였다. 당몽이 돌아와 장안(長安)에 이르러 촉(蜀)에서 온 상인에게 [그 사정을] 물었다. 상인이 말하기를, “오직 지방에서만 구장이 나는데, 대부분 몰래 가지고 나가 야랑(夜郞)에 팝니다. 야랑이라고 하는 것은 장가강 가에 있는데, 그 강의 너비가 100여 보(步)로 족히 배를 띄울 만합니다. 남월은 재물을 가지고 야랑을 역속(役屬)하여 [그 영향력이] 서쪽으로 동사(同師)에 이르지만, 또한 신하로 부리지는 못 합니다.”라고 하였다. 당몽이 이를 바탕으로 상서(上書)하여 상(上)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남월왕은 황옥좌독(黃屋左纛)의 제도를 시행하고,주 010
각주 010)
‘黃屋左纛’ : 皇帝의 車服이다. 황옥은 노란 비단으로 만든 수레의 덮개이고, ‘纛’은 야크의 꼬리로 만든 깃발이며, 수레 곁말의 머리나 수레 횡목의 좌변에 꽂은 듯하다(李斐曰 : 「天子車以黃繒為蓋裏. 纛, 毛羽幢也, 在乘輿車衡左方上注之. 蔡邕曰以犛牛尾為之, 如斗, 或在騑頭, 或在衡.」 應劭曰 : 「雉尾為之, 在左驂, 當鑣上.」 師古曰 : 「纛音毒, 又徒到反. 應說非也.」 : 『漢書』卷1上 「高帝紀」 第1上,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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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리는] 땅은 동서 만여 리(里)라 하니, 이름은 외신(外臣)주 011
각주 011)
外臣 : ‘外臣’ 개념에 관하여는 도모노부 구리하라(栗原朋信)의 학설이 유명하다. 도모노부는 황제의 덕과 중국의 예법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중국의 漢을 중심으로 하는 天下를 내외로 나누고, 중국 안은 內臣, 內客臣으로 중국 바깥은 外臣, 흉노와 같은 外客臣, 그리고 단순히 德化만으로 신속시킬 수 없는 絶域의 朝貢國으로 구분하였다(栗原朋信, 1960 : 261). 이 중 ‘外臣’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한 황제의 덕화와 함께 예가 보급될 뿐, 법이 미치지 않는 지역(栗原朋信, 1960 : 249)”이며, “내신과 외신의 구별은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역시 제도상의 것, 바꾸어 말하면 문화적인 것(栗原朋信, 1960 : 254)”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외신과 한과의 관계를 규정한 ‘職約’을 설명하면서, “한의 천하에 편입된 외신에 대하여 한 황제의 통제력은 보통의 경우 그 국내 질서에는 간섭하지 않지만, 외신 상호의 질서 유지에는 한의 규정이 존재하여 한의 간섭이 미친다(栗原朋信, 1960 : 260 ~ 61).”라고 하였다.
중국적 세계질서(Chinese World order)에 대하여 종래의 일원적 관점을 통한 평면적 접근을 극복하고 다원적 관점을 통한 보다 입체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金翰奎는 도모노부의 연구의 시도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 ‘外臣’ 개념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 비판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栗原의 ‘외신’은 ……(역주자 생략, 이하 同) 중외관계의 여러 유형 가운데서 ‘화친Ⅱ’ 관계에 포함되는 외국만을 가리킨다. 또한 율원의 ‘禮와 法’은 ‘內臣’과 ‘外臣’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뿐, ‘外臣’ 자체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栗原의 ‘내신’과 ‘외신’의 구분은 단순한 중국과 주변민족의 구분을 의미할 뿐이다. ……. 栗原의 도식 가운데에는 ‘외신이 아닌 또 다른 주변민족들’이 소외되어 있다고 하겠다. 栗原은 ‘外客臣’의 존재를 별도로 설정하고 있지만, ‘외객신’과 ‘외신’을 구별하는 기준을 오로지 ‘덕과 예가 미치는 정도의 강약’에만 두고 있으므로(『秦漢史の硏究』, 276쪽), 양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栗原의 ‘中國的 世界秩序’는 일견 대단히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매우 단순하다(김한규, 1982 :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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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되, 실은 한 주(州)주 012
각주 012)
州 : 여기에서는 部刺史의 감찰구역으로서의 ‘州’나 後漢代 13州의 하나로서의 ‘州’와는 그 의미하는 바가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의 ‘州’는 오히려 ‘九州’의 州, 특히 우임금이 정비하기 이전의 독립적이고 격절된 하나의 구역 내지 자체적 세계로서의 ‘州’라는 의미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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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인(主人)입니다. 지금 장사(長沙) 주 013
각주 013)
長沙 : 長沙國을 가리킨다. 장사국은 西漢시기 현재의 湖南 지역에 설치된 諸侯封國인데, 기원전 202年에 세워지고 기원후 7년에 廢封되어 209년간 존속하였다. 漢高祖가 봉건한 이성제후 가운데 한고조 사망 이후에도 존속한 유일한 제후왕이다. 그 강역은 秦代의 長沙郡 영역을 이어 받았고, 장사군의 치소인 “湘縣”(오늘날의 臨湘縣)을 國都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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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豫章) 주 014
각주 014)
豫章 : 漢高祖 初年(대략 기원전 202年)에 豫章郡(贛江은 본디 豫章江이라 칭하였다.)을 설치하였다. 郡의 治所는 南昌이며, 18개 縣을 관할하였는데, 南昌·廬陵·彭澤·鄱陽·餘汗·柴桑·贛·新淦·南城·宜春·雩都·艾·安平·海昏·曆陵과 建成 等이 그것이다. 그 分布地域은 贛江·盱江·信江·修水·袁水 沿岸, 곧 후대의 江西省 지역과 대체로 부합한다. 漢武帝時에 全國을 13個 監察區로 나누었는데, 이를 13部州라 칭하였다. 이때의 江西는 楊州部에 속하였다. 王莽의 新 始建國 元年(9)에 豫章郡의 이름을 九江郡으로 변경하였다. 後漢·三國·晉·南北朝 시기 郡의 이름은 豫章이었고, 郡의 治所 이름은 南昌이었다. 隋 開皇 九年(589)에 豫章郡을 폐지하고 洪州를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여전히 南昌縣이었다. 唐 至德 元年(756)에 豫章郡의 이름을 章郡으로 개칭하였다. 唐朝 貞觀年間에 長江의 中下流 지역에 江南道를 설치하였는데, 서기 733年 唐玄宗이 다시 江南東道와 江南西道로 나누었다. 江南東道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변화를 거쳐 지금은 江蘇와 安徽 兩省이 되었으며, 江南西道는 江西라는 이름을 계속 유지하여 豫章을 대신하여 강서지역의 행정명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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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해 가면, 물길이 끊기는 경우가 많아 가기 어렵습니다. 제가 듣건대, 야랑이 보유한 정예 군사가 10여 만은 족히 된다고 하니, 장가강에 배를 띄워 불시에 [군대를] 내보내면, 이는 월(越)을 제압할 수 있는 하나의 기책(奇策)입니다. 진실로 한(漢)의 강성함과 파촉(巴蜀)의 넉넉함이라면, 야랑(夜郞)에 이르는 길을 개통하여 [군현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라고 하니, 상(上)이 그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당몽을 제수(除授)하여 낭중장(郞中將)주 015
각주 015)
『考證』에서는 北宋代의 역사가 劉攽(1023 ~ 1089)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郎中將은 마땅히 中郞將으로 적어야 하며, 뒤에 (司馬)相如로 하여금 郎中將으로서 가서 깨우치게 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또, 淸代 사람인 周壽昌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華陽國志』에서는 中郞將이라 적었다.”고 했다(瀧川資言, 1935 : 4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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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고, 천인의 군사와 보급부대주 016
각주 016)
食重 : 『索隱』; “[‘食重’은] 食貨 輜重의 수레이다. ‘重’의 음은 持와 用의 半切이라 하였다(案 : 食貨輜重車也. 音持用反).” 치(輜)는 의복 같은 가벼운 물건(物件), 중(重)은 무기(武器) 같은 무거운 물건(物件)을 뜻한다. 따라서, 치중은 말이나 수레 따위에 실은 짐, 그리고 군대(軍隊)의 여러 가지 군수 물품(物品). 탄약(彈藥)·식량(食糧)·장막(帳幕)·피복 따위 물건(物件)을 통칭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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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여 인을 이끌고, 파(巴)·촉(蜀)의 작관(筰關)으로부터주 017
각주 017)
『考證』은 莋關에 관하여 설명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漢書』에는 “巴” 아래 “蜀”자가 없다. 王念孫이 말하기를, “巴의 莋關은 본디 巴의 符關으로 적어야 한다. 『水經』에 이르기를, ‘江水가 동쪽으로 符縣을 지나, 북쪽으로 邪 동남쪽에 이르면, 鰼部水가 符關 동북쪽으로부터 흘러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水經의] 注에 이르기를, ‘縣은 옛 巴夷의 땅인데, 漢武帝 建元 6년 唐蒙을 中郞將으로 삼아 萬人을 거느리고 巴의 符關을 나가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符關은 符縣에 있고, 현은 옛 巴夷의 땅이므로 巴의 符關이라 말한 것이다. 漢의 符縣은 지금의 瀘州 合江縣 서쪽에 있었고, 지금의 합강현 남쪽에 符關이 있으니, 漢의 舊名을 따른 것이다. 만약 筰地라고 한다면, 촉의 서쪽에 있으니, 巴와 서로 접하지 않아 巴의 莋關이라 말할 수 없다. 『史記』에서 巴蜀의 莋關이라 적었는데, ‘蜀’字 하나가 많은 것이다. 舊本 『北堂書鈔』의 「政術部」에서 인용한 『漢書』는 ‘巴符關’이라 적었다.”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正義』는 『幻云抄』에 의거하여 補하였고, 張氏本 또한 符라 적고 筰이라 적지 않았다. 顔師古는 말하기를, “多同은 그 侯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5). 그리고 『考證』에만 있는 정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正義] 「地理志」에 따르면, 犍爲郡에는 符離縣이 있다. 살피건대, 符關은 符縣에 있다. 犍爲郡은 지금의 戎州이다(地理志, 犍爲郡有符離縣, 按符關在符縣, 犍爲郡, 今戎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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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게 하니, 마침내 야랑후(夜郞侯)주 018
각주 018)
夜郞侯 : 漢朝는 內屬한 蠻夷에 대하여 王·侯·君·長의 爵을 수여하였다. 多同에 대하여 야랑후라고 한 것은 야랑의 내속과 置縣이 이루어진 시점에서의 호칭이다. 야랑후는 뒤에 본문에서 언급되겠지만, 한에 來朝한 이후 王의 爵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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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동(多同)을 만났다. 당몽이 하사품을 넉넉하게 내리고, 군사적 위협과 외교적 이득으로써 타이르고 훈계하여, [군현을 설치하여] 관리를 두기로 약(約)을 맺고, 야랑후의 아들을 현령(縣令)으로 삼도록 하였다. 야랑 주변의 작은 읍(邑)들이 모두 한(漢)나라의 증백(繒帛)을 탐하였는데, 한(漢)나라에 이르는 길이 험하여 끝내 얻을 수 없으리라 여기고, 결국 오래지 않아 곧 당몽의 약(約)을 받아들였다. 귀환하여 보고하니,주 019
각주 019)
『考證』에 따르면, 楓三本에는 “蒙” 아래에 “等”字가 있고, “還” 위에 “蒙”字가 있다고 한다(瀧川資言, 1935 : 4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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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위군(犍爲郡)으로주 020
각주 020)
犍爲郡 : 前漢 建元 6년(전135)에 廣漢郡 남부를 나누어 夜郞國 지역과 함께 설치하여 益州에 속하게 하였다. 治所는 鄨縣(오늘날의 貴州 遵義市 서부)에 두었다. 元光 5년(전130) 南廣(오늘날의 사천 筠連縣 경내)으로 치소를 옮겼고, 다시 始元 원년(전86) 치소를 僰道縣(오늘날의 사천 宜賓市 서남부)으로 옮겼다. 後漢 永初 원년(107) 武陽縣(四川省 彭山縣 동부)으로 치소를 옮겼다. 그 강역은 초기에 매우 넓어서 오늘날의 四川 簡陽·彭山 등 현의 이남, 廣西 서부 및 貴州 대부분에 상당하였다. 그러나 元鼎 6년(전111) 且蘭을 평정한 뒤, 그 강역이 축소되었다. 지금의 廣西 서북부, 雲南 동부 부분지역과 貴州지역에 牂柯郡을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後漢 永初 초년에 또 서남부를 나누어 犍爲屬國을 설치하였다(史爲樂, 2005 : 2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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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았다. 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길을 닦았는데, 북도(僰道) 주 021
각주 021)
僰道 : 전국시대 秦이 설치한 縣으로 현 四川의 宜賓市에 해당한다. 일설에는 宜賓縣 서쪽의 安邊場鎭이라 하기도 한다(史爲樂, 2005 : 2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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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터 장가강으로 향하였다.주 022
각주 022)
『索隱』 ; 牂柯江으로 향한 것이다. 崔浩가 이르기를, “牂柯는 배를 매는 말뚝인데, 이를 지명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道는 ‘從’과 같다. 「地理志」에서는 夜郞에 또 豚水가 있다 했는데, 東으로 南海에 이르며, 네 개의 물줄기와 만나 바다로 들어간다. 이것이 牂柯江이다(道牂柯江. 崔浩云 : 「牂柯, 繫船杙也, 以爲地名.」 道猶從也. 地理志夜郞又有豚水, 東至南海四會入海, 此牂柯江).
『考證』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僰道는 漢의 縣이고, 犍爲郡의 治所가 있던 곳이었다. 바로 오늘날의 敍州 宜賓縣이다.”라고 하였다. 張文虎가 말하기를, “『索隱』이 牂柯가 이미 위의 문장에 보이는데도, 여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單本의 이 條 또한 ‘食重萬餘人’條 뒤에 나온다. 錯亂이 의심 된다.”라고 하였다(8쪽).
「司馬相如列傳」에서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相如가 郞이 되어 몇 해가 지났는데, 마침 唐蒙이 사자로 가서 夜郞과 西僰지역을 경략하여 개통하려고 하였다. 巴蜀의 吏卒 千人을 징발하고, 郡은 또 그를 위하여 轉漕 萬餘 人을 동원하였다. (당몽이) 興法을 들어 그 渠帥를 베니, 巴蜀의 民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上이 그것을 듣고 相如를 보내 唐蒙을 질책하고, 喻告하여 巴蜀의 民에게 上의 뜻이 아님을 밝혔다(『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第57, 30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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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인 사마상여(司馬相如) 주 023
각주 023)
司馬相如 : 字는 長卿이며, 현재의 四川省 南充 蓬安 출신이다. 辭와 賦로 유명하며, 景帝時에 재물을 바쳐 郎이 되었고 武騎常侍를 맡았으나, 景帝가 사부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마침 사부를 좋아하는 양왕이 입조시 데리고 온 枚乘·鄒陽 等과 어울리게 되자 사직하고 양으로 갔다. 枚乘 鄒陽 等과 어울리면서 〈子虛賦〉를 지었다. 이후 귀향하여 임공에서 거부 卓王孫의 딸과 결혼하여 부자가 되었다. 漢武帝가 即位 후에 〈子虛賦〉를 보고 크게 기뻐하자, 狗監 楊得意의 推薦으로 다시 입궐하게 된다. 司馬相如는 漢武帝를 위하여 〈上林賦〉를 지었다. 이후 본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 郎中將으로써 西夷道 개통에 종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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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말하기를, 서이(西夷)의 공(邛)과 작(筰)은 군(郡)을 설치할 만하다고 하였다. 사마상여를 낭중장(郞中將)주 024
각주 024)
郞中將 :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郎은 [궁 안에서는] 門戶를 지키고 [황제의] 외출시에는 車騎를 지키는 일을 맡는다. [그 종류에는] 議郎 中郎 侍郎 郎中이 있고, 모두 定員이 없으며, 많으면 千 명에 이른다. 議郎 中郎은 秩이 比六百石이고, 侍郎은 比四百石이며, 郎中은 比三百石이다(『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27쪽).” 『考證』에 따르면, 「司馬相如傳」에서는 郎中將을 中郞將이라 적었다(瀧川資言, 1935 : 4696)고 했는데, 낭중장은 ‘郎中의 將’으로 중랑장은 ‘中郞의 將’으로 푸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듯하다.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平帝 元始 元年(1) 謁者의 명칭을 虎賁郎으로 바꾸고, 中郎將을 두었으며, 秩이 比二千石이라 하였는데(『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27쪽), 이 중랑장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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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삼아 가서 깨우치게 하니, 모두 남이(南夷)처럼 하였다.주 025
각주 025)
「司馬相如列傳」에서는 이 장면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때 邛과 筰의 君長들이 南夷가 漢과 通하여 賞賜를 얻은 것이 많았다 함을 듣고, 대부분 욕심을 내어 內臣妾이 되고 관리의 설치를 청하여 南夷에 준하여 처리해 주기를 바랬다. 天子가 相如에게 물으니 相如가 말하기를, ‘邛 筰 冄 駹은 蜀에 가깝고 길 또한 개통하기 쉬워서, 秦代에 일찍이 通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다가 漢이 일어남에 이르러 폐지한 바 있습니다. 지금 진실로 다시 통하여 군현을 설치한다면 南夷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天子가 그러하다 여겨 相如를 배수하여 中郎將으로 삼고, 節을 세워 사자로 보냈다. 副使 王然于 壺充國 呂越人 등과 傳 수레 네 대에 나누어 타고 말을 달려 巴蜀의 吏를 통해 幣物을 西夷에게 주었다. ……司馬長卿이 바로 西夷를 略定하자, 邛 筰 冄 駹 斯榆의 君이 모두 內臣이 되기를 청하였다. 기존의 關을 제거하고 더 넓혀서 西쪽으로는 沬 若水에 이르고, 南으로는 牂柯에 이르러 徼로 삼고, 零關道를 개통하였으며, 孫水에 다리를 놓아 邛都와 통하였다. 돌아와 天子에게 보고하니, 天子가 크게 기뻐하였다(『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第57, 3044 ~ 3046쪽). 이에 따르면 邛과 莋의 君長들이 南夷지역의 置吏와 교통로 개착 소식을 듣고 스스로 ‘稱臣’과 ‘置吏’를 요청하였고, 이 요청에 대하여 漢武帝가 司馬相如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서처럼 사마상여가 군현을 설치할 만하다고 대답하였고, 이후 西夷道 개착이 시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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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위(都尉)주 026
각주 026)
都尉 : 여기에서의 都尉는 郡都尉를 지칭하며, 특히 ‘部都尉’의 설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郡都尉는 진대의 군위를 말하며,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군위는 군수를 보좌하여 武職과 甲卒을 관장하였다 한다. 질은 比二千石에 해당하며, 景帝 中二年(전148)에 都尉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42쪽). 部都尉에 관한 김한규의 정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漢代의 邊郡에는 내군에 설치되지 않았던 특수한 都尉官이 數種 있었다. 部都尉·屬國都尉·農都尉·騎都尉·關都尉 등이 그것이다. 특히, 部都尉는 22개의 邊郡內에 48개나 설치되어, 변군조직의 가장 특이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部都尉는 太守의 治所와 분리된 치소에 常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통치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漢代의 部都尉制란 邊郡의 疆域을 地理的 便宜에 따라 東西南北中 등 五方으로 분할하여 各部의 통치권을 都尉官에게 위임한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모든 변군에 부도위가 설치된 것은 아니며, 또한 부도위가 설치된 변군이 모두 5부로 분할된 것도 아니다. 혹은 1부만 분할된 경우(7개郡)도 있으며 혹은 2部(5개郡), 3部(8개군)로 분할된 경우도 있고, 혹은 동일한 방향의 2개 부도위가 동시에 병존한 경우(2개군)도 있었다(김한규, 1982 : 178).” 대부분의 邊郡에 部都尉가 설치되어 태수의 통치권이 분할된 까닭에 대하여는, “部都尉는 邊郡의 토지가 광원하였기 때문에 설치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주요한 이유는 한인의 주거지와 비한인의 주거지를 구별하여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後漢書』 「西南夷傳」의 沈黎郡 관련 기사를 인용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沈黎郡은 武帝 元鼎 6년(전111)에 西南夷의 주거지에 설치된 初郡이었다. 그 뒤 天漢 4년(전97)에 蜀郡에 병합되어 蜀郡西部로 재편되었다. 따라서, 蜀郡西部에는 漢人의 원주거지역과 西南夷의 거주지역이 혼입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漢은 촉군 서부에 兩都尉를 두어 1都尉는 西南夷를, 1都尉는 漢人을 각각 분리하여 통령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비록 1部 2都尉의 특수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부도위의 역할이 蠻夷地域을 漢人地域으로부터 분리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일례라 할 것이다(김한규, 1982 :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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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10여 현(縣)을 설치하여 촉군(蜀郡)에 속(屬)하게 하였다.

  • 각주 001)
    大行 : 『漢書』 「百官公卿表」에서는 大行을 귀순한 蠻夷를 담당하던 典客을 개칭한 것으로 보았는데, “典客은 秦官으로 귀순한 蠻夷들을 담당하며, (屬官으로) 丞이 있다. 景帝 中 6년(전144)경에 大行令으로 불렀고, 武帝 太初 元年(전104)에 大鴻臚로 이름을 바꾸었다. 屬官으로 行人 譯官 別火 3令丞 및 郡邸長丞이 있다. 武帝 太初 元年에 行人을 大行令으로 고쳐 불렀고, 別火를 처음으로 두었다(『漢書』卷90上 「百官公卿表」 第7上, 730쪽).”라고 하였다. 顔師古는 景帝 中 2년(전148) 諸侯王이 죽거나 列侯가 처음 봉건되어 취국할 때는 大鴻臚가 諡·誄와 策을 올리게 하고, 列侯가 죽거나 諸侯의 太傅가 처음 관에 제수될 때는 大行이 諡·誄와 策文을 올리게 한 조치에 관한 「景帝紀」의 기사에 注를 달면서, “大鴻臚는 본디 명칭이 典客이며, 나중에 고쳐 大鴻臚라 한 것이다. 大行令은 본디 명칭이 行人이며, 바로 典客의 屬官인데, 나중에 고쳐 大行令이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일이 귀하고 무거울[尊重] 경우에는 大鴻臚를 파견하고, 일이 가볍고 천한[輕賤] 경우에는 大行을 보내는 것이다. 이 本紀의 글에 따르면, 景帝는 이미 典客을 고쳐 大鴻臚라 하였으며, 行人을 고쳐 大行이라 하였다. 그런데 「百官公卿表」에서는 여전히 景帝 中六年에 典客의 이름을 바꾸어 大行令이라 하고, 武帝 太初 元年에 大行令의 이름을 바꾸어 大鴻臚라 했으며, 行人의 이름을 바꾸어 大行令이라 해다고 했다. 이는 마땅히 表의 오류이다.”라고 하였다(『漢書』卷5 「景帝紀」 第5, 1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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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王恢 : 西漢의 將軍이다. 燕나라 사람으로 여러 차례 邊吏를 지낸 까닭에, 胡, 즉 흉노의 일에 밝았다. 建元 元年(전140)에 匈奴가 화친을 청하였을 때, 大行의 職에 있으면서 韓安國과 조정에서 논쟁을 벌여 화친에 반대하였다. 元光 元年(전134) 馬邑 사건으로 武帝의 질책을 받자,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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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東越列傳」에 따르면, 東越은 곧 閩越이다. 閩越에 대한 출격은 閩越이 ‘天子의 職約’을 어기고 함부로 南越을 공격하였기 때문에 벌어졌다. 東越王 郢을 죽이고 항복한 이들은 왕의 弟 餘善과 相 및 그 宗族들이었다(『史記』 卷114 「東越列傳」 第54, 29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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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番陽 : 『正義』에서 番의 音을 ‘婆’라 하였는데(番音婆), 이를 좇아 ‘番陽’을 파양으로 읽었다. 『考證』에서는 丁謙의 말을 인용하여, “番陽은 「地理志」에서 鄱陽이라 적었는데, 漢의 縣 이름이다. 豫章郡에 屬하며, 지금의 九江府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4). 『地名大辭典』에 따르면, 番는 春秋시기 楚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秦代에 番縣을 설치하였다. 이후 西漢代에 番縣을 番陽縣으로 바꾸었으며, 豫章郡에 속하게 하였다. 그 治所는 지금의 江西省 波陽縣 동북의 古縣渡鎭이다(史爲樂, 2005 : 2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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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唐蒙에 관하여는 여기 「西南夷列傳」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 가장 자세하며, 다른 사서에도 서남이 개척과 관련하여 언급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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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여기에서의 南越은 國名이다. 남월국은 기원전 203年부터 기원전 111年까지 중국의 嶺南지역에 존속한 고대국가이며, 國都는 番禺(지금의 廣州 市内)에 있었다. 그 疆域은 오늘날의 중국 廣東, 廣西 두 성의 대부분 지역과 복건, 호남, 귀주, 운남의 일부 지역과 베트남 북부를 포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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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枸醬 : 『集解』; “徐廣은 ‘枸’는 ‘蒟’라 적기도 하며, 音은 ‘窶’이다’라고 하였다. (裴)駰이 살피건대, 『漢書音義』에서 말하기를, ‘枸木은 穀樹와 유사하고, 그 잎이 뽕나무 잎과 같다. 그 잎을 사용하여 醬을 담그면 시면서도 맛있는데, 蜀人은 珍味로 여겼다(徐廣曰 : 「枸, 一作 『蒟』, 音窶.」 駰案 : 漢書音義曰 「枸木似穀樹, 其葉如桑葉. 用其葉作醬酢, 美, 蜀人以為珍味」).”라고 하였다. 『索隱』; “(枸는) 蒟이다. 살피건대, [晉人으로 『漢書音義』를 지은] 晉灼은 音이 矩라 하였다. 劉德은 이르기를, ‘蒟樹는 뽕나무와 같은데, 그 열매(오디)의 길이가 2 3寸이며 맛은 시다. 그 열매를 취하여 醬을 담그면, 맛있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蒟는 樹에서 나므로, 木이 아니다. 지금 蜀 지방에서는 家마다 蒟를 내는데, 열매가 뽕나무의 오디와 비슷하고, 맛이 매운 것이 생강과 유사하며, 시지 않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잎을 취한다.’라고 하였다. 이 注는 또 이르기를, 잎이 뽕나무 잎과 비슷하지만, 아니라고 하였다. 『廣志』에서는 이르기를, ‘色이 검고 맛이 매우며, 기를 가라앉혀 허기를 느끼게 한다(식욕을 돋운다).’라고 하였다. 窶는 求와 羽의 반절이다(蒟. 案 : 晉灼音矩. 劉德云 「蒟樹如桑, 其椹長二三寸, 味酢;取其實以為醬, 美」. 又云 「蒟緣樹而生, 非木也. 今蜀土家出蒟, 實似桑椹, 味辛似薑, 不酢」. 又云 「取葉」. 此注又云葉似桑葉, 非也. 廣志云 「色黑, 味辛, 下氣消穀」. 窶, 求羽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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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牂柯 : 『正義』; “崔浩(北魏 사람, 381 ~ 450)는 이르기를, ‘牂柯는 배를 매는 말뚝이다.’라고 하였다. 常氏(東晉代 常璩)는 『華陽國志』에서 이르기를, ‘楚 頃襄王 때에 莊蹻를 보내 夜郞을 쳤는데, 군대가 且蘭에 이르러, 江岸에 배를 대고 步兵戰을 벌였다. 夜郞을 멸한 뒤에, 且蘭을 배를 댄 말뚝이 있는 곳이라 하여 곧 그 이름을 고쳐 牂柯라 하였다.’라고 하였다(崔浩云 : 「牂柯, 繫船杙也.」 常氏華陽國志云 : 「楚頃襄王時, 遣莊蹻伐夜郞, 軍至且蘭, 椓船於岸而步戰. 旣滅夜郞, 以且蘭有椓船柯處, 乃改其名為牂柯」).”
    任乃强은 『正義』에서 인용한 『華陽國志』에서 장교와 장가를 연결시킨 부분에 대하여 『南中記』를 지은 譙周의 오류이며, 상거가 이를 무비판적으로 채용한 결과라고 하였다. 譙周가 南人으로부터 牂柯郡 이름의 유래에 관한 전설을 듣고 莊蹻의 入滇 설화에 부회하였다는 것이다(任乃强, 1987 : 233 ~ 234). 『考證』에서도 ‘장가(강)’에 관하여 설명을 붙이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楓 三本에는 牂柯 아래 “江” 字가 있다. 王念孫이 말하기를, “牂柯 아래 마땅히 ‘江’字가 있어야 한다. 道는 ‘從’의 의미이며, 서북쪽 牂柯江으로부터 오는 것을 말한다. 『索隱』 판본에 ‘道牂柯江’ 네 字가 나오고, 『漢書』, 『漢紀』 모두 ‘道西北牂柯江, 江廣數里’라고 적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라고 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牂柯江은 지금의 盤江이며, 『水經注』에서는 溫水라 칭하였다. 雲南 曲靖府 북쪽 霑益州 境內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阿迷州 동쪽에 이르면, 꺾여 동북쪽으로 흘러 八達江이 되는데, 속칭 混水河이다. 羅平州 동쪽 경계에 이르면 돌아서 동쪽으로 흐르다가 貴州 興義府 남쪽을 지나면 또 동쪽으로 北盤江과 합류하니, 곧 『水經注』에서 말하는 存水이다. 南·北盤江이 만나서 합류하면 비로소 牂柯江의 이름이 있게 되니, 대개 興義府 지역이 곧 漢武帝가 세운 牂柯郡이다. 따라서, 酈氏는 물이 牂柯郡 且蘭縣을 거친다고 말하고, 그것을 일러 牂柯水라 하였다. 牂柯江이 당시에는 牂柯郡 남쪽 일대만을 專稱하여 말하는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바야흐로 강 전체를 總稱하는 이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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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番禺城 : 南越 趙佗의 수도로 지금의 廣州 시내로 비정된다. 番禺縣은 秦始皇 33년(전214)에 南越지역을 점령한 뒤 설치한 것으로 南海郡의 치소가 되었다. 현재의 廣東省 廣州市에 비정된다(史爲樂, 2005 : 2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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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黃屋左纛’ : 皇帝의 車服이다. 황옥은 노란 비단으로 만든 수레의 덮개이고, ‘纛’은 야크의 꼬리로 만든 깃발이며, 수레 곁말의 머리나 수레 횡목의 좌변에 꽂은 듯하다(李斐曰 : 「天子車以黃繒為蓋裏. 纛, 毛羽幢也, 在乘輿車衡左方上注之. 蔡邕曰以犛牛尾為之, 如斗, 或在騑頭, 或在衡.」 應劭曰 : 「雉尾為之, 在左驂, 當鑣上.」 師古曰 : 「纛音毒, 又徒到反. 應說非也.」 : 『漢書』卷1上 「高帝紀」 第1上, 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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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外臣 : ‘外臣’ 개념에 관하여는 도모노부 구리하라(栗原朋信)의 학설이 유명하다. 도모노부는 황제의 덕과 중국의 예법이 미치는 범위에 따라 중국의 漢을 중심으로 하는 天下를 내외로 나누고, 중국 안은 內臣, 內客臣으로 중국 바깥은 外臣, 흉노와 같은 外客臣, 그리고 단순히 德化만으로 신속시킬 수 없는 絶域의 朝貢國으로 구분하였다(栗原朋信, 1960 : 261). 이 중 ‘外臣’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한 황제의 덕화와 함께 예가 보급될 뿐, 법이 미치지 않는 지역(栗原朋信, 1960 : 249)”이며, “내신과 외신의 구별은 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역시 제도상의 것, 바꾸어 말하면 문화적인 것(栗原朋信, 1960 : 254)”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외신과 한과의 관계를 규정한 ‘職約’을 설명하면서, “한의 천하에 편입된 외신에 대하여 한 황제의 통제력은 보통의 경우 그 국내 질서에는 간섭하지 않지만, 외신 상호의 질서 유지에는 한의 규정이 존재하여 한의 간섭이 미친다(栗原朋信, 1960 : 260 ~ 61).”라고 하였다.
    중국적 세계질서(Chinese World order)에 대하여 종래의 일원적 관점을 통한 평면적 접근을 극복하고 다원적 관점을 통한 보다 입체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金翰奎는 도모노부의 연구의 시도를 높게 평가하면서도 그 ‘外臣’ 개념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 비판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栗原의 ‘외신’은 ……(역주자 생략, 이하 同) 중외관계의 여러 유형 가운데서 ‘화친Ⅱ’ 관계에 포함되는 외국만을 가리킨다. 또한 율원의 ‘禮와 法’은 ‘內臣’과 ‘外臣’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뿐, ‘外臣’ 자체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栗原의 ‘내신’과 ‘외신’의 구분은 단순한 중국과 주변민족의 구분을 의미할 뿐이다. ……. 栗原의 도식 가운데에는 ‘외신이 아닌 또 다른 주변민족들’이 소외되어 있다고 하겠다. 栗原은 ‘外客臣’의 존재를 별도로 설정하고 있지만, ‘외객신’과 ‘외신’을 구별하는 기준을 오로지 ‘덕과 예가 미치는 정도의 강약’에만 두고 있으므로(『秦漢史の硏究』, 276쪽), 양자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栗原의 ‘中國的 世界秩序’는 일견 대단히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엄밀히 살펴보면 매우 단순하다(김한규, 1982 :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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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州 : 여기에서는 部刺史의 감찰구역으로서의 ‘州’나 後漢代 13州의 하나로서의 ‘州’와는 그 의미하는 바가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의 ‘州’는 오히려 ‘九州’의 州, 특히 우임금이 정비하기 이전의 독립적이고 격절된 하나의 구역 내지 자체적 세계로서의 ‘州’라는 의미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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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長沙 : 長沙國을 가리킨다. 장사국은 西漢시기 현재의 湖南 지역에 설치된 諸侯封國인데, 기원전 202年에 세워지고 기원후 7년에 廢封되어 209년간 존속하였다. 漢高祖가 봉건한 이성제후 가운데 한고조 사망 이후에도 존속한 유일한 제후왕이다. 그 강역은 秦代의 長沙郡 영역을 이어 받았고, 장사군의 치소인 “湘縣”(오늘날의 臨湘縣)을 國都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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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豫章 : 漢高祖 初年(대략 기원전 202年)에 豫章郡(贛江은 본디 豫章江이라 칭하였다.)을 설치하였다. 郡의 治所는 南昌이며, 18개 縣을 관할하였는데, 南昌·廬陵·彭澤·鄱陽·餘汗·柴桑·贛·新淦·南城·宜春·雩都·艾·安平·海昏·曆陵과 建成 等이 그것이다. 그 分布地域은 贛江·盱江·信江·修水·袁水 沿岸, 곧 후대의 江西省 지역과 대체로 부합한다. 漢武帝時에 全國을 13個 監察區로 나누었는데, 이를 13部州라 칭하였다. 이때의 江西는 楊州部에 속하였다. 王莽의 新 始建國 元年(9)에 豫章郡의 이름을 九江郡으로 변경하였다. 後漢·三國·晉·南北朝 시기 郡의 이름은 豫章이었고, 郡의 治所 이름은 南昌이었다. 隋 開皇 九年(589)에 豫章郡을 폐지하고 洪州를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여전히 南昌縣이었다. 唐 至德 元年(756)에 豫章郡의 이름을 章郡으로 개칭하였다. 唐朝 貞觀年間에 長江의 中下流 지역에 江南道를 설치하였는데, 서기 733年 唐玄宗이 다시 江南東道와 江南西道로 나누었다. 江南東道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 변화를 거쳐 지금은 江蘇와 安徽 兩省이 되었으며, 江南西道는 江西라는 이름을 계속 유지하여 豫章을 대신하여 강서지역의 행정명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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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考證』에서는 北宋代의 역사가 劉攽(1023 ~ 1089)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郎中將은 마땅히 中郞將으로 적어야 하며, 뒤에 (司馬)相如로 하여금 郎中將으로서 가서 깨우치게 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이다.”라고 하였다. 또, 淸代 사람인 周壽昌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華陽國志』에서는 中郞將이라 적었다.”고 했다(瀧川資言, 1935 : 4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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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食重 : 『索隱』; “[‘食重’은] 食貨 輜重의 수레이다. ‘重’의 음은 持와 用의 半切이라 하였다(案 : 食貨輜重車也. 音持用反).” 치(輜)는 의복 같은 가벼운 물건(物件), 중(重)은 무기(武器) 같은 무거운 물건(物件)을 뜻한다. 따라서, 치중은 말이나 수레 따위에 실은 짐, 그리고 군대(軍隊)의 여러 가지 군수 물품(物品). 탄약(彈藥)·식량(食糧)·장막(帳幕)·피복 따위 물건(物件)을 통칭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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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考證』은 莋關에 관하여 설명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漢書』에는 “巴” 아래 “蜀”자가 없다. 王念孫이 말하기를, “巴의 莋關은 본디 巴의 符關으로 적어야 한다. 『水經』에 이르기를, ‘江水가 동쪽으로 符縣을 지나, 북쪽으로 邪 동남쪽에 이르면, 鰼部水가 符關 동북쪽으로부터 흘러든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水經의] 注에 이르기를, ‘縣은 옛 巴夷의 땅인데, 漢武帝 建元 6년 唐蒙을 中郞將으로 삼아 萬人을 거느리고 巴의 符關을 나가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符關은 符縣에 있고, 현은 옛 巴夷의 땅이므로 巴의 符關이라 말한 것이다. 漢의 符縣은 지금의 瀘州 合江縣 서쪽에 있었고, 지금의 합강현 남쪽에 符關이 있으니, 漢의 舊名을 따른 것이다. 만약 筰地라고 한다면, 촉의 서쪽에 있으니, 巴와 서로 접하지 않아 巴의 莋關이라 말할 수 없다. 『史記』에서 巴蜀의 莋關이라 적었는데, ‘蜀’字 하나가 많은 것이다. 舊本 『北堂書鈔』의 「政術部」에서 인용한 『漢書』는 ‘巴符關’이라 적었다.”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正義』는 『幻云抄』에 의거하여 補하였고, 張氏本 또한 符라 적고 筰이라 적지 않았다. 顔師古는 말하기를, “多同은 그 侯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5). 그리고 『考證』에만 있는 정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正義] 「地理志」에 따르면, 犍爲郡에는 符離縣이 있다. 살피건대, 符關은 符縣에 있다. 犍爲郡은 지금의 戎州이다(地理志, 犍爲郡有符離縣, 按符關在符縣, 犍爲郡, 今戎州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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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夜郞侯 : 漢朝는 內屬한 蠻夷에 대하여 王·侯·君·長의 爵을 수여하였다. 多同에 대하여 야랑후라고 한 것은 야랑의 내속과 置縣이 이루어진 시점에서의 호칭이다. 야랑후는 뒤에 본문에서 언급되겠지만, 한에 來朝한 이후 王의 爵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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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考證』에 따르면, 楓三本에는 “蒙” 아래에 “等”字가 있고, “還” 위에 “蒙”字가 있다고 한다(瀧川資言, 1935 : 4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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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犍爲郡 : 前漢 建元 6년(전135)에 廣漢郡 남부를 나누어 夜郞國 지역과 함께 설치하여 益州에 속하게 하였다. 治所는 鄨縣(오늘날의 貴州 遵義市 서부)에 두었다. 元光 5년(전130) 南廣(오늘날의 사천 筠連縣 경내)으로 치소를 옮겼고, 다시 始元 원년(전86) 치소를 僰道縣(오늘날의 사천 宜賓市 서남부)으로 옮겼다. 後漢 永初 원년(107) 武陽縣(四川省 彭山縣 동부)으로 치소를 옮겼다. 그 강역은 초기에 매우 넓어서 오늘날의 四川 簡陽·彭山 등 현의 이남, 廣西 서부 및 貴州 대부분에 상당하였다. 그러나 元鼎 6년(전111) 且蘭을 평정한 뒤, 그 강역이 축소되었다. 지금의 廣西 서북부, 雲南 동부 부분지역과 貴州지역에 牂柯郡을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後漢 永初 초년에 또 서남부를 나누어 犍爲屬國을 설치하였다(史爲樂, 2005 : 2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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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僰道 : 전국시대 秦이 설치한 縣으로 현 四川의 宜賓市에 해당한다. 일설에는 宜賓縣 서쪽의 安邊場鎭이라 하기도 한다(史爲樂, 2005 : 2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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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索隱』 ; 牂柯江으로 향한 것이다. 崔浩가 이르기를, “牂柯는 배를 매는 말뚝인데, 이를 지명으로 삼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道는 ‘從’과 같다. 「地理志」에서는 夜郞에 또 豚水가 있다 했는데, 東으로 南海에 이르며, 네 개의 물줄기와 만나 바다로 들어간다. 이것이 牂柯江이다(道牂柯江. 崔浩云 : 「牂柯, 繫船杙也, 以爲地名.」 道猶從也. 地理志夜郞又有豚水, 東至南海四會入海, 此牂柯江).
    『考證』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丁謙이 말하기를, “僰道는 漢의 縣이고, 犍爲郡의 治所가 있던 곳이었다. 바로 오늘날의 敍州 宜賓縣이다.”라고 하였다. 張文虎가 말하기를, “『索隱』이 牂柯가 이미 위의 문장에 보이는데도, 여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해석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單本의 이 條 또한 ‘食重萬餘人’條 뒤에 나온다. 錯亂이 의심 된다.”라고 하였다(8쪽).
    「司馬相如列傳」에서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相如가 郞이 되어 몇 해가 지났는데, 마침 唐蒙이 사자로 가서 夜郞과 西僰지역을 경략하여 개통하려고 하였다. 巴蜀의 吏卒 千人을 징발하고, 郡은 또 그를 위하여 轉漕 萬餘 人을 동원하였다. (당몽이) 興法을 들어 그 渠帥를 베니, 巴蜀의 民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上이 그것을 듣고 相如를 보내 唐蒙을 질책하고, 喻告하여 巴蜀의 民에게 上의 뜻이 아님을 밝혔다(『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第57, 30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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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司馬相如 : 字는 長卿이며, 현재의 四川省 南充 蓬安 출신이다. 辭와 賦로 유명하며, 景帝時에 재물을 바쳐 郎이 되었고 武騎常侍를 맡았으나, 景帝가 사부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마침 사부를 좋아하는 양왕이 입조시 데리고 온 枚乘·鄒陽 等과 어울리게 되자 사직하고 양으로 갔다. 枚乘 鄒陽 等과 어울리면서 〈子虛賦〉를 지었다. 이후 귀향하여 임공에서 거부 卓王孫의 딸과 결혼하여 부자가 되었다. 漢武帝가 即位 후에 〈子虛賦〉를 보고 크게 기뻐하자, 狗監 楊得意의 推薦으로 다시 입궐하게 된다. 司馬相如는 漢武帝를 위하여 〈上林賦〉를 지었다. 이후 본문에 보이는 바와 같이 郎中將으로써 西夷道 개통에 종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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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郞中將 :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郎은 [궁 안에서는] 門戶를 지키고 [황제의] 외출시에는 車騎를 지키는 일을 맡는다. [그 종류에는] 議郎 中郎 侍郎 郎中이 있고, 모두 定員이 없으며, 많으면 千 명에 이른다. 議郎 中郎은 秩이 比六百石이고, 侍郎은 比四百石이며, 郎中은 比三百石이다(『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27쪽).” 『考證』에 따르면, 「司馬相如傳」에서는 郎中將을 中郞將이라 적었다(瀧川資言, 1935 : 4696)고 했는데, 낭중장은 ‘郎中의 將’으로 중랑장은 ‘中郞의 將’으로 푸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듯하다.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平帝 元始 元年(1) 謁者의 명칭을 虎賁郎으로 바꾸고, 中郎將을 두었으며, 秩이 比二千石이라 하였는데(『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27쪽), 이 중랑장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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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司馬相如列傳」에서는 이 장면을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때 邛과 筰의 君長들이 南夷가 漢과 通하여 賞賜를 얻은 것이 많았다 함을 듣고, 대부분 욕심을 내어 內臣妾이 되고 관리의 설치를 청하여 南夷에 준하여 처리해 주기를 바랬다. 天子가 相如에게 물으니 相如가 말하기를, ‘邛 筰 冄 駹은 蜀에 가깝고 길 또한 개통하기 쉬워서, 秦代에 일찍이 通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다가 漢이 일어남에 이르러 폐지한 바 있습니다. 지금 진실로 다시 통하여 군현을 설치한다면 南夷보다 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天子가 그러하다 여겨 相如를 배수하여 中郎將으로 삼고, 節을 세워 사자로 보냈다. 副使 王然于 壺充國 呂越人 등과 傳 수레 네 대에 나누어 타고 말을 달려 巴蜀의 吏를 통해 幣物을 西夷에게 주었다. ……司馬長卿이 바로 西夷를 略定하자, 邛 筰 冄 駹 斯榆의 君이 모두 內臣이 되기를 청하였다. 기존의 關을 제거하고 더 넓혀서 西쪽으로는 沬 若水에 이르고, 南으로는 牂柯에 이르러 徼로 삼고, 零關道를 개통하였으며, 孫水에 다리를 놓아 邛都와 통하였다. 돌아와 天子에게 보고하니, 天子가 크게 기뻐하였다(『史記』 卷117 「司馬相如列傳」 第57, 3044 ~ 3046쪽). 이에 따르면 邛과 莋의 君長들이 南夷지역의 置吏와 교통로 개착 소식을 듣고 스스로 ‘稱臣’과 ‘置吏’를 요청하였고, 이 요청에 대하여 漢武帝가 司馬相如에게 자문을 구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본문에서처럼 사마상여가 군현을 설치할 만하다고 대답하였고, 이후 西夷道 개착이 시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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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都尉 : 여기에서의 都尉는 郡都尉를 지칭하며, 특히 ‘部都尉’의 설치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郡都尉는 진대의 군위를 말하며, 『漢書』 「百官公卿表」에 따르면 군위는 군수를 보좌하여 武職과 甲卒을 관장하였다 한다. 질은 比二千石에 해당하며, 景帝 中二年(전148)에 都尉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漢書』 卷19上 「百官公卿表」 第7上, 742쪽). 部都尉에 관한 김한규의 정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漢代의 邊郡에는 내군에 설치되지 않았던 특수한 都尉官이 數種 있었다. 部都尉·屬國都尉·農都尉·騎都尉·關都尉 등이 그것이다. 특히, 部都尉는 22개의 邊郡內에 48개나 설치되어, 변군조직의 가장 특이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漢書』 「地理志」에 의하면, 部都尉는 太守의 治所와 분리된 치소에 常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통치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漢代의 部都尉制란 邊郡의 疆域을 地理的 便宜에 따라 東西南北中 등 五方으로 분할하여 各部의 통치권을 都尉官에게 위임한 제도를 말한다. 그러나 모든 변군에 부도위가 설치된 것은 아니며, 또한 부도위가 설치된 변군이 모두 5부로 분할된 것도 아니다. 혹은 1부만 분할된 경우(7개郡)도 있으며 혹은 2部(5개郡), 3部(8개군)로 분할된 경우도 있고, 혹은 동일한 방향의 2개 부도위가 동시에 병존한 경우(2개군)도 있었다(김한규, 1982 : 178).” 대부분의 邊郡에 部都尉가 설치되어 태수의 통치권이 분할된 까닭에 대하여는, “部都尉는 邊郡의 토지가 광원하였기 때문에 설치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주요한 이유는 한인의 주거지와 비한인의 주거지를 구별하여 통치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다.”라고 하면서 『後漢書』 「西南夷傳」의 沈黎郡 관련 기사를 인용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沈黎郡은 武帝 元鼎 6년(전111)에 西南夷의 주거지에 설치된 初郡이었다. 그 뒤 天漢 4년(전97)에 蜀郡에 병합되어 蜀郡西部로 재편되었다. 따라서, 蜀郡西部에는 漢人의 원주거지역과 西南夷의 거주지역이 혼입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漢은 촉군 서부에 兩都尉를 두어 1都尉는 西南夷를, 1都尉는 漢人을 각각 분리하여 통령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비록 1部 2都尉의 특수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부도위의 역할이 蠻夷地域을 漢人地域으로부터 분리하여 통치하는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일례라 할 것이다(김한규, 1982 :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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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왕회(王恢), 영(郢), 왕회, 당몽(唐蒙), 당몽, 당몽, 당몽, 당몽, 당몽, 다동(多同), 당몽, 당몽, 사마상여(司馬相如), 사마상여
지명
남월(南越), 남월, , 장가(牂柯), 장가강(牂柯江), 번우성(番禺城), 장안(長安), 촉(蜀), , 야랑(夜郞), 야랑, 장가강, 남월, 야랑, 동사(同師), 장사(長沙), 예장(豫章), 야랑, 장가강, 월(越), 한(漢), 파촉(巴蜀), 야랑(夜郞), 파(巴), 촉(蜀), 야랑, 한(漢)나라, 한(漢)나라, 건위군(犍爲郡), , , 북도(僰道), 장가강, , 촉군(蜀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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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몽(唐蒙)이 파촉(巴蜀)과 함께 야량(夜郞)을 개통하고 군현을 설치함 자료번호 : jo.k_0001_0116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