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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莊蹻)의 전지(滇池) 진입 및 건국과정, 진(秦)의 치리(置吏)와 한(漢)이 촉(蜀)의 고요(故徼)를 열었던 것을 설명함

  • 국가
    서남이(西南夷)
옛날 초(楚)나라 위왕(威王) 때에 장군(將軍) 장교(莊蹻) 주 001
각주 001)
莊蹻 : 『索隱』;“(蹻의) 音은 炬와 灼의 半切이라고 하였다. [莊蹻는] 楚莊王의 弟로 盜가 되었던 者이다(音炬灼反. 楚莊王弟, 爲盜者).” 『正義』;“(蹻의 음은) 其와 略의 半切이다. 郞州·昆州는 곧 莊蹻가 王노릇했던 곳이다(其略反. 郞州·昆州卽莊蹻所王).”
『考證』은 清末의 法学家인 沈家本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살피건대, 『韓非子』 「喩老篇」에서는 ‘楚莊王時에 莊蹻가 境內에서 盜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小司馬는 아마도 이것에 근거하여 說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楚威王 때라고 하였으니, 盜가 된 莊蹻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史記』의 글에 분명하게 ‘將軍’이라 하였고, 또 ‘楚莊王의 苗裔’라고 하였으니, 小司馬의 오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증』은 이 說이 淸代 사람인 梁玉繩이 지은 『史記志疑』에도 보인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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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군대를 이끌고 장강(長江)을 따라 올라가, 파(巴) 주 002
각주 002)
巴 : 巴(Ba)는 古族의 명칭이며, 古代의 國名이다. 그 활동지역은 지금의 四川省 동부이다. 史爲樂이 主編한 『中國歷史地名大辭典』(이하 『地名大辭典』)의 ‘巴’에 대한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西周初의 封國으로 巴子國이라 칭하였다. 春秋시기에는 楚·鄧의 國 등과 교왕이 매우 밀접하였으며, 四川 동부쪽으로 발전하였다. 戰國시기에는 巴國 또한 王을 칭하였으며, 그 도읍은 江州(지금의 四川省 重慶市)였다. 東晋의 常璩는 『華陽國志』 「巴志」에서 이르기를, “그 地境은 동쪽으로 魚復에 이르고, 서쪽으로 僰道에 이르며, 북으로는 漢中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黔·涪의 끝까지 미친다(其地, 東至魚復, 西至僰道, 北接漢中, 南極黔涪).”라고 하였다. 魚復은 현재의 奉節縣에 해당하고, 僰道는 현재의 宜賓市, 漢中은 현재의 陝西省 漢中市에 해당한다. 그 강역은 대체로 현재의 四川 嘉陵江, 涪江, 南溪縣 이동으로 奉節縣에 이르고, 大巴山 이남, 貴州 동북부 지구를 포괄한다. 周愼王 5年(전316)에 진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그 땅은 巴郡이 되었다(史爲樂, 2005 : 505).
任乃强은 『華陽國志校補圖注』에서 앞의 「巴志」의 巴의 강역에 관한 기사에 注하여 이르기를, “魚復과 僰道는 巴가 楚·蜀과 다투고 있는 땅이기 때문에 ‘至’라 말한 것이다. 漢中은 秦에 속해 있고, 巴國과 大巴산맥으로 격절되어 있어 서로 범할 수 없는 까닭에 ‘接’이라고 한 것이다. 黔水는 곧 烏江이다. 涪水는 곧 아랫글의 ‘巴涪水’이니, 지금의 赤水河를 말한다. 모두 그 源과 流가 이르는 곳을 다 하였기에 ‘極’이라고 말한 것이다. 두 하수가 이르는 곳은 현재의 貴州 全省을 포괄한다.”라고 하였다(任乃强, 1987 : 6).
童恩正은 種族名 ‘巴’의 유래에 관한 몇 가지 설을 정리하였는데, ① 물의 흐르는 모양에서 기원, ② 巴地 소산의 식물 苴의 音에서 기원, ③ 虫과 蛇의 종류에서 기원, ④ 平地의 지형을 지칭하는 ‘壩’의 音에서 기원 등이 그것이다. ①에 대하여 童恩正은 『元和郡縣志』 卷34 「渝州」조의 기사를 인용하였는데, 그 내용은 梁州지역은 옛 巴國에 해당하는데, 그곳의 閬水와 白水가 동남쪽으로 흘러 돌고 꺾이는 모양이 마치 巴 字와 같아서 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②에 대하여 童恩正은 『史記』 「張儀列傳」의 “苴·蜀相攻擊”이라는 기사에 대한 『索隱』의 해석을 인용하였다. 그 내용은 苴의 音이 巴인데, 巴人 巴郡이라는 것은 본디 芭苴로 인해 이름을 얻은 것이고, 그래서 그 글자도 점차 苴를 巴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苴’는 바로 갈대[蘆葦]이며, 四川에서 속칭 芭茅라고 하는데, 四川 동부 일대에서 많이 난다고 한다. ③에 관하여는 “巴는 벌레이다. 어떤 이는 코끼리를 잡아먹는 뱀이라고도 한다(巴, 虫也. 或曰食象蛇).”라고 한 許愼의 『說文』과 “西南에 巴國이 있는데, 黑蛇가 있어, 머리가 파랗고, 코끼리를 먹는다.”라고 한 『山海經』 「大荒北經」의 기사를 인용하였다. ④는 평지를 지칭하는 壩(ba)와 巴(ba)를 동일시하여, 巴族이 고대에 평지에 거주한 종족이었기 때문에 ‘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주장이다. 童恩正은 이들 설에 대하여 모두 근거가 부족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추정하기를, 巴族의 선조 廩君이 石穴에서 태어났다는 전설과 사천 동부지방의 방언에 오랫동안 石을 巴라고 하였다는 점을 결부하여, 巴氏族이 그 거주환경으로부터 그 이름을 얻었을 것이라 하였다(童恩正, 1998 : 1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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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중(黔中) 주 003
각주 003)
黔中 : 黔中郡에 관한 『地名大辭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戰國시기에 楚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나중에 秦에 속하게 되었다. 秦代의 治所는 臨沅縣(오늘날의 湖南省 常德市)에 있었다. 그 강역은 오늘날의 湖南省 沅水·灃水 유역, 湖北省의 淸江 유역, 四川省의 黔江 유역과 貴州 동북부에 상당한다. 西漢代에 고쳐서 武陵郡으로 삼았다((史爲樂, 2005 : 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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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以西)지역을 경략(經略)하게 하였다.주 004
각주 004)
『考證』은 원문의 ‘巴·(蜀)黔中’에 관하여 王念孫의 말을 인용하였다. 王念孫이 말하기를, “蜀字는 위 문단의 巴·蜀으로 인한 衍字이다. 莊蹻가 江을 따라 올라갔는데, 巴·黔中 以西로부터 滇池에 이르렀다면, 蜀에 이를 수 없다. 『漢書』에는 ‘蜀’字가 없다.”라고 하였다. 『考證』은 또 巴와 黔中에 관하여 丁謙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丁謙이 말하기를, “巴는 漢의 巴郡이며, 지금의 重慶府이다. 黔은 물의 이름인데, 의미가 검은 색인 것으로 볼 때, 지금의 烏江을 말한다. 옛 黔中郡은 漢代의 武陵이다. 章懷注에는 ‘黔中의 옛 城은 辰州 沅陵縣 서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辰州에는 黔水가 없으니, 필시 郡이 이곳에 설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轄境은 烏江 유역에 걸쳐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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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라는 자는 옛 초나라 장왕(莊王)의 먼 후손이다. 장교전지(滇池) 주 005
각주 005)
전지(滇池) : 『索隱』; “滇池는 (넓이가) 方 300里이다. 「地理志」 益州 滇池縣條에는 澤이 (현의) 西北쪽에 있다고 하였다. 『後漢書』에서 이르기를, ‘그 못의 水源이 깊고 넓은데, [그 末이] 점차 얕고 좁아져서 마치 거꾸로 흐르는 듯 보이는 까닭에 滇池라 불렀다.’라고 하였다(滇池方三百里. 地理志益州滇池縣, 澤在西北. 後漢書云 : 「其池水源深廣, 而[末]更淺狹, 有似倒流, 故謂滇池」).” 『正義』; “『括地志』에 이르기를, ‘滇池澤은 昆州 晉寧縣 西南쪽 30里에 있다. 그 水源이 깊고 넓은데, [그 末이] 갈수록 얕고 좁아져, 마치 거꾸로 흐르는 듯 보이는 까닭에 滇池라 불렀다.’라고 하였다(括地志云 : 「滇池澤在昆州晉寧縣西南三十里. 其水源深廣而[末]更淺狹, 有似倒流, 故謂滇池」).”
『考證』은 王念孫의 말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池 아래에는 마땅히 ‘地’ 字가 있을 수 없다. 『索隱』의 판본 및 『漢書』 모두 ‘地’ 字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王先謙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一統志』에 따르면, 滇池는 雲南府 昆明縣 남쪽, 呈貢縣 서쪽, 晉寧州 서북쪽, 昆陽州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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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는데, (물의)주 006
각주 006)
원문에 (地)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滇池 물의 넓이로 보아야 한다. 주23)의 『考證』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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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이가 사방 300리(里)이며, 주변의 평지가 기름지고 넉넉한 것이 수천 리였다. [장교가] 군대로 위협하여 [이 땅을]) 평정하고 초나라에 속하게 하였다. 귀국하여 보고하려고 하였으나, 마침 진(秦)파군(巴郡)검중군(黔中郡)을 쳐서 빼앗으니, 길이 막혀 통행할 수 없었다.주 007
각주 007)
『考證』은 沈家本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살피건대, 이는 楚 頃襄王 22년의 일이며, 위로 威王 末年과의 차이가 52년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2). 『漢書』의 師古注에서 인용한 『華陽國志』에도 ‘楚頃襄王時’라 하였으며(『漢書』 卷28上 「地理志」 第8上, 1602쪽), 『後漢書』 「西南夷列傳」에서도 ‘楚頃襄王時’라고 적었다(『後漢書』 卷86 「南蠻西南夷列傳」 第77, 28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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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되돌아가 그 무리를 기반으로 전(滇)에서 왕이 되었는데, 복식을 바꾸어 입고 그 풍속을 따랐기 때문에 그들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진(秦)나라 때 상안(常頞) 주 008
각주 008)
常頞 : ‘頞’의 일반적인 독음은 ‘알’인데, 『集解』에서 (頞의) 音은 案이라(音案)한 까닭에 여기서도 ‘상안’이라 읽었다. 『考證』에 따르면, 楓·三本에서는 常頞을 “常頗”라 적었고, 『漢書』에서는 “嘗破”라고 적었다고 한다(瀧川資言, 1935 : 4693). 이 밖에 상안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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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 땅을] 경략하여 오척도(五尺道)주 009
각주 009)
五尺道 : 『索隱』;“[五尺道의 5척은] 棧道의 너비가 五尺임을 말하는 것이다(謂棧道廣五尺).” 『正義』; “『括地志』에 이르기를, ‘五尺道는 郞州에 있다. 顏師古가 이르기를 그 곳이 험하고 막힌 까닭에 길의 너비가 겨우 5尺이라고 하였다. 如淳이 이르기를, 길의 너비가 5尺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括地志云 : 「五尺道在郞州. 顏師古云其處險阸, 故道纔廣五尺. 如淳云道廣五尺」).”
漢代의 夜郞道와 唐代의 石門道가 이 五尺道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석문도란 石門關(雲南省 鹽津縣 豆沙鎭 소재, 豆沙關이라고도 함)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淸溪道와 함께 蜀과 滇을 연결하는 대표적 古道의 하나이다. 成都로부터 宜賓(옛 僰道), 昭通, 曲靖을 거쳐 昆明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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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개통하였는데, 이 국(國)들에주 485
각주 485)
『考證』은 원문의 ‘諸此國’에 관한 中井積德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그는 말하기를, “‘諸此國’은 ‘此諸國’이라고 적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아래 문장의 ‘此國’ 사이에는 ‘諸’ 자가 탈락한 것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3). 이 설이 일리가 없지 않으나, 여기서는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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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를 둔 것이 자못 많았다. 10여 해가 지나 이 멸망하였다. 한(漢)이 일어나자, [관리들이] 모두 이 국을 버리고 [닫아 두었던] 촉(蜀) 주 011
각주 011)
蜀 : 여기에서의 ‘蜀(Shu)’은 기원전 314년에 秦惠王이 설치한 蜀郡을 지칭한다. 『地名大辭典』 ‘蜀郡’조에서는 西漢代 蜀郡의 영역을 비정하여 “현재 四川의 松潘 이남, 北川·彭縣·洪雅 이서, 峨邊·石棉 이북, 邛崍山·大渡河 이동, 그리고 大渡河와 雅礱江 사이·康定 이남·冕寧 이북에 미치는 땅에 상당한다.”고 하였다(史爲樂, 2005 : 2696). 그리고 ‘蜀’조에서는, 商代로부터 戰國시기까지 존재하였던 蜀國을 소개하고 있는데, 周武王을 좇아 商의 紂를 정벌한 8國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望帝 杜宇 때에 郫邑(현재의 四川省 郫縣 북쪽)에 도읍하였으며, 開明朝 시기에 成都로 천도하였다고 하였다. 또, 『華陽國志』 「蜀志」를 인용하여 그 國의 강역을 밝히고 있는데, “그 땅이 동쪽으로 巴에 접하고, 남쪽으로 越에 접하며, 북으로는 秦과 강토를 나누고 있고, 서쪽으로는 峨眉山과 嶓冢山을 포함한다(其地東接於巴, 南接於越, 北與秦分, 西奄峨嶓).”라고 하고, 현재의 四川省 서부의 江安과 長江 상류 유역 이북, 涪江 상류지구 및 陝西 서남부의 땅을 가졌다고 하였다. 촉국은 주신왕 5년(전 316)에 진에 멸망하였고, 그 땅에는 촉군이 설치되었다(史爲樂, 2005 : 2694).
任乃强은 『華陽國志校補圖注』에서 蜀國은 본디 羌氏民族이 岷江 상류 河谷에 세운 部落이었다고 하였다. 이들이 九頂山 입구를 넘어 湔水를 따라 成都평원에 들어온 뒤 농업으로 흥성하여 大國이 되었으며, 당시 독특한 문화를 가졌다고 하였다(任乃强, 1987 : 118). 童恩正은 옛 蜀人을 氐羌 계통에 속한다고 하였다(童恩正, 1998 : 62 ~ 66). 그리고 김병준은 사천지역의 청동기문화를 분석하여 成都를 중심으로 한 川西지역은 靑銅문명이 蜀 독자의 ‘蜀’ 문명이었다고 주장하였다(김병준, 1997 : 49 ~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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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옛 요(徼)를 [다시] 열었다.주 012
각주 012)
『考證』은 원문의 ‘開’字에 관한 王念孫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開’자는 마땅히 『漢書』를 좇아 ‘關’으로 적어야 한다. 秦時에 항상 諸國에 置吏하였는데, 漢初에 이르러 이 諸國을 버리고 단지 蜀의 여러 徼를 關으로 삼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래 문장에서 ‘巴·蜀의 民이 혹은 몰래 나와 교역하였다.’라고 한 것은 곧 이 關을 나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蜀의 옛 徼를 열었다.’고 말한다면, 위와 아래의 문장과 모두 합치하지 않는다. 顔師古는 말하기를, ‘西南의 徼는 北方의 塞와 같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3).” 역시 일리 있는 견해이지만, 여기에서는 원문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開’의 의미를 살리되 맥락에 맞게 번역하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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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백성 가운데 어떤 이들이 몰래 나와 교역을 하였는데, 작마(筰馬)주 013
각주 013)
筰馬 : 筰都 종족이 생산한 말이라는 의미인데, 그 종류나 특징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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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북동(僰僮)주 014
각주 014)
僰僮 : 『索隱』;“韋昭가 이르기를, ‘僰은 犍爲郡에 속하며, 音은 蒲(pu)와 北(bo)의 半切이다.’라고 하였다. 服虔은 이르기를, ‘옛 京師에 僰婢가 있었다.’라고 했다.(韋昭云 : 「僰屬犍爲, 音蒲北反.」 服虔云 : 「舊京師有僰婢.」).” 『正義』;“현재 益州의 南쪽 戎州의 北쪽은 大山에 닿아있는데, 옛날의 僰國이다(今益州南戎州北臨大山, 古僰國).”
‘僰僮’은 僰族 출신의 노예를 지칭한다. ‘僰(Bo)’에 관하여는 앞서 간간이 언급한 바 있지만, 그 설이 다소 복잡하다. 方國瑜는 僰의 族屬은 羌의 한 갈래이며, 아마도 古 羌人이 南으로 이동하여 大渡河에 이르렀는데, 그 동부에 거주하게 된 分支는 靑衣江을 따라 내려가 岷江 상류지역에 散居하게 되었으며, 또 남쪽으로 西僰지구에 이르렀는데, 邛·滇·昆과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西僰’지구란 夜郞의 서쪽 僰人의 거주지를 지칭하며, 方國瑜는 古僰人의 거주지를 비정하여 僰道縣을 중심으로 그 남쪽 경내에 散居하였으며, 秦 이후 더 남쪽으로 옮겨졌다고 하였다. 따라서, 僰僮의 産地는 朱提郡 지역, 즉 지금의 昭通지구였다고 하였다(方國瑜, 1987 : 18 ~ 19). 馬曜는 僰을 氐의 일종이라고 하면서, 四川 서부에 분포하는 僰人을 총칭하여 “西僰”, 雲南 경내에 거주하는 僰人을 총칭하여 “滇僰”이라 하고, 雲南의 동북쪽에 있는 僰道(지금의 宜賓)을 秦代의 “僰侯國” 소재지라고 하였다(馬曜, 1983 : 8 ~ 9). 우중은 북족은 저강으로부터 분화한 별종으로 전국의 주체민족이었으며, 북도현으로부터 북족 거주지를 향해 개통한 교통로 “북도”를 따라 현재의 곡정지구와 귀주 서부지구에 적지않은 북족 인구가 거주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僰(bo)과 白(bo)이 같은 음인 것과 元代 李京이 지은 『雲南志略』의 기사를 들어 漢代의 僰人이 곧 元代의 白人이었다고 하여, ‘僰’이 현재 白族의 시조라는 설을 시사하였다(尤中, 1994 : 19 ~ 23). 王文光 또한 僰人의 족속을 氐羌系로 규정하였다(王文光, 1997 : 242). 童恩正은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僰族이 실제상 바로 濮族이며 夜郞·滇 邛都 등이 濮系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四川 남부의 宜賓지구와 涼山彝族自治州 동부의 馬邊·屛山·峨邊 등의 縣이 대체로 漢代 犍爲郡의 범위 이내에 상당하며, 春秋戰國시대 僰族의 집거지였다고 하였다(童恩正, 1998 : 94 ~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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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우(髦牛)를 사들였다.주 015
각주 015)
『考證』은 일본의 학자인 岡白駒(1692 ~ 1767)의 말을 인용하여, “筰國의 말, 僰國의 노비 및 髦牛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우에 대하여 스스로의 견해를 밝혀, 髦는 마땅히 駹이라고 적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3).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髦牛는 곧 旄牛이고, 야크[yak]이다. 티베트고원을 중심으로 해발 3천미터 ~ 5천미터의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牛種으로, 雲南 서부와 四川 서부의 고지대에도 많이 보이다. 아마도 瀧川資言은 ‘莋’과 ‘僰’과 對를 이루는 개념으로 ‘駹’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말과 노비 소의 교역을 다루는 데 굳이 특정 지역이나 종족명을 거론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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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하여 이 넉넉하고 풍성해졌다.

  • 각주 001)
    莊蹻 : 『索隱』;“(蹻의) 音은 炬와 灼의 半切이라고 하였다. [莊蹻는] 楚莊王의 弟로 盜가 되었던 者이다(音炬灼反. 楚莊王弟, 爲盜者).” 『正義』;“(蹻의 음은) 其와 略의 半切이다. 郞州·昆州는 곧 莊蹻가 王노릇했던 곳이다(其略反. 郞州·昆州卽莊蹻所王).”
    『考證』은 清末의 法学家인 沈家本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살피건대, 『韓非子』 「喩老篇」에서는 ‘楚莊王時에 莊蹻가 境內에서 盜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小司馬는 아마도 이것에 근거하여 說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楚威王 때라고 하였으니, 盜가 된 莊蹻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史記』의 글에 분명하게 ‘將軍’이라 하였고, 또 ‘楚莊王의 苗裔’라고 하였으니, 小司馬의 오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고증』은 이 說이 淸代 사람인 梁玉繩이 지은 『史記志疑』에도 보인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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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巴 : 巴(Ba)는 古族의 명칭이며, 古代의 國名이다. 그 활동지역은 지금의 四川省 동부이다. 史爲樂이 主編한 『中國歷史地名大辭典』(이하 『地名大辭典』)의 ‘巴’에 대한 설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西周初의 封國으로 巴子國이라 칭하였다. 春秋시기에는 楚·鄧의 國 등과 교왕이 매우 밀접하였으며, 四川 동부쪽으로 발전하였다. 戰國시기에는 巴國 또한 王을 칭하였으며, 그 도읍은 江州(지금의 四川省 重慶市)였다. 東晋의 常璩는 『華陽國志』 「巴志」에서 이르기를, “그 地境은 동쪽으로 魚復에 이르고, 서쪽으로 僰道에 이르며, 북으로는 漢中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黔·涪의 끝까지 미친다(其地, 東至魚復, 西至僰道, 北接漢中, 南極黔涪).”라고 하였다. 魚復은 현재의 奉節縣에 해당하고, 僰道는 현재의 宜賓市, 漢中은 현재의 陝西省 漢中市에 해당한다. 그 강역은 대체로 현재의 四川 嘉陵江, 涪江, 南溪縣 이동으로 奉節縣에 이르고, 大巴山 이남, 貴州 동북부 지구를 포괄한다. 周愼王 5年(전316)에 진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그 땅은 巴郡이 되었다(史爲樂, 2005 : 505).
    任乃强은 『華陽國志校補圖注』에서 앞의 「巴志」의 巴의 강역에 관한 기사에 注하여 이르기를, “魚復과 僰道는 巴가 楚·蜀과 다투고 있는 땅이기 때문에 ‘至’라 말한 것이다. 漢中은 秦에 속해 있고, 巴國과 大巴산맥으로 격절되어 있어 서로 범할 수 없는 까닭에 ‘接’이라고 한 것이다. 黔水는 곧 烏江이다. 涪水는 곧 아랫글의 ‘巴涪水’이니, 지금의 赤水河를 말한다. 모두 그 源과 流가 이르는 곳을 다 하였기에 ‘極’이라고 말한 것이다. 두 하수가 이르는 곳은 현재의 貴州 全省을 포괄한다.”라고 하였다(任乃强, 1987 : 6).
    童恩正은 種族名 ‘巴’의 유래에 관한 몇 가지 설을 정리하였는데, ① 물의 흐르는 모양에서 기원, ② 巴地 소산의 식물 苴의 音에서 기원, ③ 虫과 蛇의 종류에서 기원, ④ 平地의 지형을 지칭하는 ‘壩’의 音에서 기원 등이 그것이다. ①에 대하여 童恩正은 『元和郡縣志』 卷34 「渝州」조의 기사를 인용하였는데, 그 내용은 梁州지역은 옛 巴國에 해당하는데, 그곳의 閬水와 白水가 동남쪽으로 흘러 돌고 꺾이는 모양이 마치 巴 字와 같아서 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②에 대하여 童恩正은 『史記』 「張儀列傳」의 “苴·蜀相攻擊”이라는 기사에 대한 『索隱』의 해석을 인용하였다. 그 내용은 苴의 音이 巴인데, 巴人 巴郡이라는 것은 본디 芭苴로 인해 이름을 얻은 것이고, 그래서 그 글자도 점차 苴를 巴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苴’는 바로 갈대[蘆葦]이며, 四川에서 속칭 芭茅라고 하는데, 四川 동부 일대에서 많이 난다고 한다. ③에 관하여는 “巴는 벌레이다. 어떤 이는 코끼리를 잡아먹는 뱀이라고도 한다(巴, 虫也. 或曰食象蛇).”라고 한 許愼의 『說文』과 “西南에 巴國이 있는데, 黑蛇가 있어, 머리가 파랗고, 코끼리를 먹는다.”라고 한 『山海經』 「大荒北經」의 기사를 인용하였다. ④는 평지를 지칭하는 壩(ba)와 巴(ba)를 동일시하여, 巴族이 고대에 평지에 거주한 종족이었기 때문에 ‘巴’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주장이다. 童恩正은 이들 설에 대하여 모두 근거가 부족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추정하기를, 巴族의 선조 廩君이 石穴에서 태어났다는 전설과 사천 동부지방의 방언에 오랫동안 石을 巴라고 하였다는 점을 결부하여, 巴氏族이 그 거주환경으로부터 그 이름을 얻었을 것이라 하였다(童恩正, 1998 : 11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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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黔中 : 黔中郡에 관한 『地名大辭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戰國시기에 楚나라에서 설치하였으며, 나중에 秦에 속하게 되었다. 秦代의 治所는 臨沅縣(오늘날의 湖南省 常德市)에 있었다. 그 강역은 오늘날의 湖南省 沅水·灃水 유역, 湖北省의 淸江 유역, 四川省의 黔江 유역과 貴州 동북부에 상당한다. 西漢代에 고쳐서 武陵郡으로 삼았다((史爲樂, 2005 : 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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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考證』은 원문의 ‘巴·(蜀)黔中’에 관하여 王念孫의 말을 인용하였다. 王念孫이 말하기를, “蜀字는 위 문단의 巴·蜀으로 인한 衍字이다. 莊蹻가 江을 따라 올라갔는데, 巴·黔中 以西로부터 滇池에 이르렀다면, 蜀에 이를 수 없다. 『漢書』에는 ‘蜀’字가 없다.”라고 하였다. 『考證』은 또 巴와 黔中에 관하여 丁謙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丁謙이 말하기를, “巴는 漢의 巴郡이며, 지금의 重慶府이다. 黔은 물의 이름인데, 의미가 검은 색인 것으로 볼 때, 지금의 烏江을 말한다. 옛 黔中郡은 漢代의 武陵이다. 章懷注에는 ‘黔中의 옛 城은 辰州 沅陵縣 서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살피건대, 辰州에는 黔水가 없으니, 필시 郡이 이곳에 설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轄境은 烏江 유역에 걸쳐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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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전지(滇池) : 『索隱』; “滇池는 (넓이가) 方 300里이다. 「地理志」 益州 滇池縣條에는 澤이 (현의) 西北쪽에 있다고 하였다. 『後漢書』에서 이르기를, ‘그 못의 水源이 깊고 넓은데, [그 末이] 점차 얕고 좁아져서 마치 거꾸로 흐르는 듯 보이는 까닭에 滇池라 불렀다.’라고 하였다(滇池方三百里. 地理志益州滇池縣, 澤在西北. 後漢書云 : 「其池水源深廣, 而[末]更淺狹, 有似倒流, 故謂滇池」).” 『正義』; “『括地志』에 이르기를, ‘滇池澤은 昆州 晉寧縣 西南쪽 30里에 있다. 그 水源이 깊고 넓은데, [그 末이] 갈수록 얕고 좁아져, 마치 거꾸로 흐르는 듯 보이는 까닭에 滇池라 불렀다.’라고 하였다(括地志云 : 「滇池澤在昆州晉寧縣西南三十里. 其水源深廣而[末]更淺狹, 有似倒流, 故謂滇池」).”
    『考證』은 王念孫의 말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池 아래에는 마땅히 ‘地’ 字가 있을 수 없다. 『索隱』의 판본 및 『漢書』 모두 ‘地’ 字가 없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王先謙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一統志』에 따르면, 滇池는 雲南府 昆明縣 남쪽, 呈貢縣 서쪽, 晉寧州 서북쪽, 昆陽州 북쪽에 있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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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원문에 (地)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滇池 물의 넓이로 보아야 한다. 주23)의 『考證』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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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考證』은 沈家本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살피건대, 이는 楚 頃襄王 22년의 일이며, 위로 威王 末年과의 차이가 52년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2). 『漢書』의 師古注에서 인용한 『華陽國志』에도 ‘楚頃襄王時’라 하였으며(『漢書』 卷28上 「地理志」 第8上, 1602쪽), 『後漢書』 「西南夷列傳」에서도 ‘楚頃襄王時’라고 적었다(『後漢書』 卷86 「南蠻西南夷列傳」 第77, 28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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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常頞 : ‘頞’의 일반적인 독음은 ‘알’인데, 『集解』에서 (頞의) 音은 案이라(音案)한 까닭에 여기서도 ‘상안’이라 읽었다. 『考證』에 따르면, 楓·三本에서는 常頞을 “常頗”라 적었고, 『漢書』에서는 “嘗破”라고 적었다고 한다(瀧川資言, 1935 : 4693). 이 밖에 상안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찾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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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五尺道 : 『索隱』;“[五尺道의 5척은] 棧道의 너비가 五尺임을 말하는 것이다(謂棧道廣五尺).” 『正義』; “『括地志』에 이르기를, ‘五尺道는 郞州에 있다. 顏師古가 이르기를 그 곳이 험하고 막힌 까닭에 길의 너비가 겨우 5尺이라고 하였다. 如淳이 이르기를, 길의 너비가 5尺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括地志云 : 「五尺道在郞州. 顏師古云其處險阸, 故道纔廣五尺. 如淳云道廣五尺」).”
    漢代의 夜郞道와 唐代의 石門道가 이 五尺道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석문도란 石門關(雲南省 鹽津縣 豆沙鎭 소재, 豆沙關이라고도 함)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淸溪道와 함께 蜀과 滇을 연결하는 대표적 古道의 하나이다. 成都로부터 宜賓(옛 僰道), 昭通, 曲靖을 거쳐 昆明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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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5)
    『考證』은 원문의 ‘諸此國’에 관한 中井積德의 견해를 소개하였는데, 그는 말하기를, “‘諸此國’은 ‘此諸國’이라고 적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아래 문장의 ‘此國’ 사이에는 ‘諸’ 자가 탈락한 것이다.”라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3). 이 설이 일리가 없지 않으나, 여기서는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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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蜀 : 여기에서의 ‘蜀(Shu)’은 기원전 314년에 秦惠王이 설치한 蜀郡을 지칭한다. 『地名大辭典』 ‘蜀郡’조에서는 西漢代 蜀郡의 영역을 비정하여 “현재 四川의 松潘 이남, 北川·彭縣·洪雅 이서, 峨邊·石棉 이북, 邛崍山·大渡河 이동, 그리고 大渡河와 雅礱江 사이·康定 이남·冕寧 이북에 미치는 땅에 상당한다.”고 하였다(史爲樂, 2005 : 2696). 그리고 ‘蜀’조에서는, 商代로부터 戰國시기까지 존재하였던 蜀國을 소개하고 있는데, 周武王을 좇아 商의 紂를 정벌한 8國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望帝 杜宇 때에 郫邑(현재의 四川省 郫縣 북쪽)에 도읍하였으며, 開明朝 시기에 成都로 천도하였다고 하였다. 또, 『華陽國志』 「蜀志」를 인용하여 그 國의 강역을 밝히고 있는데, “그 땅이 동쪽으로 巴에 접하고, 남쪽으로 越에 접하며, 북으로는 秦과 강토를 나누고 있고, 서쪽으로는 峨眉山과 嶓冢山을 포함한다(其地東接於巴, 南接於越, 北與秦分, 西奄峨嶓).”라고 하고, 현재의 四川省 서부의 江安과 長江 상류 유역 이북, 涪江 상류지구 및 陝西 서남부의 땅을 가졌다고 하였다. 촉국은 주신왕 5년(전 316)에 진에 멸망하였고, 그 땅에는 촉군이 설치되었다(史爲樂, 2005 : 2694).
    任乃强은 『華陽國志校補圖注』에서 蜀國은 본디 羌氏民族이 岷江 상류 河谷에 세운 部落이었다고 하였다. 이들이 九頂山 입구를 넘어 湔水를 따라 成都평원에 들어온 뒤 농업으로 흥성하여 大國이 되었으며, 당시 독특한 문화를 가졌다고 하였다(任乃强, 1987 : 118). 童恩正은 옛 蜀人을 氐羌 계통에 속한다고 하였다(童恩正, 1998 : 62 ~ 66). 그리고 김병준은 사천지역의 청동기문화를 분석하여 成都를 중심으로 한 川西지역은 靑銅문명이 蜀 독자의 ‘蜀’ 문명이었다고 주장하였다(김병준, 1997 : 49 ~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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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考證』은 원문의 ‘開’字에 관한 王念孫의 견해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開’자는 마땅히 『漢書』를 좇아 ‘關’으로 적어야 한다. 秦時에 항상 諸國에 置吏하였는데, 漢初에 이르러 이 諸國을 버리고 단지 蜀의 여러 徼를 關으로 삼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래 문장에서 ‘巴·蜀의 民이 혹은 몰래 나와 교역하였다.’라고 한 것은 곧 이 關을 나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蜀의 옛 徼를 열었다.’고 말한다면, 위와 아래의 문장과 모두 합치하지 않는다. 顔師古는 말하기를, ‘西南의 徼는 北方의 塞와 같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3).” 역시 일리 있는 견해이지만, 여기에서는 원문을 최대한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開’의 의미를 살리되 맥락에 맞게 번역하려고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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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筰馬 : 筰都 종족이 생산한 말이라는 의미인데, 그 종류나 특징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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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僰僮 : 『索隱』;“韋昭가 이르기를, ‘僰은 犍爲郡에 속하며, 音은 蒲(pu)와 北(bo)의 半切이다.’라고 하였다. 服虔은 이르기를, ‘옛 京師에 僰婢가 있었다.’라고 했다.(韋昭云 : 「僰屬犍爲, 音蒲北反.」 服虔云 : 「舊京師有僰婢.」).” 『正義』;“현재 益州의 南쪽 戎州의 北쪽은 大山에 닿아있는데, 옛날의 僰國이다(今益州南戎州北臨大山, 古僰國).”
    ‘僰僮’은 僰族 출신의 노예를 지칭한다. ‘僰(Bo)’에 관하여는 앞서 간간이 언급한 바 있지만, 그 설이 다소 복잡하다. 方國瑜는 僰의 族屬은 羌의 한 갈래이며, 아마도 古 羌人이 南으로 이동하여 大渡河에 이르렀는데, 그 동부에 거주하게 된 分支는 靑衣江을 따라 내려가 岷江 상류지역에 散居하게 되었으며, 또 남쪽으로 西僰지구에 이르렀는데, 邛·滇·昆과 차이가 있다고 하였다. ‘西僰’지구란 夜郞의 서쪽 僰人의 거주지를 지칭하며, 方國瑜는 古僰人의 거주지를 비정하여 僰道縣을 중심으로 그 남쪽 경내에 散居하였으며, 秦 이후 더 남쪽으로 옮겨졌다고 하였다. 따라서, 僰僮의 産地는 朱提郡 지역, 즉 지금의 昭通지구였다고 하였다(方國瑜, 1987 : 18 ~ 19). 馬曜는 僰을 氐의 일종이라고 하면서, 四川 서부에 분포하는 僰人을 총칭하여 “西僰”, 雲南 경내에 거주하는 僰人을 총칭하여 “滇僰”이라 하고, 雲南의 동북쪽에 있는 僰道(지금의 宜賓)을 秦代의 “僰侯國” 소재지라고 하였다(馬曜, 1983 : 8 ~ 9). 우중은 북족은 저강으로부터 분화한 별종으로 전국의 주체민족이었으며, 북도현으로부터 북족 거주지를 향해 개통한 교통로 “북도”를 따라 현재의 곡정지구와 귀주 서부지구에 적지않은 북족 인구가 거주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僰(bo)과 白(bo)이 같은 음인 것과 元代 李京이 지은 『雲南志略』의 기사를 들어 漢代의 僰人이 곧 元代의 白人이었다고 하여, ‘僰’이 현재 白族의 시조라는 설을 시사하였다(尤中, 1994 : 19 ~ 23). 王文光 또한 僰人의 족속을 氐羌系로 규정하였다(王文光, 1997 : 242). 童恩正은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僰族이 실제상 바로 濮族이며 夜郞·滇 邛都 등이 濮系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四川 남부의 宜賓지구와 涼山彝族自治州 동부의 馬邊·屛山·峨邊 등의 縣이 대체로 漢代 犍爲郡의 범위 이내에 상당하며, 春秋戰國시대 僰族의 집거지였다고 하였다(童恩正, 1998 : 94 ~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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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考證』은 일본의 학자인 岡白駒(1692 ~ 1767)의 말을 인용하여, “筰國의 말, 僰國의 노비 및 髦牛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우에 대하여 스스로의 견해를 밝혀, 髦는 마땅히 駹이라고 적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하였다(瀧川資言, 1935 : 4693). 이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髦牛는 곧 旄牛이고, 야크[yak]이다. 티베트고원을 중심으로 해발 3천미터 ~ 5천미터의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牛種으로, 雲南 서부와 四川 서부의 고지대에도 많이 보이다. 아마도 瀧川資言은 ‘莋’과 ‘僰’과 對를 이루는 개념으로 ‘駹’을 제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말과 노비 소의 교역을 다루는 데 굳이 특정 지역이나 종족명을 거론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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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위왕(威王), 장교(莊蹻), 장교, 장왕(莊王), 장교, 장교, 상안(常頞)
지명
초(楚)나라, 장강(長江), 파(巴), 검중(黔中), 초나라, 전지(滇池), 초나라, 진(秦), , 파군(巴郡), 검중군(黔中郡), 전(滇), 진(秦), , 한(漢), 촉(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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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莊蹻)의 전지(滇池) 진입 및 건국과정, 진(秦)의 치리(置吏)와 한(漢)이 촉(蜀)의 고요(故徼)를 열었던 것을 설명함 자료번호 : jo.k_0001_0116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