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가 멸망한 후 조타(趙佗)가 남월왕에 즉위함
남월주 001
각주 001)
왕 위타(尉佗)
주 002南越 : ‘南粤’이라고도 한다. 古代 南方 越人의 일족이다. 원래는 族名이었는데, 뒤에 趙佗가 세운 國名이 되었다. 그 강역은 현재의 廣東과 廣西 지구를 포함하여 남쪽으로는 월남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湖南省과 貴州省 남부까지 해당한다. 秦이 六國을 통일한 뒤 이 지역에 桂林郡, 南海郡, 象郡 3郡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史記正義』(이하 『正義』로 약칭)는 廣州 南海縣에 도읍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秦始皇 33년에 岭南을 통일한 뒤 南海郡을 설치하였고, 郡治는 番禺城이었다. 현재의 廣州市 越秀區 내에 속한다. 越秀區는 南海縣과 番禺縣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隋 開皇 10년에 番禺縣을 南海縣에 통합하였다가 唐 長安 3년에 다시 番禺縣을 회복시켰다. 이후 五代十國과 宋代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明代 鹿步巡檢司의 관할에 속하면서 같은 행정소속이 되었다. 한대 백월족의 분포는 뒤에 첨부한 도표와 같다.
각주 002)
는 진정(眞定)
주 003사람으로 성은 조씨(趙氏)이다. 진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양월(楊越)
주 004尉佗 : 여기에서 尉는 ‘郡尉’를 말한다. 『史記索隱』(이하 『索隱』으로 약칭)에 인용된 『十三州記』에 의하면, “‘大郡은 守라 하고 小郡은 尉라 한다.”고 하였으니, 秦漢시대 郡의 최고 군사장관으로 그 지위는 郡守 아래이며 前漢 景帝 中二年(전148)에 都尉로 改名하였다. 秦시대에 桂林, 南海, 象郡에는 아직 郡守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尉가 郡의 최고장관으로서 軍權과 民政을 모두 겸하였다. ‘尉佗’라고 한 것은 그가 일찍이 南海尉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尉佗라 부른 것이다. 참고로 『索隱』에 인용된 『十三州記』는 지금까지 應劭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는데, 『史記』中華書局本 「標點後記」(10권, 15쪽)는 『史記』 권55 「留侯世家」의 ‘放牛桃林之陰’에 대한 司馬貞의 주석에서 “應劭『十三州記』‘弘農有桃丘聚, 古桃林也’”는 ‘應劭’ 다음에 탈자가 의심된다고 하면서, 『十三州記』는 北魏 闞駰이 편찬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최근 『魏書』권52 「闞駰」傳 및 『隋書』 「經籍志」, 『舊唐書』 「經籍志」 등에 모두 ‘十三州志’로 되어 있는 점, 淸代 일련의 고증학자들이 모두 應劭의 작품으로 주석하고 있는 점, 예를 들어 清 章宗源의 『隋書經籍志考證』에 “『十三州記』卷亡, 應劭撰, 不著錄”라고 한 점, 그리고 酈道元의 『水經注』의 「泗水注」에 應劭의 『十三州記』를 인용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應劭의 저작이 맞다고 주장하는 설이 제기되었다(蘇魯支, 「『史記』 標點商榷一則―附應劭 『十三州記』佚文」, 『經學諸子硏究』 國學數典論壇).
각주 004)
을 공략하여 평정하고 계림군(桂林郡)
주 005, 남해군(南海郡)
주 006, 상군(象郡)
주 007楊越 : 楊越이라 한 것은 『史記集解』(이하 『集解』로 약칭)에 인용된 張晏에 의하면, 楊州의 南越을 말한다. 『索隱』은 『戰國策』의 “吳起가 楚나라를 위해 양월을 복속시키다.”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正義』는 禹의 九州 중 楊州에 南越이 속해 있기 때문에 양월이라 부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楊州란 명칭은 『尙書』 「禹貢」에 “淮海惟楊州”라고 처음 보인다. 현재의 淮水, 黄海, 長江에 걸친 江蘇, 安徽, 江西, 浙江, 福建 등의 省을 포함한 지역이다. 현재의 揚州도 포함하는 지역이지만 똑같은 지역이라 말할 수는 없다.
각주 007)
을 설치하였다. 이곳에 죄를 지은 자들을 천사시켜[謫民]주 008
월나라 사람과 섞여 살게 하였는데, 그러기를 어언 13년이 흘렀다.주 009
조타는 진나라 때 남해군 용천령(龍川令)주 100象郡 : 『索隱』에 의하면, 秦始皇 33년(전214) 陸梁의 땅을 공략하여 이곳에 南海, 桂林, 象郡을 설치하면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또 「地理志」에는 武帝 때 日南郡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한다. 그 治所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첫째, 漢代 日南郡이 곧 秦代 象郡이라는 설과 둘째, 秦代 설치된 후 前漢 昭帝 元鳳 5년 가을에 폐지하고 그 땅에 郁林, 柯 두 郡을 설치했다는 郁林설(「地理志」)이 있다(李龍章, 「秦漢象郡辨析」 『秦俑秦文化硏究』), 郡 치소는 臨塵(현재의 廣西省 崇左)이었으며, 일설에는 象林(현재의 越南 維州南茶轎) 또는 盧容(현재의 越南 順化 東北)이었다고 한다.
각주 100)
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진(秦)의 이세(二世)가 즉위했을 즈음에 남해위(南海尉)주 011였던 임오(任囂)
주 012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박해서 당시 용천령인 조타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들으니 진승(陳勝)
주 013등이 난을 일으켰다고 하오. 진은 무도해서 온천하가 괴로워하고 있소. 항우(項羽), 유계(劉季)
주 014, 진승(陳勝), 오광(吳廣) 등이 각자 주군(州郡)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무리를 모아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며 천하를 다투고 있다고 하오. 중국(中國)주 015이 이처럼 혼란스러워 세상이 언제 평안해질지 알 수 없소. 또, 호걸들은 진에게서 등을 돌려 잇달아 독립하고 있소.주 016
남해군은 비록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 도적떼 같은 저들의 군대가 언제 이곳까지 쳐들어올지 알 수 없소. 그래서 나는 군대를 일으켜 신도(新道)주 017를 끊고 스스로 방비하여 제후들이 일으킨 변고에 대비코자 마음먹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병이 들어 이처럼 깊어지게 되었소. 번우(番禺)
주 018는 뒤로는 험한 산세를 등지고 있고 앞에서는 남해가 가로막이가 되고 있소[阻南海].주 019이 땅은 동서로 수천 리에 걸쳐 뻗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온 적지 않은 사람들이 힘을 보태고 있으니, 이 또한 한 주(州)주 101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세울 만하오. 군에 있는 장리(長吏)주 021들과는 이런 일을 함께 의논할 수가 없어 공을 불러 이야기하는 것이오.” 그리고는 조타에게 조서를 쓰게 해서[被佗書] 남해위의 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주 022
임오가 죽자 조타는 곧바로 횡포관(橫浦關)주 023, 양산관(陽山關)주 024, 황계관(湟谿關)주 025龍川令 : 『索隱』에 인용된 「地理志」에 의하면 현 이름이며 南海郡 소속이다. 『正義』 역시 顔師古를 인용하여 남해군의 현이라 하였으며, 아울러 그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南宋의 裴淵이 편찬한 『廣州記』를 인용하여 원래 博羅縣의 東鄕이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온 뒤 그 구멍에서 샘이 흘러나와 용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史記』 「主父偃傳」에 의하면, 秦이 百越을 평정할 때 조타와 屠睢가 군을 이끌었는데, 도수의 군대는 서쪽 서구지역에서 참패하여 시체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나 동쪽 조타의 군대는 越人의 지지를 얻으며 진군하니 민월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秦始皇 33년(전214)에 마침내 임오가 장군이 되고 조타가 그 보좌로서 백월을 평정하니, 임오는 남해군위에, 조타는 龍川令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唐代 『元和郡縣志』(권34)‘河源縣’조에 보면, “용천고성은 하원현 동북수로 175리에 있다. 진의 용천현이다. 진의 남해위 임오가 병들자 용천령 조타를 불러 그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바로 이곳이다(龍川故城在縣東北水路一百七十五里, 秦龍川縣也. 秦南海尉任囂疾, 召龍川令趙佗, 授之以政, 即此處也).”라고 하였다.
각주 025)
에 격문을 돌려 포고하기를, “도적떼 같은 군대가 장차 들이닥칠테니 빨리 도로를 끊고 병사를 소집하여 각자 지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진이 임명한 장리(長吏)들을 법망에 얽어 죽여 없애고 자신의 일당으로 대체하여 대신 지키도록 하였다[假守].주 026얼마 후 진이 멸망하자 조타는 곧바로 계림군(桂林郡)과 상군(象郡)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스스로 남월
무왕(武王)
주 027에 즉위하였다. 고제(高帝)
주 028는 천하를 평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중국이 전쟁으로 피폐해졌다고 생각하여 조타를 책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한(漢)나라 11년(漢高祖 11년:전196)에 육가(陸賈)
주 029湟谿關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의하면, 桂陽郡에 있으며 南海郡 소속인 四會縣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索隱』은 ‘湟谿’를 ‘날계(涅谿)’라고 하였는데, 『漢書』가 ‘湟谿’라 하였고, 顔師古注도 “湟音皇”이라 하여 ‘황’으로 읽었다. 「衛靑傳」과 「南粵傳」에 ‘出桂陽, 下湟水’에도 ‘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姚察은 『史記』에 ‘涅’이라 되어 있다고 하고 鄒誕 역시 ‘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涅’이 조금 옛날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索隱 “涅谿.鄒氏·劉氏本並作 「涅」, 音年結反. 漢書作 「湟谿」, 音皇. 又〔衛靑傳〕〔南粵傳〕云 「出桂陽, 下湟水」 是也. 而姚察云史記作 「涅」, 今本作 「湟」, 涅及湟不同, 良由隨聞則輒改故也. 水經云含匯縣南有匯浦關, 未知孰是.然鄒誕作 「涅」, 漢書作 「湟」, 蓋近於古). 열수(涅水)는 현재 세 곳으로 추정되지만, 남월과 관련해서는 지금의 廣東省 英德 서남쪽, 즉 廣東의 東江에 해당한다. 문헌자료로는 『水經注』 「泿水注」에 “其餘水又東至龍川縣爲涅水”라고 하였다. 淸代 全祖望은 龍川이 涅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湟水 또한 세 곳으로 추정되지만, 남월과 관련있는 곳은 洭水로 추정되는 廣東省 連州市 동남쪽 連江으로 본다. 湟谿關은 廣東省 連州市 서북쪽에 설치한 關으로 보고 있다(『中國歷史地名大辭典』, 2618쪽).
각주 029)
를 보내 조타를 그대로 인정하여 남월왕에 책봉하고 부를 나눠 [신의의 징표로 삼고]주 102사신을 왕래토록 하였다. 또한 조타로 하여금 백월(百越)주 031陸賈 : 楚人으로 前漢 초기 漢高祖 劉邦이 기의했을 때부터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고 漢 건국 후에도 漢高祖 劉邦을 측근에서 보좌한 인물이다. 그는 高祖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없다.”는 충언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외에 漢高祖 劉邦에게 秦의 멸망 원인을 조목조목 분석하여 『新語』라는 저서를 편찬하여 지어 바치었다. 『史記』 「酈生陸賈列傳」에는 그가 언변이 뛰어나 자주 사신의 일을 맡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경력 때문에 남월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列傳」에는 陸賈가 조타를 상대로 유세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본문과 관련 있는 내용을 인용해 보면, “족하는 중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친척과 형제, 조상의 무덤이 진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족하는 천성을 위반하여 관대를 버리고 구구한 월나라로 천자와 맞서 적국이 되고자 하니 장차 화가 일신에 미칠 것입니다. 또, 저 진나라는 실정하여 제후들과 호걸들이 모두 봉기하였는데, 오직 한왕만이 제일 먼저 입관하여 함양을 점거하였습니다. 항우가 약조를 배반하고 스스로 서초패왕으로 자처하자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귀속되니 참으로 강력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왕은 파촉에서 봉기하여 천하 사람들을 채찍질하여 다른 제후들을 평정하고 마침내 항우를 주멸하였습니다. 그후 5년 사이 해내가 평정되었으니 이는 인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하늘이 세워 준 일입니다. 천자께서는 군왕이 남월의 왕이 되어 천하를 도와 폭도를 주멸하지 않았음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장상들이 군대를 일으켜 왕을 주벌하고자 하였지만 천자께서는 백성들의 노고를 가엾게 여겨 전역을 쉬게 하려고 신을 보내 군왕께 인을 하사하고 황제의 부절을 나눠 사신을 왕래토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군왕은 마땅히 교에 나와 이를 맞이해야 하며 북면하여 칭신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 만든 미완의 남월로써 이와 같이 한나라에 대하여 강경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한나라에서 만일 이 소식을 듣게 되면 군왕의 조상들의 무덤을 불태우고 종족들을 모두 없앨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부장으로 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월나라를 공격하게 할 것입니다. 그때 월나라 사람들이 군왕을 죽여 한에 항복할 것은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울 것입니다(陸生因進說他曰 : 「足下中國人, 親戚昆弟墳在眞定. 今足下反天性, 棄冠帶, 欲以區區之越與天子抗衡爲敵國,禍且及身矣. 且夫秦失其政, 諸侯豪桀並起, 唯漢王先入關, 據咸陽. 項羽倍約, 自立爲西楚霸王, 諸侯皆屬, 可謂至彊. 然漢王起巴蜀, 鞭笞天下, 劫略諸侯, 遂誅項羽滅之. 五年之閒, 海內平定, 此非人力, 天之所建也. 天子聞君王王南越, 不助天下誅暴逆, 將相欲移兵而誅王, 天子憐百姓新勞苦, 故且休之, 遣臣授君王印, 剖符通使. 君王宜郊迎, 北面稱臣, 迺欲以新造未集之越, 屈彊於此. 漢誠聞之, 掘燒王先人冢, 夷滅宗族, 使一偏將將十萬衆臨越, 則越殺王降漢, 如反覆手耳.」).”
각주 031)
의 여러 부족을 평화롭게 통솔케 하여 한의 남쪽 변경에서 우환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장사국(長沙國)
주 032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百越 : 남방의 여러 越族을 총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문헌상에서는 ‘百粤’, ‘諸越’로 표기되어 있다. 이 명칭이 가리키는 지역은 일반적으로 남방지역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예를 들면, 賈誼의 『過秦論』에 “南取百越之地”라고 한 예가 그것이다. 先秦시대 고적 중에는 동남지역의 토착민족을 가리켜 ‘越’이라고 통칭하기도 하였는데, 사실 광대한 이 지역에는 다양한 부족이 각기 다른 종족명과 성씨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는 ‘吳越’(東南浙北 일대)라 하기도 하고 혹은 ‘閩越’(福建 일대), 혹은 ‘楊越’(江西湖南 일대) 혹은 ‘南越’이라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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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1)
南越 : ‘南粤’이라고도 한다. 古代 南方 越人의 일족이다. 원래는 族名이었는데, 뒤에 趙佗가 세운 國名이 되었다. 그 강역은 현재의 廣東과 廣西 지구를 포함하여 남쪽으로는 월남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湖南省과 貴州省 남부까지 해당한다. 秦이 六國을 통일한 뒤 이 지역에 桂林郡, 南海郡, 象郡 3郡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史記正義』(이하 『正義』로 약칭)는 廣州 南海縣에 도읍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秦始皇 33년에 岭南을 통일한 뒤 南海郡을 설치하였고, 郡治는 番禺城이었다. 현재의 廣州市 越秀區 내에 속한다. 越秀區는 南海縣과 番禺縣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隋 開皇 10년에 番禺縣을 南海縣에 통합하였다가 唐 長安 3년에 다시 番禺縣을 회복시켰다. 이후 五代十國과 宋代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明代 鹿步巡檢司의 관할에 속하면서 같은 행정소속이 되었다. 한대 백월족의 분포는 뒤에 첨부한 도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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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02)
尉佗 : 여기에서 尉는 ‘郡尉’를 말한다. 『史記索隱』(이하 『索隱』으로 약칭)에 인용된 『十三州記』에 의하면, “‘大郡은 守라 하고 小郡은 尉라 한다.”고 하였으니, 秦漢시대 郡의 최고 군사장관으로 그 지위는 郡守 아래이며 前漢 景帝 中二年(전148)에 都尉로 改名하였다. 秦시대에 桂林, 南海, 象郡에는 아직 郡守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尉가 郡의 최고장관으로서 軍權과 民政을 모두 겸하였다. ‘尉佗’라고 한 것은 그가 일찍이 南海尉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尉佗라 부른 것이다. 참고로 『索隱』에 인용된 『十三州記』는 지금까지 應劭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는데, 『史記』中華書局本 「標點後記」(10권, 15쪽)는 『史記』 권55 「留侯世家」의 ‘放牛桃林之陰’에 대한 司馬貞의 주석에서 “應劭『十三州記』‘弘農有桃丘聚, 古桃林也’”는 ‘應劭’ 다음에 탈자가 의심된다고 하면서, 『十三州記』는 北魏 闞駰이 편찬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최근 『魏書』권52 「闞駰」傳 및 『隋書』 「經籍志」, 『舊唐書』 「經籍志」 등에 모두 ‘十三州志’로 되어 있는 점, 淸代 일련의 고증학자들이 모두 應劭의 작품으로 주석하고 있는 점, 예를 들어 清 章宗源의 『隋書經籍志考證』에 “『十三州記』卷亡, 應劭撰, 不著錄”라고 한 점, 그리고 酈道元의 『水經注』의 「泗水注」에 應劭의 『十三州記』를 인용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應劭의 저작이 맞다고 주장하는 설이 제기되었다(蘇魯支, 「『史記』 標點商榷一則―附應劭 『十三州記』佚文」, 『經學諸子硏究』 國學數典論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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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越 : 楊越이라 한 것은 『史記集解』(이하 『集解』로 약칭)에 인용된 張晏에 의하면, 楊州의 南越을 말한다. 『索隱』은 『戰國策』의 “吳起가 楚나라를 위해 양월을 복속시키다.”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正義』는 禹의 九州 중 楊州에 南越이 속해 있기 때문에 양월이라 부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楊州란 명칭은 『尙書』 「禹貢」에 “淮海惟楊州”라고 처음 보인다. 현재의 淮水, 黄海, 長江에 걸친 江蘇, 安徽, 江西, 浙江, 福建 등의 省을 포함한 지역이다. 현재의 揚州도 포함하는 지역이지만 똑같은 지역이라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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象郡 : 『索隱』에 의하면, 秦始皇 33년(전214) 陸梁의 땅을 공략하여 이곳에 南海, 桂林, 象郡을 설치하면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또 「地理志」에는 武帝 때 日南郡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한다. 그 治所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첫째, 漢代 日南郡이 곧 秦代 象郡이라는 설과 둘째, 秦代 설치된 후 前漢 昭帝 元鳳 5년 가을에 폐지하고 그 땅에 郁林, 柯 두 郡을 설치했다는 郁林설(「地理志」)이 있다(李龍章, 「秦漢象郡辨析」 『秦俑秦文化硏究』), 郡 치소는 臨塵(현재의 廣西省 崇左)이었으며, 일설에는 象林(현재의 越南 維州南茶轎) 또는 盧容(현재의 越南 順化 東北)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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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川令 : 『索隱』에 인용된 「地理志」에 의하면 현 이름이며 南海郡 소속이다. 『正義』 역시 顔師古를 인용하여 남해군의 현이라 하였으며, 아울러 그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南宋의 裴淵이 편찬한 『廣州記』를 인용하여 원래 博羅縣의 東鄕이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온 뒤 그 구멍에서 샘이 흘러나와 용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史記』 「主父偃傳」에 의하면, 秦이 百越을 평정할 때 조타와 屠睢가 군을 이끌었는데, 도수의 군대는 서쪽 서구지역에서 참패하여 시체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나 동쪽 조타의 군대는 越人의 지지를 얻으며 진군하니 민월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秦始皇 33년(전214)에 마침내 임오가 장군이 되고 조타가 그 보좌로서 백월을 평정하니, 임오는 남해군위에, 조타는 龍川令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唐代 『元和郡縣志』(권34)‘河源縣’조에 보면, “용천고성은 하원현 동북수로 175리에 있다. 진의 용천현이다. 진의 남해위 임오가 병들자 용천령 조타를 불러 그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바로 이곳이다(龍川故城在縣東北水路一百七十五里, 秦龍川縣也. 秦南海尉任囂疾, 召龍川令趙佗, 授之以政, 即此處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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湟谿關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의하면, 桂陽郡에 있으며 南海郡 소속인 四會縣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索隱』은 ‘湟谿’를 ‘날계(涅谿)’라고 하였는데, 『漢書』가 ‘湟谿’라 하였고, 顔師古注도 “湟音皇”이라 하여 ‘황’으로 읽었다. 「衛靑傳」과 「南粵傳」에 ‘出桂陽, 下湟水’에도 ‘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姚察은 『史記』에 ‘涅’이라 되어 있다고 하고 鄒誕 역시 ‘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涅’이 조금 옛날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索隱 “涅谿.鄒氏·劉氏本並作 「涅」, 音年結反. 漢書作 「湟谿」, 音皇. 又〔衛靑傳〕〔南粵傳〕云 「出桂陽, 下湟水」 是也. 而姚察云史記作 「涅」, 今本作 「湟」, 涅及湟不同, 良由隨聞則輒改故也. 水經云含匯縣南有匯浦關, 未知孰是.然鄒誕作 「涅」, 漢書作 「湟」, 蓋近於古). 열수(涅水)는 현재 세 곳으로 추정되지만, 남월과 관련해서는 지금의 廣東省 英德 서남쪽, 즉 廣東의 東江에 해당한다. 문헌자료로는 『水經注』 「泿水注」에 “其餘水又東至龍川縣爲涅水”라고 하였다. 淸代 全祖望은 龍川이 涅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湟水 또한 세 곳으로 추정되지만, 남월과 관련있는 곳은 洭水로 추정되는 廣東省 連州市 동남쪽 連江으로 본다. 湟谿關은 廣東省 連州市 서북쪽에 설치한 關으로 보고 있다(『中國歷史地名大辭典』, 26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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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29)
陸賈 : 楚人으로 前漢 초기 漢高祖 劉邦이 기의했을 때부터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고 漢 건국 후에도 漢高祖 劉邦을 측근에서 보좌한 인물이다. 그는 高祖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없다.”는 충언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외에 漢高祖 劉邦에게 秦의 멸망 원인을 조목조목 분석하여 『新語』라는 저서를 편찬하여 지어 바치었다. 『史記』 「酈生陸賈列傳」에는 그가 언변이 뛰어나 자주 사신의 일을 맡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경력 때문에 남월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列傳」에는 陸賈가 조타를 상대로 유세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본문과 관련 있는 내용을 인용해 보면, “족하는 중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친척과 형제, 조상의 무덤이 진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족하는 천성을 위반하여 관대를 버리고 구구한 월나라로 천자와 맞서 적국이 되고자 하니 장차 화가 일신에 미칠 것입니다. 또, 저 진나라는 실정하여 제후들과 호걸들이 모두 봉기하였는데, 오직 한왕만이 제일 먼저 입관하여 함양을 점거하였습니다. 항우가 약조를 배반하고 스스로 서초패왕으로 자처하자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귀속되니 참으로 강력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왕은 파촉에서 봉기하여 천하 사람들을 채찍질하여 다른 제후들을 평정하고 마침내 항우를 주멸하였습니다. 그후 5년 사이 해내가 평정되었으니 이는 인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하늘이 세워 준 일입니다. 천자께서는 군왕이 남월의 왕이 되어 천하를 도와 폭도를 주멸하지 않았음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장상들이 군대를 일으켜 왕을 주벌하고자 하였지만 천자께서는 백성들의 노고를 가엾게 여겨 전역을 쉬게 하려고 신을 보내 군왕께 인을 하사하고 황제의 부절을 나눠 사신을 왕래토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군왕은 마땅히 교에 나와 이를 맞이해야 하며 북면하여 칭신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 만든 미완의 남월로써 이와 같이 한나라에 대하여 강경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한나라에서 만일 이 소식을 듣게 되면 군왕의 조상들의 무덤을 불태우고 종족들을 모두 없앨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부장으로 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월나라를 공격하게 할 것입니다. 그때 월나라 사람들이 군왕을 죽여 한에 항복할 것은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울 것입니다(陸生因進說他曰 : 「足下中國人, 親戚昆弟墳在眞定. 今足下反天性, 棄冠帶, 欲以區區之越與天子抗衡爲敵國,禍且及身矣. 且夫秦失其政, 諸侯豪桀並起, 唯漢王先入關, 據咸陽. 項羽倍約, 自立爲西楚霸王, 諸侯皆屬, 可謂至彊. 然漢王起巴蜀, 鞭笞天下, 劫略諸侯, 遂誅項羽滅之. 五年之閒, 海內平定, 此非人力, 天之所建也. 天子聞君王王南越, 不助天下誅暴逆, 將相欲移兵而誅王, 天子憐百姓新勞苦, 故且休之, 遣臣授君王印, 剖符通使. 君王宜郊迎, 北面稱臣, 迺欲以新造未集之越, 屈彊於此. 漢誠聞之, 掘燒王先人冢, 夷滅宗族, 使一偏將將十萬衆臨越, 則越殺王降漢, 如反覆手耳.」).”
- 각주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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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31)
百越 : 남방의 여러 越族을 총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문헌상에서는 ‘百粤’, ‘諸越’로 표기되어 있다. 이 명칭이 가리키는 지역은 일반적으로 남방지역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예를 들면, 賈誼의 『過秦論』에 “南取百越之地”라고 한 예가 그것이다. 先秦시대 고적 중에는 동남지역의 토착민족을 가리켜 ‘越’이라고 통칭하기도 하였는데, 사실 광대한 이 지역에는 다양한 부족이 각기 다른 종족명과 성씨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는 ‘吳越’(東南浙北 일대)라 하기도 하고 혹은 ‘閩越’(福建 일대), 혹은 ‘楊越’(江西湖南 일대) 혹은 ‘南越’이라 불리웠다.
- 각주 032)
색인어
- 이름
- 위타(尉佗), 조타, 임오(任囂), 조타, 진승(陳勝), 항우(項羽), 유계(劉季), 진승(陳勝), 오광(吳廣), 조타, 임오, 조타, 조타, 무왕(武王), 고제(高帝), 조타, 육가(陸賈), 조타, 조타
- 지명
- 진정(眞定), 진, 양월(楊越), 계림군(桂林郡), 남해군(南海郡), 상군(象郡), 월나라, 진나라, 진(秦), 진, 진, 남해군, 번우(番禺), 진, 진,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 남월, 한(漢)나라, 장사국(長沙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