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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멸망한 후 조타(趙佗)가 남월왕에 즉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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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월(南越)
남월주 001
각주 001)
南越 : ‘南粤’이라고도 한다. 古代 南方 越人의 일족이다. 원래는 族名이었는데, 뒤에 趙佗가 세운 國名이 되었다. 그 강역은 현재의 廣東과 廣西 지구를 포함하여 남쪽으로는 월남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湖南省과 貴州省 남부까지 해당한다. 秦이 六國을 통일한 뒤 이 지역에 桂林郡, 南海郡, 象郡 3郡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史記正義』(이하 『正義』로 약칭)는 廣州 南海縣에 도읍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秦始皇 33년에 岭南을 통일한 뒤 南海郡을 설치하였고, 郡治는 番禺城이었다. 현재의 廣州市 越秀區 내에 속한다. 越秀區는 南海縣과 番禺縣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隋 開皇 10년에 番禺縣을 南海縣에 통합하였다가 唐 長安 3년에 다시 番禺縣을 회복시켰다. 이후 五代十國과 宋代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明代 鹿步巡檢司의 관할에 속하면서 같은 행정소속이 되었다. 한대 백월족의 분포는 뒤에 첨부한 도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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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타(尉佗) 주 002
각주 002)
尉佗 : 여기에서 尉는 ‘郡尉’를 말한다. 『史記索隱』(이하 『索隱』으로 약칭)에 인용된 『十三州記』에 의하면, “‘大郡은 守라 하고 小郡은 尉라 한다.”고 하였으니, 秦漢시대 郡의 최고 군사장관으로 그 지위는 郡守 아래이며 前漢 景帝 中二年(전148)에 都尉로 改名하였다. 秦시대에 桂林, 南海, 象郡에는 아직 郡守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尉가 郡의 최고장관으로서 軍權과 民政을 모두 겸하였다. ‘尉佗’라고 한 것은 그가 일찍이 南海尉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尉佗라 부른 것이다. 참고로 『索隱』에 인용된 『十三州記』는 지금까지 應劭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는데, 『史記』中華書局本 「標點後記」(10권, 15쪽)는 『史記』 권55 「留侯世家」의 ‘放牛桃林之陰’에 대한 司馬貞의 주석에서 “應劭『十三州記』‘弘農有桃丘聚, 古桃林也’”는 ‘應劭’ 다음에 탈자가 의심된다고 하면서, 『十三州記』는 北魏 闞駰이 편찬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최근 『魏書』권52 「闞駰」傳 및 『隋書』 「經籍志」, 『舊唐書』 「經籍志」 등에 모두 ‘十三州志’로 되어 있는 점, 淸代 일련의 고증학자들이 모두 應劭의 작품으로 주석하고 있는 점, 예를 들어 清 章宗源의 『隋書經籍志考證』에 “『十三州記』卷亡, 應劭撰, 不著錄”라고 한 점, 그리고 酈道元의 『水經注』의 「泗水注」에 應劭의 『十三州記』를 인용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應劭의 저작이 맞다고 주장하는 설이 제기되었다(蘇魯支, 「『史記』 標點商榷一則―附應劭 『十三州記』佚文」, 『經學諸子硏究』 國學數典論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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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眞定) 주 003
각주 003)
眞定 : 縣名이다. 『索隱』에 인용된 韋昭에 의하면, 처음에는 郡名이었는데, 뒤에 縣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前漢初에 설치되었고 常山郡에 속하였다. 前漢 武帝 元鼎 4년(전113)에 眞定國으로 바뀌었다. 治所는 현재 河北省 正定 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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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성은 조씨(趙氏)이다. 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양월(楊越) 주 004
각주 004)
楊越 : 楊越이라 한 것은 『史記集解』(이하 『集解』로 약칭)에 인용된 張晏에 의하면, 楊州의 南越을 말한다. 『索隱』은 『戰國策』의 “吳起가 楚나라를 위해 양월을 복속시키다.”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正義』는 禹의 九州 중 楊州에 南越이 속해 있기 때문에 양월이라 부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楊州란 명칭은 『尙書』 「禹貢」에 “淮海惟楊州”라고 처음 보인다. 현재의 淮水, 黄海, 長江에 걸친 江蘇, 安徽, 江西, 浙江, 福建 등의 省을 포함한 지역이다. 현재의 揚州도 포함하는 지역이지만 똑같은 지역이라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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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공략하여 평정하고 계림군(桂林郡) 주 005
각주 005)
桂林郡 : 秦始皇 33년(전214)에 설치되었다. 현재 廣西省 대부분 지역을 포괄한다. 郡의 治所는 布山縣(현재의 廣西省 貴港市) 혹은 현재 廣西省 桂平市 西南이라고 하여 불분명하다. 『索隱』은 『漢書』 「地理志」(이하 「地理志」로 약칭)를 인용하여 桂林郡이 武帝 때 鬱林郡으로 개명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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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군(南海郡) 주 006
각주 006)
南海郡 : 秦始皇 33년(전214)에 설치되었다. 番禺, 四會, 博羅, 龍川 등 4개 현을 관할하였다. 이 중에서 郡의 治所는 番禺(현재의 廣州)였으며, 주요 관할지역은 현재의 廣東省이었다(黃淼章, 『南越國』, 廣東人民出版社. 2004,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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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군(象郡) 주 007
각주 007)
象郡 : 『索隱』에 의하면, 秦始皇 33년(전214) 陸梁의 땅을 공략하여 이곳에 南海, 桂林, 象郡을 설치하면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또 「地理志」에는 武帝 때 日南郡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한다. 그 治所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첫째, 漢代 日南郡이 곧 秦代 象郡이라는 설과 둘째, 秦代 설치된 후 前漢 昭帝 元鳳 5년 가을에 폐지하고 그 땅에 郁林, 柯 두 郡을 설치했다는 郁林설(「地理志」)이 있다(李龍章, 「秦漢象郡辨析」 『秦俑秦文化硏究』), 郡 치소는 臨塵(현재의 廣西省 崇左)이었으며, 일설에는 象林(현재의 越南 維州南茶轎) 또는 盧容(현재의 越南 順化 東北)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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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하였다. 이곳에 죄를 지은 자들을 천사시켜[謫民]주 008
각주 008)
謫民 : ‘죄를 지어 형을 받은 백성들을 전쟁에 동원하거나 축성 등 노역에 동원하는 일’을 말한다. 『漢書』 「武帝纪」, “遣貳師將軍李廣利發天下讁民西征大宛.” 그 顔師古注에, “庶人之有罪讁者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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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나라 사람과 섞여 살게 하였는데, 그러기를 어언 13년이 흘렀다.주 009
각주 009)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의하면, 秦이 천하를 통일(전221)한 후부터 二世 元年(전209)까지는 13년, 천하를 통일한 뒤 8년에 越地를 평정(전214)했고, 그 후 이세 원년까지는 6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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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타진나라 때 남해군 용천령(龍川令)주 100
각주 100)
龍川令 : 『索隱』에 인용된 「地理志」에 의하면 현 이름이며 南海郡 소속이다. 『正義』 역시 顔師古를 인용하여 남해군의 현이라 하였으며, 아울러 그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南宋의 裴淵이 편찬한 『廣州記』를 인용하여 원래 博羅縣의 東鄕이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온 뒤 그 구멍에서 샘이 흘러나와 용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史記』 「主父偃傳」에 의하면, 秦이 百越을 평정할 때 조타와 屠睢가 군을 이끌었는데, 도수의 군대는 서쪽 서구지역에서 참패하여 시체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나 동쪽 조타의 군대는 越人의 지지를 얻으며 진군하니 민월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秦始皇 33년(전214)에 마침내 임오가 장군이 되고 조타가 그 보좌로서 백월을 평정하니, 임오는 남해군위에, 조타는 龍川令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唐代 『元和郡縣志』(권34)‘河源縣’조에 보면, “용천고성은 하원현 동북수로 175리에 있다. 진의 용천현이다. 진의 남해위 임오가 병들자 용천령 조타를 불러 그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바로 이곳이다(龍川故城在縣東北水路一百七十五里, 秦龍川縣也. 秦南海尉任囂疾, 召龍川令趙佗, 授之以政, 即此處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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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진(秦)의 이세(二世)가 즉위했을 즈음에 남해위(南海尉)주 011
각주 011)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의하면, 이때까지는 아직 都尉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都尉로 개칭된 것은 前漢 景帝 中二年(전148)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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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던 임오(任囂) 주 012
각주 012)
任囂 : 任囂의 囂자에는 ‘떠들썩하다’는 의미의 ‘효’와 ‘거만하다’는 의미의 ‘오’라는 두 가지 음이 있다. 이에 대해 『索隱』은 오(五)와 도(刀)의 반절, 즉 ‘오’라고 하였기에 이것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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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병이 들어 죽음에 임박해서 당시 용천령인 조타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들으니 진승(陳勝) 주 013
각주 013)
陳勝 : ‘陳涉’을 말하며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의 영수이다. 司馬遷은 이를 특별히 世家에 포함시켜 18번째 「陳涉世家」를 만들었다. 진섭이 자립해서 왕이라 칭한 것은 불과 6개월뿐이었고 영토도 부여받지 못했지만, 이처럼 司馬遷이 世家에 포함시킨 것은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漢初 공신들인 彭越, 黥布, 韓信 등을 世家에서 제외하고 진섭을 世家에 포함시킨 것은 이를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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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난을 일으켰다고 하오. 은 무도해서 온천하가 괴로워하고 있소. 항우(項羽), 유계(劉季) 주 014
각주 014)
劉季 : 漢高祖 劉邦을 가리킨다. 劉季는 즉위 후 邦으로 개명하기 이전 어렸을 때 불렸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季는 고대에 항렬의 순서인 伯, 仲, 季의 季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름 자체보다는 형제들 중 막내로 불려지던 것이 이름을 대신해서 불렸음을 보여 준다(「高祖本紀」, 『史記索隱』, “按漢書 ‘名邦, 字季’, 此單云字, 亦又可疑. 按 : 漢高祖長兄名伯, 次名仲, 不見別名, 則季亦是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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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승(陳勝), 오광(吳廣) 등이 각자 주군(州郡)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무리를 모아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며 천하를 다투고 있다고 하오. 중국(中國)주 015
각주 015)
中國 : 여기에서는 秦나라를 가리키기보다는 南越과 대비하여 중원지역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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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처럼 혼란스러워 세상이 언제 평안해질지 알 수 없소. 또, 호걸들은 에게서 등을 돌려 잇달아 독립하고 있소.주 016
각주 016)
“聞陳勝等作亂” 이하 50자의 내용은 중복되고 있어 『漢書』에는 “聞陳勝等作亂, 豪傑叛秦相立” 12字로 수정하고 있다(瀧川資言, 『史記會注考證』, 北岳文藝出版社, 1998년, 제9卷 「南越列傳」, 4649쪽, 이하 『史記會注考證』의 인용은 책명과 쪽수만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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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군은 비록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 도적떼 같은 저들의 군대가 언제 이곳까지 쳐들어올지 알 수 없소. 그래서 나는 군대를 일으켜 신도(新道)주 017
각주 017)
新道 : 秦이 嶺南에 개척한 南海郡 등 3郡과 연결된 도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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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끊고 스스로 방비하여 제후들이 일으킨 변고에 대비코자 마음먹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병이 들어 이처럼 깊어지게 되었소. 번우(番禺) 주 018
각주 018)
番禺 : 秦代 南海郡의 郡治가 된 이래, 南越國의 都城이 있던 곳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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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뒤로는 험한 산세를 등지고 있고 앞에서는 남해가 가로막이가 되고 있소[阻南海].주 019
각주 019)
阻南海 : 『漢書』에는 ‘南海’의 ‘海’자가 ‘北’字로 되어 있고 ‘番禺負山險阻’에서 구두가 찍혀 있는데, 周壽昌에 의하면, 이렇게 되면 ‘南北東西數千里’가 되어 南越의 지세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瀧川資言, 『史記會注考證』, 北岳文藝出版社, 1998년, 제9卷 「南越列傳」, 46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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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은 동서로 수천 리에 걸쳐 뻗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온 적지 않은 사람들이 힘을 보태고 있으니, 이 또한 한 주(州)주 101
각주 101)
州 : 여기에서 말하는 ‘州’는 이른바 천하의 통치지역을 상징하는 九州의 하나를 의미한다. 九州의 九는 실제 9개의 州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영역을 총칭하여 이른 개념이다. 예를 들면, 前漢 武帝 때 전통적인 『禹貢』의 九州에 새로이 편입된 남월지역에 交阯자사를 두고 雍州를 나눠 朔方자사를 두는 등 천하를 13州로 구획하고 州刺史를 설치한 데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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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주인으로서 나라를 세울 만하오. 군에 있는 장리(長吏)주 021
각주 021)
長吏 : ‘지위가 높은 관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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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과는 이런 일을 함께 의논할 수가 없어 공을 불러 이야기하는 것이오.” 그리고는 조타에게 조서를 쓰게 해서[被佗書] 남해위의 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주 022
각주 022)
『集解』와 『索隱』 모두 韋昭를 인용하여 ‘被之以書’, 즉 ‘그에게 조서를 쓰게 하다.’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索隱』에 인용된 服虔은, 任囂가 거짓으로 조서를 작성해서 南海尉를 대행하도록 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여기에서는 위소의 해석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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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가 죽자 조타는 곧바로 횡포관(橫浦關)주 023
각주 023)
橫浦關 : 현재의 廣東省 南雄縣 동북에서 江西省 大餘縣 西南 大庾嶺 위에 있는 梅關을 말하며 ‘秦關’이라고도 한다. 대유령에서 횡포관으로 이어지는 關道는 江西와 廣東을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였다(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이하 『中國歷史地名大辭典』로 약칭). 『索隱』에 인용된 『南康記』에 의하면, 南野縣 大庾嶺 30리에서 橫浦에 이르는 사이에 秦代 설치된 關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아랫지방 사람들은 이를 ‘塞上’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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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관(陽山關)주 024
각주 024)
陽山關 : 『索隱』에 인용된 「地理志」에 의하면, 揭陽郡에 陽山縣이 있는데, 이 縣 상류 백여 리쯤에 있다는 騎田嶺이 바로 陽山關이라고 한다. 현재 廣東省 陽山 서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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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계관(湟谿關)주 025
각주 025)
湟谿關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의하면, 桂陽郡에 있으며 南海郡 소속인 四會縣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索隱』은 ‘湟谿’를 ‘날계(涅谿)’라고 하였는데, 『漢書』가 ‘湟谿’라 하였고, 顔師古注도 “湟音皇”이라 하여 ‘황’으로 읽었다. 「衛靑傳」과 「南粵傳」에 ‘出桂陽, 下湟水’에도 ‘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姚察은 『史記』에 ‘涅’이라 되어 있다고 하고 鄒誕 역시 ‘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涅’이 조금 옛날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索隱 “涅谿.鄒氏·劉氏本並作 「涅」, 音年結反. 漢書作 「湟谿」, 音皇. 又〔衛靑傳〕〔南粵傳〕云 「出桂陽, 下湟水」 是也. 而姚察云史記作 「涅」, 今本作 「湟」, 涅及湟不同, 良由隨聞則輒改故也. 水經云含匯縣南有匯浦關, 未知孰是.然鄒誕作 「涅」, 漢書作 「湟」, 蓋近於古). 열수(涅水)는 현재 세 곳으로 추정되지만, 남월과 관련해서는 지금의 廣東省 英德 서남쪽, 즉 廣東의 東江에 해당한다. 문헌자료로는 『水經注』 「泿水注」에 “其餘水又東至龍川縣爲涅水”라고 하였다. 淸代 全祖望은 龍川이 涅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湟水 또한 세 곳으로 추정되지만, 남월과 관련있는 곳은 洭水로 추정되는 廣東省 連州市 동남쪽 連江으로 본다. 湟谿關은 廣東省 連州市 서북쪽에 설치한 關으로 보고 있다(『中國歷史地名大辭典』, 26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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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격문을 돌려 포고하기를, “도적떼 같은 군대가 장차 들이닥칠테니 빨리 도로를 끊고 병사를 소집하여 각자 지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이 임명한 장리(長吏)들을 법망에 얽어 죽여 없애고 자신의 일당으로 대체하여 대신 지키도록 하였다[假守].주 026
각주 026)
假守 : 『索隱』은 조타가 자기의 친당을 郡縣의 職 혹은 假守에 임명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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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이 멸망하자 조타는 곧바로 계림군(桂林郡)상군(象郡)을 공격하여 병합하고 스스로 남월 무왕(武王) 주 027
각주 027)
武王 : 『集解』에 인용된 韋昭는 살아서 ‘武’라는 호를 쓴 것은 옛 제도를 살피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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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즉위하였다. 고제(高帝) 주 028
각주 028)
高帝 : ‘高祖’와 함께 혼용하고 있다. 참고로 『史記』는 「高祖本紀」라 하였고, 『漢書』는 「高帝本紀」라고 편명을 삼았다. 다만, 『史記』 본문에서는 高帝와 高祖가 거의 별다른 구분 없이 혼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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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천하를 평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중국이 전쟁으로 피폐해졌다고 생각하여 조타를 책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한(漢)나라 11년(漢高祖 11년:전196)에 육가(陸賈) 주 029
각주 029)
陸賈 : 楚人으로 前漢 초기 漢高祖 劉邦이 기의했을 때부터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고 漢 건국 후에도 漢高祖 劉邦을 측근에서 보좌한 인물이다. 그는 高祖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없다.”는 충언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외에 漢高祖 劉邦에게 秦의 멸망 원인을 조목조목 분석하여 『新語』라는 저서를 편찬하여 지어 바치었다. 『史記』 「酈生陸賈列傳」에는 그가 언변이 뛰어나 자주 사신의 일을 맡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경력 때문에 남월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列傳」에는 陸賈가 조타를 상대로 유세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본문과 관련 있는 내용을 인용해 보면, “족하는 중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친척과 형제, 조상의 무덤이 진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족하는 천성을 위반하여 관대를 버리고 구구한 월나라로 천자와 맞서 적국이 되고자 하니 장차 화가 일신에 미칠 것입니다. 또, 저 진나라는 실정하여 제후들과 호걸들이 모두 봉기하였는데, 오직 한왕만이 제일 먼저 입관하여 함양을 점거하였습니다. 항우가 약조를 배반하고 스스로 서초패왕으로 자처하자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귀속되니 참으로 강력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왕은 파촉에서 봉기하여 천하 사람들을 채찍질하여 다른 제후들을 평정하고 마침내 항우를 주멸하였습니다. 그후 5년 사이 해내가 평정되었으니 이는 인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하늘이 세워 준 일입니다. 천자께서는 군왕이 남월의 왕이 되어 천하를 도와 폭도를 주멸하지 않았음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장상들이 군대를 일으켜 왕을 주벌하고자 하였지만 천자께서는 백성들의 노고를 가엾게 여겨 전역을 쉬게 하려고 신을 보내 군왕께 인을 하사하고 황제의 부절을 나눠 사신을 왕래토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군왕은 마땅히 교에 나와 이를 맞이해야 하며 북면하여 칭신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 만든 미완의 남월로써 이와 같이 한나라에 대하여 강경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한나라에서 만일 이 소식을 듣게 되면 군왕의 조상들의 무덤을 불태우고 종족들을 모두 없앨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부장으로 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월나라를 공격하게 할 것입니다. 그때 월나라 사람들이 군왕을 죽여 한에 항복할 것은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울 것입니다(陸生因進說他曰 : 「足下中國人, 親戚昆弟墳在眞定. 今足下反天性, 棄冠帶, 欲以區區之越與天子抗衡爲敵國,禍且及身矣. 且夫秦失其政, 諸侯豪桀並起, 唯漢王先入關, 據咸陽. 項羽倍約, 自立爲西楚霸王, 諸侯皆屬, 可謂至彊. 然漢王起巴蜀, 鞭笞天下, 劫略諸侯, 遂誅項羽滅之. 五年之閒, 海內平定, 此非人力, 天之所建也. 天子聞君王王南越, 不助天下誅暴逆, 將相欲移兵而誅王, 天子憐百姓新勞苦, 故且休之, 遣臣授君王印, 剖符通使. 君王宜郊迎, 北面稱臣, 迺欲以新造未集之越, 屈彊於此. 漢誠聞之, 掘燒王先人冢, 夷滅宗族, 使一偏將將十萬衆臨越, 則越殺王降漢, 如反覆手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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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보내 조타를 그대로 인정하여 남월왕에 책봉하고 부를 나눠 [신의의 징표로 삼고]주 102
각주 102)
원문에는 ‘剖符’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황제가 제후를 분봉할 때나 전쟁에 장수를 파견할 때 金, 玉, 銅, 竹 등으로 만든 符를 2개로 쪼개 각각 황제와 신하가 나눠가짐으로써 신의의 징표로 삼았던 것을 말한다. 필요할 때에는 서로 합쳐보아 진위를 따질 수 있다. 이것은 한왕조가 정식으로 조타를 남월왕에 임명한 표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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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을 왕래토록 하였다. 또한 조타로 하여금 백월(百越)주 031
각주 031)
百越 : 남방의 여러 越族을 총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문헌상에서는 ‘百粤’, ‘諸越’로 표기되어 있다. 이 명칭이 가리키는 지역은 일반적으로 남방지역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예를 들면, 賈誼의 『過秦論』에 “南取百越之地”라고 한 예가 그것이다. 先秦시대 고적 중에는 동남지역의 토착민족을 가리켜 ‘越’이라고 통칭하기도 하였는데, 사실 광대한 이 지역에는 다양한 부족이 각기 다른 종족명과 성씨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는 ‘吳越’(東南浙北 일대)라 하기도 하고 혹은 ‘閩越’(福建 일대), 혹은 ‘楊越’(江西湖南 일대) 혹은 ‘南越’이라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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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여러 부족을 평화롭게 통솔케 하여 한의 남쪽 변경에서 우환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장사국(長沙國) 주 032
각주 032)
長沙國 : 기원전 202년에 건립되어 기원후 37년에 폐지될 때까지 209년간 존속하였다. 秦代 長沙郡이 설치되었던 관할지역을 계승한 것으로 治所는 ‘湘縣’(뒤에 臨湘縣으로 개명, 현재 湖南省 長沙)을 국도로 삼았다. 漢의 개국공신인 吳芮가 제1대 長沙王에 봉해졌다. 그 후 王莽에 의해(기원후 8년) 모든 侯國이 폐지됨에 따라 長沙國은 ‘塡蠻郡’으로 강등되었고, 국도인 臨湘縣 또한 ‘撫睦縣’으로 개명되었다가 後漢 때 劉秀에 의해 원래 이름을 회복, 다만 國이 아닌 郡으로 편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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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 각주 001)
    南越 : ‘南粤’이라고도 한다. 古代 南方 越人의 일족이다. 원래는 族名이었는데, 뒤에 趙佗가 세운 國名이 되었다. 그 강역은 현재의 廣東과 廣西 지구를 포함하여 남쪽으로는 월남 북부까지, 북쪽으로는 湖南省과 貴州省 남부까지 해당한다. 秦이 六國을 통일한 뒤 이 지역에 桂林郡, 南海郡, 象郡 3郡을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史記正義』(이하 『正義』로 약칭)는 廣州 南海縣에 도읍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秦始皇 33년에 岭南을 통일한 뒤 南海郡을 설치하였고, 郡治는 番禺城이었다. 현재의 廣州市 越秀區 내에 속한다. 越秀區는 南海縣과 番禺縣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隋 開皇 10년에 番禺縣을 南海縣에 통합하였다가 唐 長安 3년에 다시 番禺縣을 회복시켰다. 이후 五代十國과 宋代 통합과 분리를 거듭하다가 明代 鹿步巡檢司의 관할에 속하면서 같은 행정소속이 되었다. 한대 백월족의 분포는 뒤에 첨부한 도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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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尉佗 : 여기에서 尉는 ‘郡尉’를 말한다. 『史記索隱』(이하 『索隱』으로 약칭)에 인용된 『十三州記』에 의하면, “‘大郡은 守라 하고 小郡은 尉라 한다.”고 하였으니, 秦漢시대 郡의 최고 군사장관으로 그 지위는 郡守 아래이며 前漢 景帝 中二年(전148)에 都尉로 改名하였다. 秦시대에 桂林, 南海, 象郡에는 아직 郡守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尉가 郡의 최고장관으로서 軍權과 民政을 모두 겸하였다. ‘尉佗’라고 한 것은 그가 일찍이 南海尉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尉佗라 부른 것이다. 참고로 『索隱』에 인용된 『十三州記』는 지금까지 應劭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는데, 『史記』中華書局本 「標點後記」(10권, 15쪽)는 『史記』 권55 「留侯世家」의 ‘放牛桃林之陰’에 대한 司馬貞의 주석에서 “應劭『十三州記』‘弘農有桃丘聚, 古桃林也’”는 ‘應劭’ 다음에 탈자가 의심된다고 하면서, 『十三州記』는 北魏 闞駰이 편찬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최근 『魏書』권52 「闞駰」傳 및 『隋書』 「經籍志」, 『舊唐書』 「經籍志」 등에 모두 ‘十三州志’로 되어 있는 점, 淸代 일련의 고증학자들이 모두 應劭의 작품으로 주석하고 있는 점, 예를 들어 清 章宗源의 『隋書經籍志考證』에 “『十三州記』卷亡, 應劭撰, 不著錄”라고 한 점, 그리고 酈道元의 『水經注』의 「泗水注」에 應劭의 『十三州記』를 인용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應劭의 저작이 맞다고 주장하는 설이 제기되었다(蘇魯支, 「『史記』 標點商榷一則―附應劭 『十三州記』佚文」, 『經學諸子硏究』 國學數典論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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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眞定 : 縣名이다. 『索隱』에 인용된 韋昭에 의하면, 처음에는 郡名이었는데, 뒤에 縣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前漢初에 설치되었고 常山郡에 속하였다. 前漢 武帝 元鼎 4년(전113)에 眞定國으로 바뀌었다. 治所는 현재 河北省 正定 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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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楊越 : 楊越이라 한 것은 『史記集解』(이하 『集解』로 약칭)에 인용된 張晏에 의하면, 楊州의 南越을 말한다. 『索隱』은 『戰國策』의 “吳起가 楚나라를 위해 양월을 복속시키다.”를 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正義』는 禹의 九州 중 楊州에 南越이 속해 있기 때문에 양월이라 부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楊州란 명칭은 『尙書』 「禹貢」에 “淮海惟楊州”라고 처음 보인다. 현재의 淮水, 黄海, 長江에 걸친 江蘇, 安徽, 江西, 浙江, 福建 등의 省을 포함한 지역이다. 현재의 揚州도 포함하는 지역이지만 똑같은 지역이라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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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桂林郡 : 秦始皇 33년(전214)에 설치되었다. 현재 廣西省 대부분 지역을 포괄한다. 郡의 治所는 布山縣(현재의 廣西省 貴港市) 혹은 현재 廣西省 桂平市 西南이라고 하여 불분명하다. 『索隱』은 『漢書』 「地理志」(이하 「地理志」로 약칭)를 인용하여 桂林郡이 武帝 때 鬱林郡으로 개명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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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南海郡 : 秦始皇 33년(전214)에 설치되었다. 番禺, 四會, 博羅, 龍川 등 4개 현을 관할하였다. 이 중에서 郡의 治所는 番禺(현재의 廣州)였으며, 주요 관할지역은 현재의 廣東省이었다(黃淼章, 『南越國』, 廣東人民出版社. 2004, 제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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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象郡 : 『索隱』에 의하면, 秦始皇 33년(전214) 陸梁의 땅을 공략하여 이곳에 南海, 桂林, 象郡을 설치하면서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또 「地理志」에는 武帝 때 日南郡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한다. 그 治所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첫째, 漢代 日南郡이 곧 秦代 象郡이라는 설과 둘째, 秦代 설치된 후 前漢 昭帝 元鳳 5년 가을에 폐지하고 그 땅에 郁林, 柯 두 郡을 설치했다는 郁林설(「地理志」)이 있다(李龍章, 「秦漢象郡辨析」 『秦俑秦文化硏究』), 郡 치소는 臨塵(현재의 廣西省 崇左)이었으며, 일설에는 象林(현재의 越南 維州南茶轎) 또는 盧容(현재의 越南 順化 東北)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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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謫民 : ‘죄를 지어 형을 받은 백성들을 전쟁에 동원하거나 축성 등 노역에 동원하는 일’을 말한다. 『漢書』 「武帝纪」, “遣貳師將軍李廣利發天下讁民西征大宛.” 그 顔師古注에, “庶人之有罪讁者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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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의하면, 秦이 천하를 통일(전221)한 후부터 二世 元年(전209)까지는 13년, 천하를 통일한 뒤 8년에 越地를 평정(전214)했고, 그 후 이세 원년까지는 6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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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0)
    龍川令 : 『索隱』에 인용된 「地理志」에 의하면 현 이름이며 南海郡 소속이다. 『正義』 역시 顔師古를 인용하여 남해군의 현이라 하였으며, 아울러 그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南宋의 裴淵이 편찬한 『廣州記』를 인용하여 원래 博羅縣의 東鄕이었는데, 용이 땅에서 나온 뒤 그 구멍에서 샘이 흘러나와 용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史記』 「主父偃傳」에 의하면, 秦이 百越을 평정할 때 조타와 屠睢가 군을 이끌었는데, 도수의 군대는 서쪽 서구지역에서 참패하여 시체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나 동쪽 조타의 군대는 越人의 지지를 얻으며 진군하니 민월 일대를 확고하게 장악하였다. 秦始皇 33년(전214)에 마침내 임오가 장군이 되고 조타가 그 보좌로서 백월을 평정하니, 임오는 남해군위에, 조타는 龍川令에 임명되었다고 전한다. 唐代 『元和郡縣志』(권34)‘河源縣’조에 보면, “용천고성은 하원현 동북수로 175리에 있다. 진의 용천현이다. 진의 남해위 임오가 병들자 용천령 조타를 불러 그에게 정사를 맡겼는데, 바로 이곳이다(龍川故城在縣東北水路一百七十五里, 秦龍川縣也. 秦南海尉任囂疾, 召龍川令趙佗, 授之以政, 即此處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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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의하면, 이때까지는 아직 都尉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都尉로 개칭된 것은 前漢 景帝 中二年(전148)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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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任囂 : 任囂의 囂자에는 ‘떠들썩하다’는 의미의 ‘효’와 ‘거만하다’는 의미의 ‘오’라는 두 가지 음이 있다. 이에 대해 『索隱』은 오(五)와 도(刀)의 반절, 즉 ‘오’라고 하였기에 이것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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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陳勝 : ‘陳涉’을 말하며 중국 최초의 농민반란의 영수이다. 司馬遷은 이를 특별히 世家에 포함시켜 18번째 「陳涉世家」를 만들었다. 진섭이 자립해서 왕이라 칭한 것은 불과 6개월뿐이었고 영토도 부여받지 못했지만, 이처럼 司馬遷이 世家에 포함시킨 것은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漢初 공신들인 彭越, 黥布, 韓信 등을 世家에서 제외하고 진섭을 世家에 포함시킨 것은 이를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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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劉季 : 漢高祖 劉邦을 가리킨다. 劉季는 즉위 후 邦으로 개명하기 이전 어렸을 때 불렸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季는 고대에 항렬의 순서인 伯, 仲, 季의 季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름 자체보다는 형제들 중 막내로 불려지던 것이 이름을 대신해서 불렸음을 보여 준다(「高祖本紀」, 『史記索隱』, “按漢書 ‘名邦, 字季’, 此單云字, 亦又可疑. 按 : 漢高祖長兄名伯, 次名仲, 不見別名, 則季亦是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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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中國 : 여기에서는 秦나라를 가리키기보다는 南越과 대비하여 중원지역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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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聞陳勝等作亂” 이하 50자의 내용은 중복되고 있어 『漢書』에는 “聞陳勝等作亂, 豪傑叛秦相立” 12字로 수정하고 있다(瀧川資言, 『史記會注考證』, 北岳文藝出版社, 1998년, 제9卷 「南越列傳」, 4649쪽, 이하 『史記會注考證』의 인용은 책명과 쪽수만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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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新道 : 秦이 嶺南에 개척한 南海郡 등 3郡과 연결된 도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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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番禺 : 秦代 南海郡의 郡治가 된 이래, 南越國의 都城이 있던 곳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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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阻南海 : 『漢書』에는 ‘南海’의 ‘海’자가 ‘北’字로 되어 있고 ‘番禺負山險阻’에서 구두가 찍혀 있는데, 周壽昌에 의하면, 이렇게 되면 ‘南北東西數千里’가 되어 南越의 지세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瀧川資言, 『史記會注考證』, 北岳文藝出版社, 1998년, 제9卷 「南越列傳」, 46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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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1)
    州 : 여기에서 말하는 ‘州’는 이른바 천하의 통치지역을 상징하는 九州의 하나를 의미한다. 九州의 九는 실제 9개의 州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영역을 총칭하여 이른 개념이다. 예를 들면, 前漢 武帝 때 전통적인 『禹貢』의 九州에 새로이 편입된 남월지역에 交阯자사를 두고 雍州를 나눠 朔方자사를 두는 등 천하를 13州로 구획하고 州刺史를 설치한 데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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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長吏 : ‘지위가 높은 관리’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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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集解』와 『索隱』 모두 韋昭를 인용하여 ‘被之以書’, 즉 ‘그에게 조서를 쓰게 하다.’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索隱』에 인용된 服虔은, 任囂가 거짓으로 조서를 작성해서 南海尉를 대행하도록 하였다고 해석하였다. 여기에서는 위소의 해석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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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橫浦關 : 현재의 廣東省 南雄縣 동북에서 江西省 大餘縣 西南 大庾嶺 위에 있는 梅關을 말하며 ‘秦關’이라고도 한다. 대유령에서 횡포관으로 이어지는 關道는 江西와 廣東을 잇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 중의 하나였다(史爲樂 主編, 『中國歷史地名大辭典』,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5, 이하 『中國歷史地名大辭典』로 약칭). 『索隱』에 인용된 『南康記』에 의하면, 南野縣 大庾嶺 30리에서 橫浦에 이르는 사이에 秦代 설치된 關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아랫지방 사람들은 이를 ‘塞上’이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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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陽山關 : 『索隱』에 인용된 「地理志」에 의하면, 揭陽郡에 陽山縣이 있는데, 이 縣 상류 백여 리쯤에 있다는 騎田嶺이 바로 陽山關이라고 한다. 현재 廣東省 陽山 서북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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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湟谿關 : 『集解』에 인용된 徐廣에 의하면, 桂陽郡에 있으며 南海郡 소속인 四會縣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索隱』은 ‘湟谿’를 ‘날계(涅谿)’라고 하였는데, 『漢書』가 ‘湟谿’라 하였고, 顔師古注도 “湟音皇”이라 하여 ‘황’으로 읽었다. 「衛靑傳」과 「南粵傳」에 ‘出桂陽, 下湟水’에도 ‘황’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姚察은 『史記』에 ‘涅’이라 되어 있다고 하고 鄒誕 역시 ‘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涅’이 조금 옛날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索隱 “涅谿.鄒氏·劉氏本並作 「涅」, 音年結反. 漢書作 「湟谿」, 音皇. 又〔衛靑傳〕〔南粵傳〕云 「出桂陽, 下湟水」 是也. 而姚察云史記作 「涅」, 今本作 「湟」, 涅及湟不同, 良由隨聞則輒改故也. 水經云含匯縣南有匯浦關, 未知孰是.然鄒誕作 「涅」, 漢書作 「湟」, 蓋近於古). 열수(涅水)는 현재 세 곳으로 추정되지만, 남월과 관련해서는 지금의 廣東省 英德 서남쪽, 즉 廣東의 東江에 해당한다. 문헌자료로는 『水經注』 「泿水注」에 “其餘水又東至龍川縣爲涅水”라고 하였다. 淸代 全祖望은 龍川이 涅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湟水 또한 세 곳으로 추정되지만, 남월과 관련있는 곳은 洭水로 추정되는 廣東省 連州市 동남쪽 連江으로 본다. 湟谿關은 廣東省 連州市 서북쪽에 설치한 關으로 보고 있다(『中國歷史地名大辭典』, 26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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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假守 : 『索隱』은 조타가 자기의 친당을 郡縣의 職 혹은 假守에 임명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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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武王 : 『集解』에 인용된 韋昭는 살아서 ‘武’라는 호를 쓴 것은 옛 제도를 살피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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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高帝 : ‘高祖’와 함께 혼용하고 있다. 참고로 『史記』는 「高祖本紀」라 하였고, 『漢書』는 「高帝本紀」라고 편명을 삼았다. 다만, 『史記』 본문에서는 高帝와 高祖가 거의 별다른 구분 없이 혼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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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9)
    陸賈 : 楚人으로 前漢 초기 漢高祖 劉邦이 기의했을 때부터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고 漢 건국 후에도 漢高祖 劉邦을 측근에서 보좌한 인물이다. 그는 高祖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없다.”는 충언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외에 漢高祖 劉邦에게 秦의 멸망 원인을 조목조목 분석하여 『新語』라는 저서를 편찬하여 지어 바치었다. 『史記』 「酈生陸賈列傳」에는 그가 언변이 뛰어나 자주 사신의 일을 맡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경력 때문에 남월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列傳」에는 陸賈가 조타를 상대로 유세한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다. 본문과 관련 있는 내용을 인용해 보면, “족하는 중국 사람입니다. 그리고 친척과 형제, 조상의 무덤이 진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족하는 천성을 위반하여 관대를 버리고 구구한 월나라로 천자와 맞서 적국이 되고자 하니 장차 화가 일신에 미칠 것입니다. 또, 저 진나라는 실정하여 제후들과 호걸들이 모두 봉기하였는데, 오직 한왕만이 제일 먼저 입관하여 함양을 점거하였습니다. 항우가 약조를 배반하고 스스로 서초패왕으로 자처하자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귀속되니 참으로 강력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왕은 파촉에서 봉기하여 천하 사람들을 채찍질하여 다른 제후들을 평정하고 마침내 항우를 주멸하였습니다. 그후 5년 사이 해내가 평정되었으니 이는 인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하늘이 세워 준 일입니다. 천자께서는 군왕이 남월의 왕이 되어 천하를 도와 폭도를 주멸하지 않았음을 들어 알고 있습니다. 장상들이 군대를 일으켜 왕을 주벌하고자 하였지만 천자께서는 백성들의 노고를 가엾게 여겨 전역을 쉬게 하려고 신을 보내 군왕께 인을 하사하고 황제의 부절을 나눠 사신을 왕래토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군왕은 마땅히 교에 나와 이를 맞이해야 하며 북면하여 칭신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새로 만든 미완의 남월로써 이와 같이 한나라에 대하여 강경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한나라에서 만일 이 소식을 듣게 되면 군왕의 조상들의 무덤을 불태우고 종족들을 모두 없앨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부장으로 십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월나라를 공격하게 할 것입니다. 그때 월나라 사람들이 군왕을 죽여 한에 항복할 것은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울 것입니다(陸生因進說他曰 : 「足下中國人, 親戚昆弟墳在眞定. 今足下反天性, 棄冠帶, 欲以區區之越與天子抗衡爲敵國,禍且及身矣. 且夫秦失其政, 諸侯豪桀並起, 唯漢王先入關, 據咸陽. 項羽倍約, 自立爲西楚霸王, 諸侯皆屬, 可謂至彊. 然漢王起巴蜀, 鞭笞天下, 劫略諸侯, 遂誅項羽滅之. 五年之閒, 海內平定, 此非人力, 天之所建也. 天子聞君王王南越, 不助天下誅暴逆, 將相欲移兵而誅王, 天子憐百姓新勞苦, 故且休之, 遣臣授君王印, 剖符通使. 君王宜郊迎, 北面稱臣, 迺欲以新造未集之越, 屈彊於此. 漢誠聞之, 掘燒王先人冢, 夷滅宗族, 使一偏將將十萬衆臨越, 則越殺王降漢, 如反覆手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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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102)
    원문에는 ‘剖符’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황제가 제후를 분봉할 때나 전쟁에 장수를 파견할 때 金, 玉, 銅, 竹 등으로 만든 符를 2개로 쪼개 각각 황제와 신하가 나눠가짐으로써 신의의 징표로 삼았던 것을 말한다. 필요할 때에는 서로 합쳐보아 진위를 따질 수 있다. 이것은 한왕조가 정식으로 조타를 남월왕에 임명한 표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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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1)
    百越 : 남방의 여러 越族을 총칭하여 일컫는 말이다. 문헌상에서는 ‘百粤’, ‘諸越’로 표기되어 있다. 이 명칭이 가리키는 지역은 일반적으로 남방지역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예를 들면, 賈誼의 『過秦論』에 “南取百越之地”라고 한 예가 그것이다. 先秦시대 고적 중에는 동남지역의 토착민족을 가리켜 ‘越’이라고 통칭하기도 하였는데, 사실 광대한 이 지역에는 다양한 부족이 각기 다른 종족명과 성씨를 가지고 있다. 어떤 경우는 ‘吳越’(東南浙北 일대)라 하기도 하고 혹은 ‘閩越’(福建 일대), 혹은 ‘楊越’(江西湖南 일대) 혹은 ‘南越’이라 불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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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2)
    長沙國 : 기원전 202년에 건립되어 기원후 37년에 폐지될 때까지 209년간 존속하였다. 秦代 長沙郡이 설치되었던 관할지역을 계승한 것으로 治所는 ‘湘縣’(뒤에 臨湘縣으로 개명, 현재 湖南省 長沙)을 국도로 삼았다. 漢의 개국공신인 吳芮가 제1대 長沙王에 봉해졌다. 그 후 王莽에 의해(기원후 8년) 모든 侯國이 폐지됨에 따라 長沙國은 ‘塡蠻郡’으로 강등되었고, 국도인 臨湘縣 또한 ‘撫睦縣’으로 개명되었다가 後漢 때 劉秀에 의해 원래 이름을 회복, 다만 國이 아닌 郡으로 편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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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위타(尉佗), 조타, 임오(任囂), 조타, 진승(陳勝), 항우(項羽), 유계(劉季), 진승(陳勝), 오광(吳廣), 조타, 임오, 조타, 조타, 무왕(武王), 고제(高帝), 조타, 육가(陸賈), 조타, 조타
지명
진정(眞定), , 양월(楊越), 계림군(桂林郡), 남해군(南海郡), 상군(象郡), 월나라, 진나라, 진(秦), , , 남해군, 번우(番禺), , , 계림군(桂林郡), 상군(象郡), 남월, 한(漢)나라, 장사국(長沙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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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멸망한 후 조타(趙佗)가 남월왕에 즉위함 자료번호 : jo.k_0001_0113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