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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좌대도위(左大都尉)가 선우를 죽이려는 계획을 한나라에 고함

  • 국가
    흉노(匈奴)
이 해에주 001
각주 001)
漢 武帝 太初 元年(전10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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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에서는 이사장군(貳師將軍)주 002
각주 002)
貳師 : 大宛의 城 이름이다. 여기에서는 將軍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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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리(李廣利) 주 003
각주 003)
李廣利 : 中山(지금의 河北省 定縣) 사람이다. 여동생 李夫人이 漢 武帝의 총애를 받아 등용되었다. 大宛 정벌의 명을 받고 貳師城에 이르러 善馬를 얻어 돌아와 貳師將軍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에 匈奴를 공격하다 패하고 항복하였다가 匈奴에게 피살되었다(『漢書』 권61 「張騫李廣利傳」 : 2699 ~ 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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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시켜 서쪽으로 대완(大宛) 주 004
각주 004)
大宛 : 음은 ‘대완’이다. 고대 중앙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파미르고원 서쪽 기슭 현재 키르기스탄의 페르가나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으로는 康居, 서남으로는 大月氏, 大夏, 동북으로는 烏孫과 접해 있었다. 貴山이 都城이었다(『史記』 권123 「大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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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정벌케 하고 인우주 005
각주 005)
因杅 : 匈奴의 地名이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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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因杅將軍) [공손]오 주 006
각주 006)
『漢書』에는 “貳因杅將軍”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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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시켜 수항성(受降城) 주 007
각주 007)
受降城 : 匈奴 貴族의 투항을 맞이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었다.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巴彥淖爾盟 烏拉特中後旗 동쪽 지역에 그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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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쌓게 했다. 그 해 겨울주 008
각주 008)
太初 元年(전104)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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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땅에는] 큰 눈이 내려 대다수 가축이 굶주리고 얼어 죽었다.주 009
각주 009)
몽골 초원의 자연재해는 유목민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열악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면서 가축을 길러야 했기 때문이다. “큰 눈이 내려 대다수 가축이 굶주리고 얼어 죽었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건조한 초원에 눈과 비가 계속되면 가축들에게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초원의 재해는 가축의 폐사와 함께 목민들의 기근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유목경제 자체의 와해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렇게 유목민들이 자연재해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遊牧’이라는 생산양식 자체가 축적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더욱이 겨울에도 초지에 가축을 그대로 방목하는 유목 경영방식에서 현재에 비해 훨씬 열악한 조건이었을 匈奴時代에 재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재해에는 건조지역에 비가 계속 오는 것 이외에도 가뭄[黑災], 한파(寒波), 폭설[白災]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늑대 피해[狼害 : 겨울철 늑대들이 가축을 공격하는 것]와 가축 전염병 등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초지에 영향을 미치는 가뭄[黑災]과 폭설[白災]이 가장 심각했고, 그 다음은 가축 전염병[疫]이었다. 초원의 가뭄은 초지를 줄어들게 만들어 가축들의 생존을 어렵게 했고, 그에 따라 먹을 것이 줄어들어 약해진 가축들은 아사하거나 병에 걸려 죽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초원은 황무지(赤地)라고 할 정도로 더 이상 풀이 자랄 수 없게 되고, 이런 파괴로 인해 유목민들은 재생산 기반 자체를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가뭄으로 인한 초지의 축소는 현재에도 유목민들의 생존과 관련해 심각한 문제로 기근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폭설은 겨울 내지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유목민들의 기근을 야기했고, 현재에도 유목민들에게 가장 심각한 재난으로 인식되고 있다. 폭설은 지역적으로 북위 41도 이북으로 해발 2,500 ~ 3,000미터 이상의 지역에서 언제든지 빈발할 수 있기 때문에 몽골 초원은 어느 곳에서든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폭설의 발생이 주기적이기는 하지만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대응이 어려웠고, 그 외의 시기에도 언제든지 한파, 눈보라와 함께 닥칠 가능성이 있어 몽골 유목민들에게는 이런 재해가 치명적이었다. 특히, 눈보라와 한파를 동반하는 특성은 유목민들과 가축들을 고립시켜 동사하거나 기아로 아사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자연재해는 유목사회의 열악한 자연환경으로 3년에 한 번 小災, 5년에 한 번 中災, 10년에 한 번 大災가 발생했다. 따라서 반복되는 자연재해는 유목경제의 존립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특히 말기에 이런 재해가 집중되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자연재해에 대한 대응능력이 약화되면서 내적인 분열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匈奴의 경우에도 자연재해의 발생은 각 부족들의 독자적인 움직임을 초래하여 제국의 분열과 약화를 가져오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額爾敦布和, 1988 :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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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선우가 아직 어리고 호전적이어서 국인(國人)들 대부분이 안심하지 못하였다. 좌대도위(左大都尉)주 010
각주 010)
左大都尉 : 匈奴의 관직 명칭으로 左大將의 아래, 左大當戶의 위에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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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선우를 죽이고자 해서 몰래 사람을 시켜 한나라에 고하여 말하였다. “제가 선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고자 하는데, 한나라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한나라]주 011
각주 011)
『漢書』에는 “漢”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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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바로 와서 저를 맞아주면 제가 바로 실행할 것입니다.” 일찍이 한나라에서 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수항성을 쌓았지만 그래도 [천자는 흉노와 너무] 멀다고 여겼다.

  • 각주 001)
    漢 武帝 太初 元年(전104)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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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貳師 : 大宛의 城 이름이다. 여기에서는 將軍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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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李廣利 : 中山(지금의 河北省 定縣) 사람이다. 여동생 李夫人이 漢 武帝의 총애를 받아 등용되었다. 大宛 정벌의 명을 받고 貳師城에 이르러 善馬를 얻어 돌아와 貳師將軍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후에 匈奴를 공격하다 패하고 항복하였다가 匈奴에게 피살되었다(『漢書』 권61 「張騫李廣利傳」 : 2699 ~ 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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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大宛 : 음은 ‘대완’이다. 고대 중앙아시아에 있는 나라로 파미르고원 서쪽 기슭 현재 키르기스탄의 페르가나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으로는 康居, 서남으로는 大月氏, 大夏, 동북으로는 烏孫과 접해 있었다. 貴山이 都城이었다(『史記』 권123 「大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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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因杅 : 匈奴의 地名이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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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漢書』에는 “貳因杅將軍”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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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受降城 : 匈奴 貴族의 투항을 맞이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었다.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巴彥淖爾盟 烏拉特中後旗 동쪽 지역에 그와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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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太初 元年(전104)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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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몽골 초원의 자연재해는 유목민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열악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면서 가축을 길러야 했기 때문이다. “큰 눈이 내려 대다수 가축이 굶주리고 얼어 죽었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건조한 초원에 눈과 비가 계속되면 가축들에게 전염병이 발생하였다. 초원의 재해는 가축의 폐사와 함께 목민들의 기근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유목경제 자체의 와해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렇게 유목민들이 자연재해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遊牧’이라는 생산양식 자체가 축적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는 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더욱이 겨울에도 초지에 가축을 그대로 방목하는 유목 경영방식에서 현재에 비해 훨씬 열악한 조건이었을 匈奴時代에 재해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욱 컸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재해에는 건조지역에 비가 계속 오는 것 이외에도 가뭄[黑災], 한파(寒波), 폭설[白災] 등이 있다. 그 외에도 늑대 피해[狼害 : 겨울철 늑대들이 가축을 공격하는 것]와 가축 전염병 등 다양했다. 그 중에서도 초지에 영향을 미치는 가뭄[黑災]과 폭설[白災]이 가장 심각했고, 그 다음은 가축 전염병[疫]이었다. 초원의 가뭄은 초지를 줄어들게 만들어 가축들의 생존을 어렵게 했고, 그에 따라 먹을 것이 줄어들어 약해진 가축들은 아사하거나 병에 걸려 죽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초원은 황무지(赤地)라고 할 정도로 더 이상 풀이 자랄 수 없게 되고, 이런 파괴로 인해 유목민들은 재생산 기반 자체를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가뭄으로 인한 초지의 축소는 현재에도 유목민들의 생존과 관련해 심각한 문제로 기근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폭설은 겨울 내지는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에 유목민들의 기근을 야기했고, 현재에도 유목민들에게 가장 심각한 재난으로 인식되고 있다. 폭설은 지역적으로 북위 41도 이북으로 해발 2,500 ~ 3,000미터 이상의 지역에서 언제든지 빈발할 수 있기 때문에 몽골 초원은 어느 곳에서든지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폭설의 발생이 주기적이기는 하지만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대응이 어려웠고, 그 외의 시기에도 언제든지 한파, 눈보라와 함께 닥칠 가능성이 있어 몽골 유목민들에게는 이런 재해가 치명적이었다. 특히, 눈보라와 한파를 동반하는 특성은 유목민들과 가축들을 고립시켜 동사하거나 기아로 아사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자연재해는 유목사회의 열악한 자연환경으로 3년에 한 번 小災, 5년에 한 번 中災, 10년에 한 번 大災가 발생했다. 따라서 반복되는 자연재해는 유목경제의 존립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였다. 특히 말기에 이런 재해가 집중되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자연재해에 대한 대응능력이 약화되면서 내적인 분열이 가속화되었기 때문이다. 匈奴의 경우에도 자연재해의 발생은 각 부족들의 독자적인 움직임을 초래하여 제국의 분열과 약화를 가져오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額爾敦布和, 1988 :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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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左大都尉 : 匈奴의 관직 명칭으로 左大將의 아래, 左大當戶의 위에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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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漢書』에는 “漢”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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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이광리(李廣利), [공손]오, 아선우
지명
한나라, 대완(大宛), 수항성(受降城),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수항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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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대도위(左大都尉)가 선우를 죽이려는 계획을 한나라에 고함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