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넷

상세검색 공유하기 모바일 메뉴 검색 공유
닫기

상세검색

닫기
기사명
자료명
본문
해제
국가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ID :NAHF.jo.k_0001_0110_0480IDURL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 글씨크게
  • 글씨작게
  • 프린트
  • 텍스트
  • 오류신고

한나라가 노충국(路充國)을 사신으로 삼아 흉노에 보냈으나 흉노가 노충국을 억류시키고 변경을 자주 침범함

 
  • 국가흉노(匈奴)
양신이 [그냥] 돌아온 뒤 한나라왕오를 사자로 [보냈는데], 선우가 다시 교묘한 말로 [왕오를] 달래 한나라의 재물을 많이 얻을 욕심에 [주001]
각주 001
닫기

『漢書』에는 “漢使王烏等如匈奴. 匈奴復諂以甘言”로 되어 있다.

거짓으로 왕오에게 말하였다. [주002]
각주 002
닫기

『漢書』에는 “紿王烏曰”로 되어 있다.

“내가 한나라에 몸소 들어가 천자를 뵙고 형제가 될 것을 서로 약속하고 [주003]
각주 003
닫기

『漢書』에는 “結”로 되어 있다.

싶네.” 왕오가 돌아와 한나라에 [이를] 아뢰자 한나라에서는 선우를 위해 장안에 큰 집을 지었다. [그러나 트집을 잡으며] 흉노 [선우가] 말하였다. “한나라에서 높은 지위의 사람이 사신으로 오지 않으면 나는 성실한 답을 줄 수 없소.” 흉노가 높은 지위의 인물을 사신으로 삼아 한나라에 보냈는데, 병이 나자 한나라에서 약을 주어 [주004]
각주 004
닫기

『漢書』에는 “服藥“으로 되어 있다.

치료해 주고자 했으나 불행하게도 [그가] 죽었다. [주005]
각주 005
닫기

漢 武帝 元封 4년(전107) 가을이다.

그러자 한나라에서는 노충국(路充國)을 2천 석 [주006]
각주 006
닫기

二千石 : 漢代 관인의 등급을 표시하는 秩을 말한다. 안으로 九卿, 郎將과, 밖으로 郡守, 郡尉까지 官秩이 모두 二千石이었다. 官秩이 다르고 印綬도 규모가 역시 달랐다(『漢書』 권19 「百官公卿表」). 二千石印綬의 規格은 銀印青綬였다.

[고관이 차는] 인수(印綏)를 주어 사신으로 그 유해를 호송하게 하고 정중한 장례를 치르는 비용이 수천 금이었는데, [주007]
각주 007
닫기

『漢書』에는 “漢使路充國佩二千石印綬, 使送其喪, 厚幣直數千金”으로 되어 있다.

[그가] 말하기를 “[노충국] 이 사람이 한나라의 귀인이오.”라고 했다. [주008]
각주 008
닫기

『漢書』에는 “曰 : 此漢貴人也”가 없다.

선우는 한나라가 자신의 고귀한 사자를 죽였다고 여겨 바로 노충국을 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선우가 지금까지 해 온] 여러 가지의 말들은 다만 선우가 왕오 등을 속인 것에 불과할 뿐이지 그가 한나라에 가거나 태자를 볼모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이에 흉노는 여러 번 기습부대로 하여금 변경을 침범하도록 했다. [주009]
각주 009
닫기

『漢書』 권6 「武帝紀」에는 匈奴가 元封 4년(전107) 가을에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한나라에서는 이에 곽창(郭昌) [주010]
각주 010
닫기

郭昌 : 雲中(內蒙古自治區 托克托 동북쪽) 사람으로 校尉로서 大將軍을 수행했다. 元封 4년(전107) 太中大夫로서 拔胡將軍이 되어 朔方에 주둔했다. 宣帝시대에 諫大夫가 되었다(『漢書』 권55 「衛靑霍去病傳」 : 2492).

을 발호장군(拔胡將軍)으로 삼고 착야후 [조파노] [주011]
각주 011
닫기

浞野侯는 趙破奴를 말한다.

삭방의 동쪽에 주둔시켜 흉노에 대비했다. 노충국이 흉노에 억류된 지 3년이 지나서 [오유] 선우가 죽었다. [주012]
각주 012
닫기

元封 4년(전107) 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路充國이 元封 6년(전105) 烏維單于가 죽자 돌아왔다. 匈奴에 거의 3년 정도 체류했다. 『漢書』에는 “單于死”가 없다.



 

주 001
『漢書』에는 “漢使王烏等如匈奴. 匈奴復諂以甘言”로 되어 있다.
주 002
『漢書』에는 “紿王烏曰”로 되어 있다.
주 003
『漢書』에는 “結”로 되어 있다.
주 004
『漢書』에는 “服藥“으로 되어 있다.
주 005
漢 武帝 元封 4년(전107) 가을이다.
주 006
二千石 : 漢代 관인의 등급을 표시하는 秩을 말한다. 안으로 九卿, 郎將과, 밖으로 郡守, 郡尉까지 官秩이 모두 二千石이었다. 官秩이 다르고 印綬도 규모가 역시 달랐다(『漢書』 권19 「百官公卿表」). 二千石印綬의 規格은 銀印青綬였다.
주 007
『漢書』에는 “漢使路充國佩二千石印綬, 使送其喪, 厚幣直數千金”으로 되어 있다.
주 008
『漢書』에는 “曰 : 此漢貴人也”가 없다.
주 009
『漢書』 권6 「武帝紀」에는 匈奴가 元封 4년(전107) 가을에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주 010
郭昌 : 雲中(內蒙古自治區 托克托 동북쪽) 사람으로 校尉로서 大將軍을 수행했다. 元封 4년(전107) 太中大夫로서 拔胡將軍이 되어 朔方에 주둔했다. 宣帝시대에 諫大夫가 되었다(『漢書』 권55 「衛靑霍去病傳」 : 2492).
주 011
浞野侯는 趙破奴를 말한다.
주 012
元封 4년(전107) 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路充國이 元封 6년(전105) 烏維單于가 죽자 돌아왔다. 匈奴에 거의 3년 정도 체류했다. 『漢書』에는 “單于死”가 없다.
 
이름
양신 , 왕오 , 왕오 , 왕오 , 왕오 , 노충국(路充國) , 노충국 , 노충국 , 왕오 , 곽창(郭昌) , 조파노 , 노충국 , [오유] 선우
지명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장안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삭방

태그 :

태그등록
이전페이지 리스트보기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