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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노충국(路充國)을 사신으로 삼아 흉노에 보냈으나 흉노가 노충국을 억류시키고 변경을 자주 침범함

  • 국가
    흉노(匈奴)
양신이 [그냥] 돌아온 뒤 한나라왕오를 사자로 [보냈는데], 선우가 다시 교묘한 말로 [왕오를] 달래 한나라의 재물을 많이 얻을 욕심에주 001
각주 001)
『漢書』에는 “漢使王烏等如匈奴. 匈奴復諂以甘言”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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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으로 왕오에게 말하였다.주 002
각주 002)
『漢書』에는 “紿王烏曰”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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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나라에 몸소 들어가 천자를 뵙고 형제가 될 것을 서로 약속하고주 003
각주 003)
『漢書』에는 “結”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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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네.” 왕오가 돌아와 한나라에 [이를] 아뢰자 한나라에서는 선우를 위해 장안에 큰 집을 지었다. [그러나 트집을 잡으며] 흉노 [선우가] 말하였다. “한나라에서 높은 지위의 사람이 사신으로 오지 않으면 나는 성실한 답을 줄 수 없소.” 흉노가 높은 지위의 인물을 사신으로 삼아 한나라에 보냈는데, 병이 나자 한나라에서 약을 주어주 004
각주 004)
『漢書』에는 “服藥“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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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해 주고자 했으나 불행하게도 [그가] 죽었다.주 005
각주 005)
漢 武帝 元封 4년(전107)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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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한나라에서는 노충국(路充國)을 2천 석주 006
각주 006)
二千石 : 漢代 관인의 등급을 표시하는 秩을 말한다. 안으로 九卿, 郎將과, 밖으로 郡守, 郡尉까지 官秩이 모두 二千石이었다. 官秩이 다르고 印綬도 규모가 역시 달랐다(『漢書』 권19 「百官公卿表」). 二千石印綬의 規格은 銀印青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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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관이 차는] 인수(印綏)를 주어 사신으로 그 유해를 호송하게 하고 정중한 장례를 치르는 비용이 수천 금이었는데,주 007
각주 007)
『漢書』에는 “漢使路充國佩二千石印綬, 使送其喪, 厚幣直數千金”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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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하기를 “[노충국] 이 사람이 한나라의 귀인이오.”라고 했다.주 008
각주 008)
『漢書』에는 “曰 : 此漢貴人也”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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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는 한나라가 자신의 고귀한 사자를 죽였다고 여겨 바로 노충국을 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선우가 지금까지 해 온] 여러 가지의 말들은 다만 선우가 왕오 등을 속인 것에 불과할 뿐이지 그가 한나라에 가거나 태자를 볼모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이에 흉노는 여러 번 기습부대로 하여금 변경을 침범하도록 했다.주 009
각주 009)
『漢書』 권6 「武帝紀」에는 匈奴가 元封 4년(전107) 가을에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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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에서는 이에 곽창(郭昌) 주 010
각주 010)
郭昌 : 雲中(內蒙古自治區 托克托 동북쪽) 사람으로 校尉로서 大將軍을 수행했다. 元封 4년(전107) 太中大夫로서 拔胡將軍이 되어 朔方에 주둔했다. 宣帝시대에 諫大夫가 되었다(『漢書』 권55 「衛靑霍去病傳」 : 2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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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발호장군(拔胡將軍)으로 삼고 착야후 [조파노]주 011
각주 011)
浞野侯는 趙破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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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방의 동쪽에 주둔시켜 흉노에 대비했다. 노충국이 흉노에 억류된 지 3년이 지나서 [오유] 선우가 죽었다.주 012
각주 012)
元封 4년(전107) 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路充國이 元封 6년(전105) 烏維單于가 죽자 돌아왔다. 匈奴에 거의 3년 정도 체류했다. 『漢書』에는 “單于死”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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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漢書』에는 “漢使王烏等如匈奴. 匈奴復諂以甘言”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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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漢書』에는 “紿王烏曰”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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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漢書』에는 “結”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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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漢書』에는 “服藥“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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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漢 武帝 元封 4년(전107)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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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二千石 : 漢代 관인의 등급을 표시하는 秩을 말한다. 안으로 九卿, 郎將과, 밖으로 郡守, 郡尉까지 官秩이 모두 二千石이었다. 官秩이 다르고 印綬도 규모가 역시 달랐다(『漢書』 권19 「百官公卿表」). 二千石印綬의 規格은 銀印青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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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漢書』에는 “漢使路充國佩二千石印綬, 使送其喪, 厚幣直數千金”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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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漢書』에는 “曰 : 此漢貴人也”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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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漢書』 권6 「武帝紀」에는 匈奴가 元封 4년(전107) 가을에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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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郭昌 : 雲中(內蒙古自治區 托克托 동북쪽) 사람으로 校尉로서 大將軍을 수행했다. 元封 4년(전107) 太中大夫로서 拔胡將軍이 되어 朔方에 주둔했다. 宣帝시대에 諫大夫가 되었다(『漢書』 권55 「衛靑霍去病傳」 : 2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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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浞野侯는 趙破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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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元封 4년(전107) 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路充國이 元封 6년(전105) 烏維單于가 죽자 돌아왔다. 匈奴에 거의 3년 정도 체류했다. 『漢書』에는 “單于死”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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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양신, 왕오, 왕오, 왕오, 왕오, 노충국(路充國), 노충국, 노충국, 왕오, 곽창(郭昌), 조파노, 노충국, [오유] 선우
지명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장안,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한나라, 삭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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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노충국(路充國)을 사신으로 삼아 흉노에 보냈으나 흉노가 노충국을 억류시키고 변경을 자주 침범함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