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넷

상세검색 공유하기 모바일 메뉴 검색 공유
닫기

상세검색

닫기
기사명
자료명
본문
해제
국가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ID :NAHF.jo.k_0001_0110_0370IDURL
사료라이브러리 열기
  • 글씨크게
  • 글씨작게
  • 프린트
  • 텍스트
  • 오류신고

혼야왕이 한나라에 투항한 뒤 흉노의 침입이 줄어들었으나 이듬해 흉노가 우북평(右北平)과 정양(定襄)에 다시 쳐들어옴

 
  • 국가흉노(匈奴)
그 가을 [주001]
각주 001
닫기

漢 武帝 元狩 2년(전123) 가을이다.

선우 [주002]
각주 002
닫기

匈奴 伊稚斜單于이다.

는 혼야왕(渾邪王) [주003]
각주 003
닫기

『漢書』에는 “昆邪王”으로 되어 있다.

과 휴도왕 [주004]
각주 004
닫기

休屠王을 渾邪王이 살해하자 休屠王의 아들인 金日磾가 漢나라에 투항하여 光祿大夫가 되었다.

이 서쪽에서 한나라에게 수만 명이나 죽고 사로잡힌 것에 화가 나서 그들을 불러 죽이려 했다. 혼야왕과 휴도왕은 [이를] 걱정하여 한나라에게 항복할 것을 모의하니 [주005]
각주 005
닫기

이것은 元狩 2년의 일이다.

한나라에서 표기장군 [주006]
각주 006
닫기

『漢書』에는 “票騎將軍”으로 되어 있다.

을 보내 그들을 맞이하게 했다. [주007]
각주 007
닫기

『漢書』 「食貨志」의 기록에 따르면 투항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된 物資의 車輛이 3萬乘이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의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한나라에 항복했다. 대체로 4만여 명 정도였으나 10만이라 칭했다. 이에 한나라가 혼야왕을 얻게 되자 농서, 북지, 하서(河西) [주008]
각주 008
닫기

河西 : 지명으로 지금의 甘肅省과 靑海省의 黃河 서쪽 지역을 통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에 대한 흉노 침공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한나라에서는] 함곡관 동쪽의 빈민들을 흉노에게서 빼앗은 하남 [주009]
각주 009
닫기

『漢書』에는 “河南地”로 되어 있다.

, 신진중(新秦中) [주010]
각주 010
닫기

新秦中 : 지명으로 秦代에 빈민들을 이주시켜 살도록 한 곳을 말한다. 넓이가 사방 약 6 ~ 7백 리 정도가 되고 長安 북방 朔方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史記』에서는 秦始皇帝 시대에 匈奴를 몰아내고 얻은 땅에 백성을 이주시킨 곳을 지칭하는 명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河套(오르도스) 일대이다. 武帝는 元狩 3년(전120)에 匈奴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마침 이때 華山 동쪽에서 黃河가 범람하자 백성들을 변경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關東의 주민들을 다시 찾은 新秦中으로 이주시켰다(주174) 참조).

으로 옮겨 살게 해 [이 지역을] 채웠으므로 북지[군] 서쪽의 수비병을 절반으로 줄일 수가 있었다. [주011]
각주 011
닫기

漢 武帝 元狩 3年(전122) 가을에 내린 詔에서 隴西, 北地, 上郡 등 3개 군의 戍卒을 반으로 줄여서 백성들의 요역 부담을 줄이도록 하였다.

그 이듬해 [주012]
각주 012
닫기

漢 武帝 元狩 3년(전122)이다. 여기에서 이듬해라고 한 『史記』의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關東의 백성들을 新秦中과 減北 땅에 이주시킨 것은 元狩 3年 가을의 일이기 때문이다. 『漢書』에는 “봄”이 덧붙어 있다.

흉노가 우북평[군]정양[군]으로 각각 수만 기로 쳐들어와 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다음에 돌아갔다.

 

주 001
漢 武帝 元狩 2년(전123) 가을이다.
주 002
匈奴 伊稚斜單于이다.
주 003
『漢書』에는 “昆邪王”으로 되어 있다.
주 004
休屠王을 渾邪王이 살해하자 休屠王의 아들인 金日磾가 漢나라에 투항하여 光祿大夫가 되었다.
주 005
이것은 元狩 2년의 일이다.
주 006
『漢書』에는 “票騎將軍”으로 되어 있다.
주 007
『漢書』 「食貨志」의 기록에 따르면 투항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된 物資의 車輛이 3萬乘이 넘었다고 한다.
주 008
河西 : 지명으로 지금의 甘肅省과 靑海省의 黃河 서쪽 지역을 통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주 009
『漢書』에는 “河南地”로 되어 있다.
주 010
新秦中 : 지명으로 秦代에 빈민들을 이주시켜 살도록 한 곳을 말한다. 넓이가 사방 약 6 ~ 7백 리 정도가 되고 長安 북방 朔方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史記』에서는 秦始皇帝 시대에 匈奴를 몰아내고 얻은 땅에 백성을 이주시킨 곳을 지칭하는 명칭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河套(오르도스) 일대이다. 武帝는 元狩 3년(전120)에 匈奴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마침 이때 華山 동쪽에서 黃河가 범람하자 백성들을 변경지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關東의 주민들을 다시 찾은 新秦中으로 이주시켰다(주174) 참조).
주 011
漢 武帝 元狩 3年(전122) 가을에 내린 詔에서 隴西, 北地, 上郡 등 3개 군의 戍卒을 반으로 줄여서 백성들의 요역 부담을 줄이도록 하였다.
주 012
漢 武帝 元狩 3년(전122)이다. 여기에서 이듬해라고 한 『史記』의 기록은 정확하지 않다. 關東의 백성들을 新秦中과 減北 땅에 이주시킨 것은 元狩 3年 가을의 일이기 때문이다. 『漢書』에는 “봄”이 덧붙어 있다.
 
지명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한나라 , 농서 , 북지 , 하서(河西) , 한나라 , 함곡관 , 하남 , 신진중(新秦中) , 북지[군] , 우북평[군] , 정양[군]

태그 :

태그등록
이전페이지 리스트보기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