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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읍전투 이후 흉노와의 지속된 싸움 뒤에 한나라가 하남 땅을 빼앗고 황하를 따라 방비를 구축함

  • 국가
    흉노(匈奴)
마읍의 전투가 있은 지 5년주 001
각주 001)
漢 武帝 元光 6년(전129)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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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가을주 002
각주 002)
『漢書』 권6 「武帝紀」에는 “봄”으로 되어 있는데, 본기의 기록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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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에서는 네 장군주 003
각주 003)
네 명의 장군은 車騎將軍 衛靑, 騎將軍 公孫敖, 輕車將軍 公孫賀, 驍騎將軍 李廣 등이다. 『漢書』에는 “將軍”이 “將”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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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각각 만 기씩을 주어 관시 부근의 흉노를 치게 했다. 장군 위청(衛靑) 주 004
각주 004)
衛青(? ~ 전106) : 字가 仲卿이고 河東 平陽(지금의 山西省 臨汾市 서남쪽)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鄭季인데 그가 관리 시절에 平陽侯의 집에서 일하고 있다가 平陽侯의 비첩 위온과 밀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의 이복누이 衛子가 平陽公主(孝武帝의 누나, 平陽侯의 夫人)를 모시다가 武帝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太中大夫(궁중고문관)가 되었다. 元光 5년(전127) 車騎將軍으로 匈奴를 공격한 이래 元朔 元年(전128)에는 河南 땅을 되찾아 朔方軍을 설치함으로써 長平侯가 되었다. 그 이후 이어진 匈奴의 공세에 대응해 元朔 5년(전124) 봄에 다시 高闕에서 출정하여 匈奴의 右賢王을 격파하여 大將軍이 되었다. 그 이후에는 霍去病과 함께 大司馬가 되었다. 匈奴와의 계속된 전투에서 도합 7차례에 걸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21 ~ 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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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곡[군] 주 005
각주 005)
上谷 : 郡의 명칭으로 현재 河北省 懷來縣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16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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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나와 농성(蘢城) 주 006
각주 006)
蘢城은 『漢書』에서 “龍城”으로 되어 있다(주23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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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 흉노의 수급과 포로 7백 인을 얻었다. 공손하(公孫賀) 주 007
각주 007)
公孫賀 : 義渠(秦나라에게 망한 西戎의 하나)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匈奴이다. 아버지 渾邪는 景帝 때 平曲侯가 되었으나 죄를 지어 侯를 잃었다. 武帝가 太子 시절이었을 때 舍人이었다. 武帝가 즉위하자 8년에 太僕 자격으로 輕車將軍이 되어 馬邑에 주둔했다. 4년이 지나자 輕車將軍으로 雲中郡에 출격했다. 5년이 지나서 輕車將軍으로 大將軍을 따라 출격해 軍功을 쌓고 봉을 받아 南窌侯가 되었다. 1년이 지나 左將軍으로 재차 大將軍을 따라 定襄에서 출격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4년이 지나 酎禁에 걸려 侯를 잃었다. 8년이 지나서 浮沮將軍으로 五原에서 2천여 리를 진출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8년이 지나자 太僕에서 丞相이 되어 葛繹侯로 봉해졌다. 일곱 명의 장군 중 하나로 匈奴에 출격했지만 큰 功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侯가 되고 丞相이 되었다. 그의 아들 公孫敬聲이 陽石公主(孝武帝의 皇女)와 밀통하고 남을 저주한 죄로 일족이 몰살되어 후사도 끊어졌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41 ~ 2)(주1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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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중[군] 주 008
각주 008)
雲中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林胡와 樓煩 등이 살던 곳이다. 趙 武靈王이 이들을 몰아내고 군으로 만든 이후에 漢代 11개의 현으로 이루어졌다. 郡의 治所는 內蒙古自治區 托克托縣에 있었다(주15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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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나와 [흉노를 공격하였으나]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공손오(公孫敖) 주 009
각주 009)
公孫敖 : 義渠 출신의 장군이다. 그는 먼저 郎官으로 武帝를 섬겼다. 그는 衛靑을 구한 것으로 권세를 갖게 되었다. 武帝가 즉위한 지 12년에 騎將軍이 되어 代郡에서 출격했다. 사졸을 7천 명이나 잃어 참살될 뻔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5년이 지나 校尉로서 大將軍을 따라 출격해 군공을 세워 合騎侯가 되었다. 1년이 지나서 中將軍으로 大將軍을 따라 재차 定襄에서 출격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2년이 지나서 將軍으로 北地郡에 출격해 驃騎將軍과의 약속기일에 지체돼 참죄에 해당됐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다시 떨어졌다. 2년이 지나서 校尉로 大將軍을 따라 출격했지만 군공은 없었다. 14년이 지나 因杅將軍으로 受降城을 구축했다. 7년이 지나서 다시 因杅將軍으로 匈奴를 쳤으나 余吾水에 이르러 많은 사졸을 잃었다. 형리에게 인도되어 참형을 당했으나 거짓 죽은 체하다 도망했다. 5, 6년 동안 민간에 숨어 살다가 뒤에 발각되어 다시 옥에 갇혔다. 그의 아내가 지은 巫蠱罪로 일족이 몰살되었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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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을 나와 흉노에게 7천여 명주 010
각주 010)
『漢書』에는 “七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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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잃었다. 이광(李廣) 주 011
각주 011)
李廣 : 隴西 成紀(지금의 甘肅省 秦安縣) 사람으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남다른 弓術과 騎馬術로 뛰어난 장수로 이름을 떨쳤다. 文帝 14년(전166) 匈奴가 대거 蕭關을 침입하자 이를 막은 공으로 발탁되어 郎中(侍從)과 武騎常侍(侍從騎兵 武官)가 되었다. 景帝시기에 都尉가 되었다가 騎郞將(侍從騎兵隊長)으로 승진했다. 그 이후 吳楚七國의 난 시기에 驍騎都尉로서 공을 세웠으나 梁王한테서 將軍의 인수를 몰래 받은 것이 탄로나 개선한 뒤에도 상이 없었다. 이후 上谷郡(河北省 廷慶縣 일대) 태수로 인근을 전전하면서 匈奴와 전투를 벌였다. 이후 隴西, 北地, 右北平 등의 변방 太守를 지냈다. 그리고 武帝時期에는 馬邑 전투에서 驍騎將軍으로 匈奴 원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잡혀 있다가 돌아와 참형을 면하고 庶人이 되었다. 이후 右北平郡 太守가 되어 匈奴를 방어하였다. 匈奴가 그를 飛將軍이라 부르고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이후 元朔 6년(전123) 後衛軍의 將軍이 되어 大將軍 衛靑의 군대에 소속되었다. 定襄(山西省 大同市 北西)으로 나가 匈奴를 쳤다. 9년에는 郞中令으로 博望侯 張騫과 같이 출정했다가 패전하였다. 元狩 4년(전119)에 霍去病이 출정할 때 大將軍 衛靑을 따라 참전하였다가 자살했다. 청렴하여 상을 받으면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음식도 사졸들의 것과 똑같은 것을 먹었다. 그는 죽기까지 40여 년 동안 2천 석의 俸祿을 받는 신분이면서도 집에는 재산이 남지 않았다. 또한 일생 동안 재물에 관해서 말한 적도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고 한다(『史記』 권109 「李將軍列傳」 : 2867 ~ 2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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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문[군]을 나와 흉노에게 패해 흉노가 [이]광을 사로잡았으나 [이]광이 이후에 도망쳐 돌아왔다. 한나라에서는 [공손]오[이]광을 잡아가두었는데, [공손]오[이]광은 속전을 내고 [풀려나] 서인이 되었다. 그 해 겨울에주 012
각주 012)
『漢書』 권6 「武帝紀」에는 “가을”로 되어 있다(“漢使將軍韓安國屯漁陽備胡, 亦在元光六年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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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여러 차례주 013
각주 013)
『漢書』에는 “數千人”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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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변경을 노략질하였는데, 어양(漁陽) 주 014
각주 014)
漁陽 : 郡명칭으로 秦始皇 22년(전225)에 설치되어 지금의 河北省 密雲縣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漢代에 漁陽郡에는 22개의 縣이 있었고 治所는 漁陽縣이었다(주16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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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피해가] 더욱 심했다. 한나라에서는 장군 한안국어양군에 주둔시켜 흉노[의 침입]에 대비케 했다. 그 이듬해 가을주 015
각주 015)
『漢書』 권6 「武帝紀」에서는 이 사건을 元朔 元年(전128) 가을로, 「衛將軍列傳」에는 元朔 2년(전127)으로 기록했으나, 전자의 기록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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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기병 2만이 한나라로 들어와 요서(遼西)주 016
각주 016)
遼西 : 郡명칭으로 秦始皇 2년(전245)에 설치되어 漢代에는 아래에 14개의 縣이 있었다. 郡治所는 且慮였는데, 지금의 河北省 盧龍縣이다(주16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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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수(太守)를 죽이고 2천여 명을 잡아갔다. 흉노는 또한 [변경 안으로] 들어와 어양 태수의 군대 천여 명을 패배시키고주 017
각주 017)
『漢書』에는 “又敗漁陽太守軍千餘人”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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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장군 [한]안국을 포위했다. [한]안국은 마침 천여 기의 병력마저 전멸하려 하였는데, 때마침 연(燕) 주 018
각주 018)
燕의 영역 범위는 때에 따라 변화가 많았다. 이때에는 단지 廣陽郡(지금의 北京市 大興縣과 河北省 固妥縣)에 지나지 않았다. 도읍은 薊(지금의 北京市 서남쪽)에 있었다. 이 무렵에 다스렸던 燕王 劉定國은 劉澤의 자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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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구원병이] 구하러 도착하자주 019
각주 019)
『漢書』에는 “會燕救之, 至”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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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가 바로 물러났다. 흉노가 다시 안문[군]으로 들어와주 020
각주 020)
『漢書』에는 “又入鴈門”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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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주 021
각주 021)
이 사건은 元朔 元年(전128) 가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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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한나라에서는 장군 위청으로 하여금 3만 기를 거느리고 안문[군]에서, 이식(李息) 주 022
각주 022)
李息 : 北地郡 鬱郅人(甘肅省 慶陽縣) 출신으로 처음에는 景帝를 섬겼다. 武帝가 즉위한 지 8년이 되어 材官將軍이 되어 馬邑에 주둔했다. 6년이 지나 장군이 되어 代郡에서 출격했다. 3년이 지나자 將軍이 되어 大將軍을 따라 朔方軍에서 출격했으나 모두 軍功은 없었다. 이후에 세 차례나 將軍이 되었다. 그 후로는 늘 大行(特派大使)의 직에 있었다(권111 『衛將軍列傳』 : 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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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군에서 나아가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주 023
각주 023)
이 사건은 元朔 元年(전128) 가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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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흉노의] 수급과 포로 수천 명을주 024
각주 024)
『漢書』에는 “得首虜數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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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었다. 그 이듬해에 [위]청이 다시 운중[군]에서 나가 서쪽으로 농서에 이르러 흉노의 누번왕(樓煩王)과 백양왕(白羊王)을 하남(河南)에서 격파하여 흉노의 수급과 포로 수천과 소와 양 백여 만을 얻었다.주 025
각주 025)
元朔 2년(전127)에 漢나라는 河南 땅을 수복하여 匈奴와의 전투에서 최대의 전과를 올려 과거 秦나라의 蒙恬이 확보했던 영역을 70년 만에 다시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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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한나라는 마침내 하남 땅을 빼앗아 삭방[군](朔方郡) 주 026
각주 026)
朔方 : 郡명칭으로 元朔 2년에 설치되어 밑에 10개의 縣이 있었고 治所는 朔方縣이었다.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河套 서북부와 後套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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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하고 성을] 쌓고 다시 옛날 진나라 장군 몽염이 구축했던 장성을 수리하여 황하를 따라 [방비를] 굳게 하였다.주 027
각주 027)
『漢書』에는 “因河而爲固”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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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는 또한 상곡[군]의 [북방에 흉노와] 가까운주 028
각주 028)
什辟 : ‘匈奴와 가깝다’는 의미이다. 『漢書』에는 “斗辟”으로 되어 있는데, 그 뜻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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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縣)인 조양(造陽) 주 029
각주 029)
造陽 : 지명으로 지금 河北省 赤城縣에서 獨石口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이곳은 燕나라 장성의 동쪽 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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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버리듯이 흉노에게 내주었다. 이 해가 의 원삭(元朔)주 030
각주 030)
『漢書』에는 “元朔” 앞에 “漢之”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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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127)이었다.

  • 각주 001)
    漢 武帝 元光 6년(전129)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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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漢書』 권6 「武帝紀」에는 “봄”으로 되어 있는데, 본기의 기록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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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네 명의 장군은 車騎將軍 衛靑, 騎將軍 公孫敖, 輕車將軍 公孫賀, 驍騎將軍 李廣 등이다. 『漢書』에는 “將軍”이 “將”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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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衛青(? ~ 전106) : 字가 仲卿이고 河東 平陽(지금의 山西省 臨汾市 서남쪽)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鄭季인데 그가 관리 시절에 平陽侯의 집에서 일하고 있다가 平陽侯의 비첩 위온과 밀통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의 이복누이 衛子가 平陽公主(孝武帝의 누나, 平陽侯의 夫人)를 모시다가 武帝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太中大夫(궁중고문관)가 되었다. 元光 5년(전127) 車騎將軍으로 匈奴를 공격한 이래 元朔 元年(전128)에는 河南 땅을 되찾아 朔方軍을 설치함으로써 長平侯가 되었다. 그 이후 이어진 匈奴의 공세에 대응해 元朔 5년(전124) 봄에 다시 高闕에서 출정하여 匈奴의 右賢王을 격파하여 大將軍이 되었다. 그 이후에는 霍去病과 함께 大司馬가 되었다. 匈奴와의 계속된 전투에서 도합 7차례에 걸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21 ~ 2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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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上谷 : 郡의 명칭으로 현재 河北省 懷來縣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16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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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蘢城은 『漢書』에서 “龍城”으로 되어 있다(주23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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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公孫賀 : 義渠(秦나라에게 망한 西戎의 하나)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匈奴이다. 아버지 渾邪는 景帝 때 平曲侯가 되었으나 죄를 지어 侯를 잃었다. 武帝가 太子 시절이었을 때 舍人이었다. 武帝가 즉위하자 8년에 太僕 자격으로 輕車將軍이 되어 馬邑에 주둔했다. 4년이 지나자 輕車將軍으로 雲中郡에 출격했다. 5년이 지나서 輕車將軍으로 大將軍을 따라 출격해 軍功을 쌓고 봉을 받아 南窌侯가 되었다. 1년이 지나 左將軍으로 재차 大將軍을 따라 定襄에서 출격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4년이 지나 酎禁에 걸려 侯를 잃었다. 8년이 지나서 浮沮將軍으로 五原에서 2천여 리를 진출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8년이 지나자 太僕에서 丞相이 되어 葛繹侯로 봉해졌다. 일곱 명의 장군 중 하나로 匈奴에 출격했지만 큰 功은 없었다. 그러나 다시 侯가 되고 丞相이 되었다. 그의 아들 公孫敬聲이 陽石公主(孝武帝의 皇女)와 밀통하고 남을 저주한 죄로 일족이 몰살되어 후사도 끊어졌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41 ~ 2)(주1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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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雲中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林胡와 樓煩 등이 살던 곳이다. 趙 武靈王이 이들을 몰아내고 군으로 만든 이후에 漢代 11개의 현으로 이루어졌다. 郡의 治所는 內蒙古自治區 托克托縣에 있었다(주15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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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公孫敖 : 義渠 출신의 장군이다. 그는 먼저 郎官으로 武帝를 섬겼다. 그는 衛靑을 구한 것으로 권세를 갖게 되었다. 武帝가 즉위한 지 12년에 騎將軍이 되어 代郡에서 출격했다. 사졸을 7천 명이나 잃어 참살될 뻔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5년이 지나 校尉로서 大將軍을 따라 출격해 군공을 세워 合騎侯가 되었다. 1년이 지나서 中將軍으로 大將軍을 따라 재차 定襄에서 출격했으나 군공은 없었다. 2년이 지나서 將軍으로 北地郡에 출격해 驃騎將軍과의 약속기일에 지체돼 참죄에 해당됐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다시 떨어졌다. 2년이 지나서 校尉로 大將軍을 따라 출격했지만 군공은 없었다. 14년이 지나 因杅將軍으로 受降城을 구축했다. 7년이 지나서 다시 因杅將軍으로 匈奴를 쳤으나 余吾水에 이르러 많은 사졸을 잃었다. 형리에게 인도되어 참형을 당했으나 거짓 죽은 체하다 도망했다. 5, 6년 동안 민간에 숨어 살다가 뒤에 발각되어 다시 옥에 갇혔다. 그의 아내가 지은 巫蠱罪로 일족이 몰살되었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 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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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漢書』에는 “七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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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李廣 : 隴西 成紀(지금의 甘肅省 秦安縣) 사람으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남다른 弓術과 騎馬術로 뛰어난 장수로 이름을 떨쳤다. 文帝 14년(전166) 匈奴가 대거 蕭關을 침입하자 이를 막은 공으로 발탁되어 郎中(侍從)과 武騎常侍(侍從騎兵 武官)가 되었다. 景帝시기에 都尉가 되었다가 騎郞將(侍從騎兵隊長)으로 승진했다. 그 이후 吳楚七國의 난 시기에 驍騎都尉로서 공을 세웠으나 梁王한테서 將軍의 인수를 몰래 받은 것이 탄로나 개선한 뒤에도 상이 없었다. 이후 上谷郡(河北省 廷慶縣 일대) 태수로 인근을 전전하면서 匈奴와 전투를 벌였다. 이후 隴西, 北地, 右北平 등의 변방 太守를 지냈다. 그리고 武帝時期에는 馬邑 전투에서 驍騎將軍으로 匈奴 원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잡혀 있다가 돌아와 참형을 면하고 庶人이 되었다. 이후 右北平郡 太守가 되어 匈奴를 방어하였다. 匈奴가 그를 飛將軍이라 부르고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이후 元朔 6년(전123) 後衛軍의 將軍이 되어 大將軍 衛靑의 군대에 소속되었다. 定襄(山西省 大同市 北西)으로 나가 匈奴를 쳤다. 9년에는 郞中令으로 博望侯 張騫과 같이 출정했다가 패전하였다. 元狩 4년(전119)에 霍去病이 출정할 때 大將軍 衛靑을 따라 참전하였다가 자살했다. 청렴하여 상을 받으면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음식도 사졸들의 것과 똑같은 것을 먹었다. 그는 죽기까지 40여 년 동안 2천 석의 俸祿을 받는 신분이면서도 집에는 재산이 남지 않았다. 또한 일생 동안 재물에 관해서 말한 적도 신경을 쓴 적도 없었다고 한다(『史記』 권109 「李將軍列傳」 : 2867 ~ 2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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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漢書』 권6 「武帝紀」에는 “가을”로 되어 있다(“漢使將軍韓安國屯漁陽備胡, 亦在元光六年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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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漢書』에는 “數千人”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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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漁陽 : 郡명칭으로 秦始皇 22년(전225)에 설치되어 지금의 河北省 密雲縣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漢代에 漁陽郡에는 22개의 縣이 있었고 治所는 漁陽縣이었다(주16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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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漢書』 권6 「武帝紀」에서는 이 사건을 元朔 元年(전128) 가을로, 「衛將軍列傳」에는 元朔 2년(전127)으로 기록했으나, 전자의 기록이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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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遼西 : 郡명칭으로 秦始皇 2년(전245)에 설치되어 漢代에는 아래에 14개의 縣이 있었다. 郡治所는 且慮였는데, 지금의 河北省 盧龍縣이다(주16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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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漢書』에는 “又敗漁陽太守軍千餘人”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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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燕의 영역 범위는 때에 따라 변화가 많았다. 이때에는 단지 廣陽郡(지금의 北京市 大興縣과 河北省 固妥縣)에 지나지 않았다. 도읍은 薊(지금의 北京市 서남쪽)에 있었다. 이 무렵에 다스렸던 燕王 劉定國은 劉澤의 자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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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漢書』에는 “會燕救之, 至”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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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漢書』에는 “又入鴈門”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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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이 사건은 元朔 元年(전128) 가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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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李息 : 北地郡 鬱郅人(甘肅省 慶陽縣) 출신으로 처음에는 景帝를 섬겼다. 武帝가 즉위한 지 8년이 되어 材官將軍이 되어 馬邑에 주둔했다. 6년이 지나 장군이 되어 代郡에서 출격했다. 3년이 지나자 將軍이 되어 大將軍을 따라 朔方軍에서 출격했으나 모두 軍功은 없었다. 이후에 세 차례나 將軍이 되었다. 그 후로는 늘 大行(特派大使)의 직에 있었다(권111 『衛將軍列傳』 : 2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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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이 사건은 元朔 元年(전128) 가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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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漢書』에는 “得首虜數千”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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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元朔 2년(전127)에 漢나라는 河南 땅을 수복하여 匈奴와의 전투에서 최대의 전과를 올려 과거 秦나라의 蒙恬이 확보했던 영역을 70년 만에 다시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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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朔方 : 郡명칭으로 元朔 2년에 설치되어 밑에 10개의 縣이 있었고 治所는 朔方縣이었다.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河套 서북부와 後套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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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漢書』에는 “因河而爲固”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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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什辟 : ‘匈奴와 가깝다’는 의미이다. 『漢書』에는 “斗辟”으로 되어 있는데, 그 뜻은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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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9)
    造陽 : 지명으로 지금 河北省 赤城縣에서 獨石口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이곳은 燕나라 장성의 동쪽 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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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0)
    『漢書』에는 “元朔” 앞에 “漢之”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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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위청(衛靑), 공손하(公孫賀), 공손오(公孫敖), 이광(李廣), [이]광, [이]광, [공손]오, [이]광, [공손]오, [이]광, 한안국, [한]안국, [한]안국, 위청, 이식(李息), [위]청, 몽염
지명
마읍, 한나라, 상곡[군], 농성(蘢城), 운중[군], 대[군], 안문[군], 한나라, 한나라, 어양(漁陽), 한나라, 어양군, 한나라, 한나라, 연(燕), 안문[군], 한나라, 안문[군], 대군, 운중[군], 농서, 하남(河南), 한나라, 하남, 삭방[군](朔方郡), 진나라, 황하, 한나라, 상곡[군], 조양(造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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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읍전투 이후 흉노와의 지속된 싸움 뒤에 한나라가 하남 땅을 빼앗고 황하를 따라 방비를 구축함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