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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가 흉노와 화친의 맹약을 맺어 대우를 후하게 해주었으며 이후 두나라의 물자왕래가 풍부해짐

 
  • 국가흉노(匈奴)
지금의 황제[武帝]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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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황제는 武帝를 지칭한다. 景帝가 後 3년(전141)정월 甲子(28일)에 붕어하자 같은 날 즉위하였다. 『漢書』는 武帝 이후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武帝”로 되어 있다.
武帝(재위 전141 ~ 전87) : 이름은 劉徹. 묘호는 世宗. 즉위 후 前代의 權臣들을 면직시키고 어질고 겸손한 선비를 등용하여 관리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五經博士를 두어 儒學에 중점을 두고 전127년부터 諸侯國을 왕의 여러 아들에게 分封하여 中央集權을 강화하였다. 이후에 全國을 13州로 나누고, 주마다 刺史를 두어 군수를 감독시켰다. 또 運河를 굴착하여 농지의 관개와 운송을 도왔다. 대외적으로는 張騫을 大月氏로 파견하고, 장군 衛靑, 霍去病, 李廣 등을 시켜 匈奴를 토벌시켜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두 개의 郡을 설치하였다. 전119년에는 衛靑이 匈奴를 고비 북쪽으로 내쫓았다. 河西에 있던 匈奴 渾邪王이 항복하자 그곳에 4군을 설치해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교통로를 확보하다. 이후 西域諸國의 入貢이 계속되었고 전104년에는 李廣利를 시켜 파미르고원 북서에 있는 페르가나[大宛國]를 정벌하였다. 匈奴에 대한 방어와 西域 교통로 유지를 위해 漢人을 이주시키고 屯田을 두었다. 남으로 閩越·東越 두 왕국을 병합하였다. 전111년에는 番禺(지금의 廣州)에 도읍한 南越을 멸망시킨 다음 9개의 郡을 설치했다. 四川省 변경에서 雲南·貴州에 있는 冉駹·巂·筰·夜郞·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키고 6개의 郡을 설치했다. 동으로는 朝鮮을 공격해 王劍城을 함락시키고, 전108년 樂浪·眞番·臨屯·玄郡 등 4개의 郡을 두었다. 성공적인 外治의 성과에 비해 宮殿과 離宮을 짓고, 不老長生을 믿어 方士를 모아 泰山에 封禪하고 각지를 순행하여 재정을 압박함으로써 내치에서는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增稅·新稅에다 鹽·鐵을 전매하고 均輸·平準法 등을 실시하는 등 재정확보 정책을 썼다. 또한 武功爵을 팔기도 했으나 관리의 부정이 심해지고 국민의 생활도 궁핍해져 皇太子의 반란(巫蠱의 亂)이 일어났다. 晩年에는 외정을 중지하고 다시 변경에 있던 輪臺의 屯田을 폐지하는 등 백성을 다스리는 데 힘썼다.

가 즉위하자 [흉노와] 화친의 맹약을 분명히 하고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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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帝는 즉위한 이후에 과거에 맺었던 화친조약을 다시 확인하고 시집보내지 않은 公主를 匈奴로 보냈다. 建元 6년(전135) 匈奴가 화친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해 오자 그와 관련하여 조정에서 논의를 벌였다. 이때 大行王 恢는 군사를 동원해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御史大夫 韓安國이 화친을 주장하였다. 관료들이 모두 韓安國의 주장에 동조하자 武帝 역시 화친을 허락하였다. 이로 인해 형성된 일시적인 화친 국면은 元光 2년(전133) 여름 6월에 전쟁이 시작되면서 깨졌다.

대우를 후하게 하여 관시를 통해 [물자를] 풍부하게 주었다. 흉노에게도 선우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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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의 軍臣單于를 지칭한다.

이하가 모두 한나라와 친근해져 장성 근처까지 왕래했다.

 

주 001
지금의 황제는 武帝를 지칭한다. 景帝가 後 3년(전141)정월 甲子(28일)에 붕어하자 같은 날 즉위하였다. 『漢書』는 武帝 이후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武帝”로 되어 있다.
武帝(재위 전141 ~ 전87) : 이름은 劉徹. 묘호는 世宗. 즉위 후 前代의 權臣들을 면직시키고 어질고 겸손한 선비를 등용하여 관리의 자질을 향상시켰다. 五經博士를 두어 儒學에 중점을 두고 전127년부터 諸侯國을 왕의 여러 아들에게 分封하여 中央集權을 강화하였다. 이후에 全國을 13州로 나누고, 주마다 刺史를 두어 군수를 감독시켰다. 또 運河를 굴착하여 농지의 관개와 운송을 도왔다. 대외적으로는 張騫을 大月氏로 파견하고, 장군 衛靑, 霍去病, 李廣 등을 시켜 匈奴를 토벌시켜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여 두 개의 郡을 설치하였다. 전119년에는 衛靑이 匈奴를 고비 북쪽으로 내쫓았다. 河西에 있던 匈奴 渾邪王이 항복하자 그곳에 4군을 설치해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교통로를 확보하다. 이후 西域諸國의 入貢이 계속되었고 전104년에는 李廣利를 시켜 파미르고원 북서에 있는 페르가나[大宛國]를 정벌하였다. 匈奴에 대한 방어와 西域 교통로 유지를 위해 漢人을 이주시키고 屯田을 두었다. 남으로 閩越·東越 두 왕국을 병합하였다. 전111년에는 番禺(지금의 廣州)에 도읍한 南越을 멸망시킨 다음 9개의 郡을 설치했다. 四川省 변경에서 雲南·貴州에 있는 冉駹·巂·筰·夜郞·滇 등의 종족을 귀순시키고 6개의 郡을 설치했다. 동으로는 朝鮮을 공격해 王劍城을 함락시키고, 전108년 樂浪·眞番·臨屯·玄郡 등 4개의 郡을 두었다. 성공적인 外治의 성과에 비해 宮殿과 離宮을 짓고, 不老長生을 믿어 方士를 모아 泰山에 封禪하고 각지를 순행하여 재정을 압박함으로써 내치에서는 문제를 일으켰다. 그래서 增稅·新稅에다 鹽·鐵을 전매하고 均輸·平準法 등을 실시하는 등 재정확보 정책을 썼다. 또한 武功爵을 팔기도 했으나 관리의 부정이 심해지고 국민의 생활도 궁핍해져 皇太子의 반란(巫蠱의 亂)이 일어났다. 晩年에는 외정을 중지하고 다시 변경에 있던 輪臺의 屯田을 폐지하는 등 백성을 다스리는 데 힘썼다.
주 002
武帝는 즉위한 이후에 과거에 맺었던 화친조약을 다시 확인하고 시집보내지 않은 公主를 匈奴로 보냈다. 建元 6년(전135) 匈奴가 화친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해 오자 그와 관련하여 조정에서 논의를 벌였다. 이때 大行王 恢는 군사를 동원해 공격할 것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御史大夫 韓安國이 화친을 주장하였다. 관료들이 모두 韓安國의 주장에 동조하자 武帝 역시 화친을 허락하였다. 이로 인해 형성된 일시적인 화친 국면은 元光 2년(전133) 여름 6월에 전쟁이 시작되면서 깨졌다.
주 003
匈奴의 軍臣單于를 지칭한다.
 
이름
武帝
지명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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