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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가 화친을 끊고 다시 침입하였으나 효경제가 즉위한 후 다시 화친을 맺어 왕래를 시작함

  • 국가
    흉노(匈奴)
군신선우가 즉위한 지 4년이 지나주 001
각주 001)
저본에 “四歲”로 되어 있는데, 『史記』 권10 「孝文本紀」와 『漢書』 권4 「文帝紀」, 『漢書』 권94上 「匈奴傳」에 근거하면 ‘일 년 남짓[歲餘]’으로 고쳐야 한다. 『漢書』 역시 이로 인해 “歲餘”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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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는 또 다시 화친을 끊고 대거 상군운중[군]을 각각 삼만 명 기병으로 들어와주 002
각주 002)
文帝 後元 6년(전158)에 匈奴가 대거 雲中을 공격했을 때 방어를 맡았던 것은 魏尚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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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노략질을 많이 한 다음에 돌아갔다.주 003
각주 003)
『漢書』에는 “所殺略甚衆”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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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한나라에서는 세 명의 장군주 004
각주 004)
세 명의 장군은 車騎將軍 令免, 將軍 蘇意, 그리고 將軍 張武였다. 北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던 將軍은 張武였다(『史記』 권10 「孝文本紀」 :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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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북지에, 대(代)에는 구주산에,주 005
각주 005)
代郡의 句注山에 주둔했던 장군은 과거 楚相이었던 蘇意였다. 句注山은 雁門山인데, 山西省 代縣 西北에 위치하고 있다(주1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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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에는 비호구(飛狐口) 주 006
각주 006)
飛狐口 : 요새 명칭으로 河北 蔚縣의 남쪽, 淶源縣의 북쪽에 있는 협곡이다. 그 길이가 백여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곳에는 車騎將軍과 中大夫 令免이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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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주둔시켜 변경주 007
각주 007)
緣邊 : 漢나라와 匈奴가 서로 접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前漢시대에는 9개의 군이 匈奴와 접해 있었다. 그것은 五原郡, 朔方郡, 雲中郡, 代郡, 雁門郡, 定襄郡, 北平郡, 上谷郡, 漁陽郡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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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라 또한 수비를 단단하게 함으로써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한 세 장군들을주 008
각주 008)
세 명의 장군은 河內太守 周亞夫, 宗正 劉禮, 祝茲侯 徐厲이었다(『史記』 권10 「孝文本紀」 :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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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하여 장안 서쪽의 세류(細柳) 주 009
각주 009)
細柳 : 지금의 陝西省 咸陽市 서남쪽 渭河 北岸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周亞夫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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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渭水) 북쪽의 극문(棘門)주 010
각주 010)
棘門 : 秦나라의 宮門 명칭으로 지금의 陝西省 咸陽市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徐厲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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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상(覇上) 주 011
각주 011)
覇上 : 지명으로 ‘霸頭’라고도 한다. 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劉禮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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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진을 쳐 흉노에 대비하게 했다. 흉노의 기병이 구주[산] 주변으로 들어오자 봉화불이 감천(甘泉) 주 012
각주 012)
甘泉 : 지명으로 甘泉山 또는 甘泉宮이 위치한 곳을 말하였다. 陝西省 淳化縣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주4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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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장안까지 전달되었다. 수개월이 지나 한나라 병사들이 변경에 이르니 흉노가 또한 변경 요새에서 멀리 가 버려주 013
각주 013)
『漢書』에는 “去”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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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군사들 역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1년 남짓 지나 효문제가 붕어하고주 014
각주 014)
文帝는 後元 7년(전157) 여름(夏) 유월 己亥(초하루)未央宮에서 붕어했는데, 46세였다. 『漢書』에는 “文帝”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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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제가 즉위하니주 015
각주 015)
文帝가 붕어하고 유월 초9일, 文帝의 中子 劉啟가 景帝(재위 전156 ~ 전141)로 즉위하였다. 『漢書』에는 “景帝”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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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왕(趙王) 수(遂) 주 016
각주 016)
劉遂 : 漢 高祖의 손자로 幽王 友의 아들이다. 文帝가 즉위하자 趙王이 되었다. 景帝시기에 晁錯가 영지를 줄이는 것에 반발해 吳·楚의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패배하자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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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몰래 흉노로 사신을 보냈다. 오나라초나라 [등 일곱 나라의] 반란이주 017
각주 017)
이를 보통 ‘吳楚七國의 亂’이라고 부른다. 漢 景帝 3년(전154) 正月 吳王 劉濞가 조정의 削藩에 반대하여 楚王 劉戊, 남쪽의 閩, 동쪽의 越, 북쪽의 匈奴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이월 太尉 周亞夫 등이 출전하여 반란을 진압하자, 삼월 반란을 일으킨 왕들은 자살하거나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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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을 때 [흉노는] 조나라와 모의하여 변경을 침입하고자 했다. 한나라조나라를 포위해 격파하니주 018
각주 018)
吳와 楚가 패배해 七王 聯合軍의 주력이 약화되자 漢 조정에서는 曲周侯 酈寄를 보내 趙를 공격하였다. 趙王이 邯鄲을 지키면서 대치하기를 7개월 정도 하였고 匈奴도 吳와 楚의 패전 소식을 듣고 군사 행동을 중지하였다. 欒布가 齊를 멸망시키고 趙를 공격하여 성이 파괴되자 劉遂 역시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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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도 [침입 기도를] 그만두었다. 그 뒤로주 019
각주 019)
『漢書』에는 “自是後”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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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제가 다시 흉노와 화친을 하고주 020
각주 020)
景帝 元年(전156) 사월 御史大夫 陶青을 보내 和親하고 2년(전155)과 5년(전152)에 和親使節을 다시 匈奴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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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시(關市)를 열어 흉노에 [물자를] 보내 주고, 한나라 공주를 보냈는데, [이는] 본래의 약속과 같았다. 마침내 효경제의 시대에 때로주 021
각주 021)
『漢書』에는 “時時”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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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의 변경 침범이 있었으나 대규모 침입은 없게 되었다.주 022
각주 022)
景帝時期에 匈奴의 침공 기록을 검토해 보면, 2년(전155)에 燕나라를 공격한 것, 6년(전151)에 雁門을 공격하여 武泉에 이르러 上郡을 공격한 것, 後元 2년(전142)에 雁門을 공격한 것인데, 이 모두가 소규모의 소요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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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1)
    저본에 “四歲”로 되어 있는데, 『史記』 권10 「孝文本紀」와 『漢書』 권4 「文帝紀」, 『漢書』 권94上 「匈奴傳」에 근거하면 ‘일 년 남짓[歲餘]’으로 고쳐야 한다. 『漢書』 역시 이로 인해 “歲餘”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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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文帝 後元 6년(전158)에 匈奴가 대거 雲中을 공격했을 때 방어를 맡았던 것은 魏尚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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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漢書』에는 “所殺略甚衆”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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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세 명의 장군은 車騎將軍 令免, 將軍 蘇意, 그리고 將軍 張武였다. 北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던 將軍은 張武였다(『史記』 권10 「孝文本紀」 :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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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代郡의 句注山에 주둔했던 장군은 과거 楚相이었던 蘇意였다. 句注山은 雁門山인데, 山西省 代縣 西北에 위치하고 있다(주1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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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飛狐口 : 요새 명칭으로 河北 蔚縣의 남쪽, 淶源縣의 북쪽에 있는 협곡이다. 그 길이가 백여 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곳에는 車騎將軍과 中大夫 令免이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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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緣邊 : 漢나라와 匈奴가 서로 접하고 있는 지역을 말한다. 前漢시대에는 9개의 군이 匈奴와 접해 있었다. 그것은 五原郡, 朔方郡, 雲中郡, 代郡, 雁門郡, 定襄郡, 北平郡, 上谷郡, 漁陽郡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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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세 명의 장군은 河內太守 周亞夫, 宗正 劉禮, 祝茲侯 徐厲이었다(『史記』 권10 「孝文本紀」 :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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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細柳 : 지금의 陝西省 咸陽市 서남쪽 渭河 北岸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周亞夫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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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棘門 : 秦나라의 宮門 명칭으로 지금의 陝西省 咸陽市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徐厲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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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覇上 : 지명으로 ‘霸頭’라고도 한다. 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劉禮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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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甘泉 : 지명으로 甘泉山 또는 甘泉宮이 위치한 곳을 말하였다. 陝西省 淳化縣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주4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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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漢書』에는 “去”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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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文帝는 後元 7년(전157) 여름(夏) 유월 己亥(초하루)未央宮에서 붕어했는데, 46세였다. 『漢書』에는 “文帝”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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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文帝가 붕어하고 유월 초9일, 文帝의 中子 劉啟가 景帝(재위 전156 ~ 전141)로 즉위하였다. 『漢書』에는 “景帝”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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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劉遂 : 漢 高祖의 손자로 幽王 友의 아들이다. 文帝가 즉위하자 趙王이 되었다. 景帝시기에 晁錯가 영지를 줄이는 것에 반발해 吳·楚의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패배하자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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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이를 보통 ‘吳楚七國의 亂’이라고 부른다. 漢 景帝 3년(전154) 正月 吳王 劉濞가 조정의 削藩에 반대하여 楚王 劉戊, 남쪽의 閩, 동쪽의 越, 북쪽의 匈奴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이월 太尉 周亞夫 등이 출전하여 반란을 진압하자, 삼월 반란을 일으킨 왕들은 자살하거나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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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吳와 楚가 패배해 七王 聯合軍의 주력이 약화되자 漢 조정에서는 曲周侯 酈寄를 보내 趙를 공격하였다. 趙王이 邯鄲을 지키면서 대치하기를 7개월 정도 하였고 匈奴도 吳와 楚의 패전 소식을 듣고 군사 행동을 중지하였다. 欒布가 齊를 멸망시키고 趙를 공격하여 성이 파괴되자 劉遂 역시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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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漢書』에는 “自是後”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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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景帝 元年(전156) 사월 御史大夫 陶青을 보내 和親하고 2년(전155)과 5년(전152)에 和親使節을 다시 匈奴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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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漢書』에는 “時時”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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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景帝時期에 匈奴의 침공 기록을 검토해 보면, 2년(전155)에 燕나라를 공격한 것, 6년(전151)에 雁門을 공격하여 武泉에 이르러 上郡을 공격한 것, 後元 2년(전142)에 雁門을 공격한 것인데, 이 모두가 소규모의 소요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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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군신선우, 효문제, 효경제, 수(遂), 효경제, 효경제
지명
상군, 운중[군], 한나라, 대(代), 구주산, 조(趙), 비호구(飛狐口), 장안, 세류(細柳), 위수(渭水), 패상(覇上), , 구주[산], 감천(甘泉), 장안, 한나라, 한나라, 오나라, 초나라, 조나라, 한나라, 조나라,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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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가 화친을 끊고 다시 침입하였으나 효경제가 즉위한 후 다시 화친을 맺어 왕래를 시작함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