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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가 붕어한 뒤 고후(高后)가 흉노의 공격을 그만두고 화친을 맺음

 
  • 국가흉노(匈奴)
고조가 붕어하고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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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祖 12年(전195) 사월 25일 長樂宮에서 붕어했다. 『漢書』에는 앞 단락의 끝에 “終高祖世”로 되어 있다.

효혜제(孝惠帝)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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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帝(재위 전195 ~ 전188) : 이름은 劉盈으로 高祖의 長子로서 황위를 이었으나, 유약하여 母 呂太后가 실권을 행사하였다.

, 여태후(呂太后)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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呂太后 : 漢 高祖 劉邦의 정실부인이다. 성은 呂, 자는 娥姁, 이름은 雉이다. 山陽 출신으로 劉邦과 결혼한 이후 지속적으로 남편을 도와 漢나라의 건국을 가능하게 했다. 劉邦이 죽은 뒤 아들 惠帝를 즉위시키고 실권을 잡았다. 惠帝가 23세의 나이로 죽자, 惠帝의 후궁에서 출생한 여러 왕자들을 차례로 등극시켰으나 呂氏 일족을 중용하여 사실상 呂氏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특히, 劉氏만을 侯王으로 책봉하라는 高祖의 遺訓을 어기고 동생 呂産, 呂祿 등을 侯王으로 책봉하였다. 이것이 劉氏 옹호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그녀가 집권한 지 8年만인 辛酉 칠월 30日 未央宮에서 죽자 곧 呂氏 일가가 모두 誅滅되었다. 이로써 呂氏 정권이 붕괴한 다음에 高祖의 차남 劉恒이 즉위하여 文帝가 되었다.

의 시대가 되었으나 한나라는 천하를 평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흉노가 교만하게 굴었다. 묵특고후(高后)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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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后”는 呂太后를 지칭한다.

에게 서신을 보내 망령되게 말하였다. 고후가 [노하여] 공격하려 하였다. 여러 장군들이 말하였다. “고조의 현명함과 용맹을 갖고서도 [그들을 응징하기는커녕] 평성에서 곤욕까지 겪었습니다.”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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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呂后時期 匈奴와의 관계에서 오고간 서신 및 그와 관련된 내용을 보충하였다. 『史記』에 빠진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惠帝, 高后의 시대에 冒頓이 더욱 교만하게 되어 서신을 보냈다. 사신을 高后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독해서 설 수 없는 임금은 음습한 땅에서 태어나 드넓은 초원에 소와 말이 사는 곳에서 자랐으나 여러 번 변경에 와서 중국에서 놀기를 원했소이다. 폐하께서도 홀로 즉위하시니 고독해서 설 수 없는 과부의 신세입니다. 두 임금이 즐거움이 없어서 스스로 근심스러우니 그 가진 바로 부족함을 바꾸기 바라는 바입니다.” 高后가 크게 화를 내며 丞相과 樊噲, 그리고 季布 등을 불러 그의 사자를 벨 것과 군대를 일으켜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다. 樊噲가 “신이 십만의 군대를 얻어 匈奴에서 누비고 다니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계포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해 “樊噲를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 이전에 陳豨가 代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나라 군대가 32만으로 번쾌가 大將軍이었습니다. 그때 匈奴가 高祖를 평성에서 포위하였는데, 樊噲가 그 포위를 풀지 못하였습니다. 천하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평성의 아래에서 정말로 고생했구나! 이레 동안 먹지 못하니 쇠뇌를 당길 힘도 없네.’ 지금 노래도 지금 소리도 끊기지도 않았고 그때 다친 사람들이 이제 일어설 수 있을 정도일 뿐입니다. 그리고 樊噲가 천하를 뒤흔들어 놓으려고 하여 십만의 군대로 누비고 다닌다고 망령되게 얘기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민족들은 비유하면 짐승과 같아 그들은 좋은 말을 들어도 기뻐하는 것이 부족하고, 나쁜 말을 들어도 노하는 것이 부족한 자들입니다.”라고 말하였다. 高后가 “옳다.”라고 했다. 大謁者 張澤에게 그에 대답하는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單于는 우리 나라의 일을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 주니 우리 나라가 두려워하고 있소. 며칠 동안 깊이 생각하였으나 나는 늙고 기운도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과 이빨이 모두 빠져 걷는 것도 힘이 드오. 선우가 이전에 청한 것을 받들기에는 부족하여 감당할 수 없소. 우리 나라는 잘못이 없으니 마땅히 용서해 주시오. 천자가 타는 두 대의 수레와 그에 맞는 말 여덟 필을 드리니 일상적으로 타는 수레로 쓰십시오.” 冒頓이 편지를 받고서 다시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중국의 예의를 일찍이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폐하께서는 용서해 주십시오.” 이에 말을 바치니 마침내 화친이 이루어졌다.(孝惠·高后時, 冒頓寖驕, 乃爲書, 使使遺高后曰 “孤僨之君, 生於沮澤之中, 長於平野牛馬之域, 數至邊境, 願遊中國. 陛下獨立, 孤僨獨居. 兩主不樂, 無以自虞, 願以所有, 易其所無.” 高后大怒, 召丞相平及樊噲·季布等, 議斬其使者, 發兵而擊之. 樊噲曰 “臣願得十萬衆, 橫行匈奴中.” 問季布, 布曰 “噲可斬也! 前陳豨反於代, 漢兵三十二萬, 噲爲上將軍, 時匈奴圍高帝於平城, 噲不能解圍. 天下歌之曰 ‘平城之下亦誠苦!七日不食, 不能彀弩.’ 今歌吟之聲未絶, 傷痍者甫起, 而噲欲搖動天下, 妄言以十萬衆橫行, 是面謾也. 且夷狄譬如禽獸, 得其善言不足喜, 惡言不足怒也.” 高后曰 “善.” 令大謁者張澤報書曰 “單于不忘弊邑, 賜之以書, 弊邑恐懼. 退日自圖, 年老氣衰, 髮齒墮落, 行步失度, 單于過聽, 不足以自汙. 弊邑無罪, 宜在見赦. 竊有御車二乘, 馬二駟, 以奉常駕. 冒頓得書, 復使使來謝曰 “未嘗聞中國禮義, 陛下幸而赦之.” 因獻馬, 遂和親. 『漢書』 권94上 「匈奴列傳 上」 : 3754 ~ 3755).

이에 고후는 [정벌을] 그만두기로 하고 다시 흉노와 화친했다.

 

주 001
高祖 12年(전195) 사월 25일 長樂宮에서 붕어했다. 『漢書』에는 앞 단락의 끝에 “終高祖世”로 되어 있다.
주 002
惠帝(재위 전195 ~ 전188) : 이름은 劉盈으로 高祖의 長子로서 황위를 이었으나, 유약하여 母 呂太后가 실권을 행사하였다.
주 003
呂太后 : 漢 高祖 劉邦의 정실부인이다. 성은 呂, 자는 娥姁, 이름은 雉이다. 山陽 출신으로 劉邦과 결혼한 이후 지속적으로 남편을 도와 漢나라의 건국을 가능하게 했다. 劉邦이 죽은 뒤 아들 惠帝를 즉위시키고 실권을 잡았다. 惠帝가 23세의 나이로 죽자, 惠帝의 후궁에서 출생한 여러 왕자들을 차례로 등극시켰으나 呂氏 일족을 중용하여 사실상 呂氏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특히, 劉氏만을 侯王으로 책봉하라는 高祖의 遺訓을 어기고 동생 呂産, 呂祿 등을 侯王으로 책봉하였다. 이것이 劉氏 옹호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그녀가 집권한 지 8年만인 辛酉 칠월 30日 未央宮에서 죽자 곧 呂氏 일가가 모두 誅滅되었다. 이로써 呂氏 정권이 붕괴한 다음에 高祖의 차남 劉恒이 즉위하여 文帝가 되었다.
주 004
“高后”는 呂太后를 지칭한다.
주 005
『漢書』에는 呂后時期 匈奴와의 관계에서 오고간 서신 및 그와 관련된 내용을 보충하였다. 『史記』에 빠진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惠帝, 高后의 시대에 冒頓이 더욱 교만하게 되어 서신을 보냈다. 사신을 高后에게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독해서 설 수 없는 임금은 음습한 땅에서 태어나 드넓은 초원에 소와 말이 사는 곳에서 자랐으나 여러 번 변경에 와서 중국에서 놀기를 원했소이다. 폐하께서도 홀로 즉위하시니 고독해서 설 수 없는 과부의 신세입니다. 두 임금이 즐거움이 없어서 스스로 근심스러우니 그 가진 바로 부족함을 바꾸기 바라는 바입니다.” 高后가 크게 화를 내며 丞相과 樊噲, 그리고 季布 등을 불러 그의 사자를 벨 것과 군대를 일으켜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다. 樊噲가 “신이 십만의 군대를 얻어 匈奴에서 누비고 다니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계포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해 “樊噲를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 이전에 陳豨가 代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나라 군대가 32만으로 번쾌가 大將軍이었습니다. 그때 匈奴가 高祖를 평성에서 포위하였는데, 樊噲가 그 포위를 풀지 못하였습니다. 천하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평성의 아래에서 정말로 고생했구나! 이레 동안 먹지 못하니 쇠뇌를 당길 힘도 없네.’ 지금 노래도 지금 소리도 끊기지도 않았고 그때 다친 사람들이 이제 일어설 수 있을 정도일 뿐입니다. 그리고 樊噲가 천하를 뒤흔들어 놓으려고 하여 십만의 군대로 누비고 다닌다고 망령되게 얘기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민족들은 비유하면 짐승과 같아 그들은 좋은 말을 들어도 기뻐하는 것이 부족하고, 나쁜 말을 들어도 노하는 것이 부족한 자들입니다.”라고 말하였다. 高后가 “옳다.”라고 했다. 大謁者 張澤에게 그에 대답하는 편지를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單于는 우리 나라의 일을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 주니 우리 나라가 두려워하고 있소. 며칠 동안 깊이 생각하였으나 나는 늙고 기운도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과 이빨이 모두 빠져 걷는 것도 힘이 드오. 선우가 이전에 청한 것을 받들기에는 부족하여 감당할 수 없소. 우리 나라는 잘못이 없으니 마땅히 용서해 주시오. 천자가 타는 두 대의 수레와 그에 맞는 말 여덟 필을 드리니 일상적으로 타는 수레로 쓰십시오.” 冒頓이 편지를 받고서 다시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중국의 예의를 일찍이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폐하께서는 용서해 주십시오.” 이에 말을 바치니 마침내 화친이 이루어졌다.(孝惠·高后時, 冒頓寖驕, 乃爲書, 使使遺高后曰 “孤僨之君, 生於沮澤之中, 長於平野牛馬之域, 數至邊境, 願遊中國. 陛下獨立, 孤僨獨居. 兩主不樂, 無以自虞, 願以所有, 易其所無.” 高后大怒, 召丞相平及樊噲·季布等, 議斬其使者, 發兵而擊之. 樊噲曰 “臣願得十萬衆, 橫行匈奴中.” 問季布, 布曰 “噲可斬也! 前陳豨反於代, 漢兵三十二萬, 噲爲上將軍, 時匈奴圍高帝於平城, 噲不能解圍. 天下歌之曰 ‘平城之下亦誠苦!七日不食, 不能彀弩.’ 今歌吟之聲未絶, 傷痍者甫起, 而噲欲搖動天下, 妄言以十萬衆橫行, 是面謾也. 且夷狄譬如禽獸, 得其善言不足喜, 惡言不足怒也.” 高后曰 “善.” 令大謁者張澤報書曰 “單于不忘弊邑, 賜之以書, 弊邑恐懼. 退日自圖, 年老氣衰, 髮齒墮落, 行步失度, 單于過聽, 不足以自汙. 弊邑無罪, 宜在見赦. 竊有御車二乘, 馬二駟, 以奉常駕. 冒頓得書, 復使使來謝曰 “未嘗聞中國禮義, 陛下幸而赦之.” 因獻馬, 遂和親. 『漢書』 권94上 「匈奴列傳 上」 : 3754 ~ 3755).
 
이름
고조 , 효혜제(孝惠帝) , 여태후(呂太后) , 묵특 , 고후(高后) , 고후 , 고조 , 고후
지명
한나라 , 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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