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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의 관직과 귀성(貴姓)에 대한 설명

 
  • 국가흉노(匈奴)
[선우 밑에는]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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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여기에 “單于姓攣鞮氏, 其國稱之曰‘撐犂孤塗單于’. 匈奴謂天爲撐犂, 謂子爲孤塗. 單于者, 廣大之貌也. 言其象天單于然也.”과 같이 單于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이후에 보충되었거나 아니면 『史記』에서 그 내용이 탈락했을 것으로 보인다(주184) 참조).

좌현왕(左賢王), 우현왕(右賢王), 좌록리왕(左谷蠡王), 우록리왕(右谷蠡王)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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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蠡王 : 음은 ‘록리왕’이다. ‘谷蠡’의 발음은 ‘luk-li’ 즉 ‘록리’이다.
여기에서 나열하고 있는 左賢王, 右賢王, 左谷蠡王, 右谷蠡王 등의 관칭은 地方에서 군사와 행정을 관리하는 최고 관리들의 명칭이다. 이들은 각기 單于로부터 分封을 받아 각자의 영지를 갖고 있었다. 左部는 東部를, 右部를 西部에 위치하고 있었다. 匈奴의 통치체제는 동남부에는 左賢王, 동북부에는 左谷蠡王, 서남부에는 右賢王, 서북부에는 右谷蠡王이 중앙부의 單于庭을 중심으로 각 지역을 통치하는 5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로 單于의 子弟들, 즉 왕족들이 담당했다. 賢王 아래에 谷蠡王이 자리했다. 특히 左賢王은 차기 單于를 계승할 사람인 太子가 담당했는데, ‘左屠耆王’이라고도 불리었다.

, 좌대장(左大將), 우대장(右大將), 좌대도위(左大都尉), 우대도위(右大都尉), 좌대당호(左大當戶), 우대당호(右大當戶), 좌골도후(左骨都侯), 우골도후(右骨都侯)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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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大將, 右大將, 左大都尉, 右大都尉, 左大當戶, 右大當戶, 左骨都侯, 右骨都侯 등은 모두 匈奴의 官稱이다. 單于를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관직을 나열한 것이다. 그중에서 骨都侯는 單于의 일족인 攣鞮氏가 아닌 여타 異姓들이 담당했다. 즉 呼衍氏·蘭氏·須卜氏 등이 담당했는데, 呼衍氏는 左에 蘭氏·須卜氏는 右에 자리했다(주219) 참조).

를 두었다. 흉노에서는 ‘어질다[賢]’는 [말을] 도기(屠耆)라고 했는데,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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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屠”는 ‘諸’로 쓰기도 한다.

그래서 늘 태자를 좌도기왕(左屠耆王)이라고도 불렀다. 또 좌현왕과 우현왕 이하 당호에 이르기까지 크게는 만 기(騎), 작게는 수천 기를 거느렸는데, 대체로 24인의 장(長)들이 있었고,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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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騎를 이끄는 長이 24개라고 한 기록에 대해서는 이와 동일한 『漢書』의 기록과 그 이후 匈奴의 변화를 기록한 『後漢書』 권89 「南匈奴傳」의 내용을 비교해 구체적인 내용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後漢書』에서는 위와 달리 “其大臣貴者左賢王, 次左谷蠡王, 次右賢王, 次右谷蠡王, 謂之四角;次左右日逐王, 次左右溫禺鞮王, 次左右漸將王, 是爲六角;皆單于子弟, 次第當爲單于者也. 異姓大臣左右骨都侯, 次左右尸逐骨都侯, 其餘日逐·且渠·當戶諸官號, 各以權力優劣·部衆多少爲高下次第焉.”이라고 四角, 六角, 異性大臣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匈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치적 지배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신설된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했다(護雅夫, 1970 : 362;李春梅, 2006 : 51). 1950년 처음 護雅夫의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이에 대한 반론으로 프리착(Pritsak)은 명칭의 변화가 아니라 동일한 내용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고 설명했다(Pritsak, 1954 : 178 ~ 202). 이에 대해 山田信夫는 24長을 左右賢王과 左右谷蠡王 및 左右骨都侯가 담당하는 지위로 이해하고 그 다음에 大將, 大都尉, 大當戶가 그에 소속된 것이라고 설명해 그 실태를 해명하였다(山田信夫, 1989 : 31 ~ 46). 하지만 그는 左賢王, 左谷蠡王, 右賢王, 右谷蠡王, 즉 四角이라 칭해진 것을 상급지휘관, 左右大將, 大都尉, 大當戶 등을 중급지휘관으로 분류했다. 이것은 그들이 비록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單于를 배출하는 攣鞮氏였다는 점에서 姻戚氏族인 骨都侯의 지휘하에 조직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24長이라고 기록된 것이 그 앞에 나열된 左賢王 이하의 관직과 그 숫자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주요한 관직만을 나열한 것에 그쳤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다(사와다, 2006 : 158).

[이들을] 만기(萬騎)라 불렀다. [이] 여러 대신들은 모두 세습하는 관직이었다. 호연씨(呼衍氏), 난씨(蘭氏), 그 다음에 수복씨(須卜氏)가 있었는데, [주006]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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呼衍氏, 蘭氏, 須卜氏는 單于를 배출하는 씨족 이외에 匈奴의 지배층을 형성하는 핵심 씨족들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顔師古가 呼衍이 鮮卑族에 있는 呼延과 같은 성씨이고 蘭氏 역시 蘭姓이라고 했다(『史記正義』 : 顏師古云 “呼衍, 即今鮮卑姓呼延者也. 蘭姓今亦有之.” 其後有須卜氏). 그리고 이런 유력씨족들은 單于를 배출하는 씨족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須卜氏의 경우에는 주로 訟事를 담당하였다고 한다(주217) 참조).

이 세 가지의 성이 귀하였다. 여러 명의 왼쪽[左] [주007]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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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王”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에 ‘左[가 붙는] 王’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래 右의 용례도 동일하다.

방향의 왕이나 장군들은 동방에 위치하며 상곡[군]의 동쪽을 담당하였고, [주008]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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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 : ‘値’과 같은 글자인데, 그 의미는 ‘當’과 같다.

예맥(穢貉) [주009]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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穢貉 : 고대 종족 명칭으로 東北 邊方의 韓半島 북부에 거주하였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詩經』, 『論語』, 『中庸』, 『孟子』 등에는 “貊”으로, 『史記』에는 “穢貉”으로 기록되어 있다. ‘貉’의 원주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三國志』의 ‘高句麗’ 관련 기록에 따르면, 大水(漢代에 鹽難水라고 하였던 鴨綠江) 유역에 거주한 부락과 小水(漢代에 馬訾水라고 하였던 渾江) 유역에 거주한 2개의 부락이 있어 각기 首長을 추대하고 있었다. 漢人들이 小水지역에서 거주한 부락을 小水貉이라 칭하였다. 또한 『漢書』 권6 「武帝紀」와 『後漢書』 권85 「東夷傳」 〈濊〉에 보면 전 128년 穢의 君長인 南閭가 朝鮮王 右渠와의 관계를 끊고 그가 지배하던 인구 28만을 이끌고 漢의 遼東郡에 가서 內屬을 청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초기에 肅愼과 東胡 사이에 끼어 松花江 및 黑龍江과 鴨綠江, 豆滿江 유역 및 한반도 북부지역인 함경도와 강원도 등지에 걸쳐 살고 있었다. 그 갈래가 남부로 이주하여 百濟를 이루며 발전하였다. 종족적으로는 알타이어계 퉁구스에 속하는 한 갈래로 농경문화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발전해 韓民族의 주류를 형성하였다(주130) 참조).

, 조선(朝鮮) [주010]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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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 遼河 유역에서 韓半島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다. 檀君神話의 기록에 따르면 전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나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기원전 7세기 초이다. 朝鮮은 戰國時代에 들어와 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諸侯들이 왕이라 칭할 때 인접국인 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면서 발전하였다. 朝鮮은 기원전 4세기 무렵 燕나라와 대립하였다. 또, 당시 중국에서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朝鮮은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燕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였다. 燕나라의 장수 秦開가 遼河 상류에 근거를 둔 東胡를 원정한 다음 朝鮮 영역 내로 쳐들어와 遼河 동쪽에 遼東郡을 설치하고 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朝鮮은 서방 2천여 리의 땅을 상실하였다. 그 뒤 秦나라가 燕나라를 멸망시키고(전222) 遼東郡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자 朝鮮의 否王은 秦나라의 공격이 두려워 복속할 것을 청하나 직접 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否王이 죽고 아들 準王이 즉위할 무렵 전202년 漢나라가 中國을 통일하였다. 漢나라는 秦나라와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았다. 다만 과거 燕나라가 쌓은 牆塞만을 수축하고 朝鮮과의 경계를 浿水로 재조정하였다. 전195년 燕王 盧綰이 漢나라에 반기를 들고 匈奴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朝鮮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衛滿이 무리 약 천 명을 이끌고 朝鮮으로 들어왔다. 準王은 그를 신임하여 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백 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衛滿은 전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王儉城에 입성하여 準王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일반적으로 衛滿朝鮮이라고 부른다. 그 이전의 시대를 衛滿朝鮮이나 李氏朝鮮과 구분하기 위해 古朝鮮이라고 칭하였다(『史記』 권105 「朝鮮列傳」).

과 접해 있었다. 오른쪽[右] 방향의 왕이나 장군들은 서방에 위치하며 상군 [주011]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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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郡의 故城은 涇州 上縣 東南 50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匈奴가 서남쪽으로 綏州와 경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의 서쪽을 담당하였고, [소]월지나 [주012]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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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月氏”가 빠져 있는데, 이들은 匈奴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한 大月氏가 아니라 甘肅省에 거주하고 있었던 小月氏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氐) [주013]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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氐 : 고대 종족의 하나로 羌과 원류가 같은 종족 또는 다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두 종족이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氐의 언어는 고대의 羌, 雜胡의 언어와 비슷하였고, 漢語도 상당부분 섞여 있다. 氐는 羊을 토템으로 하는 羌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의 발상지는 지금의 甘肅省 남부인 武都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華夏와 가까운 관계로 氐는 과거에 중국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殷墟 갑골문에도 氐라는 글자가 나타나는데, 주로 征伐의 뜻으로 통용되었다. 이를 통해 商나라와 氐 사이에 정복전쟁이 자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史記』 「西南夷列傳」에 보면 “冉과 駹으로부터 동북쪽으로 군장이 열을 헤아리는데, 白馬가 가장 크며, 모두 氐의 부류이다.”라고 하였다. 『魏略』 「西戎傳」에도 “氐에는 임금이 있다.”고 했으며, 또한 “여러 부족에는 왕후가 있으며 중국의 책봉을 받는다.”고 하였다. 漢 武帝 元鼎 6년(전111)에 “氐의 왕을 멸하고 염·방의 땅을 개산군으로 하였으며 광한군 서부 및 백마 氐의 땅을 武都郡으로 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곳이 氐가 주로 사는 거주지였다. 漢 武帝 元封 8년(전108)에 氐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였고 일부가 酒泉으로 이주되었다(馬長壽(b), 2006).

, 강(羌) [주014]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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羌 : 서북지역의 오래 된 종족 중의 하나이다. 주로 羊을 기르기 때문에 羊의 뜻을 따라 사람들을 ‘羌’이라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商代부터 보인다. 甲骨文에서는 ‘羌方’이라 불렀다. 이때에 두 개의 큰 부락이 있어 北羌과 馬羌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오늘날의 陝西省 서부와 甘肅省 동부, 남부에 주로 거주하였다. 『詩經』 「商頌」에 보면 商 건국 시조인 成湯시절에 먼 곳에 사는 氐, 羌이 굴복하여 왔다고 칭송하는 노래를 지었다. 商 말기에 周가 周原에서 일어나 발전할 때 羌은 그에 붙어 武王이 商나라를 공격할 때 군사를 보내 회맹에 참가하였다. 春秋時代에 秦나라가 陝西, 甘肅에서 발전하자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때부터 羌은 자체적으로 발전하여 越雋羌, 廣漢羌, 武都羌 등으로 불렸다. 秦나라 孝公時期에 羌은 秦나라의 위협에 굴복하였고, 秦始皇이 6국을 통일하고 蒙恬이 匈奴를 공격하고 서쪽의 여러 戎族을 압박하자 羌은 동진할 수밖에 없었다. 漢나라 초기에 匈奴의 冒頓單于가 西域을 압박하자 羌은 匈奴에 귀부하고 漢나라의 서쪽을 공격하였다. 漢나라 초기부터 甘肅, 靑海지역의 羌은 東進을 시작해 景帝시기에 隴西에 이르렀고, 武帝시기에 다시 밀려났다가 匈奴와 연합하여 河西지역을 공략하기도 했다(馬長壽(b), 2006).

과 접해 있었다. 선우정(單于庭) [주015]
각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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單于庭 : 王庭(오르두)으로 單于가 머무르면서 정사를 행하던 곳이다. 匈奴 單于庭의 위치에 대해서는 주238)의 설명을 참조..

대[군], 운중[군]을 담당하고 있었다. 각각의 영역[分地]이 있었으며, [그 범위 안에서]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좌현왕과 우현왕, 그리고 좌록리왕과 우록리왕의 영역이 가장 컸다. 좌골도후와 우골도후가 선우의 정치를 보좌했다. 여러 24명의 장들은 각자 천장(千長), 백장(百長), 십장(什長) [주016]
각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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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牧民들의 군사조직은 십진법 단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匈奴를 비롯해서 그 이후의 遊牧帝國에서 계속적으로 동일한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 효시가 匈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비소왕(裨小王) [주017]
각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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裨小王 : 匈奴의 관칭으로 漢의 裨將과 같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漢輕騎校尉郭成等逐數百里, 不及, 得右賢裨王十餘人.” : 2925).

, 상봉(相封) [주018]
각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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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封”은 ‘將’과 통한다. 『漢書』에는 “封”이 없다. 相封은 원래 相邦인데, 漢 高祖 劉邦의 이름을 피해 ‘邦’을 ‘封’으로 했다고 한다. 저본에서 相과 封을 끊어 읽었는데 이는 잘못이다.

, 도위(都尉), 당호(當戶) [주019]
각주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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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戶 : 匈奴의 관칭으로 諸王이나 大臣들이 스스로 둔 속관이었다.

, 저거(且渠) [주020]
각주 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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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의 顔師古 주에서 “지금의 沮渠氏는 대개 이 관직 명칭에서 연유된 성씨이다(今之沮渠姓, 蓋本因此官).”라고 하였다.

등의 속관을 두었다.

 

주 001
『漢書』에는 여기에 “單于姓攣鞮氏, 其國稱之曰‘撐犂孤塗單于’. 匈奴謂天爲撐犂, 謂子爲孤塗. 單于者, 廣大之貌也. 言其象天單于然也.”과 같이 單于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이후에 보충되었거나 아니면 『史記』에서 그 내용이 탈락했을 것으로 보인다(주184) 참조).
주 002
谷蠡王 : 음은 ‘록리왕’이다. ‘谷蠡’의 발음은 ‘luk-li’ 즉 ‘록리’이다.
여기에서 나열하고 있는 左賢王, 右賢王, 左谷蠡王, 右谷蠡王 등의 관칭은 地方에서 군사와 행정을 관리하는 최고 관리들의 명칭이다. 이들은 각기 單于로부터 分封을 받아 각자의 영지를 갖고 있었다. 左部는 東部를, 右部를 西部에 위치하고 있었다. 匈奴의 통치체제는 동남부에는 左賢王, 동북부에는 左谷蠡王, 서남부에는 右賢王, 서북부에는 右谷蠡王이 중앙부의 單于庭을 중심으로 각 지역을 통치하는 5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주로 單于의 子弟들, 즉 왕족들이 담당했다. 賢王 아래에 谷蠡王이 자리했다. 특히 左賢王은 차기 單于를 계승할 사람인 太子가 담당했는데, ‘左屠耆王’이라고도 불리었다.
주 003
左大將, 右大將, 左大都尉, 右大都尉, 左大當戶, 右大當戶, 左骨都侯, 右骨都侯 등은 모두 匈奴의 官稱이다. 單于를 보좌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관직을 나열한 것이다. 그중에서 骨都侯는 單于의 일족인 攣鞮氏가 아닌 여타 異姓들이 담당했다. 즉 呼衍氏·蘭氏·須卜氏 등이 담당했는데, 呼衍氏는 左에 蘭氏·須卜氏는 右에 자리했다(주219) 참조).
주 004
“屠”는 ‘諸’로 쓰기도 한다.
주 005
萬騎를 이끄는 長이 24개라고 한 기록에 대해서는 이와 동일한 『漢書』의 기록과 그 이후 匈奴의 변화를 기록한 『後漢書』 권89 「南匈奴傳」의 내용을 비교해 구체적인 내용을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後漢書』에서는 위와 달리 “其大臣貴者左賢王, 次左谷蠡王, 次右賢王, 次右谷蠡王, 謂之四角;次左右日逐王, 次左右溫禺鞮王, 次左右漸將王, 是爲六角;皆單于子弟, 次第當爲單于者也. 異姓大臣左右骨都侯, 次左右尸逐骨都侯, 其餘日逐·且渠·當戶諸官號, 各以權力優劣·部衆多少爲高下次第焉.”이라고 四角, 六角, 異性大臣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匈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치적 지배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신설된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했다(護雅夫, 1970 : 362;李春梅, 2006 : 51). 1950년 처음 護雅夫의 주장이 제기되었을 때 이에 대한 반론으로 프리착(Pritsak)은 명칭의 변화가 아니라 동일한 내용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라고 설명했다(Pritsak, 1954 : 178 ~ 202). 이에 대해 山田信夫는 24長을 左右賢王과 左右谷蠡王 및 左右骨都侯가 담당하는 지위로 이해하고 그 다음에 大將, 大都尉, 大當戶가 그에 소속된 것이라고 설명해 그 실태를 해명하였다(山田信夫, 1989 : 31 ~ 46). 하지만 그는 左賢王, 左谷蠡王, 右賢王, 右谷蠡王, 즉 四角이라 칭해진 것을 상급지휘관, 左右大將, 大都尉, 大當戶 등을 중급지휘관으로 분류했다. 이것은 그들이 비록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單于를 배출하는 攣鞮氏였다는 점에서 姻戚氏族인 骨都侯의 지휘하에 조직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24長이라고 기록된 것이 그 앞에 나열된 左賢王 이하의 관직과 그 숫자가 일치하지 않는다. 이것은 주요한 관직만을 나열한 것에 그쳤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다(사와다, 2006 : 158).
주 006
呼衍氏, 蘭氏, 須卜氏는 單于를 배출하는 씨족 이외에 匈奴의 지배층을 형성하는 핵심 씨족들이었다. 이들에 대해서는 顔師古가 呼衍이 鮮卑族에 있는 呼延과 같은 성씨이고 蘭氏 역시 蘭姓이라고 했다(『史記正義』 : 顏師古云 “呼衍, 即今鮮卑姓呼延者也. 蘭姓今亦有之.” 其後有須卜氏). 그리고 이런 유력씨족들은 單于를 배출하는 씨족과 혼인관계를 맺고 있었다. 須卜氏의 경우에는 주로 訟事를 담당하였다고 한다(주217) 참조).
주 007
『漢書』에는 “王”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에 ‘左[가 붙는] 王’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래 右의 용례도 동일하다.
주 008
直 : ‘値’과 같은 글자인데, 그 의미는 ‘當’과 같다.
주 009
穢貉 : 고대 종족 명칭으로 東北 邊方의 韓半島 북부에 거주하였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詩經』, 『論語』, 『中庸』, 『孟子』 등에는 “貊”으로, 『史記』에는 “穢貉”으로 기록되어 있다. ‘貉’의 원주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다. 하지만 『三國志』의 ‘高句麗’ 관련 기록에 따르면, 大水(漢代에 鹽難水라고 하였던 鴨綠江) 유역에 거주한 부락과 小水(漢代에 馬訾水라고 하였던 渾江) 유역에 거주한 2개의 부락이 있어 각기 首長을 추대하고 있었다. 漢人들이 小水지역에서 거주한 부락을 小水貉이라 칭하였다. 또한 『漢書』 권6 「武帝紀」와 『後漢書』 권85 「東夷傳」 〈濊〉에 보면 전 128년 穢의 君長인 南閭가 朝鮮王 右渠와의 관계를 끊고 그가 지배하던 인구 28만을 이끌고 漢의 遼東郡에 가서 內屬을 청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초기에 肅愼과 東胡 사이에 끼어 松花江 및 黑龍江과 鴨綠江, 豆滿江 유역 및 한반도 북부지역인 함경도와 강원도 등지에 걸쳐 살고 있었다. 그 갈래가 남부로 이주하여 百濟를 이루며 발전하였다. 종족적으로는 알타이어계 퉁구스에 속하는 한 갈래로 농경문화의 경제력을 기반으로 발전해 韓民族의 주류를 형성하였다(주130) 참조).
주 010
朝鮮 : 遼河 유역에서 韓半島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다. 檀君神話의 기록에 따르면 전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나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것은 기원전 7세기 초이다. 朝鮮은 戰國時代에 들어와 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諸侯들이 왕이라 칭할 때 인접국인 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면서 발전하였다. 朝鮮은 기원전 4세기 무렵 燕나라와 대립하였다. 또, 당시 중국에서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朝鮮은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燕나라가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밀리기 시작하였다. 燕나라의 장수 秦開가 遼河 상류에 근거를 둔 東胡를 원정한 다음 朝鮮 영역 내로 쳐들어와 遼河 동쪽에 遼東郡을 설치하고 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朝鮮은 서방 2천여 리의 땅을 상실하였다. 그 뒤 秦나라가 燕나라를 멸망시키고(전222) 遼東郡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자 朝鮮의 否王은 秦나라의 공격이 두려워 복속할 것을 청하나 직접 朝會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否王이 죽고 아들 準王이 즉위할 무렵 전202년 漢나라가 中國을 통일하였다. 漢나라는 秦나라와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았다. 다만 과거 燕나라가 쌓은 牆塞만을 수축하고 朝鮮과의 경계를 浿水로 재조정하였다. 전195년 燕王 盧綰이 漢나라에 반기를 들고 匈奴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朝鮮으로 망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衛滿이 무리 약 천 명을 이끌고 朝鮮으로 들어왔다. 準王은 그를 신임하여 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백 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衛滿은 전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王儉城에 입성하여 準王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로부터 일반적으로 衛滿朝鮮이라고 부른다. 그 이전의 시대를 衛滿朝鮮이나 李氏朝鮮과 구분하기 위해 古朝鮮이라고 칭하였다(『史記』 권105 「朝鮮列傳」).
주 011
上郡의 故城은 涇州 上縣 東南 50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匈奴가 서남쪽으로 綏州와 경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주 012
『漢書』에는 “月氏”가 빠져 있는데, 이들은 匈奴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한 大月氏가 아니라 甘肅省에 거주하고 있었던 小月氏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 013
氐 : 고대 종족의 하나로 羌과 원류가 같은 종족 또는 다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두 종족이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氐의 언어는 고대의 羌, 雜胡의 언어와 비슷하였고, 漢語도 상당부분 섞여 있다. 氐는 羊을 토템으로 하는 羌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의 발상지는 지금의 甘肅省 남부인 武都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華夏와 가까운 관계로 氐는 과거에 중국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殷墟 갑골문에도 氐라는 글자가 나타나는데, 주로 征伐의 뜻으로 통용되었다. 이를 통해 商나라와 氐 사이에 정복전쟁이 자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史記』 「西南夷列傳」에 보면 “冉과 駹으로부터 동북쪽으로 군장이 열을 헤아리는데, 白馬가 가장 크며, 모두 氐의 부류이다.”라고 하였다. 『魏略』 「西戎傳」에도 “氐에는 임금이 있다.”고 했으며, 또한 “여러 부족에는 왕후가 있으며 중국의 책봉을 받는다.”고 하였다. 漢 武帝 元鼎 6년(전111)에 “氐의 왕을 멸하고 염·방의 땅을 개산군으로 하였으며 광한군 서부 및 백마 氐의 땅을 武都郡으로 하였다.”고 한다. 바로 이곳이 氐가 주로 사는 거주지였다. 漢 武帝 元封 8년(전108)에 氐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였고 일부가 酒泉으로 이주되었다(馬長壽(b), 2006).
주 014
羌 : 서북지역의 오래 된 종족 중의 하나이다. 주로 羊을 기르기 때문에 羊의 뜻을 따라 사람들을 ‘羌’이라 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商代부터 보인다. 甲骨文에서는 ‘羌方’이라 불렀다. 이때에 두 개의 큰 부락이 있어 北羌과 馬羌이 있었다. 이들은 대체로 오늘날의 陝西省 서부와 甘肅省 동부, 남부에 주로 거주하였다. 『詩經』 「商頌」에 보면 商 건국 시조인 成湯시절에 먼 곳에 사는 氐, 羌이 굴복하여 왔다고 칭송하는 노래를 지었다. 商 말기에 周가 周原에서 일어나 발전할 때 羌은 그에 붙어 武王이 商나라를 공격할 때 군사를 보내 회맹에 참가하였다. 春秋時代에 秦나라가 陝西, 甘肅에서 발전하자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때부터 羌은 자체적으로 발전하여 越雋羌, 廣漢羌, 武都羌 등으로 불렸다. 秦나라 孝公時期에 羌은 秦나라의 위협에 굴복하였고, 秦始皇이 6국을 통일하고 蒙恬이 匈奴를 공격하고 서쪽의 여러 戎族을 압박하자 羌은 동진할 수밖에 없었다. 漢나라 초기에 匈奴의 冒頓單于가 西域을 압박하자 羌은 匈奴에 귀부하고 漢나라의 서쪽을 공격하였다. 漢나라 초기부터 甘肅, 靑海지역의 羌은 東進을 시작해 景帝시기에 隴西에 이르렀고, 武帝시기에 다시 밀려났다가 匈奴와 연합하여 河西지역을 공략하기도 했다(馬長壽(b), 2006).
주 015
單于庭 : 王庭(오르두)으로 單于가 머무르면서 정사를 행하던 곳이다. 匈奴 單于庭의 위치에 대해서는 주238)의 설명을 참조..
주 016
遊牧民들의 군사조직은 십진법 단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匈奴를 비롯해서 그 이후의 遊牧帝國에서 계속적으로 동일한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 효시가 匈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 017
裨小王 : 匈奴의 관칭으로 漢의 裨將과 같다(『史記』 권111 「衛將軍驃騎列傳」 “漢輕騎校尉郭成等逐數百里, 不及, 得右賢裨王十餘人.” : 2925).
주 018
“封”은 ‘將’과 통한다. 『漢書』에는 “封”이 없다. 相封은 원래 相邦인데, 漢 高祖 劉邦의 이름을 피해 ‘邦’을 ‘封’으로 했다고 한다. 저본에서 相과 封을 끊어 읽었는데 이는 잘못이다.
주 019
當戶 : 匈奴의 관칭으로 諸王이나 大臣들이 스스로 둔 속관이었다.
주 020
『漢書』의 顔師古 주에서 “지금의 沮渠氏는 대개 이 관직 명칭에서 연유된 성씨이다(今之沮渠姓, 蓋本因此官).”라고 하였다.
 
지명
상곡[군] , 조선(朝鮮) , 상군 , 대[군] , 운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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