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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匈奴)의 선조와 문화 및 풍속에 대한 설명

 
  • 국가흉노(匈奴)
흉노(匈奴) [주001]
각주 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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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 : 기원전 3세기 말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북아시아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하여 발전하였다. 漢나라와 대결·화친을 되풀이하다가 내분으로 기원후 1세기경에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그 이후 내부적인 갈등의 증폭과 漢나라의 羈縻政策으로 인해 국가가 붕괴되었다. 그 이후에 주요 세력은 中國 북방으로 내려와 南匈奴를 형성하여 三國時代까지 中國의 藩屛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永嘉의 喪亂을 계기로 시작된 五胡十六國時代에 漢과 前趙, 北涼 등을 건설하면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匈奴 세력은 과거와 같은 유목국가 내지는 중원의 왕조를 건설하지 못하고 약화되어 정치적으로 소멸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4세기 유럽 게르만의 대이동을 유발한 훈(Hun)의 등장과 함께 세계사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왜냐하면 匈奴와 훈의 유사성이 많은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종족적인 기원과 함께 匈奴와 훈의 관련성 여부를 검토하는 것은 연구사적인 측면에서 중시되었다. 그동안의 연구 경향은 匈奴와 훈을 동일하게 보는 입장이 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同族論 역시 절대적인 논거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앞으로 문헌 연구와 함께 고고학적 조사가 더욱 심화될 필요가 있다(정수일, 2001 : 264 ~ 273). 匈奴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사 정리 차원에서 기존에 전개되었던 匈奴라는 말의 어원 내지는 종족적 기원 등과 관련된 몇 가지 논의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匈奴’라는 말의 原義가 정확하게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匈’을 훈(Hun 혹은 Qun)의 音寫로 보는데, 그 의미는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라는 뜻이며 匈奴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이라고 불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알타이어에서 쿤(kūn), 즉 ‘태양’을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卡哈爾曼·穆汗, 2000 : 28). 그리고 한자에서 ‘奴’ 역시 비어인 ‘종’이나 ‘노예’를 뜻하는 ‘奴’가 멸시의 의도로 첨가되어 匈奴라고 불렸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칭을 匈奴가 자신의 명칭으로 받아들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이 의심스럽다. 따라서 그 의미를 비칭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람을 부르는 어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江鴻, 1984 : 9 ~ 14).
匈奴의 종족적 기원에 대해서는 그리스 자료에서 등장하는 ‘프로니오(Phrynoi)’나 ‘파우노이(Phaunoi)’ 등과 匈奴를 동일시한 19세기의 주장 이래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이는 匈奴와 훈의 동일성 여부를 따지려는 시도와 관련되는데, 워낙 오래 계속된 해묵은 논쟁으로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 다만 考古學的인 증거들과 서구 기록들이 훈의 아시아적 요소를 보여준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게르만의 명칭을 지닌 훈의 지배층이 아시아의 匈奴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결정적인 증거 역시 없다는 점에서 同族說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물론 匈奴가 서구의 기록에 나오는 ‘후나(Huna)’, ‘훈니(Hunni)’라는 명칭들과 언어적인 공통점이 있으므로 그들의 연관성을 확인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이것이 아시아 전역에서 유목민 일반을 지칭하거나 특정한 유목민 또는 유목민의 소국을 가리킬 때 공통적으로 사용된 말일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에서 匈奴와 훈의 명칭적 유사성만을 가지고 그의 종족적 연관성을 단언하는 것은 어렵다.
또한 匈奴의 종족적 기원 문제에 대해서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언어적인 측면에서 이를 확증하려는 논의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먼저 훈, 투르크, 몽골을 포괄하는 ‘타타르’와 匈奴를 동일시하려고 한 18세기 드기네(Deguignes)로부터 시작되어 20세기까지 匈奴가 훈의 조상이라는 견해가 유력하였다. 20세기에 들면서 히르쓰(Hirth), 白鳥庫吉 등이 匈奴와 투르크를 동일시하였는데, 이는 중국 기록의 狄이라는 명칭이 투르크의 초기 음역이라는 점과 관련하여 설득력을 가졌다. 그리고 프리착(Pritsak), 에버하르트(Eberhard), 바쟁(Bazin), 사몰린(Samolin) 등은 葷(薰粥), 獫狁(玁狁), 犬戎 등이 모두 匈奴가 속했던 종족과 같은 것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칼그렌(Kalgren), 마스페로(Maspero) 등은 반박을 가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크릴(Creel)은 狄과 戎 같은 중국 북방의 종족이 투르크라는 점을 부정하고 사실상 투르크는 알타이보다는 漢族에 가깝다는 식의 황당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리게티(Ligeti)는 흉노의 언어가 알타이어계라기보다는 예니세이강 남부 시베리아 계통의 언어인 오스티약(Ostyak)어라는 주장도 했다. 또한 풀리블랭크(Pulleyblank)는 匈奴의 언어에 알타이어적인 요소가 나타나는 것이 그들이 원래 시베리아 계통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고, 이것을 나중에 몽골 초원에서 국가를 세운 투르크와 몽골 등이 차용하게 되면서 비슷해졌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배일리(Baily)는 匈奴가 이란계 언어를 사용했다고 했고, 되르퍼(Doerfer)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와 연관 가능성이 없다고도 했다. 이처럼 언어를 기초로 한 匈奴의 원류에 대한 설명은 현재 하나의 정치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터키(투르크), 몽골 등과 같은 나라들이 匈奴를 자신의 조상으로 보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판단을 어렵게 한다(디코스모, 2005 : 449). 따라서 이런 입장은 이후 자신들의 조상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정치적인 입장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중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匈奴나 훈에 ‘族’을 결합시켜 ‘匈奴族’·‘훈족’ 등과 같이 사료에도 없는 용어를 만들어냄으로써 종족적 내지는 인종적 접근을 하려고 했던 기존의 설명 방식 역시 문제가 있다. 그보다는 원래의 기록에 충실하게 匈奴라는 말이 사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기초로 그것을 인종적 측면보다 하나의 정치집단을 부르는 통칭이었다고 보는 것이 그 복합적인 문화의 특징을 설명하는 올바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즉, 이와 같이 다양한 주장들을 볼 때, 匈奴가 현재 분명하지 않은 다양한 종족과 언어 집단의 복합체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는 그 선조가 하후씨(夏后氏) [주002]
각주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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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后氏 : 옛날 부락의 명칭이다. 그 우두머리 禹가 黃河의 치수에 공이 있어 舜임금을 이어 군주가 되었고, 그 아들 啓가 夏나라를 건립하였다. 따라서 夏后氏는 夏나라의 별칭으로도 쓰인다. 夏나라는 중국 最古의 王朝로서 桀王이 商의 湯王에게 망할 때까지 17세대에 걸쳐 439년간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考古學的 증거가 거의 없어 그 실존 여부는 논쟁 중에 있다.

의 후예로 순유(淳維) [주003]
각주 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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淳維 :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를 匈奴의 조상이라고 했거나, 아니면 商(殷은 이하에서 모두 商으로 표기)代에 北邊으로 도망간 자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淳維가 商나라 말기 북변으로 도망가게 된 유래를 자세하게 부연함으로써 淳維가 匈奴의 조상이고, 薰粥과 匈奴가 동일하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淳維(Chun-wei)’와 ‘獯粥(Xun-yu)’이 그 음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계통이 같다고 설명할 수 있는 여타의 증거가 없다. 물론 ‘淳維’나 ‘獯粥’이 匈奴(Xiong-nu)의 발음과 비슷한 이상 동일한 原名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匈奴의 계통에 대한 이러한 司馬遷의 설명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 그들의 종족 내지 부족 단위로서의 역사 과정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중국에 남아 있는 기록만에 의거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匈奴의 기원이 中國人과 연결된다고 하는 설정은 이들을 시초부터 中國 역사의 합법적인 구성 요소의 하나로 만들려는 목적과도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漢代 和親의 상대로서 실재하는 匈奴가 과거부터 존재했음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漢代 이후 이미 和親政策을 통해 婚姻關係를 맺는 등 정치적인 血緣關係 설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 방식은 古代의 聖賢과 異民族들을 연결시키는 中國의 전통, 예를 들어 舜을 東夷로, 文王을 西夷로 보거나, 羌族을 神農氏의 후예로 설명한 것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빈번하게 中國 史書에 등장하는 이런 식의 수사적인 표현을 기초로 이민족들과 中國의 관련성을 설명하려는 논의는 보다 신중한 이해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보다 객관적인 증거, 예를 들어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 등에 더욱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9) 참조)

라고 불린다. [도]당[씨](陶唐氏) [주004]
각주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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陶唐氏 : 五帝의 하나인 堯를 가리킨다. 舜이 그를 이었다(『史記』 권1 「五帝本紀」 : 15 ~ 30).

[유]우[씨](有虞氏) [주005]
각주 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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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虞氏 : 五帝의 마지막인 舜을 가리킨다(『史記』 권1 「五帝本紀」 : 30 ~ 44). 치수에 공을 세운 禹가 그를 이었고, 이로부터 夏나라가 시작되었다(주2) 참조).

이전에는 산융(山戎) [주006]
각주 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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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戎 : 고대 종족의 명칭으로 ‘無終’, ‘北戎’이라고도 한다. 春秋시대에 山西省 太原에 살았던 戎의 한 갈래이다. 이후에 지금의 河北 淶源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東遷하여 河北省 玉田縣 서북에 있는 無終山으로 이주했다. 燕나라 莊公 27년(전664)에 燕나라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齊나라 桓公이 燕나라를 도와 孤竹(지금의 河北省 盧龍 남쪽)에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후에 이들은 다시 晉나라 북부로 이주하였다. 晉나라의 悼公 4년(전569)에 사신을 보내 여러 戎들과 결맹을 하였다. 晉나라 平公 17년(전541)에 晉나라가 이들을 太原에서 격파하였다. 그 뒤 趙나라에게 멸망당했다. (주74) 참조)

, 험윤(獫狁) [주007]
각주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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獫狁 : 고대 종족의 명칭으로 음은 험윤이다. 지금의 陝西省·甘肅省 북부와 內蒙古自治區 서부에 거주하면서 살았던 다른 종족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漢書』에는 ‘獫允’으로 기록했는데, 혹 ‘玁狁’으로 적기도 한다. 이런 表記의 차이는 곧 漢字로 音譯된 것임을 보여 준다.

, 훈육(葷粥) [주008]
각주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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葷粥 : 고대 종족의 명칭으로 음은 훈육이다. 『漢書』에는 ‘薰粥’으로 기록했는데, 혹 ‘獯鬻’으로 적기도 한다. 이런 表記의 차이는 漢字로 音譯된 것임을 보여 준다. (주3) 참조)

등[의 여러 종족들]이 [주009]
각주 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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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集解』는 “堯時曰葷粥, 周曰獫狁, 秦曰匈奴.”라는 晉灼의 말로 이 구절을 설명하였으며, 전통적으로 山戎, 獫狁, 葷粥이 모두 秦漢時代 이전 匈奴의 이름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런 전근대의 기록을 토대로 王國維는 商과 周시대의 鬼方, 混夷, 獯鬻, 西周시대의 獫狁, 春秋時代의 戎狄, 戰國時代의 胡가 모두 匈奴와 같은 종류로 보았다(王國維, 1984 : 583 ~ 606;姚大力, 2004, 48 ~ 54)). 梁啓超나 呂思勉, 金元憲, 何震亞 등과 같은 학자들도 이런 입장에 찬동하였다. 하지만 이와 달리 匈奴가 鬼方, 獯粥, 畎夷, 玁狁 등이 아니라 義渠와 동일한 것이라고 보거나(蒙文通, 1958), 鬼方, 混夷, 獯粥, 玁狁 등을 羌人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黃文弼, 1983 : 2 ~ 28). 그 밖에도 이들을 서방에서 온 종족으로 이해하기도 했다(岑仲勉, 1983 : 29 ~ 36). 따라서 기존에 존재했던 다른 종족들이 匈奴라는 국가를 세운 지배집단과 직접 연결된 증거는 없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런 명칭의 유사성은 匈奴가 등장하면서 서서히 다양한 명칭을 갖고 있었던 기존의 종족들을 병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주3) 참조)

북쪽 이민족의 땅(北蠻) [주100]
각주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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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蠻 : 북쪽에 사는 이민족을 의미한다. 蠻은 四夷의 通稱으로 남쪽에 있는 것만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범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주57) 참조)

에 살면서 가축을 따라서 먹이며 옮겨 다니며 [살았다] [주011]
각주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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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을 따라서 먹이며 옮겨 다니며 살았다.”고 한 것은(『漢書』에는 “隨草畜牧而轉移”라고 하여 조금 표현이 다르다.) 몽골 초원에서 이루어지는 遊牧(또는 游牧 : nomadism)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遊牧 : 구대륙 전반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목축 방식의 하나로서, 초식성의 발굽 동물을 길들여 이들을 이끌고 주기적으로 이동하며 살아가는 생활 형태를 말한다. 유목은 거주지를 완전히 바꾸는 移住와 다르며, 또 일정한 중심지를 가지고 이동한다는 점에서 정처 없는 방랑이나 流浪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유목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나 하자노프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고 정리했다. ① 목축은 무엇보다도 경제 행위의 한 형태이다. ② 그 광역적 성격은 축사를 갖지 않고 연중 거리의 제한 없이 방목시키는 가축 사육 방법에서 비롯된다. ③ 주기적 이동은 목축 경제의 욕구에 따라 일정한 목지의 범위 내에서, 혹은 지역 간을 오가면서 이루어진다. ④ 목축 이동에는 성원의 전부 혹은 대다수가 참여한다. ⑤ 생산이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여러 가지 요구를 충족한다(하자노프, 1990 : 50).
이런 특징을 갖고 있는 ‘遊牧’에서 목민들이 가축을 이끌고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은 먼저 계절의 변화에 따른 가축들의 기후 적응과 관련되었다. 왜냐하면 혹독한 환경에서 가축들의 생체 리듬과 기후 변화를 맞추어 재생산을 해야만 했고, 그와 동시에 가축들의 먹이를 제공하는 초원의 생태를 파괴시키지 않아야 되었기 때문이다. 즉, 移動을 통해 초지의 파괴를 막음으로써 이후 다시 그것을 활용하기 위한 ‘再生産 構造의 確保’가 유목의 이유였다. 초원(steppe)은 강수량이 많지 않고 척박해 한 번 파괴되면 다시 그 초지를 복원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목민들은 제한된 지역을 중심으로 가축을 길러야만 했다. 때문에 가축들이 초지를 파괴하는 것을 막고 재생산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유목 생산의 기본이었다. 따라서 유목민들은 초지 보호와 가축들의 생체 리듬에 맞추어 가능하면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이동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범위 역시 다른 유목민들과의 중복을 피하도록 제한되었다.
또한 遊牧은 자연환경 조건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대체적으로 몽골 초원에 거주하는 목민들은 중앙아시아의 산악지역에서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수직’ 이동하는 유목민들과 달리 비교적 평탄한 구릉을 중심으로 ‘수평’ 이동하면서 가축을 기른다. 그리고 유목민들은 가축을 길러 얻어지는 생산물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사냥 또는 채집을 하거나 약간의 농사를 짓기도 하고 또한 곡식 등과 같이 생산되지 않는 물품을 얻기 위해 농경민들과 교역을 하기도 한다. 구릉 지역을 계절적으로 순환하는 것이 일반적인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의 경우에도 가축의 종류, 지형, 기후 등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띠고 있다. 몽골 초원의 경우에는 지역에 따라 유목의 형태가 다르다. 고비 남부의 內蒙古의 경우에는 동부에서 서부로 갈수록 건조 정도가 강해지고 고비 북부의 몽골공화국(외몽골)은 남에서 북으로 갈수록 건조 정도가 완화되면서 삼림지대로 연결된다. 그리고 동부지역에 비해 서부지역에는 알타이를 비롯한 산지가 발달해 있어 지역에 따라 유목민들의 생활양식이 다르다. 이런 자연환경의 차이는 식생과 가축의 구성 등에 큰 영향을 미쳐 유목민들의 생활방식을 결정한다(後藤富男, 1967;張承志, 1993; 松井健, 2001).

. 기르는 짐승들은 [주012]
각주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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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신석기시대 짐승을 길들여 생산경제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은 발굽을 갖고 있는 초식성의 ‘有蹄類’였다. 양, 염소, 소, 낙타, 말, 순록, 산양 등이 가장 중요한 가축이었는데, 몽골 초원에서는 이 중에서도 순록과 산양을 제외하고 다섯 가지의 가축을 중시한다. 그중에서도 중요도에 따라 말, 소, 낙타, 양, 염소 순서로 나열할 수 있다. 말과 소, 그리고 양과 염소 등이 가장 기본적인 가축인데, 습기가 상대적으로 높아 덜 건조하고 풀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소의 사육 비중이 높고, 고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낙타, 그리고 북부 산악지역에서는 이끼를 주로 먹는 순록을 일부 사육하기도 한다. 『史記正義』에 인용된 「西河故事」의 “亡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失我焉支山, 使我婦女無顏色.”의 기록에 나오는 六畜을 말, 소, 양, 닭, 개, 돼지 등이라고 몽골 초원에서 기르는 가축으로 열거한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대다수가 말 [주013]
각주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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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 인류의 말 사육은 기원전 3500 ~ 3000년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주로 수레를 끄는데 사용되었다. 반면에 말 위에 올라타는 승마를 시작한 것은 중앙유라시아에서 기원전 약 2000년경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유목민들은 말을 타기 위한 다양한 마구를 개량하게 되면서 말을 잘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철기로 마구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유목민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7세기경 흑해 연안의 남러시아 초원에서 국가를 건설하였던 스키타이(이란에서는 ‘사카(Saka)’, 中國에서는 ‘塞’로 기록)였다. 스키타이가 보여 준 기마 유목기술과 다양한 문화는 이후 중앙유라시아 전반에 전파되어 보편적으로 나타났고, 몽골 초원의 경우에도 月氏, 匈奴 등과 같은 세력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몽골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은, 다리가 가늘고 키가 큰 아라비아종의 말과 달리, 체구에 비해 머리가 크고 목이 굵으며 다리가 짧고 둔부가 삼각형의 모양을 띠며 노지에서 풀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뱃가죽이 얇아 축 쳐져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털이 많아 추위를 잘 견디고 오래 달릴 수 있는 지구력이 강한 알타이 계통의 말로 과거 몽골에서 우리나라에 수입된 조랑말이 바로 이 계통의 말이다. 말 무리는 거세하지 않은 수말을 리더로 30마리 정도의 소규모로 구성되어 있고, 이런 작은 여러 개의 무리가 모여서 큰 무리가 된다. 대개 여름철에 어린 말들을 길들여 승마가 가능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킨다.
몽골인은 다리가 4개라고 할 정도로 말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말을 탄 이런 스키타이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인들이 신화 속 켄타우루스의 형상을 만들어 냈을 정도로 유목민들은 말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만큼 말을 자유자재로 잘 탄다. 또한 몽골 속언으로 “안장이 없으면 낮에 굶고, 아내가 없으면 밤에 굶는다.”라고 할 정도로 말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대상이다. 뿐만 아니라 말은 사회적인 지위를 상징하는 성격 역시 강하게 갖고 있다. 몽골 사람들은 駿馬를 과시하며 초원을 질주하는 것을 중시하고, 말에 대한 장식 역시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말에 대한 애정 표시는 머리에 행운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채찍으로 머리를 때리지 않고 애마는 절대로 식용하지 않는다. 식용의 경우에도 모두 먹지 않고 먹은 후에는 오보(Ovoo)에서 제사하고 또한 말의 고환도 거세한 후에 먹지 않는 등 대우를 한다. 또한 유목민들의 지혜는 말에 대한 어휘가 연령, 성별, 털의 색깔, 털의 부분적인 특징, 신체 부위의 특징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어휘가 풍부하다고 하는 것은 어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생활과 지혜가 그곳에 담겨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에 대한 그들의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반영한다.

, 소 [주014]
각주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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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 소는 일찍부터 가축화된 동물의 하나이다. 몽골 초원에서 기르는 소는 일반적으로 다른 지역의 소에 비해 약간 작다. 소는 가축 중에서 큰 편에 속할 뿐만 아니라 고기와 젖, 그리고 가죽 등을 제공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가축의 하나로 여겨진다. 몽골 초원에서는 풀이 좋고 습지가 발달한 지역을 중심으로 소의 분포 비율이 높은 편이다. 그리고 소와 비슷하지만 고산지역에서 잘 자라는 야크가 몽골 초원에서는 오히려 더 많이 사육된다. 목민들은 주로 거세한 황소를 주요한 운송수단의 하나로 사용했는데, 匈奴의 경우 車廬(수레 위에 穹廬를 올려놓은 것)를 끄는 데 소를 주로 사용했다(주21) 참조). 또한 소는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기 때문에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에 소를 해체하여 냉동 건조한 다음에 라면의 수프와 같이 고기 섬유질을 모은 형태의 비축양식을 만들었다. 이것은 유목민들의 전투를 할 경우에 안장에 그것을 매달고 이동하면서 바로 물에 넣어 끓여 먹을 수 있는 간편식으로 사용되었다(주37) 참조). 이런 전투 식량의 확보로 인해 중국처럼 많은 보급부대가 필요하지 않았던 유목군대는 기동성 있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 양 [주015]
각주 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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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 털과 가죽, 그리고 고기와 젖 등 의식주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자원을 제공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가축으로 여겨진다. 몽골 초원에서는 한 가정이 200 ~ 300마리 정도의 양을 길러야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양의 사육이 유목 생활에서 이처럼 중요한 만큼 목민들의 모든 움직임도 양의 생태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양의 사육에는 다양한 기술이 필요한데, 먼저 몽골 초원에서는 양과 염소를 같이 사육한다. 이것은 염소가 양에 비해 황량한 지방에서 훨씬 적응력이 뛰어나고 추위도 잘 견디는 특징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과 다른 습성을 이용해 이들을 조화롭게 기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염소를 이용해 양을 방목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를 8 : 2 또는 7 : 3 정도 섞어서 기른다.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염소가 한 곳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양을 끌고 다니게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한 곳에 머물러 양을 그대로 두면 한 곳에 머물러 풀의 뿌리까지 먹어 버림으로써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초원의 환경을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목의 계절 이동 중에 겨울을 나는 것 역시 양들의 생식 주기와 맞물려 있다. 혹독하고 긴 계절인 초원의 겨울을 나기 위해 유목민들은 가장 많은 가축인 양을 계획적으로 겨울이 접어드는 시점에 임신을 시킨다. 왜냐하면 양의 임신 주기가 150일 정도가 되는데, 따뜻한 봄이 됨과 동시에 출산을 하게 함으로써 재생산 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 때나 새끼를 낳게 되면 관리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착하여 생활하는 冬營地와 春營地에서 새끼의 출산과 관련된 노동을 집중적으로 투여해 1년 동안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체계적으로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었는데, [그 중에서] 특이한 것은 낙타[橐駝] [주016]
각주 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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橐駝 : 낙타를 말하는데, “등의 살이 전대와 같아서 橐이라고 한다”라는 설명처럼 몽골 초원에는 등에 기름주머니인 혹이 두 개 있는 쌍봉낙타가 주로 사육된다. 이들은 체구가 아주 크고 강인하여 추위에 강하나 더위에 약한 특징이 있다. 초원보다는 주로 고비와 같은 더 건조한 지역에서 사육되기 때문에 “낙타는 고비(사막)의 장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낙타는 털, 젖, 고기 등을 이용하고 짐을 옮기거나 승용으로 사용하는데, 특히 나쁜 자연조건에 잘 버텨 내기 때문에 ‘사막의 배’로서 隊商이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목민들에게 낙타는 그들의 인내력과 강한 힘에 대한 신뢰와 함께 등에 달린 혹 때문에 유머러스한 존재로 이해되기도 한다.

, 나귀[驢], 노새[驘] [주017]
각주 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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驘 : 곧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騾 : mule)’이다. 생식기능은 없으나 온순하기 때문에 주로 운반용으로 사용하였다.

, 버새[駃騠] [주018]
각주 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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駃騠 : 수말과 암나귀 사이에서 생긴 잡종 말로 ‘버새(hinny)’이다. 北狄의 좋은 말[駿馬]로서 어미의 배를 갈라서 태어나고 이레 뒤에 벌써 어미를 넘어선다고도 했다. 이런 말의 교잡 기술은 목민들이 특수하게 발명해 낸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증명하는 것으로 초원에 성숙된 유목 문화가 발달했음을 보여 준다.

, 도도(騊駼) [주019]
각주 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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騊駼 : 푸른색을 띤 말을 뜻하는데, 몽골어로 야생의 노새를 가리키는 ‘치기타이(chigitai)’가 바로 이 ‘騊駼’를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北海(바이칼호)에 있는 말처럼 생긴 짐승 또는 북쪽에 있는 나라의 명칭으로 그곳에서 생산되는 말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 탄해(驒駭) [주101]
각주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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驒駭 : ‘巨虛之屬’이라 하였고, 驒은 ‘野馬屬’이라고 하였다. 이는 몽골어로 野生馬을 ‘타키(taki)’라고 하는 것과 음이 상통한다는 점에서 野生馬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內田吟風, 1971 : 4). 『漢書』에는 “驒奚”로 되어 있다.

[등]이었다.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아 성곽이나 일정하게 사는 곳, [주021]
각주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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處 :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은 목재 기둥과 서까래 등의 골조를 펠트로 둘러싸고 난 다음 그 위에 면포나 가죽을 덮는 조립식 이동용 천막(yurt 또는 ger)에 살았다. 匈奴 시대에는 이런 조립식 천막을 수레 위에 설치한 穹廬에 거주하면서 바로 땅 위에 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주로 벽부분이 탄력성이 좋고 유연한 버드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사와다, 2007 : 122). 이런 이동식 가옥을 이용해 遊牧民들은 계절에 따라 옮겨다니며 생활했기 때문에 司馬遷의 기록처럼 고정된 주거지를 만들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을 보내야 하는 冬營地에서 목민들은 대체로 정해진 지역에서 머물러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맞춘 잦은 이동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分地가 일정하였기 때문에 그 범위 내에서 주거지를 만들어 이동하는 생활을 했다.
한편, 계절적 이동을 기초로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에게도 匈奴 시대부터 이미 고정적인 주거지 내지는 소규모의 성곽, 그리고 넓은 농경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반 유목민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유목국가가 건설되면서 그를 위해 봉사하는 외래의 정주민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20세기 이래 몽골과 바이칼 지역을 중심으로 많이 발굴된 匈奴時代의 농경지와 성곽 등의 유적이 그 증거이다. 이를 통해 匈奴의 대외 확장과 함께 몽골 초원과 오아시스 지역, 그리고 중국과 근접한 변경 지역에서 농업이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많은 주거지가 匈奴 영역 내에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다양한 종자의 사용만이 아니라 농기구 등을 제작하기 위한 시설 등이 존재했음 역시 확인된다(馬利淸, 2005 : 378 ~ 388). 이상과 같은 유목과 정주의 복합적인 특징은 遊牧國家의 건설과 함께 몽골 초원에 정주와 유목의 이중적인 문화가 공존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漢書』에는 “居”로 되어 있다.

 
:5

[그리고]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것이 없었으나, [각자가] 나누어 갖고 있는 땅[分地] [주022]
각주 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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分地 : 하나의 가족 내지는 氏族 등이 소유한 分有地를 가리키는데, 이는 유목민들의 개인적인 토지 소유 상황을 설명한다. 즉, 遊牧民들은 개인과 가족들이 자신들의 가축 무리를 먹일 수 있도록 특정 牧草地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유목민들이 토지를 하늘에서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토지에서 자라는 풀에 대해서 점유권 분쟁을 일으켰을 뿐이다. 遊牧民들에게는 가축을 먹일 수 있는 초지만이 중요한 것이었지 그 자체의 소유권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목지는 어느 한 개인의 사유지적인 성격보다는 유목집단 전체의 공유물이었고, 공유라는 개념도 엄밀히 말하면 ‘限時的인 獨占的 使用權’에 가깝다. 우선적인 사용권을 갖고 있는 집단이 이용하지 않는 시기에 다른 집단이 양해를 얻어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소유권의 침해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토지 이용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목민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목지 내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하였다(金浩東, 1989 : 260).

은 있었다. 글이나 책이 없어 [주023]
각주 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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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無文書”로 되어 있다. ‘無’字는 아래의 다른 용례에서는 ‘毋’字로 되어 있다.

말로 [서로] 약속을 했다. [주024]
각주 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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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에는 文字가 없었으나, 기호로 서로 의사 전달하는 수단이 있었음을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鹽鐵論』 「論功篇」 “刻骨卷木, 百官有以相記.” : 357;『後漢書』 「南匈奴列傳」 “主斷獄訟, 當決輕重, 口白單于, 無文書簿領.” : 2944). 현재까지 匈奴에서 사용된 문자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漢나라와의 관계에서 외교문서가 작성 교환되는 등의 예로 볼 때 한자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유목군주를 보좌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독자적인 문자사용 가능성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구소련의 구밀료프(Gumiev) 이래로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해서 몽골공화국 서북부 예니세이강 가에서 발견된 돌에 새겨진 글자와 기호가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또한 몽골의 도르주스렌(Dorjisuren)은 발굴된 여러 가지의 토기나 중국제 칠기 바닥에 새겨진 기호를 토대로 14개의 匈奴文字가 존재한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의 일부가 이후 소위 ‘오르콘 룬문자’라고 하는 突厥文字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이것은 기호가 갖고 있는 유사성으로 추정되고 또한 발견된 장소가 토기나 칠기라는 점에서 소유자의 서명 정도로 보인다(사와다, 2007 : 132 ~ 133). 그 외에도 현재까지 몽골 초원 岩刻畵 등에서 발견된 400여 개의 기호 역시 문자라고 단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사용연대의 추정이 어렵다는 점에서 匈奴의 문자 존재 여부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지 못하고 있다(田廣金·郭素新, 2005 : 483;馬利淸·宋遠茹, 2004 : 49 ~ 53).

어린아이들도 양을 타고 돌아다닐 수 있으며 활을 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추고, 조금 크면 여우나 토끼를 쏘아 맞추어서 먹을 것으로 썼다. [주025]
각주 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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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肉食”으로 되어 있다.

남자들의 힘은 활[毌弓] [주026]
각주 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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毌弓 : 毌의 音은 ‘관’인데, ‘貫’과 통한다. 이는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된다(『鹽鐵論』 「論功篇」 “一旦有急, 貫弓上馬而已.” : 356). 여기에서 ‘毌’은 ‘彎’의 借字이고, 실제로 『漢書』에는 “彎弓”이라고 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활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발명해 낸 것이다. 두 개의 판을 풀을 먹여 합치거나 혹은 나무로 된 궁체 뒷면에 동물의 힘줄을 팽팽하게 붙여 만든 合成弓이다. 길이가 짧은 短弓의 하나이다. 強化弓의 일종인 合成弓은 탄성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사용 후에 시위를 벗기는 것이 보통이다. 시위를 벗기면 궁체는 시위를 걸었을 때와는 반대 방향으로 휜다. 시위를 걸었을 때나 벗겼을 때도 궁체는 직선이나 반달 모양으로 되지 않고 彎曲되기 때문에 合成弓을 ‘反曲弓’ 또는 ‘彎弓’이라고 한다. 合成弓은 활 중에서 가장 발달된 구조로서 그 힘이 강력하다. 궁체의 길이가 짧아도 긴 單純弓에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들은 이 활을 많이 사용하여 그들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Hildinger, 1997 : 21).

을 잘 다룰 수 있어 모두 무장 기병(騎兵)이 되었다. [주027]
각주 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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騎兵의 등장은 기원전 2000년경 카스피해 근처에 살던 초원의 주민들이 말을 길들이고 그에 맞는 마구를 개발하여 직접 올라타게 된 이후이다. 그리고 기원전 7세기경 스키타이 등이 유라시아초원에서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하면서 이들의 강력한 위력이 증명되었다. 이런 강력한 전투력을 제공하는 유목 기마 기술은 이후 점차 중앙유라시아의 초원을 따라 주변으로 전파되었다. 이로 인해 몽골 초원의 주민들도 말을 잘 탈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초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였다. 그들의 중요한 기술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독특한 전술이었다. 이것은 이후에 농경 정주세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왜냐하면 초기에 말을 길들여 원하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은 고도의 숙달된 기술을 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환경적으로 말이 잘 자랄 수 있는 초원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농경 정주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말을 사용하였지만 말을 길들여 올라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따라서 말에 수레를 달아 사용하는 다른 양상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주로 말을 이용한 전차 전술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처럼 두 세계에서의 말의 상이한 사용이 전력상 큰 차이를 가져왔다.

그 습속은 편하면 가축을 따라 다니면서 새나 짐승을 쏘아 잡는 [주028]
각주 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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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田獵”으로 되어 있다.

[사냥을] 생업으로 삼았고, [주029]
각주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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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면 가축을 따라 다닌”다는 기록은 가축들의 생리적 특성에 맞춰 유목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새나 짐승을 쏘아 잡는 [사냥을]” 한다고 한 것은 부족한 자원을 보충하기 위한 생업 수단의 하나가 사냥이었음을 뜻한다. 유목민들은 사냥을 통해 부족한 고기를 보충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동물의 가죽과 털을 획득하여 교역함으로써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담비털과 같은 모피가 중요한 교역 물품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사냥은 개별적으로 행해지기도 했지만 집단적인 몰이사냥으로 상시적인 군사훈련을 할 수 있어 유목민들의 전투 능력을 배가시키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급하면 사람들이 싸워 공격하는 것을 익혀 침공하는 것이 [그들의] 타고난 성품이었다. [주102]
각주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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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遷이 유목민들의 이러한 행태를 “타고난 성품”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적인 행동’이라고 이해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유목민들이 기마궁사가 되는 것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중국인과 달리 이루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쓰는 무기는 [주031]
각주 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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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兵 : 射程거리가 긴 長器인 ‘弓矢’를 말한다. 匈奴의 弓矢는 漢나라에 비해 좋은 것은 아니었다. 漢나라는 활과 비슷하지만 기계적 힘으로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무기인 쇠뇌[弩]를 가지고 있었다. 쇠뇌는 활과 달리 사용자의 팔 힘에 상관없이 일정한 강도로 발사되는 것이 특징이다. 활은 익히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만 쇠뇌는 단기간에 조련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따라서 훈련되지 않은 병사가 사용하기에는 쇠뇌가 활보다 훨씬 편리하였다. 하지만 유일한 단점은 장전시간이 오래 걸려 발사속도가 활보다 훨씬 느리다는 점이었다. 이 무기의 장점에 대한 지적은 晁錯의 “勁弩長戟, 射疏及遠, 則匈奴之弓弗能格也(『漢書』 권49 「晁錯列傳」 : 2281).”라는 말에 잘 드러난다.

활과 화살이고, [주032]
각주 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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匈奴는 漢나라에 비해 열등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쓰는 활과 화살의 전술적인 활용를 극대화함으로써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匈奴가 주요한 무기인 弓矢를 이용해 輕裝騎兵의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목민들이 기동력이 둔한 적을 만났을 때 적을 향해 돌진하다가 가까운 거리에 이르면 갑자기 일제히 말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흩어지면서 뒤돌아보듯이 좌후방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쏜 다음에 멀리 도망가는 전술이었다. 기마궁사들은 이런 방법을 반복적으로 구사해 적을 어지럽게 한 다음에 격파하였다.
유목민들이 활 쏘는 모습은 고구려 벽화 무용총 기마 수렵도에서 말을 탄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활을 쏘는 자세와도 같다. 이를 일반적으로 ‘파르티아式 騎射法(Parthian shooting)’이라고 한다. 匈奴 역시 이런 전술에 익숙하였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말 위에 탄 상태에서 상반신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기마법이 필요하였다. 이것은 화살을 쏠 때 반동이 적은 ‘側對步(amble)’이다. 側對步는 같은 쪽의 두 다리가 서로 근접하는 일이 없게 앞의 왼발과 뒤의 왼발이 동시에 들리는 주법(走法)이다. 이 방법은 속도를 내면 말의 어깨 쪽이 떠올라 말을 탄 사람이 넘어지기 쉽고 선회가 어려운 점도 있었다. 하지만 대신에 쉽게 정지할 수 있고 말을 탈 때 거의 반동을 느끼지 않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이런 기마에 능숙하게 훈련이 된 유목민들은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활을 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한나라에 비해 장비 및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와 사냥에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가까이 떨어져 있을 때 쓰는 무기는 칼 [주033]
각주 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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刀 : 匈奴에서 사용한 칼은 길이가 길지 않은 소위 ‘아키나케스 단검’이라고 부르는 동검(또는 철검)과 유사하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그리고 스키타이에서 사용한 양날의 칼인데, 騎馬에 편리하게 50㎝ 이하로 만들었다. 이런 형식의 칼이 점차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기원전 6 ~ 3세기경에 시베리아, 몽골, 화북 지역에 보급되었다. 고고학적인 발굴 자료에 따르면 匈奴時代 칼의 모양은 양쪽에 날을 가진 단검으로 날과 자루가 하나로 주조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칼끝이 상대적으로 좁고 곧은 검코 모양을 띠고 있고 자루 끝이 버섯 모양, 동물 머리 모양, 다양한 고리 형태 등이었다. 단검에 장식된 가하학적 문양과 유사한 것이 칼자루에도 있었다(馬利淸, 2005 : 77 ~ 78). 특히, 이런 단검 ‘徑路刀’라고도 하는데, 그 어원을 추적해 보면 킹룩(king luk; 徑路)은 아키나케스(Akinakes)의 약어인 키낙(Kinak)의 전사음으로 볼 수도 있다(內田吟風, 1971 : 4).

과 창(鋋) [주034]
각주 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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鋋 :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史記集解』는 “모양이 창과 비슷하나 쇠로 된 자루가 있다(鋋形似矛, 鐵柄).”고 하며 『史記索隱』에서는 “작은 창으로 쇠로 된 자루가 있다(小矛鐵矜).”고도 하였다.

 
:3

이었다. [싸움이] 유리하면 나아가고 불리하면 물러났는데, 달아나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주035]
각주 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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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앞서 설명한 유목민들의 ‘파르티아式 騎射法’을 사용한 경장기병의 전형적인 전법과 관련이 있다. 중국인에게 낯선 이런 전법의 기록은 이 시대 匈奴와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그들에 대한 이해가 심화된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적은 도망함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다.”는 『左傳』의 기록과 비슷한 이 『史記』의 설명은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편견을 담고 있다. 명예와 희생정신을 중시하는 중국의 군대는 물러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司馬遷만이 아니라 그리스·로마 사가들의 초원 유목민들의 전투 방법에 대한 기록에서도 보인다(디코스모, 2005 : 361).

오로지 이익이 있는 곳에 있고자 할 뿐 예의를 알지 못하였다. [주036]
각주 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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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속담에 “3일을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초원에서 유목민들의 삶은 힘들다.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주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예의와 같은 것은 따질 수 없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초원의 유목민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언제든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런 태도를 司馬遷은 예의를 모른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임금부터 그 아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가축의 고기를 먹고 [주037]
각주 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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食 : 匈奴의 음식은 현재 몽골 유목민과 비슷하게 가축의 고기를 위주로 하는 육식이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현재 몽골인들의 식생활과 연결시켜 설명해 보면, 육고기는 주로 양고기를 일반적으로 많이 먹는다. 그 조리 방법은 소금물에 고기를 삶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다. 그 외에 소고기나 사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다른 고기도 먹는다. 또한 장기간의 보존을 위해 생고기를 냉동 건조시켜 저장해 두었다가 이것을 물에 넣어 끓여 먹는 방법 역시 발달하였다(주14) 참조). 가축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젖 역시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식품으로 제작되었다. 젖을 약한 불에 가열해 유지방을 모은 다음 산과 효모 등으로 응고시킨 駝酪이 그것이다. 이 駝酪을 바짝 졸여 직사각형이나 구형으로 만들어 햇볕에 말리면 煉乳(固乳)가 된다. 이것은 빻아서 물에 녹여 먹을 수 있는데 휴대가 간편하여 유목민들에게 좋은 식량이 되었다. 그리고 여름철에 말의 젖을 가죽 포대에 넣고 계속 저어 유산분해로 발효시켜 馬乳酒를 만들었다. 또한 이것을 다려 만든 燒酒 형태 등의 주류가 중요한 기호식품으로 음용되었다. 그 외에 일부 정주민들이 경작하는 농경지에서 나오는 곡물이나 야채 등을 식용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 가죽과 [털]로 옷을 해 입고 [털을 다진] 모직물과 가죽[旃裘] [주038]
각주 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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旃 : ‘毡’과 같은 의미로, ‘모전[毡]’을 의미하는데, 봄철 털갈이를 하기 전의 양이나 낙타, 염소 등의 털을 깎아 그것을 짜거나(양탄자) 다져서(펠트) 만들었다. 갖옷[裘]은 가죽을 무두질하여 만든 옷이다. 동물로부터 얻어지는 자신들의 기본적인 의복 이외에도 중국과의 관계가 활발해짐에 따라 귀족층을 중심으로 많은 비단옷이 사용되기도 했다. 몽골 초원지역에서 모직물의 의류와 함께 발굴된 비단 자수로 된 겉옷이 그 증거의 하나이다. 아래에 첨부한 사진은 몽골 노인 울라 유적에서 발견된 흉노시대의 의복들인데, 당시 지배층의 의복 형태를 추정하게 한다(馬利淸, 2005 : 88 ~ 89).

 
:3

을 덮었다. 젊은이가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늙은이들이 그 나머지를 먹었다. 건장한 사람을 중히 여기고, 노약자들은 경시하였다. [주039]
각주 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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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遷은 이와 같이 적고 있으나, 유목민들의 경우에도 노인의 지혜를 그 사회 유지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사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匈奴의 모습은 실제 핵가족 단위의 생활을 유지하는 유목민들의 습성과도 관련되었다. 왜냐하면 혹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유목민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게 될 경우 일단 젊은 남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 그가 더 많은 것을 얻어올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유목적인 지혜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이후 中行說이 漢나라의 사자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주374) 참조).

아비가 죽으면 [그를 잇는 아들이] 그 후처를 아내로 맞고, 형제가 죽으면 [남아 있는 형이나 아우가] 그 아내를 차지하였다. [주103]
각주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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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죽으면 그의 아들이나 동생이 그 후처를 아내로 맞고, 형제가 죽으면 남아 있는 형이나 아우가 그 아내를 차지했다. 이것을 학술적으로는 ‘嫂婚制’ 또는 ‘兄死取嫂’ 내지는 ‘收繼婚(levirate)’이라고 한다. 이것은 가계를 상속하는 사람이 선대의 아내를 계승함으로써 종족의 혈통이 없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목적에 기인했다. 왜냐하면 異姓 아내의 경우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출신 씨족에게서 얻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나 형의 후처를 아들이나 동생이 다시 취함으로써 혈족의 단결을 유지하고 재산이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武沐, 2005 : 42).

그 풍속은 이름이 있어도 [높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성(姓)이나 자(字) 같은 것은 없었다. [주041]
각주 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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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에는 “無字”라고만 하였다. 반면에, 사실 匈奴에 欒鞮氏, 呼衍氏, 須卜氏 등의 氏姓이 있었음은 本傳에서도 확인된다. 이런 점에서 성이 없었다는 『史記』의 기록은 착오이거나 아니면 匈奴 이전의 옛 北方民族의 습속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주 001
匈奴 : 기원전 3세기 말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북아시아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하여 발전하였다. 漢나라와 대결·화친을 되풀이하다가 내분으로 기원후 1세기경에 남북으로 분열되었다. 그 이후 내부적인 갈등의 증폭과 漢나라의 羈縻政策으로 인해 국가가 붕괴되었다. 그 이후에 주요 세력은 中國 북방으로 내려와 南匈奴를 형성하여 三國時代까지 中國의 藩屛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永嘉의 喪亂을 계기로 시작된 五胡十六國時代에 漢과 前趙, 北涼 등을 건설하면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匈奴 세력은 과거와 같은 유목국가 내지는 중원의 왕조를 건설하지 못하고 약화되어 정치적으로 소멸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4세기 유럽 게르만의 대이동을 유발한 훈(Hun)의 등장과 함께 세계사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왜냐하면 匈奴와 훈의 유사성이 많은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종족적인 기원과 함께 匈奴와 훈의 관련성 여부를 검토하는 것은 연구사적인 측면에서 중시되었다. 그동안의 연구 경향은 匈奴와 훈을 동일하게 보는 입장이 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同族論 역시 절대적인 논거를 확보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앞으로 문헌 연구와 함께 고고학적 조사가 더욱 심화될 필요가 있다(정수일, 2001 : 264 ~ 273). 匈奴에 대한 기본적인 연구사 정리 차원에서 기존에 전개되었던 匈奴라는 말의 어원 내지는 종족적 기원 등과 관련된 몇 가지 논의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匈奴’라는 말의 原義가 정확하게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다만, 일반적으로 ‘匈’을 훈(Hun 혹은 Qun)의 音寫로 보는데, 그 의미는 퉁구스어에서 ‘사람’이라는 뜻이며 匈奴 스스로가 자신들을 ‘훈(Hun, 匈)’이라고 불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알타이어에서 쿤(kūn), 즉 ‘태양’을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卡哈爾曼·穆汗, 2000 : 28). 그리고 한자에서 ‘奴’ 역시 비어인 ‘종’이나 ‘노예’를 뜻하는 ‘奴’가 멸시의 의도로 첨가되어 匈奴라고 불렸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칭을 匈奴가 자신의 명칭으로 받아들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그 타당성이 의심스럽다. 따라서 그 의미를 비칭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사람을 부르는 어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江鴻, 1984 : 9 ~ 14).
匈奴의 종족적 기원에 대해서는 그리스 자료에서 등장하는 ‘프로니오(Phrynoi)’나 ‘파우노이(Phaunoi)’ 등과 匈奴를 동일시한 19세기의 주장 이래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 이는 匈奴와 훈의 동일성 여부를 따지려는 시도와 관련되는데, 워낙 오래 계속된 해묵은 논쟁으로 정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다. 다만 考古學的인 증거들과 서구 기록들이 훈의 아시아적 요소를 보여준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게르만의 명칭을 지닌 훈의 지배층이 아시아의 匈奴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결정적인 증거 역시 없다는 점에서 同族說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물론 匈奴가 서구의 기록에 나오는 ‘후나(Huna)’, ‘훈니(Hunni)’라는 명칭들과 언어적인 공통점이 있으므로 그들의 연관성을 확인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반면에, 이것이 아시아 전역에서 유목민 일반을 지칭하거나 특정한 유목민 또는 유목민의 소국을 가리킬 때 공통적으로 사용된 말일 가능성도 있다. 이런 점에서 匈奴와 훈의 명칭적 유사성만을 가지고 그의 종족적 연관성을 단언하는 것은 어렵다.
또한 匈奴의 종족적 기원 문제에 대해서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언어적인 측면에서 이를 확증하려는 논의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먼저 훈, 투르크, 몽골을 포괄하는 ‘타타르’와 匈奴를 동일시하려고 한 18세기 드기네(Deguignes)로부터 시작되어 20세기까지 匈奴가 훈의 조상이라는 견해가 유력하였다. 20세기에 들면서 히르쓰(Hirth), 白鳥庫吉 등이 匈奴와 투르크를 동일시하였는데, 이는 중국 기록의 狄이라는 명칭이 투르크의 초기 음역이라는 점과 관련하여 설득력을 가졌다. 그리고 프리착(Pritsak), 에버하르트(Eberhard), 바쟁(Bazin), 사몰린(Samolin) 등은 葷(薰粥), 獫狁(玁狁), 犬戎 등이 모두 匈奴가 속했던 종족과 같은 것에서 나왔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칼그렌(Kalgren), 마스페로(Maspero) 등은 반박을 가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크릴(Creel)은 狄과 戎 같은 중국 북방의 종족이 투르크라는 점을 부정하고 사실상 투르크는 알타이보다는 漢族에 가깝다는 식의 황당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리게티(Ligeti)는 흉노의 언어가 알타이어계라기보다는 예니세이강 남부 시베리아 계통의 언어인 오스티약(Ostyak)어라는 주장도 했다. 또한 풀리블랭크(Pulleyblank)는 匈奴의 언어에 알타이어적인 요소가 나타나는 것이 그들이 원래 시베리아 계통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고, 이것을 나중에 몽골 초원에서 국가를 세운 투르크와 몽골 등이 차용하게 되면서 비슷해졌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배일리(Baily)는 匈奴가 이란계 언어를 사용했다고 했고, 되르퍼(Doerfer)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와 연관 가능성이 없다고도 했다. 이처럼 언어를 기초로 한 匈奴의 원류에 대한 설명은 현재 하나의 정치체제를 구성하고 있는 터키(투르크), 몽골 등과 같은 나라들이 匈奴를 자신의 조상으로 보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판단을 어렵게 한다(디코스모, 2005 : 449). 따라서 이런 입장은 이후 자신들의 조상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정치적인 입장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신중한 이해가 필요하다.
또한 匈奴나 훈에 ‘族’을 결합시켜 ‘匈奴族’·‘훈족’ 등과 같이 사료에도 없는 용어를 만들어냄으로써 종족적 내지는 인종적 접근을 하려고 했던 기존의 설명 방식 역시 문제가 있다. 그보다는 원래의 기록에 충실하게 匈奴라는 말이 사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어떤 이해에 기반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기초로 그것을 인종적 측면보다 하나의 정치집단을 부르는 통칭이었다고 보는 것이 그 복합적인 문화의 특징을 설명하는 올바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즉, 이와 같이 다양한 주장들을 볼 때, 匈奴가 현재 분명하지 않은 다양한 종족과 언어 집단의 복합체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주 002
夏后氏 : 옛날 부락의 명칭이다. 그 우두머리 禹가 黃河의 치수에 공이 있어 舜임금을 이어 군주가 되었고, 그 아들 啓가 夏나라를 건립하였다. 따라서 夏后氏는 夏나라의 별칭으로도 쓰인다. 夏나라는 중국 最古의 王朝로서 桀王이 商의 湯王에게 망할 때까지 17세대에 걸쳐 439년간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考古學的 증거가 거의 없어 그 실존 여부는 논쟁 중에 있다.
주 003
淳維 :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를 匈奴의 조상이라고 했거나, 아니면 商(殷은 이하에서 모두 商으로 표기)代에 北邊으로 도망간 자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淳維가 商나라 말기 북변으로 도망가게 된 유래를 자세하게 부연함으로써 淳維가 匈奴의 조상이고, 薰粥과 匈奴가 동일하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淳維(Chun-wei)’와 ‘獯粥(Xun-yu)’이 그 음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계통이 같다고 설명할 수 있는 여타의 증거가 없다. 물론 ‘淳維’나 ‘獯粥’이 匈奴(Xiong-nu)의 발음과 비슷한 이상 동일한 原名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匈奴의 계통에 대한 이러한 司馬遷의 설명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 그들의 종족 내지 부족 단위로서의 역사 과정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중국에 남아 있는 기록만에 의거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匈奴의 기원이 中國人과 연결된다고 하는 설정은 이들을 시초부터 中國 역사의 합법적인 구성 요소의 하나로 만들려는 목적과도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漢代 和親의 상대로서 실재하는 匈奴가 과거부터 존재했음을 설명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漢代 이후 이미 和親政策을 통해 婚姻關係를 맺는 등 정치적인 血緣關係 설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록 방식은 古代의 聖賢과 異民族들을 연결시키는 中國의 전통, 예를 들어 舜을 東夷로, 文王을 西夷로 보거나, 羌族을 神農氏의 후예로 설명한 것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따라서 빈번하게 中國 史書에 등장하는 이런 식의 수사적인 표현을 기초로 이민족들과 中國의 관련성을 설명하려는 논의는 보다 신중한 이해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보다 객관적인 증거, 예를 들어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 등에 더욱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9) 참조)
주 004
陶唐氏 : 五帝의 하나인 堯를 가리킨다. 舜이 그를 이었다(『史記』 권1 「五帝本紀」 : 15 ~ 30).
주 005
有虞氏 : 五帝의 마지막인 舜을 가리킨다(『史記』 권1 「五帝本紀」 : 30 ~ 44). 치수에 공을 세운 禹가 그를 이었고, 이로부터 夏나라가 시작되었다(주2) 참조).
주 006
山戎 : 고대 종족의 명칭으로 ‘無終’, ‘北戎’이라고도 한다. 春秋시대에 山西省 太原에 살았던 戎의 한 갈래이다. 이후에 지금의 河北 淶源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東遷하여 河北省 玉田縣 서북에 있는 無終山으로 이주했다. 燕나라 莊公 27년(전664)에 燕나라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齊나라 桓公이 燕나라를 도와 孤竹(지금의 河北省 盧龍 남쪽)에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이후에 이들은 다시 晉나라 북부로 이주하였다. 晉나라의 悼公 4년(전569)에 사신을 보내 여러 戎들과 결맹을 하였다. 晉나라 平公 17년(전541)에 晉나라가 이들을 太原에서 격파하였다. 그 뒤 趙나라에게 멸망당했다. (주74) 참조)
주 007
獫狁 : 고대 종족의 명칭으로 음은 험윤이다. 지금의 陝西省·甘肅省 북부와 內蒙古自治區 서부에 거주하면서 살았던 다른 종족을 지칭하는 명칭이다. 『漢書』에는 ‘獫允’으로 기록했는데, 혹 ‘玁狁’으로 적기도 한다. 이런 表記의 차이는 곧 漢字로 音譯된 것임을 보여 준다.
주 008
葷粥 : 고대 종족의 명칭으로 음은 훈육이다. 『漢書』에는 ‘薰粥’으로 기록했는데, 혹 ‘獯鬻’으로 적기도 한다. 이런 表記의 차이는 漢字로 音譯된 것임을 보여 준다. (주3) 참조)
주 009
『史記集解』는 “堯時曰葷粥, 周曰獫狁, 秦曰匈奴.”라는 晉灼의 말로 이 구절을 설명하였으며, 전통적으로 山戎, 獫狁, 葷粥이 모두 秦漢時代 이전 匈奴의 이름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런 전근대의 기록을 토대로 王國維는 商과 周시대의 鬼方, 混夷, 獯鬻, 西周시대의 獫狁, 春秋時代의 戎狄, 戰國時代의 胡가 모두 匈奴와 같은 종류로 보았다(王國維, 1984 : 583 ~ 606;姚大力, 2004, 48 ~ 54)). 梁啓超나 呂思勉, 金元憲, 何震亞 등과 같은 학자들도 이런 입장에 찬동하였다. 하지만 이와 달리 匈奴가 鬼方, 獯粥, 畎夷, 玁狁 등이 아니라 義渠와 동일한 것이라고 보거나(蒙文通, 1958), 鬼方, 混夷, 獯粥, 玁狁 등을 羌人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黃文弼, 1983 : 2 ~ 28). 그 밖에도 이들을 서방에서 온 종족으로 이해하기도 했다(岑仲勉, 1983 : 29 ~ 36). 따라서 기존에 존재했던 다른 종족들이 匈奴라는 국가를 세운 지배집단과 직접 연결된 증거는 없다는 점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런 명칭의 유사성은 匈奴가 등장하면서 서서히 다양한 명칭을 갖고 있었던 기존의 종족들을 병합하여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주3) 참조)
주 100
北蠻 : 북쪽에 사는 이민족을 의미한다. 蠻은 四夷의 通稱으로 남쪽에 있는 것만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범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주57) 참조)
주 011
“가축을 따라서 먹이며 옮겨 다니며 살았다.”고 한 것은(『漢書』에는 “隨草畜牧而轉移”라고 하여 조금 표현이 다르다.) 몽골 초원에서 이루어지는 遊牧(또는 游牧 : nomadism)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遊牧 : 구대륙 전반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목축 방식의 하나로서, 초식성의 발굽 동물을 길들여 이들을 이끌고 주기적으로 이동하며 살아가는 생활 형태를 말한다. 유목은 거주지를 완전히 바꾸는 移住와 다르며, 또 일정한 중심지를 가지고 이동한다는 점에서 정처 없는 방랑이나 流浪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유목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나 하자노프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고 정리했다. ① 목축은 무엇보다도 경제 행위의 한 형태이다. ② 그 광역적 성격은 축사를 갖지 않고 연중 거리의 제한 없이 방목시키는 가축 사육 방법에서 비롯된다. ③ 주기적 이동은 목축 경제의 욕구에 따라 일정한 목지의 범위 내에서, 혹은 지역 간을 오가면서 이루어진다. ④ 목축 이동에는 성원의 전부 혹은 대다수가 참여한다. ⑤ 생산이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여러 가지 요구를 충족한다(하자노프, 1990 : 50).
이런 특징을 갖고 있는 ‘遊牧’에서 목민들이 가축을 이끌고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은 먼저 계절의 변화에 따른 가축들의 기후 적응과 관련되었다. 왜냐하면 혹독한 환경에서 가축들의 생체 리듬과 기후 변화를 맞추어 재생산을 해야만 했고, 그와 동시에 가축들의 먹이를 제공하는 초원의 생태를 파괴시키지 않아야 되었기 때문이다. 즉, 移動을 통해 초지의 파괴를 막음으로써 이후 다시 그것을 활용하기 위한 ‘再生産 構造의 確保’가 유목의 이유였다. 초원(steppe)은 강수량이 많지 않고 척박해 한 번 파괴되면 다시 그 초지를 복원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 뿐만 아니라 목민들은 제한된 지역을 중심으로 가축을 길러야만 했다. 때문에 가축들이 초지를 파괴하는 것을 막고 재생산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유목 생산의 기본이었다. 따라서 유목민들은 초지 보호와 가축들의 생체 리듬에 맞추어 가능하면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이동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범위 역시 다른 유목민들과의 중복을 피하도록 제한되었다.
또한 遊牧은 자연환경 조건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대체적으로 몽골 초원에 거주하는 목민들은 중앙아시아의 산악지역에서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수직’ 이동하는 유목민들과 달리 비교적 평탄한 구릉을 중심으로 ‘수평’ 이동하면서 가축을 기른다. 그리고 유목민들은 가축을 길러 얻어지는 생산물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사냥 또는 채집을 하거나 약간의 농사를 짓기도 하고 또한 곡식 등과 같이 생산되지 않는 물품을 얻기 위해 농경민들과 교역을 하기도 한다. 구릉 지역을 계절적으로 순환하는 것이 일반적인 몽골 초원의 유목민들의 경우에도 가축의 종류, 지형, 기후 등에 따라 다양한 차이를 띠고 있다. 몽골 초원의 경우에는 지역에 따라 유목의 형태가 다르다. 고비 남부의 內蒙古의 경우에는 동부에서 서부로 갈수록 건조 정도가 강해지고 고비 북부의 몽골공화국(외몽골)은 남에서 북으로 갈수록 건조 정도가 완화되면서 삼림지대로 연결된다. 그리고 동부지역에 비해 서부지역에는 알타이를 비롯한 산지가 발달해 있어 지역에 따라 유목민들의 생활양식이 다르다. 이런 자연환경의 차이는 식생과 가축의 구성 등에 큰 영향을 미쳐 유목민들의 생활방식을 결정한다(後藤富男, 1967;張承志, 1993; 松井健, 2001).
주 012
인류는 신석기시대 짐승을 길들여 생산경제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은 발굽을 갖고 있는 초식성의 ‘有蹄類’였다. 양, 염소, 소, 낙타, 말, 순록, 산양 등이 가장 중요한 가축이었는데, 몽골 초원에서는 이 중에서도 순록과 산양을 제외하고 다섯 가지의 가축을 중시한다. 그중에서도 중요도에 따라 말, 소, 낙타, 양, 염소 순서로 나열할 수 있다. 말과 소, 그리고 양과 염소 등이 가장 기본적인 가축인데, 습기가 상대적으로 높아 덜 건조하고 풀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소의 사육 비중이 높고, 고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낙타, 그리고 북부 산악지역에서는 이끼를 주로 먹는 순록을 일부 사육하기도 한다. 『史記正義』에 인용된 「西河故事」의 “亡我祁連山, 使我六畜不蕃息;失我焉支山, 使我婦女無顏色.”의 기록에 나오는 六畜을 말, 소, 양, 닭, 개, 돼지 등이라고 몽골 초원에서 기르는 가축으로 열거한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주 013
말 : 인류의 말 사육은 기원전 3500 ~ 3000년경부터 시작되었는데, 처음에는 주로 수레를 끄는데 사용되었다. 반면에 말 위에 올라타는 승마를 시작한 것은 중앙유라시아에서 기원전 약 2000년경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유목민들은 말을 타기 위한 다양한 마구를 개량하게 되면서 말을 잘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철기로 마구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유목민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7세기경 흑해 연안의 남러시아 초원에서 국가를 건설하였던 스키타이(이란에서는 ‘사카(Saka)’, 中國에서는 ‘塞’로 기록)였다. 스키타이가 보여 준 기마 유목기술과 다양한 문화는 이후 중앙유라시아 전반에 전파되어 보편적으로 나타났고, 몽골 초원의 경우에도 月氏, 匈奴 등과 같은 세력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다.
몽골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은, 다리가 가늘고 키가 큰 아라비아종의 말과 달리, 체구에 비해 머리가 크고 목이 굵으며 다리가 짧고 둔부가 삼각형의 모양을 띠며 노지에서 풀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뱃가죽이 얇아 축 쳐져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털이 많아 추위를 잘 견디고 오래 달릴 수 있는 지구력이 강한 알타이 계통의 말로 과거 몽골에서 우리나라에 수입된 조랑말이 바로 이 계통의 말이다. 말 무리는 거세하지 않은 수말을 리더로 30마리 정도의 소규모로 구성되어 있고, 이런 작은 여러 개의 무리가 모여서 큰 무리가 된다. 대개 여름철에 어린 말들을 길들여 승마가 가능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킨다.
몽골인은 다리가 4개라고 할 정도로 말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말을 탄 이런 스키타이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인들이 신화 속 켄타우루스의 형상을 만들어 냈을 정도로 유목민들은 말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만큼 말을 자유자재로 잘 탄다. 또한 몽골 속언으로 “안장이 없으면 낮에 굶고, 아내가 없으면 밤에 굶는다.”라고 할 정도로 말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대상이다. 뿐만 아니라 말은 사회적인 지위를 상징하는 성격 역시 강하게 갖고 있다. 몽골 사람들은 駿馬를 과시하며 초원을 질주하는 것을 중시하고, 말에 대한 장식 역시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말에 대한 애정 표시는 머리에 행운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채찍으로 머리를 때리지 않고 애마는 절대로 식용하지 않는다. 식용의 경우에도 모두 먹지 않고 먹은 후에는 오보(Ovoo)에서 제사하고 또한 말의 고환도 거세한 후에 먹지 않는 등 대우를 한다. 또한 유목민들의 지혜는 말에 대한 어휘가 연령, 성별, 털의 색깔, 털의 부분적인 특징, 신체 부위의 특징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어휘가 풍부하다고 하는 것은 어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생활과 지혜가 그곳에 담겨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에 대한 그들의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반영한다.
주 014
소 : 소는 일찍부터 가축화된 동물의 하나이다. 몽골 초원에서 기르는 소는 일반적으로 다른 지역의 소에 비해 약간 작다. 소는 가축 중에서 큰 편에 속할 뿐만 아니라 고기와 젖, 그리고 가죽 등을 제공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가축의 하나로 여겨진다. 몽골 초원에서는 풀이 좋고 습지가 발달한 지역을 중심으로 소의 분포 비율이 높은 편이다. 그리고 소와 비슷하지만 고산지역에서 잘 자라는 야크가 몽골 초원에서는 오히려 더 많이 사육된다. 목민들은 주로 거세한 황소를 주요한 운송수단의 하나로 사용했는데, 匈奴의 경우 車廬(수레 위에 穹廬를 올려놓은 것)를 끄는 데 소를 주로 사용했다(주21) 참조). 또한 소는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기 때문에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에 소를 해체하여 냉동 건조한 다음에 라면의 수프와 같이 고기 섬유질을 모은 형태의 비축양식을 만들었다. 이것은 유목민들의 전투를 할 경우에 안장에 그것을 매달고 이동하면서 바로 물에 넣어 끓여 먹을 수 있는 간편식으로 사용되었다(주37) 참조). 이런 전투 식량의 확보로 인해 중국처럼 많은 보급부대가 필요하지 않았던 유목군대는 기동성 있는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주 015
양 : 털과 가죽, 그리고 고기와 젖 등 의식주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자원을 제공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가축으로 여겨진다. 몽골 초원에서는 한 가정이 200 ~ 300마리 정도의 양을 길러야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양의 사육이 유목 생활에서 이처럼 중요한 만큼 목민들의 모든 움직임도 양의 생태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양의 사육에는 다양한 기술이 필요한데, 먼저 몽골 초원에서는 양과 염소를 같이 사육한다. 이것은 염소가 양에 비해 황량한 지방에서 훨씬 적응력이 뛰어나고 추위도 잘 견디는 특징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과 다른 습성을 이용해 이들을 조화롭게 기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염소를 이용해 양을 방목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양과 염소를 8 : 2 또는 7 : 3 정도 섞어서 기른다.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염소가 한 곳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양을 끌고 다니게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한 곳에 머물러 양을 그대로 두면 한 곳에 머물러 풀의 뿌리까지 먹어 버림으로써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초원의 환경을 파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목의 계절 이동 중에 겨울을 나는 것 역시 양들의 생식 주기와 맞물려 있다. 혹독하고 긴 계절인 초원의 겨울을 나기 위해 유목민들은 가장 많은 가축인 양을 계획적으로 겨울이 접어드는 시점에 임신을 시킨다. 왜냐하면 양의 임신 주기가 150일 정도가 되는데, 따뜻한 봄이 됨과 동시에 출산을 하게 함으로써 재생산 구조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 때나 새끼를 낳게 되면 관리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착하여 생활하는 冬營地와 春營地에서 새끼의 출산과 관련된 노동을 집중적으로 투여해 1년 동안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체계적으로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주 016
橐駝 : 낙타를 말하는데, “등의 살이 전대와 같아서 橐이라고 한다”라는 설명처럼 몽골 초원에는 등에 기름주머니인 혹이 두 개 있는 쌍봉낙타가 주로 사육된다. 이들은 체구가 아주 크고 강인하여 추위에 강하나 더위에 약한 특징이 있다. 초원보다는 주로 고비와 같은 더 건조한 지역에서 사육되기 때문에 “낙타는 고비(사막)의 장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낙타는 털, 젖, 고기 등을 이용하고 짐을 옮기거나 승용으로 사용하는데, 특히 나쁜 자연조건에 잘 버텨 내기 때문에 ‘사막의 배’로서 隊商이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목민들에게 낙타는 그들의 인내력과 강한 힘에 대한 신뢰와 함께 등에 달린 혹 때문에 유머러스한 존재로 이해되기도 한다.
주 017
驘 : 곧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騾 : mule)’이다. 생식기능은 없으나 온순하기 때문에 주로 운반용으로 사용하였다.
주 018
駃騠 : 수말과 암나귀 사이에서 생긴 잡종 말로 ‘버새(hinny)’이다. 北狄의 좋은 말[駿馬]로서 어미의 배를 갈라서 태어나고 이레 뒤에 벌써 어미를 넘어선다고도 했다. 이런 말의 교잡 기술은 목민들이 특수하게 발명해 낸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증명하는 것으로 초원에 성숙된 유목 문화가 발달했음을 보여 준다.
주 019
騊駼 : 푸른색을 띤 말을 뜻하는데, 몽골어로 야생의 노새를 가리키는 ‘치기타이(chigitai)’가 바로 이 ‘騊駼’를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北海(바이칼호)에 있는 말처럼 생긴 짐승 또는 북쪽에 있는 나라의 명칭으로 그곳에서 생산되는 말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
주 101
驒駭 : ‘巨虛之屬’이라 하였고, 驒은 ‘野馬屬’이라고 하였다. 이는 몽골어로 野生馬을 ‘타키(taki)’라고 하는 것과 음이 상통한다는 점에서 野生馬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內田吟風, 1971 : 4). 『漢書』에는 “驒奚”로 되어 있다.
주 021
處 : 일반적으로 유목민들은 목재 기둥과 서까래 등의 골조를 펠트로 둘러싸고 난 다음 그 위에 면포나 가죽을 덮는 조립식 이동용 천막(yurt 또는 ger)에 살았다. 匈奴 시대에는 이런 조립식 천막을 수레 위에 설치한 穹廬에 거주하면서 바로 땅 위에 살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주로 벽부분이 탄력성이 좋고 유연한 버드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사와다, 2007 : 122). 이런 이동식 가옥을 이용해 遊牧民들은 계절에 따라 옮겨다니며 생활했기 때문에 司馬遷의 기록처럼 고정된 주거지를 만들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을 보내야 하는 冬營地에서 목민들은 대체로 정해진 지역에서 머물러 생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계절의 변화에 맞춘 잦은 이동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分地가 일정하였기 때문에 그 범위 내에서 주거지를 만들어 이동하는 생활을 했다.
한편, 계절적 이동을 기초로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에게도 匈奴 시대부터 이미 고정적인 주거지 내지는 소규모의 성곽, 그리고 넓은 농경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일반 유목민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고 유목국가가 건설되면서 그를 위해 봉사하는 외래의 정주민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20세기 이래 몽골과 바이칼 지역을 중심으로 많이 발굴된 匈奴時代의 농경지와 성곽 등의 유적이 그 증거이다. 이를 통해 匈奴의 대외 확장과 함께 몽골 초원과 오아시스 지역, 그리고 중국과 근접한 변경 지역에서 농업이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많은 주거지가 匈奴 영역 내에 건설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서 다양한 종자의 사용만이 아니라 농기구 등을 제작하기 위한 시설 등이 존재했음 역시 확인된다(馬利淸, 2005 : 378 ~ 388). 이상과 같은 유목과 정주의 복합적인 특징은 遊牧國家의 건설과 함께 몽골 초원에 정주와 유목의 이중적인 문화가 공존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漢書』에는 “居”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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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22
分地 : 하나의 가족 내지는 氏族 등이 소유한 分有地를 가리키는데, 이는 유목민들의 개인적인 토지 소유 상황을 설명한다. 즉, 遊牧民들은 개인과 가족들이 자신들의 가축 무리를 먹일 수 있도록 특정 牧草地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유목민들이 토지를 하늘에서 잠시 빌린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토지에서 자라는 풀에 대해서 점유권 분쟁을 일으켰을 뿐이다. 遊牧民들에게는 가축을 먹일 수 있는 초지만이 중요한 것이었지 그 자체의 소유권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목지는 어느 한 개인의 사유지적인 성격보다는 유목집단 전체의 공유물이었고, 공유라는 개념도 엄밀히 말하면 ‘限時的인 獨占的 使用權’에 가깝다. 우선적인 사용권을 갖고 있는 집단이 이용하지 않는 시기에 다른 집단이 양해를 얻어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소유권의 침해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토지 이용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목민들은 나름대로 일정한 목지 내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가능하였다(金浩東, 1989 : 260).
주 023
『漢書』에는 “無文書”로 되어 있다. ‘無’字는 아래의 다른 용례에서는 ‘毋’字로 되어 있다.
주 024
匈奴에는 文字가 없었으나, 기호로 서로 의사 전달하는 수단이 있었음을 다음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鹽鐵論』 「論功篇」 “刻骨卷木, 百官有以相記.” : 357;『後漢書』 「南匈奴列傳」 “主斷獄訟, 當決輕重, 口白單于, 無文書簿領.” : 2944). 현재까지 匈奴에서 사용된 문자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漢나라와의 관계에서 외교문서가 작성 교환되는 등의 예로 볼 때 한자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유목군주를 보좌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독자적인 문자사용 가능성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구소련의 구밀료프(Gumiev) 이래로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해서 몽골공화국 서북부 예니세이강 가에서 발견된 돌에 새겨진 글자와 기호가 증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또한 몽골의 도르주스렌(Dorjisuren)은 발굴된 여러 가지의 토기나 중국제 칠기 바닥에 새겨진 기호를 토대로 14개의 匈奴文字가 존재한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의 일부가 이후 소위 ‘오르콘 룬문자’라고 하는 突厥文字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이것은 기호가 갖고 있는 유사성으로 추정되고 또한 발견된 장소가 토기나 칠기라는 점에서 소유자의 서명 정도로 보인다(사와다, 2007 : 132 ~ 133). 그 외에도 현재까지 몽골 초원 岩刻畵 등에서 발견된 400여 개의 기호 역시 문자라고 단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사용연대의 추정이 어렵다는 점에서 匈奴의 문자 존재 여부를 밝혀주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지 못하고 있다(田廣金·郭素新, 2005 : 483;馬利淸·宋遠茹, 2004 : 49 ~ 53).
주 025
『漢書』에는 “肉食”으로 되어 있다.
주 026
毌弓 : 毌의 音은 ‘관’인데, ‘貫’과 통한다. 이는 다른 기록에서도 확인된다(『鹽鐵論』 「論功篇」 “一旦有急, 貫弓上馬而已.” : 356). 여기에서 ‘毌’은 ‘彎’의 借字이고, 실제로 『漢書』에는 “彎弓”이라고 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활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들이 발명해 낸 것이다. 두 개의 판을 풀을 먹여 합치거나 혹은 나무로 된 궁체 뒷면에 동물의 힘줄을 팽팽하게 붙여 만든 合成弓이다. 길이가 짧은 短弓의 하나이다. 強化弓의 일종인 合成弓은 탄성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사용 후에 시위를 벗기는 것이 보통이다. 시위를 벗기면 궁체는 시위를 걸었을 때와는 반대 방향으로 휜다. 시위를 걸었을 때나 벗겼을 때도 궁체는 직선이나 반달 모양으로 되지 않고 彎曲되기 때문에 合成弓을 ‘反曲弓’ 또는 ‘彎弓’이라고 한다. 合成弓은 활 중에서 가장 발달된 구조로서 그 힘이 강력하다. 궁체의 길이가 짧아도 긴 單純弓에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들은 이 활을 많이 사용하여 그들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Hildinger, 1997 : 21).
주 027
騎兵의 등장은 기원전 2000년경 카스피해 근처에 살던 초원의 주민들이 말을 길들이고 그에 맞는 마구를 개발하여 직접 올라타게 된 이후이다. 그리고 기원전 7세기경 스키타이 등이 유라시아초원에서 최초로 유목국가를 건설하면서 이들의 강력한 위력이 증명되었다. 이런 강력한 전투력을 제공하는 유목 기마 기술은 이후 점차 중앙유라시아의 초원을 따라 주변으로 전파되었다. 이로 인해 몽골 초원의 주민들도 말을 잘 탈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기초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였다. 그들의 중요한 기술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독특한 전술이었다. 이것은 이후에 농경 정주세계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왜냐하면 초기에 말을 길들여 원하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은 고도의 숙달된 기술을 요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환경적으로 말이 잘 자랄 수 있는 초원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농경 정주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말을 사용하였지만 말을 길들여 올라타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따라서 말에 수레를 달아 사용하는 다른 양상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주로 말을 이용한 전차 전술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처럼 두 세계에서의 말의 상이한 사용이 전력상 큰 차이를 가져왔다.
주 028
『漢書』에는 “田獵”으로 되어 있다.
주 029
“편하면 가축을 따라 다닌”다는 기록은 가축들의 생리적 특성에 맞춰 유목을 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새나 짐승을 쏘아 잡는 [사냥을]” 한다고 한 것은 부족한 자원을 보충하기 위한 생업 수단의 하나가 사냥이었음을 뜻한다. 유목민들은 사냥을 통해 부족한 고기를 보충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동물의 가죽과 털을 획득하여 교역함으로써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담비털과 같은 모피가 중요한 교역 물품이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사냥은 개별적으로 행해지기도 했지만 집단적인 몰이사냥으로 상시적인 군사훈련을 할 수 있어 유목민들의 전투 능력을 배가시키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했다.
주 102
司馬遷이 유목민들의 이러한 행태를 “타고난 성품”이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적인 행동’이라고 이해하여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유목민들이 기마궁사가 되는 것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중국인과 달리 이루어진 결과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주 031
長兵 : 射程거리가 긴 長器인 ‘弓矢’를 말한다. 匈奴의 弓矢는 漢나라에 비해 좋은 것은 아니었다. 漢나라는 활과 비슷하지만 기계적 힘으로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무기인 쇠뇌[弩]를 가지고 있었다. 쇠뇌는 활과 달리 사용자의 팔 힘에 상관없이 일정한 강도로 발사되는 것이 특징이다. 활은 익히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만 쇠뇌는 단기간에 조련이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따라서 훈련되지 않은 병사가 사용하기에는 쇠뇌가 활보다 훨씬 편리하였다. 하지만 유일한 단점은 장전시간이 오래 걸려 발사속도가 활보다 훨씬 느리다는 점이었다. 이 무기의 장점에 대한 지적은 晁錯의 “勁弩長戟, 射疏及遠, 則匈奴之弓弗能格也(『漢書』 권49 「晁錯列傳」 : 2281).”라는 말에 잘 드러난다.
주 032
匈奴는 漢나라에 비해 열등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쓰는 활과 화살의 전술적인 활용를 극대화함으로써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匈奴가 주요한 무기인 弓矢를 이용해 輕裝騎兵의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목민들이 기동력이 둔한 적을 만났을 때 적을 향해 돌진하다가 가까운 거리에 이르면 갑자기 일제히 말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흩어지면서 뒤돌아보듯이 좌후방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쏜 다음에 멀리 도망가는 전술이었다. 기마궁사들은 이런 방법을 반복적으로 구사해 적을 어지럽게 한 다음에 격파하였다.
유목민들이 활 쏘는 모습은 고구려 벽화 무용총 기마 수렵도에서 말을 탄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활을 쏘는 자세와도 같다. 이를 일반적으로 ‘파르티아式 騎射法(Parthian shooting)’이라고 한다. 匈奴 역시 이런 전술에 익숙하였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말 위에 탄 상태에서 상반신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기마법이 필요하였다. 이것은 화살을 쏠 때 반동이 적은 ‘側對步(amble)’이다. 側對步는 같은 쪽의 두 다리가 서로 근접하는 일이 없게 앞의 왼발과 뒤의 왼발이 동시에 들리는 주법(走法)이다. 이 방법은 속도를 내면 말의 어깨 쪽이 떠올라 말을 탄 사람이 넘어지기 쉽고 선회가 어려운 점도 있었다. 하지만 대신에 쉽게 정지할 수 있고 말을 탈 때 거의 반동을 느끼지 않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이런 기마에 능숙하게 훈련이 된 유목민들은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활을 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한나라에 비해 장비 및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와 사냥에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주 033
刀 : 匈奴에서 사용한 칼은 길이가 길지 않은 소위 ‘아키나케스 단검’이라고 부르는 동검(또는 철검)과 유사하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그리고 스키타이에서 사용한 양날의 칼인데, 騎馬에 편리하게 50㎝ 이하로 만들었다. 이런 형식의 칼이 점차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기원전 6 ~ 3세기경에 시베리아, 몽골, 화북 지역에 보급되었다. 고고학적인 발굴 자료에 따르면 匈奴時代 칼의 모양은 양쪽에 날을 가진 단검으로 날과 자루가 하나로 주조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칼끝이 상대적으로 좁고 곧은 검코 모양을 띠고 있고 자루 끝이 버섯 모양, 동물 머리 모양, 다양한 고리 형태 등이었다. 단검에 장식된 가하학적 문양과 유사한 것이 칼자루에도 있었다(馬利淸, 2005 : 77 ~ 78). 특히, 이런 단검 ‘徑路刀’라고도 하는데, 그 어원을 추적해 보면 킹룩(king luk; 徑路)은 아키나케스(Akinakes)의 약어인 키낙(Kinak)의 전사음으로 볼 수도 있다(內田吟風, 1971 : 4).
주 034
鋋 :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史記集解』는 “모양이 창과 비슷하나 쇠로 된 자루가 있다(鋋形似矛, 鐵柄).”고 하며 『史記索隱』에서는 “작은 창으로 쇠로 된 자루가 있다(小矛鐵矜).”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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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35
이것은 앞서 설명한 유목민들의 ‘파르티아式 騎射法’을 사용한 경장기병의 전형적인 전법과 관련이 있다. 중국인에게 낯선 이런 전법의 기록은 이 시대 匈奴와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그들에 대한 이해가 심화된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적은 도망함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다.”는 『左傳』의 기록과 비슷한 이 『史記』의 설명은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편견을 담고 있다. 명예와 희생정신을 중시하는 중국의 군대는 물러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는 司馬遷만이 아니라 그리스·로마 사가들의 초원 유목민들의 전투 방법에 대한 기록에서도 보인다(디코스모, 2005 : 361).
주 036
몽골의 속담에 “3일을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초원에서 유목민들의 삶은 힘들다.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주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예의와 같은 것은 따질 수 없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초원의 유목민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언제든지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런 태도를 司馬遷은 예의를 모른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주 037
食 : 匈奴의 음식은 현재 몽골 유목민과 비슷하게 가축의 고기를 위주로 하는 육식이 일반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현재 몽골인들의 식생활과 연결시켜 설명해 보면, 육고기는 주로 양고기를 일반적으로 많이 먹는다. 그 조리 방법은 소금물에 고기를 삶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다. 그 외에 소고기나 사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다른 고기도 먹는다. 또한 장기간의 보존을 위해 생고기를 냉동 건조시켜 저장해 두었다가 이것을 물에 넣어 끓여 먹는 방법 역시 발달하였다(주14) 참조). 가축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젖 역시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식품으로 제작되었다. 젖을 약한 불에 가열해 유지방을 모은 다음 산과 효모 등으로 응고시킨 駝酪이 그것이다. 이 駝酪을 바짝 졸여 직사각형이나 구형으로 만들어 햇볕에 말리면 煉乳(固乳)가 된다. 이것은 빻아서 물에 녹여 먹을 수 있는데 휴대가 간편하여 유목민들에게 좋은 식량이 되었다. 그리고 여름철에 말의 젖을 가죽 포대에 넣고 계속 저어 유산분해로 발효시켜 馬乳酒를 만들었다. 또한 이것을 다려 만든 燒酒 형태 등의 주류가 중요한 기호식품으로 음용되었다. 그 외에 일부 정주민들이 경작하는 농경지에서 나오는 곡물이나 야채 등을 식용하기도 했으나 그것은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했다.
주 038
旃 : ‘毡’과 같은 의미로, ‘모전[毡]’을 의미하는데, 봄철 털갈이를 하기 전의 양이나 낙타, 염소 등의 털을 깎아 그것을 짜거나(양탄자) 다져서(펠트) 만들었다. 갖옷[裘]은 가죽을 무두질하여 만든 옷이다. 동물로부터 얻어지는 자신들의 기본적인 의복 이외에도 중국과의 관계가 활발해짐에 따라 귀족층을 중심으로 많은 비단옷이 사용되기도 했다. 몽골 초원지역에서 모직물의 의류와 함께 발굴된 비단 자수로 된 겉옷이 그 증거의 하나이다. 아래에 첨부한 사진은 몽골 노인 울라 유적에서 발견된 흉노시대의 의복들인데, 당시 지배층의 의복 형태를 추정하게 한다(馬利淸, 2005 : 88 ~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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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039
司馬遷은 이와 같이 적고 있으나, 유목민들의 경우에도 노인의 지혜를 그 사회 유지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이 기록은 사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匈奴의 모습은 실제 핵가족 단위의 생활을 유지하는 유목민들의 습성과도 관련되었다. 왜냐하면 혹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유목민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게 될 경우 일단 젊은 남자에게 먹을 것을 주어 그가 더 많은 것을 얻어올 수 있도록 하는 배려가 유목적인 지혜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이후 中行說이 漢나라의 사자와 논쟁을 벌이는 장면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주374) 참조).
주 103
아비가 죽으면 그의 아들이나 동생이 그 후처를 아내로 맞고, 형제가 죽으면 남아 있는 형이나 아우가 그 아내를 차지했다. 이것을 학술적으로는 ‘嫂婚制’ 또는 ‘兄死取嫂’ 내지는 ‘收繼婚(levirate)’이라고 한다. 이것은 가계를 상속하는 사람이 선대의 아내를 계승함으로써 종족의 혈통이 없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목적에 기인했다. 왜냐하면 異姓 아내의 경우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그 출신 씨족에게서 얻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나 형의 후처를 아들이나 동생이 다시 취함으로써 혈족의 단결을 유지하고 재산이 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武沐, 2005 : 42).
주 041
『漢書』에는 “無字”라고만 하였다. 반면에, 사실 匈奴에 欒鞮氏, 呼衍氏, 須卜氏 등의 氏姓이 있었음은 本傳에서도 확인된다. 이런 점에서 성이 없었다는 『史記』의 기록은 착오이거나 아니면 匈奴 이전의 옛 北方民族의 습속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름
[도]당[씨](陶唐氏) , [유]우[씨](有虞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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