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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청국경회담자료집

백두비기고(白頭碑記攷) :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진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에서 청국이 두만(豆滿)을 토문(土門)이라 하는 것은 부당함을 밝힘

白頭碑記攷
肅宗朝壬辰定界碑
高通尺二尺餘廣一尺餘額題大淸二大字橫書正面九行一行八字二行十二字三行十字四行三字五行十一字六七行十字八九行八字皆正書石質靑頭背左右琢而不磨本無坐臺鑿壠而立以大石塡後在白頭山大澤東下十里許
大淸烏喇總管穆克登奉旨査邊至此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右額題及一二三四行
康熙五十一年五月十五日筆帖式蘇爾昌通官二哥右五六行
朝鮮軍官李義復 趙台相差使官許樑 朴道常通官金應瀗 金慶門右八九行
烏喇總管穆克登先遣筆帖式三人馳啓于淸帝曰本年四月二十九日離厚州江三十里有朝鮮國王所遣接伴使朴權咸鏡道觀察使李善溥來接三十日渡江騎朝鮮馬循其北鄙行二百餘里至惠山朝鮮國王又遣戶曹叅議來排宴床情念款洽禮貌甚恭此皆感皇上之恩敬大國之使從惠山起身至劒川道溝以朝鮮二使臣年老率重駄同副使一人一路往茂山去臣一路減行粮約騎從只帶朝鮮微官數員登白頭山觀池水西爲鴨綠東爲土門遂於分水嶺上立石爲記北流之水未知何向云是烏龍江也循土門江而下今方觀察事完回京云云
金評事璿鏡城元師臺碑閣記曰不佞奉 旨比士于愁州 溫平遂間其暇日隮不咸之頂以望先春 烏喇之界鄆讙陽關之田殆周千里烏虖詩有之召公日辟國百里今也日蹙國百里余仰天而嘻喟然而息烏喇總管穆克登之來定界也巡按而下稱疾不會惟土校若而人從朴道常與焉是豈殺人盈城殺人盈野而後失之哉坐而喪之而不知所以喪之也又不足與論於蹙國也慷慨咄唶殆怒髮之將衝冠也淸人之來聲言取發祥之地是誠不可以口舌爭然周禮天子祭五嶽漢武帝時魯獻泰山 五嶽在固不害於諸侯之國也若以周漢之禮詰之彼必樂而聽之不幸爭而不見從彼必謂秦有人焉不猶愈於坐而喪之而不知所以喪之也歟道常有箚記云人如飛人馬如飛馬蓋如僬僥之見長人震栗碎易而不暇自飾也烏虖然爾則尹文肅公其夫人也已矣方金虜之席卷天下也其勢豈下於滿人哉然按甲長驅斥地數千莫有與誰何者悲夫彼獨何人哉
白頭山上古無定碑只以山麓江派爲界高麗時立定界碑於先春嶺白山戌亥方一枝迤東列麓於松花江北濱者也我 朝疆土人民乃麗氏之舊有故每以先春標北界之銅柱矣萬曆年間淸人起自建州松花以北亦其基本康熙壬辰聲言取發祥之地命穆克登白頭定界夫兩國天作之限以山麓而無踰先春嶺以江派而莫若大澤北流之水矣界以此嶺此水則彼所謂發祥恐屬我疆故穆克登指其北流曰未知何向遂尋白山東麓別名曰分水嶺任意自斷勒石著記噫我國重臣老㥘自蹲只付微官備員傍觀無一口苦爭坐失我東方千年先春之舊限志士公憤禁自不得觀於後來金評事元帥臺閣記槩可想矣今北流之水姑雖未論土門之分乃是素定也近年談辦彼强指豆滿土門土門之定昔屈於肆然號令之勢尙蹙我疆況當此公法交好之世又欲蹙土門之南而苟無明白査勘則又以滋後人之惑矣玆附辨說以俟通考
北輿要選上
北輿要選下

색인어
이름
穆克登, 李義復, 趙台相, 許樑, 朴道常, 金應瀗, 金慶門, 穆克登, 朴權, 李善溥, 金評事璿, 穆克登, 朴道常, 漢武帝, 尹文肅公, 穆克登, 穆克登
지명
白頭山, 鴨綠, 土門, 分水嶺, 朝鮮, 厚州江, 朝鮮, 惠山, 惠山, 劒川, 朝鮮, 茂山, 朝鮮, 白頭山, 鴨綠, 土門, 分水嶺, 土門江, 鏡城, 愁州, 溫平, 先春, 烏喇, 泰山, 五嶽, 白頭山, 高麗, 先春嶺, 白山, 松花江, 先春, 建州, 松花, 白頭, 先春嶺, 白山, 分水嶺, 先春, 土門, 豆滿, 土門, 土門, 土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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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비기고(白頭碑記攷) :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진 서위압록(西爲鴨綠) 동위토문(東爲土門)에서 청국이 두만(豆滿)을 토문(土門)이라 하는 것은 부당함을 밝힘 자료번호 : jc.d_0008_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