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넷

상세검색 공유하기 모바일 메뉴 검색 공유
닫기
리스트

일본군위안소지도

상세검색

닫기
제목
본문
역사이슈 열기
ID :NAHF.iswm.d_0010IDURL
역사이슈 열기
  • 글씨크게
  • 글씨작게
  • 프린트
  • 텍스트
  • 오류신고

미얀마

 
 

피해와 고백

 

1941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의 개전과 동시에 미얀마와 충칭(重慶)을 잇는 장제쓰(蒋介石) 지원 루트 차단을 위해 일본군(제 15군)은 미얀마 진공작전을 개시하여 1942년 3월 8일 수도 랑군을 점령하였다. 장제쓰(蒋介石)가 보낸 원정군은 미국의 스티루웰의 통일 지휘 하에 들어갔으며, 미얀마 전역의 공략을 위해 일본군이 증원한 제 18사단과 제 56사단은 연합군과 각지에서 격전을 벌렸는데, 일본군은 5월 1일에 만달레이를, 8일에 북부 미트키나를 점령하고 5월말까지는 미얀마 전역을 제압하였다. 일본군은 미얀마를 제압하자 부대 주둔지에 위안소를 개설하고 「위안부」유치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1991년에 자기공개한 문옥주씨는 미얀마의 위안소에 들어갔던 첫 증언자였다. 1942년 7월,「일본군 식당에서 일한다」는 말에 속아서 미얀마에 주둔하고 있던 방패(楯) 8400부대의 만달레이의 위안소에 들어갔으며, 그 후 방패(楯) 사단과 함께 아캬브의 위안소로 옮겨졌고 영국군의 공격이 심해지면서 프롬, 랑군으로 이동하였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도 1993년에 박영심(朴永心)씨가 자기공개를 하고 미얀마로 연행되었다고 증언. 박씨는 1942년 8월에 난징(南京)의 위안소에서 랑군으로 끌려갔는데 이와 부합되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이다. 이것은 연합군이 미얀마에서 체포한 「위안부」와 일본인 경영자를 심문한 보고인데 그에 따르면 1942년 8월, 약 800명(조선인「위안부」703명, 일본인 남녀 90명 정도)를 태운 배가 랑군에 상륙, 여성들은 각지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박씨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된다. 박씨는 라시오의 위안소에 들어갔는데 미트키나(미치나)로 연행된 여성들도 있었다.
미얀마에서는 조선인, 중국인, 대만인, 일본인 외에 현지 미얀마인 여성도 「위안부」가 되어있던 것이 모리카와 마치코(森川万智子)씨의 조사로 확인되고 있는데, 미얀마인 피해 여성이 공적으로 자기공개한 경우는 없다.

 

정부의 대응과 피해 여성

 

1952년 미얀마 정부가 대일 전투상태 종결선언을 하고 1954년에 미얀마에 대한 배상교섭이 타결되었으며 1955년에 일본․미얀마 평화조약, 일본․미얀마 배상협정․경제협력협정이 발효되었다. 1963년에 배상협정 재검토 조항에 기초한 배상 증액 교섭이 이루어져 경제협력협정이라는 형태로 1965년부터 1977년까지 실행되었는데, 정국이 계속 불안정한 가운데 미얀마인 여성의 피해자가 공적으로 신고하는 일도 없어 현지에서 「위안부」문제가 공개적으로 언급된 적은 없다.

 

태그 :

태그등록
이전페이지 리스트보기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