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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타이의 위안소

 

구 일본병의 증언에 따르면 타이에도 위안소가 만들어져 타이인 「위안부」가 타이와 말레이시아에도 있었다고 하는데, 피해자의 공적인 신고가 없기 때문에 그 피해 상황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하야시(林博史)씨의 연구논문 (「マレ-半島における日本軍慰安所について」關東學院大學 경제학부 일반교육론집『自然 .人間 .社會』第 15호, 1993年7月)에 소개되어있는 말레이 반도에서의 위안소 개설, 관리를 맡았던 제 25군 병참 소속의 일본병이었던 B씨의 말에서 그 양상을 엿볼 수 있다.
1942년 1월 2일 말레이반도의 상륙지점 싱고라에 있었던 B씨를 포함한 병참의 장교 이하 3명에게 방콕 출장명령이 떨어졌다. 임무에는 「위안부」모집도 있었다. B씨 등은 방콕 사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 기업의 주재원에게 부탁하여 타이 각지에서 23명의 매춘부를 모집하도록 해주었으나, 성병 검사에 합격한 것은 타이인 여성 3명뿐이어서 이 3명을 데리고 돌아가, 2월 초경에 타이령의 하자이와 싱고라에 위안소를 개설하였다고 한다.
쿠알라룸푸르에서는 7지역에 16곳의 위안소가 개설되었다. 「위안부」의 대부분은 중국인으로 다음으로 많았던 사람은 조선인 여성(약 20명)이었으며, 그 외에 타이인 여성 3명, 인도인 여성 2명, 쟈바계의 여성 3명도 있고, 말레이시아인과 중국인의 혼혈, 쟈바인과 말레이시아인의 혼혈도 있었다고 한다.

 

전후(戰後)에도 타이에서 산 노수복(盧壽福)씨

 

일본군이 패전한 후에도 말레이시아와 국경이 가까운 남부 하자이에서 현지 중국계 타이인 남성과 결혼하여 살고 있던 조선여성이 있었다. 노수복씨이다. 노씨는 1942년에 부산에서 우물물을 긷고 있다가 일본인 순사에게 불려가 손을 묶인 채 차에 실려가, 군함으로 싱가포르로 연행되어갔다. 위안소에 보내져 하루에 수십 명이나 되는 일본병을 상대하였는데 부대와 함께 말레이반도를 북상하여 태국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이 항복하여 1945년 6월 영국군에게 항복하여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귀국선이 왔으나 엄격하셨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자 「이렇게 더럽혀진 몸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수용소를 탈주하여 그대로 타이에 남았던 것이다.
일본에서 노수복씨의 존재를 재빨리 전한 것은 당시 아사히신문(朝日新聞)사 기자로서 싱가포르 특파원이었던 마쓰이(松井) 야요리씨였다. 1984년 11월 2일 석간에 게재되었던 노수복시의 기사는 마쓰이(松井)씨가 처음 「위안부」에 대해 쓴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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