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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일본인 여성의 피해

 

아시아 각지의 위안소에 이송된 일본인 여성의 상당수는, 공창 제도 하에서, 궁핍한 집에서 유곽에 팔리고, 전쟁터의 위안소에 보내진 사람들이었다. 오키나와에서는 1944년에 오키나와 수비군이 편성되었을 때, 일본군은 나하(那覇) 경찰서에 위안소를 만들도록 신청했다. 사거리 유곽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하도록 명령해서, 약 500명의 여성이 위안소에 넣어졌다. 지금까지의 조사로, 오키나와 섬 전체에서는 145개소의 위안소가 확인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이나 대만으로부터 온 여성도 포함되어, 몇 사람이 「위안부」로 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일본 정부가 만든 마지막 위안소는, 패전 3일 후인 1945년 8월 18일, 내무성이 각 현의 경찰에 지시해 만들게 한 진주군을 위한 R.A.A(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 특수 위안 시설 협회)였다. 매춘 업자를 동원해서 여성을 모을 계획이었지만, 아무리 해도 시간에 맞출 수가 없어서, 가두나 신문에서 「신일본 여성 구한다」라고 공모했다. 그러나 기독교 관계자나 미국 본국으로부터의 비난과 성병의 만연을 이유로, 46년 3월에 폐쇄. 여기서의 가혹한 체험으로, 병에 걸리거나 자살하게 된 여성도 적지 않다.

 

일본여성의 자기공개와 일본 사회

 

위안소에서의 체험을 말하는 일본인 여성의 증언이나 수기는, 1970~80년대에 나왔다. 시로타 스즈코(城田すず子)씨는 1971년, 대만이나 팔라우 등의 위안소에서의 경험을 수기로 저술하고, 85년에는 「가니타 부인의 마을(かにた婦人の村)」에 「위안부」의 진혼비를 세웠다. 그녀는 매스컴에 크게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다. 오키나와에 잔류한 한반도 출신의 배봉기(裵奉奇)씨는 75년에 「위안부」였던 일이 알려져 경험담을 취재를 하거나 지원 활동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위안부」지원 운동이나 위안소의 조사 연구를 하게 된 것은, 김학순(金学順)씨의 자기 공개가 있었던 90년대 이후이다. 각국의 피해 여성에 의한 재판 지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NGO가 활동을 시작해, 오키나와나 각지의 산업 위안소, RAA등의 조사도 진행되어 왔다. 「위안부」핫 라인을 계기로 일본에 있는 송신도(宋神道)씨에 대한 지원 활동이 계속되고 있지만, 얼굴을 내놓고 증언하거나, 출판물을 통해 자신의 체험을 출판한 사람은 시로타 스즈코씨, 오키나와의 우에하라 시게코(上原栄子)씨 등, 극히 소수 밖에 없다.
90년대 후반부터의 우파에 의한 「위안부」공격이나 역습으로 중학의 역사 교과서로부터 「위안부」기술이 사라지고, 매스컴은 이것을 금기시하여 보도를 자숙해, 정부는 「위안부」문제는 해결이 끝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위안부」문제에 대한 여러 가지 대처나 여성 국제 전범 법정의 성과를 보존·공개·계승하기 위해서, 2005년에는 도쿄에 액티브·박물관 「여자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 탄생했다. 각 NGO는 피해국의 운동체와 연대하면서, 일본 정부가 공식 사죄와 배상을 하도록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일본국내에 만들어진 위안소

 

국내에 설치한 위안소에는, 유곽을 군의 지정 위안소로 한 케이스나, 군위안소로서 설치한 것이 있다. 그 밖에 댐 건설이나 탄광 등에도 위안소가 만들어졌지만, 이 지도는 이 노무 위안소가 아니고, 군대 위안소에 한정하고 있다.
홋카이도 구시로(釧路)에서는 해군 제3어뢰 함정이 시내에 있던 유곽 6채를 지정 위안소로 하고 있었다. 지바현(千葉県) 기사라즈(木更津)에는, 해군 전용의 위안소가 6채 건설되어 일본인이나 조선인 여성이 들어가 있었다. 또 지바현 모바라(茂原)에도, 해군의 위안소가 7채 설치되었고, 나라현(奈良県)의 야나기모토(柳本) 비행장을 건설하는 곳에서도, 군인용의 위안소가 설치되었다. 이와 같이 군사시설 공사를 지휘·감독하는 군인을 위해서 위안소가 설치된 케이스는, 일본 내에 다수 있었다.
한국의 강덕경(姜徳景)씨는 1944년 여자 근로정신대로서 도야마현(富山県)의 후지코시(不二越) 공장에 동원되어 일하고 있었지만, 가혹한 노동과 공복에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다. 그렇지만 그 도중에 헌병에 잡혀 트럭으로 군의 부대에 연행되어, 칸막이를 한 텐트에서 1일에 10명 정도의 군인의 상대를 하게 했다고 한다. 강덕경씨는 마츠시로(松代)를 방문했을 때에 본 기억이 있다고 했지만, 실제 강덕경씨가 들어간 위안소가 어디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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