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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 년도
  • 나이
  • 내용
  • 1928년
  •  
  •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출생
  • 1943년
  • (16세)
  • 집에서 취업사기로 연행
    경산-대구 소개소-서울 소개소-하얼빈-내몽고-북경으로 이동
  • 1944년
  • (17세)
  • 북경, 장가고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
  • 1946년경
  • (19세경)
  • 압록강 거쳐서 평양으로 귀국
  • 1947년경
  • (20세경)
  • 서울에서 유곽 생활
  • 1948년경
  • (21세경)
  • 군산, 여수 등지에서 요릿집 생활
  • 1949년
  • (22세)
  • 여수에서 첫 아들 임신, 고향으로 돌아간 후 출산
  • 1953년
  • (26세)
  • 동두천 등지에서 양색시, 달러 장사로 생계유지
  • 1957년경
  • (30세경)
  • 둘째 아들 임신, 출산
  • 1977년경
  • (50세경)
  • 식모살이, 냉면 장사로 생계유지
  • 2001년
  • (74세)
  • 일본군 ‘위안부’ 등록
  • 2004년
  • (77세)
  • 경북 경산의 영구 임대 아파트에서 혼자 생활

경산 위치 →서울 위치 →하얼빈 위치 →내몽고 위치 →북경 위치 →장가고 위치 →평양 위치 →서울 위치
“내 나고는 선물 받고 하는 게 제일 원이라 안 카더나? 꽃 한 송이를 안 받아 봤다. 내가 본대 꽃을 좀 좋아하는데도 안 받아 봤어. … 꽃 받은 사람은 얼매나 좋겠노.
“생화는 그렇게 곱게 있다가 말이야 한 일주일씩 가면은 시크머이 시들어지는 거 보이, 아이구 우야꼬 싶어 가지고는 뵈기 싫어. 그래서 인자 이거(조화)를 사다 [놓았지]. 인제 평생 봐도 되고. [더러워지면] 말간 물에 탁 해 가지고 [물은] 뿌리 뿌고 저래 꼽아 놓으면 금방 살았는 거매로.

의심증

병원도 병을 진찰하면 아는가 봐, 마음을 진정하라 카매.
“내 그마이- 안 살라고, 다 버리고 다- 버릴라 하고, 옛날 꺼. … 우리 동생 술 먹고 죽는 거 보이 인자 술 먹고 죽어야지 하고는 난 더 먹고 죽을라고 막- 소주 먹었다, 소주 댓 병으로. 그라다 보이께네이 훈이할매가 떡 들어오는데 주 131
각주 131)
캄보디아로 끌려가 1997년에 발견된 훈 할머니가 한국 국적을 되찾고, 김순악이 거주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아파트로 이사 오는 광경을 목격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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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을 치겠더라꼬. … 인자 텔레비전 보면 아- 저런 사람도 다 사는 데 나는 누가 들봐다 보겠노. … 어데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되겠노? 어떻게 해야 되겠노.
“이 눈 눈 눈 하러 병원에 가이께네 주 132
각주 132)
김순악은 2001년 백내장 수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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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 데리러 오라카는데 천지에 데리고 갈 사람이 없어. 그래 가지고 삼만 원 주고 여그 아는 사람 데리고 갔다커이.
“병원도 병을 진찰하면 아는가 봐. 마음을 진정하라 카매. 하! 맞다. 병원이 안다싶은 기. 만날 날 잡으러 오는 [것 같고] 여여(화장대에) 받치도 깜짝깜짝 놀래고. … 그런 병이 한없이 들어앉았다 이 말이야. 우울증에다 뭐, 의심증 아 있나? 사람이고 뭐고 뭐 의심하는 거. [물건을] 이렇게 끝퉁이에다가 놨두기로 하면 반듯이 해 놔야 내 맘이 좀 낫지. 하지 못해 양말 같은 거도 한 컬리 벗어 놓으면 그걸 빨아 뿌리야 마음이-.
“마음이 막 그리 급하고, 짜증만 나고, 내 혼자 자꾸 그런 마음을 억씨 오래 가졌다고. 내 속으로 욕하면서 에이 씨-팔 가서 술이나 한 잔 먹어야겠다이라면 또 인자 술 꼴딱 구신 되다시피 해야 들어와야 된다. 그래야 잠자고 배고픈 줄도 모르고 술만 먹으면 그저 에헤-하고 … 그만한 병을 내가 가지고 있었다.
“아가씨나 머심애나 얼래나 사람을 안 만나고 싶다 카이께네. 사람을 만내서 이런 얘기도 하고 이래야 되는데 어디 통한 데가 없으끼네이. 내가 이야기해가 ‘어이구 그랬구나, 참 애 묵었다’ 이렇게 보드랍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
“인자 마이 좋아졌어. 술 안 먹고는 이런 말을 주끼진(이야기) 안 해.

유곽

베린 몸띠기 때문에 처녀가 아이고.
“남자들캉 한 번 자도 버린다 카는데 수십 명씩을 그렇게 했는데, 내 몸이 온당하나. 나는 인자 아주 베린 기지. … 애초에 돈 벌러 나가 가지고 엉뚠 데 [가서] 이래 됐으끼네이, 잘못 살았는 거 아이가?
“내가 [해방 후] 동짓달인가 섣달인가 서울 넘어 와 가지고 생전에 안 와본 서울을 어떻게 어두로 찾아가겠노. 아는 데를 찾아가겠나 어델 찾아가겠노. … 덜덜덜 떨고 있으이 어떤 지게꾼이 ‘누구 기다리고 있는가’ 이래, 불쌍한가 밥 사준다고. 어떤 밥집에[서] 사주더라 카이께네. … 그래 나를 밥 먹는 데로 보내달라고 캐노이께네 어떤 큰 식당 집에 보내줘가, 식당에서 일하다가.
“식당 같은 데 일하면 밥이나 얻어 묵고 잠잤다 뿐이지 돈 주는 거는 없거든.
“[지게꾼이] 다 큰 가시내가 그런 데 있지 말고 차라리 돈 벌라면 몸띠 파는 색시들도 있고 이래이께네.
“그래 몸띠 파는 데 댕기가 가지고 몸띠도 팔고 그라이께네 돈이 퍼뜩퍼뜩 [모이대]. 옷도 빤듯이 해 입고 인자, 그런대로 인자 깨달았지. 그래 가지고 [고향에] 몇 해로 안 왔지 뭐.
“인제 이왕 이까정 왔으께이 돈만 거머쥐면 인자 간다. 애들(동생)하고 엄마하고 지지리 뭐 못 살고 있는데, 그땐 돈만 벌이만 인자 일 년이고 이 년이고 나는 돈만 벌이면 집에 간다 인자 그거만 생각했지. … 돈 따매로 내가 이렇게 나갔더랬는데. 목숨만 살아왔는 것도 부모님은 [좋아]할 낀데도.
“그런 유곽 찾는 것도 나는 베린 몸띠기 때문에, 처녀가 아이고 생 가시내가 아이란 말이야. 돈 벌라 카믄 저런 데 가야되는구나 하고 소개소로 물어물어 찾아서 그런 데로 갔다고.
“한국여자도 유곽에 많고. 아주- 고운 거만 뽑아, 날씬하고 이쁘고. 나는 옷을 해 입혀 놔노이께네이 기가 차. 이쁘겠지 뭐 그때. … 그때는 내 육공 말을 했다, 여섯 나라 말을. 담배라 카는 말도 알고, 한마디 들으면 다 아는가 봐. 담배는 쎄가래고, 오케이 하는 거. 재떨이는 에스제이.
“돈 더 잘 벌일라고, 퍼뜩 벌려고 인자 전라도로 가 가지고 인자 군산 갔다. 군산 가 가지고 또 좋은 집에 들어가 가지고 또 이래 손님 받고 돈 벌이고. 또 그래가 여수에 갔다.
“스물하나, 둘 때 인자 여수 가 가지고 인자 지금 겉으면 뭐라카노? 몸띠 안 팔고 술만 파는 집에 들어갔다, 요릿집. 손님 인제 꽉 오면 인제 상 크게 차리 놓고 그런 데 가 가지고 술 마시고, 그때부터 술 마셨다 이 말이야.
“술 따라 주고 술값도 계산하고 손님 오면 알래(안내)하고, 그럼 도꾸이(단골) 손님들이 한패썩 안 오나? … 그때부터 인제 몸띠 파는 거는 또 싹 끊고.
“요릿집에 있을 직에는 [손님들이] 무진장 많이 [나를] 찾지, 좋다고. 잘 주끼지, 술 잘 먹지, 끼고 놀기는 마 희한했다 참말.

임 순경

이제 한국사람 정이 쪼매 들었다.
“어떤 순사가 나를 착하게 잘 봤던동, 단골 손님 중에. … 자기 쉴 참에 한 번썩 와 가지고 이얘기도 하고 그라더라. 그래서 이제 한국사람 정이 쪼매 들었다. 애인매로 그래 알고 댕깄는데. … 그래 거 있는 친구들도, 다 ‘너거 애인이다’ 캐싸믄서, ‘임 순경 왔다’ 이캐샀고 그래 꼭 나를 불러 주면 인자 독상 안 주나 뭐. 그래 우째 친해 가지고 함 그래 잤던가 봐. 그것도 뭐 잤는 거는 알지만은 애 밴줄을 몰랐어.
“인제 멘스가 없이끼네, 그래 친구들캉 앉아 가지고 ‘아이고 야, (소근거리듯이 가는 목소리로) 니 순사하고 잤구나?’ 이래.
“‘그래 잤다.’ 이러이끼네, 친구가 인제 누구 딴 순경한테 물어 보이께네 [임 순경이] 어데 갔다 그래. 얼래나 하나 배 가지고는 내 혼자만 돈 좀 벌어가 [고향] 가자 카는 도중인데, … 여수반란사건이 났어. 그러이께네이 내가 여기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애 배 가지고 [고향에] 내려왔다고. 이 사람 통 안 보이는데 어떡해, 애는 뱄는데. 스물둘에 애를 뱄는기다 인자 말하자면.
“한 이 년꺼정도 그 사람[하고] 안 친했제, 한 일 년도 안 친했겠다.
“애 배기 전에 [고향에] 편지 연락하이 아부지가 돌아가셨다 그래.
“[아버지는] 나무 짐을 댕기고 하이께네이 대구 있으면 나를 찾아 볼라고 캤는데. … 엄마가 그카는데 ‘너 찾을라고 너거 아바이가 몇 번 찾아 보이께네 못 찾고, 누가 이야기 들었다 카는데 서울로 갔다 카더라. 너거 아바이가 그카더라’ 이카대. 우리 아부지가 해방 돼가 내가 집에 오기 전에, 천날만날 나 따문에 병이 들어 가지고, 논둑에 앉아 가지고 해나 우리 순악이 오는가 싶어가 그래 기다리다 기다리다 내 여기(고향집에) 오기 전에 (울먹이며)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지.
“첫 번 편지에다 취직했다 카고 돈 벌으는 중이라 카면서 [엄마에게 보내니] 살았으이 다행이다 카고. … 아부지가 그래 너만 기다리다 죽었다고 카는데, [아부지] 죽고 나서 갈라커이 오지 말라고 캐가, 자꾸 자꾸 [편지] 연락만 됐지.
“그렇게 임신해 가지고 [고향에 가니] ‘신랑도 없이 지랄하고 자빠져가 왔다’고. 우리 엄마가 내매로 이래 뚝뚝하거든. 그래노이 [내가] ‘신랑이 인자 오겠지 뭐. 아이(아직) 소식 없이께 우야는고’ 그랬다.
“여게 와 가지고, 낳아 가지고 한 삼 년 넘게 있었지.
“엄마가 있고 하이께네 내 가 가지고 어데 돈 벌 데도 있고, 내 전에 아는 사람도 어데가 있는지 함 찾아 보고 그란다고 [동두천으로] 올라갔지.
“내가 객제(객지)를 댕기다가 보이께네 어데다 [아이를] 둘 데가 있나 그래. 친정밖에 더 두나?

장사

양키 물건 장사도 하고, 양키 색시 장사도 하고.
“박 대통령 할 때 양키 물건 장사도 하고 양키 색시 장사도 하고. 내- 하던 거, 우리 배웠는 기 그거 뿐이라, 참말로 배운 것이.
“애들 믹이 살리고 공부를 시키야 안 되나? 애 여덟 살 때 [동두천으로] 내가 데리고 올라 갔댔다. 그래 가지고는 양키 물건장사 하민서 동대문 시장에 딸러 장사[도 하고]. 나는 양색시들한테 딸러를 바까 가지고 준다. 주면 또 양색시는 저거 미국놈 아는 놈한테로 준다.
“그런데 인자 자꾸 하다 보이까네 양놈들[하고] 같이 술도 묵고 이얘기 하고 … 내가 스물다섯, 여섯, 뭐 삼십 다 돼 가는데 막 ‘마마상’ 하고 오면은 밥도 막 떠 믹이주고. 색시들하고 한테 어울리 가지고 놀고 이라믄 또 미국사람하고 내가 친하다고.
“[미군부대에] 들어가 가지고는, 거도 패쑤(출입증)가 있어야 들어가는데, 아는 사람이 보초 누가 선다 하믄은 그래 내가 ‘드가이끼네 니 나 좀 봐도고’ 하이께, [보초를 선 미군이]‘아, 오케이, 오케이 마마상’ 마- 좋다고 말이라. 그래가 인자 들어갔다.
오바 이거, 추을직엔 오바 통에다가 접시 겉은 것도 하나 썩 집어 여가[온다].
“나는 색시장사 해 가주고 돈 마이 못 벌었어.
“내 집이 없이끼네 방을 얻어줘야 될 것 아이가? … 한 집에 싹 얻을 수가 없으께 여게 저게 얻지. 애하고 내하고 사는 방 있지. 나는 방세도 반반썩 했어. 그래 돈을 똑같이 갈라뿌이 이 원을 벌이머는 내가 [양색시들] 일 원 줘 뿌고 이러이끼네 돈을 마이 못 벌이겠어.
“가시내들도 실컷 배워 가지고는 저거 맘대로 살림을 나가뿐단 말이야. … 독방 얻어 가지고 지 맘대로 하겠다 하는 거 어데 뿌잡노? 서울 저저 장사꾼한테 말해 가지고 끄자다가(끄집어다가) 신분 올찮고 인맥이 없다 카고 뭐 어짜고 하는 거 데리다가 인자 실컷 가리키 놓으만 저거 맘대로 간다카이.
“내가 본데 없어 글치 인심은 내보다 못한 사람을 자꾸 도와주고 싶지, 까래비고(할퀴고) 막 이렇게 그렇게 하기는 싫다, 이 말이야 내 말은.
“한 서이 너이 고래 델고 있지 뭐. … 그라민서 미국 [딸러] 장사를 내가 시작해.
“그래도 그 장사를 하이께 내가 유지를 어예했지. [아들을] 학교 보내고 밥 먹고 그라지. 안 그라면 색시장사[만] 하면 저거(양색시들) 아가리에 집어였는 기나 한가지라. … 내가 젊으만 내가 하는 기 낫겠다 하는 그 생각밖우 안 들어. 이왕 나는 버맀는긴데 자슥 따매 못 하끼네 그렇지.
“[둘째 아들은] 그때 낳았지. 그때 내 처음 색시장사 안 하고 양키물건 장사할 때.
“그때도 그거 낳고 해도 고아원 겉은 데 가고 그랬지. 우리 애도 고아원에 줬다가 가지 않아 가지고 그래 할 수 없이 밥 좀 믹이서 키왔는 거지, 그저 그랬는 기고.
“동두천, 의정부 거서 한 십 년 넘게 살았다카이끼네. [큰아들이] 한 중학교 이 학년에 [동두천에서] 나와 가지고 서울에 방 얻어 가지고 살았지.
“식모로 갔으끼네이, 럭키그룹 부잣집에서 일 년 반밖에 안 있었고, 저어-게 한 집에 가 가지고는 칠팔 년 있다가.
“[식모살이는] 십오 년 넘게 하고 냉민 가게도 다 해보고, … 애들 공부시키고 할 직에.

이름

순옥인데, 어릴 적에 그래 불렸는데.
“순옥인데, 어릴 적에 그래 불렸는데, 아버지가 글을 모르고 무식해가 그랬든지 한국사람을 갔다가 일본 성으로 갈리면서 내 이름 문자가 그리 됐부렀는지 모르겠는 기라. 출생신고를 늦게 하게 따매로, 동생 놓고 [출생신고]하러 갈 때는 벌써 내가 나이가 뭐 한 아홉 살인가, 열 살인가 그래 무다 카던대. … 우리나라 뭐꼬, 주민등록인가 도민증인가 나올 때 보이니께 그래 김순악 ‘악’자가 돼 가지고 있대.
“장녀. 밑에 남동생 둘. 내 밑에 바로 동생은 잃어 다. 한 오십대[에] 고마 죽었다카이. 하도 줄줄이 못사니까네 술에 그래서 죽었어. 동생 하나는 또 부산에서 산다고 사는데 저것도 그럭저럭 사는 것 같고.
“아부지가 넘의 농사 머슴매로 당기기 땜에로, 말하자면 넘의 농사 짓고, 그래 인자 뭐 밭때기 인자 돌밭, 돌 있는 그런 데-.
“쪼맨한 농사도 짓는데 그런데 밥 해묵고 말갱이매로(말처럼) 나물이나 뜯고 소도 믹이고 뭐 이런 산골에선 그래 다 살았지이.
“지대로 살았는 집 같으면 가시내들을 어데 오라 칸다고 내보내고 공장 보낼 가시내들이 어데 있노?

야마다 공장

공장에 실 푸러 간다고 간 것이.
“내가 잊어뿌지는 안 하거든. 음- 저게 야마다 공장에 실 푸러 간다고 간 것이 몸띠만 베리고 이렇게 고생만 하고.
야마다 공장이라고 있었어. 대구에 야마다 공장 그것밖에 모리거든.
“누 집 할아버지 손년가 손준가, 누비(누에) 공친하는(키우는), 실 푸는 공장 댕겼댔다고. [그 집] 기집애하고 만날 같이 놀고 뭐 이라고 하이께네 친한 줄 알고 인자 그 집 할아버지가 ‘그 공장에 인자 가게 되었다’고 카고. 그래 가 나는 우리 동네 주 133
각주 133)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금곡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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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나 혼자 나오는 기라. 면에 오니까 또 몇이 있더라고. 그래 인자 대구로 들어가니께네 공장[에 간다고] 모집해다 놨는 것도 억시 많대. 사람이 한 여남은 명 되드라고. … [처녀들] 잡아 갈 끼라고 카민서 모두 그래 캐싸이끼네 공장이라도 가뿐기 낫다. 공장 댕기던 사람도 봤고 인자 마음이 들뜬 기지. 공장 보내준다고 가기는 갔지.
“내가 그때 열여섯 살이지. [모인 여자들이] 다 고 또래들이지 뭐.
“엄마가 요마끔한 상추 씻어 가지고 집에서 점숨 먹고 나오는데 엄마가 마-- 울고 (눈시울이 붉어지며) 막 손잡고 막 울고.
“전에부텀 우리 아부지는 나를 부잣집에 치운다 캤싸코, 우리 엄마는 일하는 데 안 보낼려고. 그런 생각을 하이께네 어무이 손을 놀 때 생각이, 그게 눈에 선하거든.
“우리 아부지는 공장에 넣는 줄 알고. 무식하이께네 아무 것도 모린단 말이야.
“지금 내가 생각커이 전에도 자꾸 생각해 보이 그 할아버지는 옛날에 양반들 기생집에 댕겼나 싶어.
“기생을 인자 모으는 매로 지금으로 생각허면 소개소로 해 가지고 그케 사방 군데서 여자애들 모으는 소개소가 있는가 봐.
“그리 점숨 묵고 나와 가지고 남천면에서 생전에 안 타본 기차를 대구 꺼정 타고 나왔지. 생전 처음 탔지.
“그 할아버지가 대구꺼정 나를 데려다줬지.
“대구 소개소에 모아 가지고 … 몇 일 있었는동 그건 모리겠는데, 또 그래 가지고 기차 타러 모두 우- 나갔는데 기차 타고 또 서울 갔다, 또 서울로 인자 팔러 가는가 봐. … 그래 서울서 모닸는데 한 이십 명, 삼십 명 모치가 있는데, [여자들] 어데로 갔다 카고. 우리는 나이가 어린께네 허가가 안 난다 캐싸민서. … 그렇게 그렇게 끌고 갔지, 그렇게 갔지.
“[나를] 소개소로 갔다 줘 가지고 서울서 색시 가지러 온 사람들 생[색시] 사러 온 사람들이, 그 사람이 또 돈 주고 우리를 사 가지고 가는 기라 말하자면. 그래서 서울서 우리가 몇 일 있으끼네이 우리가 안 팔리 나가이, 워낙 시골뜨기다 캐노이께네이 안 팔리 나가는 거, 옷도 우린 워낙 남루하게 입어 놓으께네이 그 소개소서 옷 해 입히고 업자가 돈을 더 비싸게 받는 기라. 우리를 갖다가 그리 팔아 무졌는 거 같애. 어디로 데리고 왔는지 어데로 데리고 갈란지 다 모리는 거지.

색시집

가보니 군인, 군인 상대하는 데라.
“옷 참하게 입히 가지고 팔리 나가게끔 일본에도 보내고 하루삔도 보내고 그래 인제 어두루 보내고 남았는 거는 서울시내 팔리 나가는 거는 또 팔리 나가고. … 한 이십 명 되었다, 그때 우리 갈 직에도.
“저거 돈 벌기 좋은 데는 그렇게 팔아 묵는 갑다 이 말이지. 그이 우리는 모리고 인자 그래가 따라 갔는 기다 이 말이야. 가보니 군인, 군인 상대하는 데라.
“우리는 [전쟁] 끝날 때쯤 갔는 기라.
“우리들을 끄짓고 댕기다가 [여자들은] 전부 없어졌고 또 딴 데 여자들 또 사 모라(모아) 가지고 또 많고. … 한 일 년? 왜 돌아 댕겼나 하믄은, 군인이 철수를 하기 따매로 군인이 없어 가지고 또 딴 데로 가고 또 딴 데로 가고, [일본 군인들이] 자꾸 후퇴를 해 가지고는 그래 됐다. 결국에는 우리가 인자 몸띠 팔게 되고, … 빚 졌는 거 건질라커이께네 팔려 갔는 기고. … 구박이 얼매나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를 밥도 지대로 안 사주고 데리고 댕겼다고. 소개소 주인이 한 일곱, 여덟 명 될 끼다, 우리 갔는 거.
“우리 저-어 몽고 어데까지 갔다 카면 말 다했지.
“여름을 몽고에서 지내다가, 몇 달 지냈는가 그건 모르겠어.
“거 계속 있었는 게 아니라, 거서도 인자 헤매다가 우리가 그냥 밥 묵고 헤매고 군인들 없어 가지고 그냥 헤매고.
“그러니께이 여름을 지나 또 가을 들다말다 할 적에 인제 또 북경으로 왔단 말이야. … 북경을 갔는가 봐, 북경 안의 시내.
장가고 주 134
각주 134)
장가구(張家口)는 중국 허베이성 북서부에 있는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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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더라. … 그기 중국말인지 일본말인지 그런 기는 모리는데, 골짜기 들어갔는데 그런 데를 지어 놓고 일본사람들도 살고 중국사람 동넨가 봐. 인제 집을 자꾸자꾸 지어 나가는데, 우리는 지어놨는 데 들어갔고.
“전부 흙이지. 산골에다가 아무 데나 빈터에다 갑자기 지었는 집들인데.
다다미 두 장 까는 거 매로 작지. 요 하나 이불 하나 (여름이불을 가리키며) 요래 얇은 거 하나 깔고 자는 기라. 딱 여겨만치 주 135
각주 135)
1인용 이부자리 정도의 크기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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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라 혼자 자게끔 해 놨지. 침대 만치 높아 방이. 복도에 조개탄 불을 넣어, 이 비루박(벽)도 흙벽돌로 가지고 지은 거기 때매로 춥지는 않애.
“색시집이라 써 놓으끼네 그리 다 들어오는 기라. … 간판이 달려가 있지. 그래 거서 인제 군인들 받았지 뭐.
“그런 집이 또 어데가 몇 개가 있는지 모르지만, 요요요 마실에는 우리 집 고 하나고 또또 저 우에 동네 좀 나가면 몇 개가 있는지도 모리지. 산밑에 가면 또 그런 집들이 있는가.
“한국 사람이 맡아가 장사하는 기다 그기. [주인은] 한 오십, 육십 넘었지.
“주인네가 다 해 주고 관리하고 [우리는] 돈벌이인 기라, 말하자면. … 주인이 내외 간이면 내외 간이고 형제 간이면 형제 간이고 그렇지 뭐. 저거 식구들 먹고 돈 벌이는 거지 뭐.

고기

고기 벌리놨는 거 한가지로라 우리는.
“일요일날은 마- 바글바글하이 나라비(나란히)로 서 가지고 들어오는 거지 뭐. 내 하나에다가 군인들이 나라비로 서가 있으면, 화장실에 갈라면 우리 서가 있는 거 있지? 한 애 앞에 그렇게 배치가 된다 이 말이야. … 하루 일요일, 토요일 같은 날은 삼십 명썩, 사십 명썩 사람을 상대한단 말이라, 군인을. 그저 뭐 십 분, 오 분 뭐 이런데, 내우 간에 자는 거매로 그래 옷을 벗나? (허리춤을 풀어헤치며) 여게만 열면 되는 긴데.
“십 분 걸리는지 이십 분 걸리는지 그것도 몰라. 눈 질끈 감고 (두 눈을 감으며) 막 고기 벌리놨는 거 한가지로라 우리는. (라이터를 가지고 손으로 비벼대면서) 주 136
각주 136)
김순악은 군인들에 대해 말 할 때 평소보다 유난히 말이 빨라졌고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손과 무릎에 비비며 초조해했다.
닫기
그러이 보통 날은 뜨문뜨문 있고, 한 대여섯도 받고 뭐 한 여남은도 받고. 토요일, 일요일에 삼십 명, 사십 명씩 받고, 요령 있고 빨리빨리 잘 받는 사람은 오십 명씩, 마 육십 명씩 이래 받는단다.
“나는 그렇게 못 받는데, 나는 한 삼십 명 정도 받았지 싶어.
“아침 아홉 시쯤 시작해 손님 받으만은 지녁 여섯 시까지 받나? 그래 받고 또 인자 일곱 시, 여덟 시부터는 장교들이 나와 장교들이. … 그런 것들이 나와 가지곤 사람을 딱 골라 가지고 도꾸이(단골)가 있이믄은, 지가 댕깄는 그 색시 찾아서 그 방으로 들어가고 우리는 뭐 손님 없으믄 손님 없는 대로 밤에 자고.
“군대서 외출 나올 직에 너는 몇 시간, 너는 몇 시간, 장교는 장교대로 나오고 쫄병은 아침부터 나오고, [군대에서] 싸인 짝짝 해가 나오는 대로 나와야 되고. 일찍 나오는 거는 일찍 드가야 되고. … 휴가 나와서 할 짓 없어 자고 가고 이런 것도 없어. 시간이 없지.
“대문에서 들어와 가지고 인제 극장에 표 팔듯이 그래 팔믄은 [표 값으로] 돈 주믄은 고게서 [주인이] 도장 탕 났는 종이 쪼가리 그 사람한테 지키 줘 (쥐어 줘). 그 있단 말이라 끼우는, 삿쿠. 후- 그거하고 그 패하고 그렇게 들라 줘. 그거를 인자 군인한테 지켜 주만 그 군인이 줄 서가 있지. … 그래 우리가 잠깐 손님 하나 받고 둘 받고, 인자 잘못 되믄 빨리 인자 나가서 씻는 데가 있어.
“뒷물 하는 데가 있단 말이야. 거서 인제 퍼뜩 센죠(뒷물)하고 들어오고, 그랄따나(그럴동안) 문이 환하게 열리 가지고 있이마는 한 놈 벌써 와가, 들어와 가지고는 문 열어 놓고도 사람이 없으께네, 옷 (허리춤을 가리키며) 이거 대강 인제 끌르고 있는 것도 있고. 또 하도 바쁠 직에는 그냥 [뒷물 하러] 안 가고, 말하자믄 [삿쿠] 그기 안 터지면 안 가는 기고 터지믄은 찝찝어서 우리가 못 한단 말이야.
“[뒷물 하러 가면] 손님 안 받고 어데 갔는고 고함을 지르고 생-지랄을 하는 거지. 거 인제 관리하는 사람이.
“단도 찼지, 총알 같은 거 찼지, 뭐 이래노이께네. 단도를 다 끌러지지 않으노이께네 마 [우리는] 옆구리도 배기지, 배도 배기지, 온- 전신이 가슴백이도 배기지, 명찰 뭐 이런 거 배기고.
“나는 내- [병] 안 걸리고 만날 군인을 받는 거나 한가지라 말하자믄은. 빙 걸린는 거는 주사 맞고 일주일로 또 주사 맞으러 댕기고 손님 받지 마라 그래. 밥만 먹고 노이께네(노니까) 주인네가 덜 좋아하고 막 그라지.
“또 어떤 거는 얼라 배 가지고 얼래 치이면은(낙태시키면) 며칠씩 있고.
“빙원에서 안 나오면 ‘검진 떨어졌단다’이라고, 난 안 떨어졌으께 [군인] 받는 기고.
“막 찢어지고 따갑고 가서 뒷물하믄 영- 따가바서 마 못 살고 이랬지. 그래 아프다 카믄 소독약 그거 하라 카고, 검진할 때 가서 또 약 바리고 피 빼가지고, 또 주사하믄은 [검진] 안 떨어진께네 그래 내- 했는 거지.

장부정리

이런 통이 있어, 여 담기키가. 몇 사람을 상대 핸 거를 알지.
“[이름을] 일본식 사다꼬라 졌다가 데리꼬라고 부리던지 뭐 부리고. … 데리꼬는 뭐, 소나무 송자에 대죽 자더라.
“아침저녁에 좀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좀 씻고 뭐. 밥 해주는 사람이 있지.
“점숨 먹을 여거(여유)가 어디 있노? 소금에다 주먹밥 해 가지고는 도재이(도자기) 그릇 같은 넙떡한 데 서너 개 담아 가지고 들라준다. 유치장에 들라 묵은 거 매로.
“[군표는] 간수를 하는 거지. (작은 통을 들면서) 이런 통이 있어, 여 담기키가. [그래야] 몇 사람을 상대 핸 거를 알지. 내가 그거를 인자 사무실에 가져 가믄은 시아려 봐야 자기들이 장부에 적지.
“그라고 인제 참 뭣도 모리는 거는 거 터져 가지고도 안 씻고 그냥 돈만 많이 벌이만 좋은가 싶어 가지고. 돈 벌이만 우리가 만지나 뭐. 돈 주나 뭐.
“옷이 없으면 사 입는다고 하는 거를 [주인이] 고래 돈을 주면 옷을 사 입어. 한 벌 가지고 뭐 뭐 입나? 일본 옷을 산단 말이야. 싸구려 같은 거 그런 거를.
“우리가 얼마씩 씨겠다 달라카믄 [주인이] 얼매 주고, 그냥 마음대로 주지를 않애. … 우리 지금 겉으면 만 원을 달라 카든지 이만 원을 달라 카든지[카면] 그래 주는 기고, ‘그래 니가 얼매 썼다’하는 거 그것만 있지. 돈 하나도 받아보지를 못했는데도 한 번썩 계산해. 한 달에 한 번썩. 너는 얼매 벌었니, 니 얼매 썼다 하는 그런 거 이야기해 주고.
“아이구 답답해라. 나는 이렇게 됐구나 싶은 생각부터 먼저 나던데 뭐.
“가시네들 크면 시집가는데 이기 그긴 갑다 싶으고 뭐. 열일곱, 열여덟 된께 인제 또 경도(생리)도 있고 이렇던데.
“열여섯 살에 갔으끼네 누가 하는 것도 알고 뭐 이라는데, 뭐 기분이 어떤지 뭣이 어떤지 우리는 그런 거 몰랐단 이말이야. 남자, 여자 상대가 어떤가 그거는 몰라, 시집가야 인제 남자캉 여자캉 그래 사는갑다 하는 거만 알지.
“친한 사람이 없지. … 지금도 넘한테 얼굴도 지대로 못 들고 댕기고, 술로가 살았는데 그때도 낯선 여자들캉 만내키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그러이께네 그때는 수심도 가득하고 … 그 사람들이 하자 하는 대로 가야되고 무라 카면 묵고, 자라 카면 자고, 뭐 여기 있으라카면 있는 기고. 아무 것도 그때 이야기를 잘 모리겠어. 딴 이야기 뭐뭐뭐뭐 할 이야기가 있노.

피난민

우리가 나오는 기차에 막 짐짝 같이 짐차에 실리 가지고 나오는데.
“산골에 가가 자리잡아가 한창 주인네도 재미볼라 하는 통에 해방이 됐단 말이다.
“해방됐다는 소릴 아침에 듣는데 우린 나오는 기다. 듣고는 그 질로 막 보따리 싸 가지고.
“우리가 갈 때는 하루삔 걸쳐 가지고 몽고로 갔는데, 또 나올 직에도 하루삔역 걸쳐 가지고 기차를 타고 인자 북경까지 다 나가는 기지. 피난민으로 인제 쫓기서. … 우리가 나오는 기차에 막 짐짝 같이 짐차에 실리 가지고 나오는데.
“몇 날 며칠로 그래 나왔는데 북경에서 독립군이라 하는 나이 한 사십 오십 육십 이래된 사람들이 태극기를 인자 극장 겉은 그런 광장에다가 [걸어 놓고] 몇 천 명인지 몇 백 명인지 바글바글 하는데 우리를 모아놓고 사람을 골르드라 카이께네이, 중국사람, 한국사람.
“그래 사람을 갈라 가지고는 우리 독립군들이 한국 우리들만 인솔해 가지고 북경, 천진 배 타고 간다 카는 데를 알아 보이께네 배가 끊어졌다, 맥히서 못 타고 간다고 인제.
“기차를 타고 어데꺼증 왔는지 것도 몰라 내가, 중국의 어느 땅까지 왔는지 그것도 모리겠는데. 기차도 못 가고 인자 사람[도] 못 가. 핑양 갈라카믄 아이 차리(아직) 멀었는데. 압록강도 건너야지 아이따나(아직까지) 중국 땅에서 헤맨단 말이야.
“중국 땅에서 밤낮없이 걸었어. … 팔월 십오 일이께 구월 한 달로 걸어. 걸어서 잠자가 헛간 겉은 데 잠자믄은 또 밥을 주는데 보이 빗자리 하는 수수, 그거를 삶았는데, 삶아 가지고 물에다가 특특 갈아 주더라고. 막 배가 고파 못 젼디는데 그거를 꾹꾹 씹어. 물이 입으로 넘어가지를 않고. 다 그렇게 살았다고 참말로, 살아서 한국에 나올라고.
“나는 거-- 이듬해 나왔거든. 농사졌는 집에 그런 데서 근 일 년을 이북에 살았는 기지, 이북에 살았어. … 해방되고 근 일 년 반, 이 년이나 돼 가지고 여기에 한국에 도착했는 기지.
“해방되이께네 나라가 꺼꾸러 되었는지 어에 되었는지 아무 것도 모리는데. … 우쨌거나 웃었는동 사람 죽는 것도 모리고, 와 이카노 싶은 게 말이야. 그런 총탄 속에서도 안 죽고 이래 살았는 … 그런 생각을 하면 우째 살았는가 싶은고 내가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우리 애한테 말을 해야 되나, 우찌 해야 되나.
“우리 애한테 말을 해야 되나 우찌 해야 되나 이런 생각을 했거든. 왜냐면 이기 자랑이 아니고 우리 한국사람은 숭이란 말이다.
“우쨌든간 내 양심으로써는 버맀는 거지. 베린 몸이라 이 말이야. 시집을 가도 좋은 소리 못 듣고.
“내 몸띠 이런 것이 어데로 가고, 인지 내가 어떤 놈을 만내 가지고.
“밑으로 그래 가지고는, 처녀라꼬 누가 안 데려 갈 끼라 이 말이야. 그런 천대를 어찌 받겠노. 이 세월이 자꾸자꾸 이래 좋아지는데, 나도 사는 것이 점점 좋아지는데, 넘의 집을 살아도 팔자 핀턴데.
“나는 인제 남자라 하는 것이 말하자믄 싫어. 내 맘대로 [살아]보자 하는 그 배짱밖에 없지. 누가 저 이북서 왔다고 살자고 하는 사램들도 많앴어.
“나 역시도 글도 모리고 아무것도 모리는 게 구박만 받지. 그게 한이, 원이 됐어 내,가. 그런데 가가 몸띠 베맀지 하는 생각하믄, 몸을 베렸다 이 말이다. 딴 사람 친구들도 다 엄마 아부지 잘 만내노이 시집가가 아들 딸 놓고 잘 살았는데. 말하자믄 이런 데 여 시골 사람들은 개잡년이라카고 다 그렇게 다 욕하지. 하나도 좋은 소리하는 사람 하나도 없어. 그러게 서울에 애 주 137
각주 137)
큰아들의 1남 1녀인 손주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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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저거 어릴 직에나 할매, 할매 하고 이랬지만은 인제 크고 이거 꺼정은 알 필요가 없다 이 말이라. 할매 혼자 사는 거는 알지만은 이래 돼 가지고 뭐 이런 거는 말 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라.
“할마씨들 이얘기하고 우쓰개 소리하고 화투치고 하는 고거 밖에 몰라 내가. … 화투도 오래도 안 쳐. 한 두어 서너 시간치면 허리가 아파.
“쫌 더 오래 살아야 되는 거 그거하고.
“자꾸 인자 내보다가 더 못한 사람한테 자꾸 비하는 기라, 전에 부텀.
“(가슴을 가리키며) 이 내 속에 들은 거, 이 [아파트]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청소하라거든. 싫다좋다 할 수 없지. [백내장 수술한] 눈 하나 이래 가래(가려) 가지고도 청소하러 댕기고. 눈이 쑥 둘러 빠지는 거 같애. 뭐 줍고 이라는데 눈에 보이지도 안 하고 아무도 내 속을 모리는 기라. 어떻게 아픈지. … 인간이 돼 가지고 어디 비빌 데가 있나, 지댈 데가 있나, 내 속을 알아 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

  • 각주 131)
    캄보디아로 끌려가 1997년에 발견된 훈 할머니가 한국 국적을 되찾고, 김순악이 거주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아파트로 이사 오는 광경을 목격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132)
    김순악은 2001년 백내장 수술을 했다. 바로가기
  • 각주 133)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금곡동. 바로가기
  • 각주 134)
    장가구(張家口)는 중국 허베이성 북서부에 있는 도시이다. 바로가기
  • 각주 135)
    1인용 이부자리 정도의 크기를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136)
    김순악은 군인들에 대해 말 할 때 평소보다 유난히 말이 빨라졌고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손과 무릎에 비비며 초조해했다. 바로가기
  • 각주 137)
    큰아들의 1남 1녀인 손주들을 말한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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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자료번호 : iswj.d_0012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