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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누구보고 말을 허고, 하늘이나 알랑가”

“누구보고 말을 허고, 하늘이나 알랑가”

김봉이는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하면서부터 귀국하여 광주에서 살 때까지 사용했던 이름으로, 구술자는 이 이름을 사용하기를 원했다.
  • 년도
  • 나이
  • 내용
  • 1927년
  •  
  • 전북 고창 출생
  • 1942년
  • (16세)
  • 일본군 ‘위안부’로 연행, 일본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
  • 1945년
  • (19세)
  • 귀국하여 광주에 도착
  • 1948년경
  • (22세경)
  • 왕○○와 동거
  • 1956년
  • (30세)
  • 혼인신고
    딸 출산
  • 1970년경
  • (44세경)
  • 남편과 사별
  • 1993년
  • (67세)
  •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등록
  • 2004년
  • (78세)
  • 전북 고창에 혼자 거주하고 있음

장성 위치 →일본(구체적인 지명은 불확실) 위치 →광주 위치
“내가 원래는 똑똑허고 영리하단 말을 들었는디. 내가 지은 죄가 없는디 어째서 이 모양 되았을까 … 내가 거그 갔다 와서는 죄가 지은 것 말이로 기를 못 펴요.
“아이 넘 부끄러와서도 거시기해라. 내가 통 몰랐는디. 이렇게 표시나 버렸어요. 사람들이 나를 사람으로 안 보고 우습게 본다는 그 마음이 맥혀요, 그 마음이.
“내가 막 뭣 헐 때는 나 같은 년 없을 것이다고 울어싸믄 [주위 사람들이] ‘그때 니가 가고 싶어서 갔냐? 그때는 그 지랄들 했은게 끄껴 갔제. 그러고 그런 것을 니가 그렇게 거시기 허믄 쓴다냐. 그리마라, 그리마라’ 막 그려요. 혼자 앉겄으믄은 … 일본 안 갔으믄 그놈들한테 … 내가 안 당하고, 이렇게 안 살턴디.
“그것(책 내는 것)은 이해해요. 왜 그냐믄 여럿이 알아 갖고 일본놈, 그놈을 똥집 막대기로 … 그래서 내가 얘기를 해 주는 것이여, 그러고 절대 이름 성은 넣지 말고.
“나중에라도 자식들[이]나 손자들이 알믄 못써.
“이름허고 성허고 사진만 안 들어가믄은 그 놈 내서 일본까지라도 보내. 그 잡을 놈들.

영장통지서

도망 댕기고 숨어 댕기고 그러다가 장성 주 120
각주 120)
전라남도 장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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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잽혔거든요.
“열여섯에 갔던가. 봄에 갔을 것인디.
“내가 여기서 일본 가기 전에 아버지하고 나하고 같이 살았어요. 어머니 애려서 조실부모 잃어버리고, 일본 갈 때 아버지하고 나하고 우리 작은오빠 하나 하고 같이 살았거든요. 주 121
각주 121)
김봉이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 두 명, 언니 한 명, 남동생 한 명이었다. 어머니는 어려서 일찍 돌아가셨고, 남동생도 어려서 죽었다. 연행 당시 큰오빠는 탄광으로 끌려갔었고, 언니는 다른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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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영장이 나왔어요, 그때.
“일본 가라는 영장 통지서. 통지서가 나왔는디, 도망 댕기고 숨어 댕기고 그러다가 장성 가서 잽혔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일본사람보담 거 일본놈 앞잽이 조선사람, 그 사람이 겁나게 나쁜 사람이에요. 그놈들이 더 지랄혀요, 더 지랄혀.
“빨간 딱지든가 노란 딱지든가 나왔어. 일본 모집 공장에 [라고 써 있었어].
“써진 것은 위안부 공출하믄 거슥허제. 그런게 놈들이 헌단 말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나왔다, 근게 오매 정신대 공출 나왔네, 모다 그랬제. 그런게 그냥, 옆에서들도 그냥 [여자들을] 숨겨 놓으면 딱 소리도 없이 싹 [잡아갔지].
“아이고 그때 일 생각하면은 아이고 그냥 피가, 그냥 꺼꿀로 솟아.
“아 그 놈들이 어디가 숨어 있으면 막 찾으려 당겨 갖고 ‘여 다!’해 갖고 데려가고 … 근게 그 전에 큰애기들이 다 그렇게 큰 항아리 속에 들어앉거 갖고 그 욱에다가 목화솜, 목화솜 놔 두고 … 모다 숨고, 그래 갖고 모다 살고, 모다 안 가고 그랬다고 허대요, 나도 들었는디.
“집에서도 숨어서 살고, 장성으로 약 사러 가 갖고 장성서 잽혀갔어요. 아버지가 몸이 안 좋아서 아버지 약 사러 갔었어요. 그래서 약 사러 갔다가 거기서 잽히고.
“그때 오빠도 있어도 그때 일본제국 때 군인들, 시방 군인이라 안 허요. 그때는 헤이따이. 그것 안 갈라고 피해 갖고 집에가 없으니까,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사러갔죠.
“생전 모르는 사람이, 잡어 갈 때 두 명이 끄고 갔어. 아 거 잡아가는 놈, 한국 밀대들이여, 연락꾼. [옆에] 사람 있었자 쓸데없어. 사람 있든가 없든가 몰라. 느닷없이 와서 그냥 탁 잡어 갖고 간게.
“그때 시국은 말렸다가는 그놈도 맞어. 니가 뭣 때문에 막냐고. 누가 물끄러미 쳐다나 보제. 말기는 사람은 없는 것이여.
“한 사람이고 두 사람이고 앵기는 대로 실어 갔었제. 막 걸려서 끄고 들어 가. 용케 차 앵기면 차 타고 가고.
“이렇게 방 같은 데 사람 모으느라고 거기다가, 우리 간게 벌써 몇 명 있드만이라. 한 서너, 너댓 명. 거기다가 꽉 잡아다 넣어 놓고 나가도 들어가도 못하고, 소변보러 나갈라도 따라오고 … 도망가들 못하고 뭣도 못하고. 그래서 거기서 그렇게 해서 하루 저녁 자고 그 이튿날 배 탔어. 주 122
각주 122)
김봉이는 위안소에 있을 당시 정신질환으로 이동경로나 지명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2차 인터뷰에서 일본으로 들어갈 때, 트럭을 타고 서울로 가 일본으로 들어가는 배를 탄 것으로 기억하였으나, 4차 인터뷰에서는 부산 쪽으로 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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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징그럽게 내가 곤욕 당했소. 누구보고 말을 허고, 하늘이나 땅이나 알란가. 어휴, 말을 할 수가 없네요, 참말로. 그래 가지고 가다가 중간에서, 어딘지도 몰라요. 막 모아 가지고 인자 거그서 배로 가다가 배에서도 모다 죽은 사람 있고, 배에서도 가다 죽으믄은 물 속에다 홀딱 땡겨버리고 가요. 가다가도 조금만 잘못 하믄 막 뚜들어 패요. 나도 총대로 여그 맞어 가지고 이 내 시방 인자 나이가 들어버린게 골이 애려 갖고 못 살아요, 내가. 여그를 갖다가 (손으로 머리의 오른쪽 부위를 가리키며) 요쪽, 꼭 요쪽이에요. 어설피 찢어져서 고놈이 터져 갖고 피가 흘러버렸으면 쪼게 나은디, 피가 안 흘러 갖고 그놈이 멍이 들어 갖고, 그냥 골이 애려서 시방 어지랍고 애리고, 막 기냥.
“우리 뭣 허러 데려가냐고 막 소리질렀거든요. 그런게 맞었죠. 배에서도 가만히 점잖허니 디진 놈 만이로 있으믄은 안 맞었제.
“후유, 아니 기냥 막 배에서 악 쓰고 한 사람은 물 속에다도 잡어 때려 갖고 죽으믄은 넣어버렸어요. 그렇게 했산게, 느그들 일본 가믄은 공장에서 돈 벌어서 집에 내려보내고 그럴턴디 왜 그러냐고. 가서 공장 귀경하믄은 느그들 어마어마해 놀래 자빠라진다고.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제, 몰랐어. 내가 여 철이 겁나게 늦게 났어요. 놈 있는 그 월경? 월경 그것도 없었어요. 그것도 일본 가서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 다 있는디 나는 없고 그래서 병신인지 알았더니, 아 그래도 열아홉 된 게 있대요. 그래서 속으로 나 병신은 아니구나 그랬어요.
“내가 김가라고 성을 갈아 부렀어요. 우리 집안도 양반 집안인데, 그 추접스럽고 더러워서. 일본말로 이름을 긴또끼 상이라 했어요. [배에서] 이름을 막 대라고 합디다, 성하고 이름하고. 그래서 가만히 얼른 그 생각이 나요. 김봉이라고 그랬어. 그랬는데 친구 하나 주 123
각주 123)
김봉이보다 세 살 위로, 같은 김씨라며 일본군 ‘위안부’ 시절 김봉이를 돌봐주었으며 함께 귀국하였다. 김봉이가 언니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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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자기 일가라고, 자기하고 같은 성이라고 나를 겁나게 생각했어.
“개 돼야지도 그런 짓 못해요, 개 돼야지도. 아이고 징그란 놈의 꼴을 내가 다 보고 살고, 죽도 않고 살아서 왔어라.

말집 같은 위안소

차북차북 넣어 놓고 별놈들이 다 달라 들어요, 별놈들이.
“나는 일본으로 갔어. 거 말하는 소리 들어보면 대강 알거든. 말하는 소리가 중국놈은 중국말하고, 소련은 소련말하고, 일본놈은 일본말하고 다 그러잖아요. 나 있는 디는 일본말만 했어요.
“공장켕이는 즈그 엄매 개떡도 없이 울타리, 철사 울타리 딱 해논디, 기다라-히 방 있다가 칸칸 막아졌어요. 그 속에 [여자들을] 차북차북 넣어 놓고, 별놈들이 다 달라 들어요. 별놈들이.
“건물은 이름이 없어요. 우리나라의 말집, 거 기다란히 안 짓소? 그러대끼 지다란-히 지어놔요.
“[보초병들이] 문 밖에, 여그 우리로 해서는 대문 밖이제. 총 들어 매고 다이러고 있고, 철사 울타리 했어.
“일본 여자들은 없어요. 한국 사람들이제 전부. 근디 죽으믄은 금방 덷꼬 가 갖고 어디로 가.
다디미 그거 하나쓱 깔아 놓고, 고리 하나쓱 몰아 넣대요 막 그냥, 거 산뺀들이(산비탈) 밑에다가. 거그서 생활해 가는디, 뭐 어디 도망할라니 도망할 데도 없고, 꽉꽉 지키고 모다 그러고 있응게. 우리 친구 한 명은 어쩌고 도망가다가, 도망가야 어디 갈 지를 알간이라? 갈 지를 모르제 길을. 모르니까 아무디라도 도망가다가 붙잽혀 갖고, 더 어마어마한 데로 들어갔다 허대요.
다다미자리 요만이나(한 사람 누울 정도) 한디 거그다가 그놈 하나 들어 가게 해서 잠도 재우고, 여그 신 벗고 댕긴 디 있고.
“짚푸락 넣고 그 우에다 그 자리 그거 하나 넣어서 이렇게 뉘빈 거, 그것이 다다미드만이라. 근데 이러고 앉았으면 쏜득쏜득 찬기는 없어라. [겨울에는] 발이 어쯔코 시려운게 그러고(다리를 꼬고 오므리고) 있었당게요.
“옷도 보따리에다 싸서 이렇게 놓고. (무릎을 가리키며) 요만치 닿는 치매 하나. 그래 안하믄 몸빼나 그렇게 입고 웃도리는 뭔 부라우스 하나 입고.
“반찬 없어요. 글 안하믄 주먹밥이고, 소금 쪼까 넣은 주먹밥. 항고(그릇) 갖고 가믄은 개 밥 주대끼. 그러다 안 죽을란게 배고픈 거 못 견딘게 그놈이라도 먹어요.
“각 방에[서] 혼자 먹어, 뭣 할 때는 식당에 나가서 먹고. 식당에 나가면은 이렇게 상[이] 지드런하게 이렇게 있어요. 군인들 들어와서 먹는 데다 하대요. 책상만 하나 놓고 그냥 거기 서서 떠먹어요. 밥 먹음시로 말도 못하고, 뭣도 못하고. 후닥닥 한 숟구락 떠먹고 들어와 버려요.
“[어쩔 때는] 좀 더 시간은 있었지. 그럴 때는 가만히 앉었제. 어디 갈 데 있다? 방에가 앉것제. 나갔던 철망 안에 거기 쪼까 섰다가 들어가고.
“[다른 사람과] 얘기할라두요, 거 바깥에 … 한가할 때 그때 바람 쐬러 나와서는 만나서나 이야기할까 그 이상 못해요. 밤낮으로 뭣 한게 주 124
각주 124)
군인들을 상대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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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들어 앉거서 바깥구경도 못허고.
지사이 산뽀라고 있어. 일본서 거그 한 번씩 나가서 기미가요 주 125
각주 125)
일본 제국주의시기 천황을 찬미하는 의례곡으로 1937년 일본국가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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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불렀어. 여그로 말하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아니여? 그러지만 거그는 기미가요이여. 그거 불러야제 안 불르믄, 가만히 섰으믄 또 앵기게?
“다 모여서 애국가만 불르고 들어가. 날마다 안 해, 나올 때만 하지. 차례대로 나가 인자. 우리말로 같으면 일 소대, 사 소대, 오 소대, 이렇게 소대가 있어 그것도.

부속품

싫다고 한게, 부수품으로 온 것이제 느그들이 뭣이냐고 일본말로 함시로 때려.
“아이고 그때-. 아이구 세상에 느닷없이. 그래서 내가 정신병자가 됐는가 비여라. 그때 세상에 나이 열여섯 살 먹은 놈 데려다 놓고, 만으로는 열다섯 살이 되었제. 자지를 둘레둘레둘레 헐떡 벗어 버리고 내 놓고는 ‘짐뽀 구다사이, 오망구 구다사이.’ 주 126
각주 126)
짐뽀는 남자의 성기, 오망구는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일본말로 성기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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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냥 무서와서 그냥 어매, 어매 어매 함시로 그냥 이렇게 (다리를 딱 붙여 오무리며) 그냥 오물고 있응게. 그냥 빠가야로!(바보), 함시로 그냥 쳐버리드람 말이요, 그냥 때려버리드랑게. 그때 또 찢어져 갖고 피가 막 나고, 아이고--.
“억지로 집어 넣지. 옷을 벗겨? 그냥 찢어 버리제. 벗기도 안해. 그래다 놈들이 그러드만 나중에는 차라리 속옷을 입지 말고 치마만 입으라고. 그래야 그놈들 오면 치마 떠들어 주제야고. 다른 사람들도 물어본게 다 그런다 하드만.
“그것들은 피가 흘러도요, 일절 없어요.
“그냥 해요. 그럼시로, ‘니미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른 놈들이 뭔 식은 밥 찬밥 게리냐’고 그려.
“한국군인들이 헌단 말이, 저놈들(일본군인들)이 독이 올랐다고, 긍게 인정사정 안 본다고. 어째 그러냐면 전장통에서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릉게로 ‘우리, 하고나 죽자’고. 그래 가지고 저놈들이 인정사정 없는 놈들이라고 그러드랑게로라.
“젊은 놈도 웬간 방사해야 안 죽제. 나는 그래도 정신이 그래 갖고(나가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쪼까 당하기는 덜 했제. 여자들, 그리고 애기 낳으믄은 애기도 데리고 나가부러.
“워-매, 군인들 말도 말아요. 아니 쌈하는 사람, 군인들인디 원(얼마나) 많겄소.
“시도 때도 없제. 저녁 열 시까지는 하여간 시도 때도 없어요.
“쌈이 전투 중인디 그러믄, [군인들이] 많으제 없다요. 그놈들이 그럴라고 여자들 그렇게 데려갔제.
“싫다고 한게 니 같은 것들이 뭣이냐고 우리 부수품(부속품)이라든가? 부수품으로 온 것이제 느그들이 뭣이냐고 일본말로 함시로 때려.
“순서대로 들어온가 어찐가 그냥 무조건 들어와요. 보초병들 서 있고 … 바깥으로 철사 울타리 다 싹 해져 갖고 있고.
“[적게 올 때는] 일곱 여덟 명 됐을 껄.
“[여자들은] 사-방 한 데가 있었어 … [얼마나 되는지] 그건 몰라. 방 요만-한 디 가서, 꼭 혼자 누워 잘 디. 그만하면 여가 한나, 저가 한나 그러고 있었어.
“나 있는 방, 그 다음 여자가 우리 언니하고, 저짝 방에 있는 여자, 어매 그냥 거 애기 배어 갖고 애기를 지워서 그냥-. 뭐 있가니, 그런 디(애를 지울 곳)가 없응게. 그냥 옷으로 그놈을 다 받아서 그냥 삘-게 갖고 있는디, 아니 그래도 달라들드라.
“우리 한국사람은 안 하고 나가면 또 즈그들이 까진다여(맞는다여). 시간이 있어 그것도. 그 시간에 맞춰서 나가야 한게 나감시로 옷 입는시끼 요렇게 하고 단추 채우는 시늉하고 갔제, 총 그놈 메고. 한국 군인들이 원허이(훨씬) 낫어요. 한국 군인들은 참, 우리 한국 여자들만 아니면은 즈그도 하겄는디, 우리 한국서 온 양반들이라 어 못하것다 이거여. 그리고 그러고 시늉만 내고 나가, 한국 군인들은. 그러고 한국 군인들도 못된 놈들은 하고 나가고.
“[삿꾸(콘돔)는] 찡겼다도 홀딱 빼서 던져버려 잡놈들이, 맛이 없다고.
“즈그들이 갖고 와서 껴. 그것도 배급이 나오는 갑디다, 애기 들어선다고. 근디 그놈들이 하다가도 맛탱이 없다고 홀딱 빼내쁘러. 껴야 한다고 그러믄은 빠가야로! 막 그러는데.
“그때 가서 얼마 안되어 갖고 임질 걸려 갖고 고름 나오드만. 임질 걸린 게 고름 나오고 아프고 그러드만.
“그래서 내가 그때 군인들 거 산에 한국군인들 있제? 그 군인들 보고 거 임질초라고 있어. 여기도 있었어. 그놈을 쪼까 뽑아다 주라혀. 뽑아다 주라혀 갖고 어따 삶을 데가 있가니. 그놈을 냇가에서 조물조물 씻어 가지고 그냥 그 물 붓어 갖고 삶아 갖고 마시고 씻고 그랬어. 그래서 낫었어.
“동네 노인양반들이. 어려서 [내가] 한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먹었을 때 그것을 뽑아 갖고 와서 씻습디다. 아 그래서 ‘할머니 이것 뭐여?’ 그런게, ‘임질초란다’ … ‘자지에서 고름 나오고 조금 아프고 하면 이것을 대려서 먹고 볼르고 한단다’ 그러드만이라. 그것을 내가 안 잊어 버렸어. 내가 아픈게 기억이 나. 기억이 나서 그놈을 한 재만 뽑아다 도라고 그래 갖고 그 놈을 이렇게 대려 가지고는 그렇게 마셨어요. 씻는 것은 한 번 씻으면은 먹는 것은 두세 번 먹어요. 아따 그놈의 것 그냥 오줌 눌라믄 떼악거리고 아프고 그냥 못 견디것드만이라. 그래 갖고 그거 지어먹고 낫었어라. 그래서 시방도 누가 이렇게 물어보면은 내가 갈쳐주네요.
“남자들이 난잡하니 놀잖 안 허요? 난잡하니 놀면 그런 거 걸려요. 그러고 남자들 거 임질 있는 남자들 있죠? 그런 남자들하고 [하면 병이 걸려요].

정신이상

이를테면은 얼른 쉽게 참말로 미쳐버려, 미쳐버렸어.
“담배라도 피워야제 글 안하면 죽어. (가슴 쪽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여기가 그냥 거식한게 화, 화로. 내가 그놈들한테 당한 일을 생각하면은 기가 막히고 … 글로 화가 됐는가비여.
“이상한 말도 하제. 친구가 나를 못 나가게 나를 막 잡으고 뒤진다고 나가지 마라고 나를 붙잡고 막 그랬다라. 그라고 그냥 나갈라하믄 그냥 막 문 가둬 갖고 그냥 미끄러 버리고 그랬다라. 나중에 들었제. 막 욕을 하더라라.
“인제 내가 막 욕을 해드라여. 저 놈을 쏴 죽여라, 저 개 간다, 개. 개, 개, 개 간다 쏴 죽여라. 개, 개, 저 개, 개. 막 그러더라, 일본놈만 보믄은. 그런게 내가 성해 갖고 그런 소리 하것소? 못 허제. 맞어 죽을라고 혀? 그러지만은 정신이 없은게 했제. 근게 [언니가] 나 [일본에서] 데리고 나오느라고 진땀 났다여, 진땀 나.
“[내가 정신이 나간 지를] 어쯔코 알아요? 원이 되고 한이 된게 그놈들 보고 씨발놈, 좆 같은 놈, 때려 죽인다, 칼로 찔러 죽인다 막 그런 소리하고 앉았고, 어요요요요, 개 부른다고, 어요요요요 개, 개새끼 온다, 개새끼 어요요요요- . 밤나 그러고 앉거서 그놈들 오면은, 막 막 화병이 나서 이러고. 이 다리를 시방도 내가 그 곤조 주 127
각주 127)
성질, 기력, 근성이라는 뜻의 일본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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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있어. 이 다리를 이놈 (다리를 ×자 모양으로 꼬며) 요렇게, 아이고 다리가 아픈게 안 되네.
“나 처음에 그러고 당함시로 그렇게 정신 이상자로 들어 앉았어. 어쯔코 놀래 갖고 거시기 했던지. 어이구 그놈들 말하면 그냥, 아이구 기냥 지긋지긋 해라.
“그런 일이 그냥 시방도 문득 떠오면, ‘어매 내가 왜 이려. 내가 왜 이럴까’하고 (가슴에 손을 대면서) 여기만 쥐어 뜯어 그냥. 십 년이 넘어가고 이십 년이 되었는디 내가 왜 이럴까 하고.

귀국

‘올 때 다 죽은 송장만이로 시커먼이 그래 갖고 와서 내가 씻겼다.’
“갈 때는 기억이 확실히 나제. 배로 가 갖고, 글고 다 가서 일본놈한테다 처맡겨버린게. 인자 배 타고 가서 차로 들어간 일은 인자 선연히 알지. 차로 어디 변두리, 어디 그냥 산이 겹겹겹 거시기한 데로 들어갔제. 올 때는 내가 몰라, 어쯔코 왔는가 못 왔는가. 내가 이야기 소리만 들었제 몰라.
“[끌려간 지] 삼 년만에 해방 되았거든요. 그 해방된 지도 나는 몰랐죠 우리는. 사방군데서 모다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어찌 뜨끔해라(뜸해라) 군인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뭐라고 헌고 허니는 조선 해방 되았다고 사방 간데서. 정신 들었는게 그때는 알았죠.
“그래 가지고는 거그서 나와 가지고 가라고 한다고 그러대요. 그런게 그 언니가 나를 붙잡고, 그때는 그냥 열차도 겁나게 만원 되아서 그 많은 숫자들이 막 온게로 지붕 우에도 타고 그랬다고 그러대요. 사람들이 언니보고 나 같은 저런 사람 델꼬 어쩌코 탈라고 그러냐고 못 탄다고 막드라요. [언니가] 세상에 한 동네서 와서 우리 동상인디 어쩌코 내가 떼어 놓고 갈 것이냐고, 데리고 가서 낫어 줘야 할 거 아니냐고,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런 사람 아니잖어냐고. 그런게로는 거 석탄 창고, 그 속에 앉거서 [왔지]. 일본놈들이 오다가, 중간에서 굶어 죽을 것이요, 밥을 줘야제. 근게 표때기 하나쓱 줘서 갖고 와서 밥 탔다고 그러대요.
“[귀국해서 언니 집으로 가니까] 그 언니네 어머니가 인자 ‘아이고 불쌍한 것, 죽으믄 어쩐다냐’고 방에다가 자기 딸하고 나하고 꼭- 놔 두고는 … 그 친구 엄니가 약을 사서 늘 나를 멕였다여. 그때는 그것 보고 애편약이라 그러던가? 그것을 석 달 간 맞았다 해요, 내가. 석 달 간 맞은게로 정신이 돌아오더라라. 정신이 돌아와서 얘기도 허고 어쩌고 헌게 양을 줄이드만이라. 그 양을 줄여 가지고 불쌍한 것 중독되면 못쓴다고 조끔쓱- 조끔쓱 놔 주고 하루쓱 띄어 주고 놔 주고, 이틀 띄어 주고 놔 주고 조끔쓱 줄임시로 그렇게.
“‘엄마 나 올 때 어쩌코 되얐어?’ 물은게 ‘올 때 다 죽은 송장만이로 시커먼이 그래 갖고 와서 내가 씻겼다.’
“언니 어머니[를] 어머니라 그랬어요. 엄마가 다 씻겨 가지고 언니허고 다 같이 모욕허고 그러고 방에 가서 언니허고 꼭 같이 있었고. 그래 가지고 낫었어.
“병 다 낫어 갖고 여기(고향)를 왔었어. 여기 와서 인자 물어보고 당겼어요. 물어보고 댕긴게 살아 계신다고 그러대요, 아부지랑 오빠랑 살아 계신다고. 그래서 거가 어디냐고 물어봐 갖고 들어간게 ‘니가 누구냐?’ 그럽디다. ‘니가 누구가니 나보고 아버지라고 하냐?’ 그려. 그래서 ‘아이고 아빠, 나 안 죽고 살아왔어.’ 이름을 인자 가르쳐줬제. 이름을 갈쳐 줌시로 ‘안 죽고 살아왔어. 일본놈들한테 끼껴가 갖고 거시기하고 인자 나왔어.’ 그런게 그때는 인자 막 붙잡고 울제.
“[아버지는] 아이고 살아왔으면, 일본 가서 별 짓을 다 했을망정 살아왔응 게 다행이다 그것만 생각했어. 그런 거 끄집어 내야 니 속만 뒤집어지고 한게, 그때 정신대 공출장 나온 지는 알겄다, 도망댕기고 한 지는 알겄다, 그렁게로 그때 가서 니가 별 짓을 다 했을망정 살아서 와서 니 얼굴 본게 좋다고 글로 끝났어. 뭔 말 안 혀. 내 속 뒤집어진다고 말 안 혀.
“일본 가서 그놈들한테 당할 때 어쯔겄소? 징한 놈들이라 인정사정도 없고. 그놈들한테 그렇게 당하고, 또 정신병자 되어 갖고 그래도 어디로 뛰쳐나가지는 안 했다 하대요. 그래 갖고 친구 덕분으로 살아 나갔제라. 아 세 번 죽을 고비 안 넘겼소? 내가 시방 생각하면 그래요. 어떻게 내가 살아서 세상에 나왔을꼬, 세상에 부모형제 간 다 간 지도 모르고 죽은 줄만 알았는디 그래도 어쯔코 소식 한 번 못 전하고 했어도 그래도 나 나와 갖고 우리 오빠 얼굴 보고.

인연

서로 불쌍한 사람끼리 살자고, 자기도 부모형제 간 없다고, 그래 갖고 만나서 살았어요.
“[언니 집에서 나와서] 식모살이 하고 거그서 인자 방 그놈 얻어 가지고, 인자 식모살이도 못허것어. 조금 거시기 하면 아프고 욕 보겄고 했산게 못허것어. 그래서 공장 간다고 갔더니 그것도 무거워서 못허것어.
“오랫동안 [일을] 안 했었어, 못하것드만 그놈의 것. 이런 쇠덩어리 들랑게 무거워서 못 들것어. 지금 돈으로 [하루에] 이천 원이여, 그때 돈으로 이백 원 삼백 원인디, 쌀 한 되 값도 못 되었어. 그때는 그래도 그놈이라도 받고 살아나갔어.
“그런데 넘들이 차라리 그러지 말고 영감이라도 얻어가라고 말해서 영감 얻었었어. 그 양반도 일본으로 가 갖고 군인들 탄, 폭탄, 총알 그런 거 지고 댕김시러 배달해 줬어. 친구들 열 명이 갔는디, 그놈 지고 가다가 그냥 대포 소리가 나서 바우 틈에가 가만히 숨어 있었드라. 그래서 나와 본게 그 사람들 다 죽고 자기 혼자만 살았드라.
“영감님은 [그런 디 갔다는 것을] 알았어요. 만날 때 아조 말했어요. 나중에 거시기한다 해서 말 다 해버렸어요.
“그때는 영감님도 그렇게 갔다 왔다고 그러고, 그리고 영감님도 나이도 나하고 열 살 차이 났어요.
“결혼[식]도 못 허고 오늘날 결혼도 못 허고 요렇게 늙어버렸어요. 스물 싯인가 둘인가 만났어.
“[영감] 호적도 개성에가 있어 갖고 혼인신고도 못하고 있었어. 여그 이장이 힘 써 갖고, 근게 돈 주고 했제. 개성 호적이 다 서울로 넘어갔다 하더라. 서울 가서 떠들어본게 있어서 그놈을 요리 옮겨 가지고 혼인신고 했어요.
“내가 그때 서른 살인가 되어서 [혼인신고를] 했어. 거그 아그들을 다 올렸지 내 앞으로, 내 앞으로 올렸제.
“우리 영감이 마음씨가 올라서, 애잔혀 갖고 어디 불쌍한 애기 있으믄 데려다가 키웠어. 데려다가 나한테다가 불쌍한 애긴디 키워서 우리 새끼 맨들세, 그러고 데려와요. 그것들을 내가 반대를 하면은 솔직히 말해서 어디 가서 죽기밖에 더 허것소? 그래서 내가 키우고 갓난이도 키우고, 그래서 내 앞으로 아그들 많애요. 닛이나 되야.
“놈의 애기들도 데려다가 키우믄은 탁힌다(닮는다) 해라. 내 빈 젖꼭지 많이 빨고 그랬어요. 다 내가 낳은지 알아라. 갓난이 때 내 젖 빨리고 어찌고 해 놔서 다 내가 낳은 지 알어라. 나중에는 젖이 펄펄 납디다.
“[딸을 낳을 때] 할아버지(영감)도 집에가 없었는디. 배 아프다 소리 하도 안 하고 그냥 혼자 끙끙 앓고 그냥 혼자 낳았어요.
“혼자 낳아서 애기가 앙앙앙 운게 아이고 동네 노인양반이 오셔서, 빌어먹을 것이 말도 않고 자빠라져 있었구나[하고] 야단맞고는 그 노인이 와서 인자 태 가르고 애기 목욕시키고 해서 뉘어주드만.
“안 생긴게 못 낳제. 생겼으면 낳으면은 아들 하나 [더] 낳고 싶었제.
“그런디 어른들 하시는 말씀이 그러대요. 남자들을 이놈 저놈 상대를 많이 하면은 애기를 못 난다고 그러대요. 그래 갖고 인자 하나만 접촉을, 연애하면은 뽈깡(얼른) 낳을 수도 있다고 그러대요.
“[영감이] 장사할란다 해서 빚 쪼깨 얻어 줬더니 아이고 온통 망해 갖고, 집 팔어 갖고 갚어줘 버리고 어디 올 데 갈 데 없어서 한 데(추운 데) 자고 그랬어라. 그래 갖고는 영감은 나이가 많은게 일을 못 헌게로 내가 안 해 본 일이 없이 다 했제. 노가대 벽돌도 짊어지고 댕기고, 괭이질도 하고 그냥 모도 숨기고 그래서 먹고 살았지라.
“식당살이 댕기는 사람이 어디를 못 갈까. 방 얻으러 댕겼어. 제일 처음에 OO리에서 살다가, 저그 이사 간 집이, 거기 가서 쪼께 살다가 갈 데가 없어서 집 가에다가 천막 하나 쳤어. 네 귀퉁이에다 말뚝 하나씩 박고, 산에 가서 풀 나무 뜯어다가 그 우에 가리고, 가맹이(가마니) 깔고 그렇게 거기서 한 몇 달 살았어요. 거기서 몇 달 살다가, 날은 추워지고 절대 못 살것드란 말이요. 그래서 영감이 친구네 집이, 친구가 방 두 개 짜리 얻어 갖고 사는디, 인자 거기에서 영감이 혼자 아랫방 살고 우리는 웃방에 살고 그러다가, 저 위에 꼭대기 집이 있어요, 거기 조그만한 방 하나 얻어 갖고 살다가 공자맹자 주 128
각주 128)
집 근처에 있던 사당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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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로 갔어요. 그리 가서 그렇게 살다가 거기서 영감 그렇게 죽어버리고, 영감 죽고도 거기서 몇 년 간 살았어요. 몇 년 간 살다가 방세도 안 주고 그렇게 있었어요, 사람이 여간 좋은게.
“영감이랑 십 년 넘게 같이 살았지. 식당서 요리사 했어, 일등 요리사였어. 우리 큰아들이 그때 열세 살 국민학교 졸업할 때 영감이 죽었어. 눈물 하나도 안 나왔어. 새끼들 멕여서 키울 일을 생각한게 앞이 캄캄해.
“우리집 식구들은 내가 낳은지 알어라 다. 다 몰라, 내가 낳은지 알아. 딱 덮어버렸응게, [유족회] 회장님보고 행여라도 그런 소리 할까 무서워서 절대하지 마라고 막 그랬어.
“[친딸한테] 올케가 잘 혀. [남편이 양아들인지] 모른게로 잘 혀. 즈그들 간에 우애를 잘 혀.
“[사위가] 선 보러왔을 때 내가 뭣이 없은게 뭣을 못해 주잖혀. 그래서 ‘나는 입고 먹는 것은 내가 계산은 안 하네. 계산은 안 하지만은 둘이 쌈하지 말고 욕하지 말고 오순도순하게 사는 거, 나는 그것이 젤로 행복으로 아네’ 그랬더니 ‘네 명심 하것습니다’ 그려. 명심 하것습니다 하더니, 성질이 나도 마누라보고 뭐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그 전에 하던 소리 그놈이 딱 떠올라서 말 못헌다 혀. 둘이는 그냥 쌈 안 한게 젤로 좋아. 근디 우리 큰딸이 그렇게 싸왔싸.
“큰아들[은] 어쩌코 마누라를 개 패대끼 팬디 그냥, 내가 그것이 두고두고 죽겄어. 내가 속이 상하고. 지그는 나보고 안 한다고 했샀지만은 내가 가서 사흘도 못 있어, 사흘만에 기어코 내 속 오장육보가 뒤집어져서, ‘니가 나를 데리고 있고 싶어서 그러는디. 나는 여그 와서 단 열흘도 못 살아야, 열흘도 못 산게 나는 그대로 있다가 죽으믄 화장해라’ 그랬당게.

신고

절대 안 한다 했어. 그랬더니 무릎 꿇고 비는 디 안 할 수가 있어?
“처음에 그런 것을 적발할 때 십 년, 십이 년인가 되었을 것이네. 저그 밭에 일 가 갖고 인자 이야기 나왔었어. [밭에서 같이 일한 사람한테] ‘아이고 그놈들 말도 마라’고, ‘그냥 쫙쫙 찢어 죽여도 분한 그런 놈들이라’고 내가 그랬어. 그랬더니 [유족회] 회장이 그런 양반들 있으면 신청한다고 그런게로 그 양반(밭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 듣고 와서, 듣고 와서 나한테 말을 해주드만. 절대 안 한다 했어.
“여 일본 갔다 온 사람들 모집하는 거 … 인자 아까 젊은 양반 사진에 있었제? 주 129
각주 129)
마을 유족회 회보에 실렸던 유족회 회장의 사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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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양반이 와서 막 그냥 무릎 꿇고 앉아서 [유족]회 들으시라고 … 그냥 안 한다 … 그랬더니 무릎 꿇고 젊은 사람이 비는 디 말 안 할 수가 있어? 그래서 몇 차례 와서 그랬사서 내가 승낙을 했어, … 그 뒤로는 인자 참 내가 굶어 죽게 생겼응게. 이제 정부에서 돈도 생활비 보태서 쪼까 타게 해 주고, 그래 가지고 오늘날 이렇게 살고 있어, 그래 안 했으믄 죽었어요, 굶어서도.
“그놈들을 뭣이냐, 우리가 이 담에라도 후사에 할 것 아니냐고 그런게로 우리가 데모도 하고 그럴랑게 할머니는 못 가시면은 집에 계시고 그러시라고, 그래 가지고 일본들 데모 들어가고 그랬어요. 그러고 우리 가족이 오빠도 일본 탄광에 가 갖고 거시기하고, 우리 형부도 탄광이 무너져서 사고 나고, 용케 어쯔코 구석대기에 서 가지고 다치기만 하고 살았어요. 우리 오빠 아들 죽고 형부도 죽고, 다 죽었어요. 내 형제 간이 사남매인데 다 죽고 혼자 남았어요. 그래 명은 길다 했소. 어서 가면 쓰겄는디 명은 길다 했소.
“[일본사람들이] 물어보고, 주 130
각주 130)
2002년 8월 12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전후보상을 위한 재판을 준비하던 중 유족회 관계자와 일본변호사들이 김봉이 집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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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보나 뭣 하나 말하기도 싫고. 나 혼자 있다가 몇 마디, 일본사람 저가 앉었지만은 다 알아들으라고 했는디 뭐. 개새끼들이라고, 개새끼들이라고 그럼시로.
“[일부러] 들으라고 하제 그러믄. [그 사람들은] 암말도 안 하제 뭐라 그래, 뭐라 해, 즈그들이 잘못 했는디. 즈그 조상들이 잘못 했는디 뭐라 할 것이여.
“쪽바리 새끼들 말도 마라고 아이구 징한놈들이라고 그냥 쫙쫙 찢어 죽여 버렸으면 쓰것다고 그냥. 그냥 한, 내 손으로 그냥 한 넷만 찢어 죽여도 분 조까 풀리것다고 그냥 막 그러니까 옆에서 그냥 ‘할머니 뭔 소리를 그렇고 혀.’ 회장님도 그렇고. ‘아 우리를 도와줄라고 하신 양반인디 그렇게 욕을 하고 막 그려’ 그러대요. 그래서 아야 저, 저 양반 보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놈들 칼 지드러니 이렇게 차고 이렇게 댕김시로 그 염병하고 댕긴 일을 생각하믄, 우리 잡아갈 때도 그놈들이 그 염병 그러면서 그놈들이 더 했다고. 그런게 너나 없이 한국놈이나 일본놈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어쯔코 한국사람을 빼앗아 버린갑다 모르것다고. 그런게 하기사 자기 목숨 살랑게 그놈들 밀개(앞잡이) 노릇을 하기가 말이 못하고. 내가 또 한국사람들 그 앞잡이 노릇하고 댕겼다고 내가 그랬더니 아 옆에서 막 못하게 하더라니까. 우리를 도울려고 나왔는디, 재판할 때 우리를 도울라고 나왔는디 그렇게 욕하믄 쓴다냐고. ‘할머니 하지 말아요, 하지 말아요.’
“내가 그만치 내가 우리가 일본놈들을 원수로 삼는다는 거, 일본 가서 하라고 내가 했어. 일부러, 일부러 했어.

악몽

가끔 자면은 그놈들이 눈에 아른아른 … 한 번씩 꿈 깨고 나서는 허유, 허유-.
“꿈 때문에 자다가 일어나지. 그래 안해도 소변 볼라고 자주도 일어나는 사람이 그냥 꿈도 아주 그냥 좋게 꿔지지 않니, 그냥 잠이 어슴프레 안 드요? 그럴 때, 그놈들이랑 들어온 거 같이 아른아른, 아른아른. 낯바닥도 모르겄고 암것도 안 보이는데 그놈들이 아른아른 혀. 그럼 발딱 눈을 뜨고 그냥 거시기 한당게요.
“꿈 속에서 해코지는 안 해요. 군복을 입었는지 뭣인지 아른아른 일본놈이라는 생각이 들제 그냥. 그때 지쳐놔서 내 원수를 삼아놔서, 저놈들이 시방 원수 삼을라고 그런갑다 그려. 꿈 꿔 갖고.
“그놈들을, 막 욕이 나온게 그놈들이라 혀, 가끔 자면은 그놈들이 눈에 아른아른. … 생각 안 해도, 한 번씩 꿈 깨고 나서는 ‘허유, 허유-’, 그러고 앉아서 ‘오매 징헌 놈들, 징헌 놈들’ 막 그런당게요.

보상, 그리고 지금의 나

돈이 중요해도 즈그 손모가지로 용서를 빈다고 그러고 줘야제.
“마음이 아픈디, 마음이 아픈디. 즈그들이 우리 꽃다운 나이에 데려다가 신세 망쳐놓고 당연히 즈그들이 보상 해야제. 보상하고 잘못 했다고 용서를 빌어야제. 아 대통령 봐, 자기 아들이 그랬는디 그냥 잘못 했다고 자식 잘못 둔 죄라고 함시로 용서해도라고 막 안 빌어.
“나 보상 받으믄은 나 죽으믄은 나하고 우리 영감하고 들어갈 자리 쪼까 사고, 우리 아들 나 죽으믄은 초상해 주고 제사라도 지내도라고, 제사지내면 뭣할랍디요만은 그래도 그렇게 해서 쪼까 주고 나 쓰고, 나도 쪼깨 맘대로 써야제. 늙은이도 밥도 한 그릇씩 사주고. 나 그러믄 쓰겄는디. 아이고 꿈이야. 나올 것인가 안 나올 것인가 하는데 보면 가망 초산이 없응게. 아, 정부에서 돈을 줘야 준다하제 가망도 없는디 준다고 했다가 나중에 어쯔코 될라고. 안 되면 또 우리들이 떠들고 일어나제.
“돈이, 돈이 중요해도 즈그들이 반드시 즈그 손모가지로 해서, 손모가지로 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다고 그러고 줘야제, 그렇게 니미 모다 걷어서 거기(일본) 사는 사람들이 모다 걷어 갖고 아이구 그런 돈은 벼룩에서 애를 내 먹제. 이 집 오두막집이라도, 정부에서 우리나라 정부에서 돈 조까 나와서 그래 갖고 이 집 샀어요. 건물은, 땅은 아니지만 건물이라도 사 놓은게 내 집이라고 신간 편해.
“[내가] 옛날에는 많이 알았제. 그런디 내가 일본 가 갖고 아조 그냥 바보가 되어버렸어. 그냥 여기 이러고 살림하고 삼시로도 누구 알까 무서운게로 그냥 광주서 나아 가지고 요리 와 갖고, 누구알까 무서운게 그냥 쉬쉬쉬쉬하니, 그리고 생전 어디 가서 말 한자리도 못하고 고개 팍 숙이고 그저 바보만이로 그러고 있었는디, 인자는 그냥, 다 알아버렸어. 처음에는 그냥 방에도 바깥에도 못 나가고 방에만 이러고 갇혀 있응게 친구들이 누구는 가고 싶어서 갔냐고, 그거 그때는 강제적으로 끌려가서 그러제. 나와서 바람도 쐬고 말도 하라고 그랬쌌대요. 그래서 인자 친구 말도 듣고 나가서 바람도 쐬고 어디 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디 가서 참, 이야기라도 한마디씩하고 그러제.
“[동네 친구들과] 계를 했어요. 계를 해 갖고 놀러 나가고 설악산도 가고 또 흔들바우도 가고, 또 뭔 전망대라고 하드야 뭐라 하드야. 만리경으로 이렇게 쳐다보면 이북사람들이 집 짓는 것까지 뭣까지 다 보이드만이라, 거기도 가고. 내가 눈 빌 때까지는 했은게, 눈 안 빌 때부터는 안 했은게. 시방 눈 안 빈 지가 칠 년찬가, 팔 년찬가. 어디를 생전 못 나가, 뭐 어쩌코해서 나가. 거 눈만 비고 거슥허믄은 금강산[에] 계라도 들어서 갔을 것이오.
“노인정 회장도 했었제. 남들이 못 놀믄 내가 부추겨 갖고, 노래 불르라고 해 놓고 나는 인자 앉아 부러. 근디 눈이 안 뵈인게 아무것도 못혀.
“눈이 안과에 가믄 골에서 내려왔다 해요. 골에서 내려와 갖고 수술도 못허고 이러고 몇 년을 살고 있어요 시방. 그러고 나이 먹은게 그냥 몸이 자꾸 아파요. 자꾸 아프고, 못 견뎌요. 그런게 어디 나가도 못허고 어찌도 못허고 이러고 방 안에만 가만-히 앉겄다 누웠다 잤다 그것이 일이어요.
“[작년에 병원에] 갔다 나왔은게 이만이나 하제. 아무것도 못 허고, 어지랍고 막 쓰러져 버리고 그런게로 병원에 갔다 있다가 나와 가지고. 정신채려 가지고 밥도 해 먹고 그러제. 그 전에는 아무것도 못했어라, 병원에 가기 전에는. 병원에서 웬간하믄 퇴원할라고, 시 번을 퇴원했어라. 그랬다 도로 엠부란스 실려서 가고.
“병원에 나간게 친구 하나 사귀었어라. 일요일날, 토요일날 낮에 와서 놀고, 무슨 날은 저녁에 와서 놀고 그래요. 아직 거그는 환갑도 안 넘어 갔어. 아직 환갑 안 넘어 갔어도 언니라 하고 찾아 댕겨요. 언니가 다른 사람만이로 성질이나 내고 못되야 먹었으믄 안 댕기는디 언니가 오늘 먹은 맘 이대로 안 버리고 거슥헌게 그런다는 거지라.
“[나는] 놈한테 나쁜 소리 안 들을라하요, 성미가. 왜 내가 조금만 잘하믄은 놈한테 그런 소릴 안 듣는디 뭣 헐라고 내가 놈한테 말을 듣고 살아야. 그러고 내가 절대 그런 것을 안 해, 남한테.

“제일 보고 싶은 사람? 나는 우리 어머니 한 번, 응, 나는 어려서 엄니 잃어버려서 나는 젤로 어머니 한 번 보고 죽으면 쓰겄어. 그 이상은 [없어]. 꿈에라도 한 번 뵈면 쓰겄다고 내가 그런디, 우리 엄니가 보고 싶어서. … 아이, 어려서 돌아가시고 어머니 얼굴도 잘 모릉게. 젤로 어머니 한번 보고 싶어서 그것이 원이랑게. … 얼굴, 기억이 안 나, 기억이 안 나도 엄니가 젤로 보고 싶당게. 몰라 나 죽으믄 만날랑가.”

  • 각주 120)
    전라남도 장성군. 바로가기
  • 각주 121)
    김봉이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 두 명, 언니 한 명, 남동생 한 명이었다. 어머니는 어려서 일찍 돌아가셨고, 남동생도 어려서 죽었다. 연행 당시 큰오빠는 탄광으로 끌려갔었고, 언니는 다른 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122)
    김봉이는 위안소에 있을 당시 정신질환으로 이동경로나 지명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는 2차 인터뷰에서 일본으로 들어갈 때, 트럭을 타고 서울로 가 일본으로 들어가는 배를 탄 것으로 기억하였으나, 4차 인터뷰에서는 부산 쪽으로 갔다고 말했다. 바로가기
  • 각주 123)
    김봉이보다 세 살 위로, 같은 김씨라며 일본군 ‘위안부’ 시절 김봉이를 돌봐주었으며 함께 귀국하였다. 김봉이가 언니라고 불렀다. 바로가기
  • 각주 124)
    군인들을 상대하니까. 바로가기
  • 각주 125)
    일본 제국주의시기 천황을 찬미하는 의례곡으로 1937년 일본국가로 지정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126)
    짐뽀는 남자의 성기, 오망구는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일본말로 성기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바로가기
  • 각주 127)
    성질, 기력, 근성이라는 뜻의 일본말. 바로가기
  • 각주 128)
    집 근처에 있던 사당을 일컫는다. 바로가기
  • 각주 129)
    마을 유족회 회보에 실렸던 유족회 회장의 사진을 말한다. 바로가기
  • 각주 130)
    2002년 8월 12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전후보상을 위한 재판을 준비하던 중 유족회 관계자와 일본변호사들이 김봉이 집을 방문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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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고 말을 허고, 하늘이나 알랑가” 자료번호 : iswj.d_0011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