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느그들이 와서 보상하고 우리한테 와 빌어라”

“느그들이 와서 보상하고 우리한테 와 빌어라”

  • 년도
  • 나이
  • 내용
  • 1923년
  •  
  • 충청북도 영동 출생
  • 1938년
  • (16세)
  • 영등포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연행
    만주 목단강 부근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
  • 1940년
  • (18세)
  • 첫째 아이 임신
    싱가포르 위안소로 이동
  • 1941년
  • (19세)
  • 첫째 아이 출산, 곧 사망
  • 1942년
  • (20세)
  • 둘째 아이 출산, 곧 사망
  • 1943년
  • (21세)
  • 셋째 아이 출산, 곧 사망
  • 1944년
  • (22세)
  • 넷째 아이(딸) 출산
  • 1945년
  • (23세)
  • 해방 후 딸과 함께 고향 영동으로 귀국
  • 1946년
  • (24세)
  • 포항 양○○의 집에서 거주
  • 1948년
  • (26세)
  • 경상도와 대전, 서울 등지에서 장사
  • 1960년경
  • (38세경)
  • 사촌 동생의 딸을 양딸로 얻음
  • 1964년
  • (42세)
  • 서울 혜화동에서 식모살이
    위안소에서 낳은 딸 미국으로 감
  • 1965년
  • (43세)
  • 위안소에서 낳은 딸 사망
  • 1970년 초반 추정
  •  
  • 중학생인 고아를 양자로 들임
  • 2001년
  • (79세)
  • 일본군 ‘위안부’ 등록
  • 2004년
  • (82세)
  • 인천에서 양딸 부부와 살고 있음

영동 위치 →서울 위치 →만주 위치 →싱가포르 위치 →영동 위치
“어떤 때는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믄 뻘-떡 일어나 내가. 답답해. (가슴을 치며) 여가 답답해져 가지고 하- 숨을 한 번씩 쉬어야 돼. 그라고 천장 들여다보고 아무 생각 안 하면 인제 그때 쫌 가라앉아서 괜찮고. 또 머리에 뭐가 떠올라. 그라믄 또 아이 나 죽겄다고 나가. 나가서 ‘아이 나 바깥에 가서 좀 쉬고 와야지 안 것다고.’ (한숨을 길게 쉬며) 아휴-- 이걸 이렇게 쉬면 시원하게 나와야 하는데 억지로 나오면 그냥 죽겄어. 머리에 자꾸 떠올르면 그게 막 생각나고.
“그걸 가만히 생각하면 속이 상해. 미친 사람만이여. 하- 한숨을 이리 쉬야 돼, 쉬도 억지로 쉬는 거여. 술- 나오면 좀 되는데 억지로 나온께 내가 그냥 잠을 못 자.
“느그들 와서 보상해 주고, 그만치 우리는 시방 느그들 땜에 처녀로 늙어 있다. 이렇게 행복을 모르고 살고 있다. 그런께 보상하고 느그들 와서 우리한테 와 빌어라.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

광목공장

산 언덕 있는데 쪼맨-한 집 있는데 고리 덷고 가더라고.
“[식구들이] 영동 주 112
각주 112)
충청북도 영동군.
닫기
시내에서 십 리 들어가는데 대밭마리에서 살다가 대밭마리에서 인제 [영동]읍으로 나왔거든.
“핵교는 문아케도(문 앞에도) 안 갔다 칸께. … 울아버지가 공부 안 시켰어. 저년 공부시키면 남의 집구석 망한다고 만날 책을 뺏고. 아휴- 머리는 괜찮은데 공부를 안 시켜 가지고 후회가 된다고 내가 시방, 울아버지 원망하고.
“[형제들이] 딸이 여섯이고, 아들 둘. [언니들은] 다들 시집가서 살은게.
“[영동 와서 나는] 일본 집에 쪼금 있었지. 애기 봐 주고, 먹고 살기 위해서. … [그 집에서 돈을] 훔치 가지고, 왜 그전에 그거 하는 사람 있었지? 독립 [운동]. 훔치다가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 갖다 줄라고. 아이 보러 갔응께 아이 두리매기(포대기) 같은 게 있잖아? 여기다 넣고 인제 갔어. 갔는데 그날은 [주인이 돈을] 안 찾았는데 이튿날 돈을 찾더라고. 날 보고 가져갔다고 그라는 거여. 그래 가만히 갖다 놨더니 ‘아 구석에 있는 걸 모르고 그랬다’고 그라잖아. 구석에 감촤 났응께, 빨리 갖다가. 안 쓰기를 잘했지, 썼으면 나는 그날은 죽는 거여. 그럭하고 그날부터 나온 거여, 그 집에 한 달 있다가. 그래 [그 집] 운전수, 그 사무 보는 이가 그라잖아, ‘아가씨 하여간 보통 넘어. 글이나 좀 배우지 그랬어.’
“그전 시골 옛날에 왜 영화 들어왔잖아? 그걸 구경을 갈려면 울아버지 무서워서 가만히 도망갔는데, 여관에 직장 댕기는 남자가 하나 있어. 그게 자꾸 [나를] 따라댕기네. 우리 아부지 알면 맞아 죽지. 그래 가지구 딴 집으로 들어갔다가 우리집에 들어 와버려 가지구, 다시는 못 찾아 오잖아. 꾀는 그렇게 부렸어. 근데 거긴 왜 끌려갔는가 몰라.
“집에서 살기가 곤란한께 인제 … 이모가 [서울에서] 아들 둘 데리고 혼자 살아. 집은 크고 하숙을 치면서 살았는데 거기를 오라고 하더라구.
“그때 열다섯인가 열여섯인가 [기억이] 미미해. 영등포 광목공장이라고 있어요, 일본사람들이 했는가 봐.
“[부모님께는] 공장 간다고 얘기하고 [이모집에 가는데].
“[영등포] 역전에 탁 내린께 어떤 남자가 나를 어디 가냐구 그랴. 그래서 공장에 갈려고 그란다고. 그람 공장에 갈라면 우리가 공장에 [일] 보는 사람인께 잘 됐다고, 공장에 가자고. 그래 데리고 가더니 산 언덕 있는데 쪼맨-한 집 있는데 고리 덷고 가더라고. ‘왜 공장에 덷고 간다더니 [여기로 왔냐]’ 밤인께 날 새 가지고 가자고. 그래서 그렇게 된 거여 그만.
“[그 사람이] 일본놈인지, 한복 입었응께 알도 못하지. 난중에 보믄 군속, 군인말고 군소꾸 있잖아? 그거 겉애, 옷 입은 거 본께. 뭐 한국사람이랑 비슷하기도 하고, 말하는 거 본께 일본놈 겉기도 하고 뭐 알 수가 있어?

도망

‘나 도망가면 너도 따라 갈래?’
“날 샌께 인제 밥을 뭐 뭉텅이밥 갖다 주대. 그걸 먹고 있다본께 가자고 하더라고. 그래 간께 차를, 그때는 기차 댕겼잖아? 기차 타고 만주 목단강이란 데서 내리는데.
“만주 벌판에 집이 쪼끄만한 게 있어. 방이 요렇게 칸칸이 있더라고, 쪼맨-허게. … 동네하고 떨어졌어, 아주 외따리여.
“한 사람 딱 자기 좋[을]만하게 칸 막어 놓고서는 기집애들 갖다 너 놓고 인제 군인들 받는 [거야]. … 군인들 덮는 담요가 하나 있었는데 … 그 담요 하나 덮고 그 추운 데서 어떻게, 시방 그렇게 춥다는데 어떻게 살았나 [싶어].
“군인도 많도 안하고 먼 데 떨어져서 하나씩 하나씩 오지, 많이 안 나오더라고.
“한국사람은 못 봤어. 일본사람 가시깡(하사관), 군소꾸 그런 사람이 왔지. 가시깡은 별 시개짜리.
“메칠 있는데 이게 암만해도 안 될 거 같애, 방도 그렇고, 하는 행동이. 그래서 기집아, 나이 먹은 사람이 하나 있더라고, 그 여자가 그러드라고. ‘나 도망가면 너도 따라 갈래?’ ‘아이고 언니 도망가면 나도 따라 가지.’ 그럭하고 인제 엿을 전-부 보고 도망을 했는데 그 새끼들이 어디 숨어서 본 줄 알았어? 총을 막 공중으로 쏘는 거여. 그렁께 도망 못 가고 있는 거지. [다시] 뿥잽혀 와 가지고 갸는 많이 맞았어. 나는 말이 없고 수더분-한께 [덜 맞고] 갸만 인제 ‘꼬아 가지고 니가 데리고 갔지 않냐?’ 그래 가지고 그렇게 많이 맞았어. 코에다 물을 막 들어붓고. 일본사람들 본시 옛날부터 고춧가루 타 가지고 코에다 들어붓잖아. 아-주 지독한 놈들이여, 하는 것 보면.
“그때만 안 잡혔어도 괜찮을 건데 잡혀 가지고. 나 귀[를 맞아서] 전화 잘 못 받아, 안 들려.

싱가포르로

애기를 배 가지고 그것도 몰르고 그냥 싱가포르 끌려갔지.
“부산 간다고 허드라고, 부산. 부산 가면 우리 성도 있고 보것다. 주 113
각주 113)
결혼 한 언니가 부산에서 살고 있었다.
닫기
… 우리 성들 집으로 내가 도망가야지 하고 따라갔지, 안 따라가고는 못 배기고 또. 그래 따라갔더니 여관에 잤는지 어디서 잤는지 잤어. 자구선 배 타라고 하드라고. 배 타면 인제 저그 좋은 데 간께 배 타라고. 근데 배 타고 한 달 걸렸어. 물에 댕기는 거 있잖아, 땅속에로 댕기는 거. 주 114
각주 114)
잠수함.
닫기
그거 피해 댕기니라고 한 달 걸렸어, 싱가포르 가는데. 한 달 동안이나 밥을 못 먹었으니 어떻게 되겄어, 사람이. 다 죽은 거지. 아이는 속에, 배에 있고. 아이고 말도 못해.
“애기를 배 가지고 그것도 몰르고 그냥 싱가포르 끌려갔지.
“할미꽃 뿌랭이 먹으면 아이가 떨어진다 그래서 그거 먹었더니 내가 죽겄어. 그렇게 독하드만, 그 할미꽃 뿌랭이가. 다리미 가지고 또 뭐 (배를 쓰다듬으며) 여기를 다리면, 배를 설설 문대면 떨어진다고 그래도 안 떨어져.
“아이를 및 달 있다 낳는데, 병원에도 못 가구 꺼꿀로 나왔는데 인제 난 죽었다 싶으니. 막- 힘주라고 친구들이 그냥 아이 꺼꿀로 나왔다고 막 힘주라고 그래 가지고 힘줘 가지고 내가 살라고 낳던가 봐.
“내가 죽을라다 살아났지. [아기는] 죽었어. 잘 했지 나한테는.
“나 편하라고 인자 하나님이 도와준 거지 뭐. 그거 키울라면 어떻게 키워.
“[아기는] 죽고 이제 몸조리도 못하지. 뭐 미역국이 있어 무슨 뭐가 [있어]. 찬물에다가 그냥 밥 먹응께 이 이가 다 절단난 거여. 그 아이 놓고서는 한 달인가 있었어. 그래서 또 손님 받으라고 그래.

일본놈들

‘저 씨팔놈의 새끼들이 왜 끄대 오냐’
“싱가포르 [시내에]서 한 오리 더 들어가 가지고는 집도 괴상한 데 있어. … 집만 하나 크-게 있어.
“[여자들이] 한 이십 명 있었을 거여. 이층 아래층 있었응께.
“큰 데 있다가 딴 데로 욂겼잖아 우리가. 집도 아조 기어 들어가고 기어 나오는 데로 욂겼잖아. 더 들어갔잖아. 말하자면 일선지 가는 데지. … 거기는 밤에 땅 파 놓고 들어가는 데가 있잖아? 방공호. 그걸 인제 파 놓고 있는데 막 뱅기가 웅-웅 하면서 댕겨. 그래 그 안에 들어갔어. 물이 (허리춤을 가리키며) 이만치 올라오면서 막 벌거지들 기어 올라오고 그란다고.
“[우리가 있던 곳을] 신마찌라고 그라지. [신마찌가] 여러 개가 있는 게 아니고 우리 뿐이야.
“괜찮기는 싱가포르가 괜찮았지. 거기서는 사람이 많이 안 나오거든. 일주일에 두 명 아니면 시 명, 니 명 나온께. 나는 뭐 부엌에서 일이나 하고 나 안 나온다고 [다른 여자들이 뭐라고 하면] ‘밥 해, 나. 못 나가.’ 그라면 저희들끼리 거식하고(손님 받고) 그랬어.
“밥도 못 얻어 먹어. 만-날 해 먹는다는 것이 가지, 가지 기름에다 볶아 가지고 아휴- 징그러워. 그거하고 밥하고 먹는데 밥이나, 쌀이나 옳아? 안남미 같은 거.
“쌀, 군인들이 갖다 주믄 벌거지 있는 쌀밥 먹었어. 벌거지가 둥둥 떠.
“옷은 입을 게 없고, 돈이 없은께 못 사 입은께. 말할 거 없지 뭐. 거기서 및 해 있다가 나와도 옷 한 벌 입고 나왔으면 말 다했지 뭐.
“아이고- 군인들이 오면 돈 줄짱 싶어? 안 줘, 일본놈들. 어때(어쩌다) 좋은 사람 만내면 쪼금 주고 한국 사람이 좀 봐 주고 그라지, 없어. 돈 뭐 주고 받고 그란 거 없어. 난 화장은 안 했응께. 딴 사람은 화장품 사고 뭐 어짜고 해도 나는 화장품 죽어도 안 샀어. 화장해서 뭐 햐? 그것들한테 이쁘게 보여서 뭐 햐? 머리도 그냥 평범하게 하고. 낯이나 씻나? 씻도 안허고 그냥 나가면 [군인이] 이렇게 보고 그냥 가고. 딴 사람 데리고 들어가고. (웃으며) 꾀가 나는 많아 가지고.
“그 새끼들 오면 어서 옵쇼, 인제 일본말로 이라샤이마세, 이렇게 하지 절-대 일본말 안 썼어. 한국말로 쓰지, 우리끼리 있을 때는. 춘자, 일본말로 요시꼬, 뭐 이렇게 이름 지[어] 주잖아? 그냥 이름 춘자면 춘자, 화자면 화자, 영자면 영자 이렇게 불렀지 절-대 일본말로 안 불렀어.
“일본여자들도 거그 와서 [몸] 팔러 온 여자들 있지. 돈 받고 팔러 온 여자들 있지. … 나랑 같이 있는 기집애가 쪼맨-해, 아조. 그런 애가 일본말 잘햐. 갸는 뭐 일본 기집애들 잘못하면 막 뚜드러 패. 그럭하고 목욕 가 가지고 [일본 여자들 있으면 우리가] 비누칠 해 가지고 그냥 들어가, 물 끼우치도 안 하고. [일본 여자들이] 조센징 키다나이라고, 조센징 드럽다고 다- 도망가버려. 우리끼리 [목욕]하고 오는 거여. 그렇게 못되게 놀았어 모도.
“[군인들 오면] 조선말로 ‘저 씨팔놈의 새끼들이 왜 끄대(자꾸) 오냐’하고. 저 씹팔놈들 뭐 하러 끄대 오냐구 욕을 얼-마나 한다고, 앉아서. 한국말 아는 놈이 어디 있어? 에이고- 욕도 많이 얻어 먹었어, 우리한테. 저 개새끼 소새끼 총에 맞아 디져라고 하고. 하하.

잘 해준 남자들

울 아버지가 일본놈한테 가게 햐?
“나하고 살자고 일본사람이 얼-마나 뭐 별 거 다 갖다 줬어, 먹는 거. 그랬는데 내가 싫어서 안 한다고 그랬지. 일본놈하고 왜 내가 사냐고, 안 한다고 그랬지. 늘 오믄 몸 애껴주고, 안 자고 먹을 것만 갖다 주는 거여. 그때 일본사람들 과자, 그 얼마나 맛있는 거 나와. 그거 다 갖다 줬다고. [같이] 살자고 그-렇게 즈이 집에 핀지 한다고 옷도 해서 보내고, 겔혼도 하자고 어짜고 해도 내가 그때는 말 안 들었지. 그 사람은 기억이 확 나, 얼굴이. 얼굴이 또 시방 봐도 알어. 어떻게- 지랄하고 댕겼는지.
“울 아버지가 무서워. 쌈하다가도 우리 아버지 지침 [소리]만 나면 다 도망가고 그랬어, 영동서. 그라고 일본사람이라면 아조-. 왜 하얀 옷 입고 나면 물감으로 막 뿌렸잖아, 일본사람이. 물들여서 입으라고. 그래 가지고 일본놈 뚜드러 패고 그랬어, 울 아버지가. 그렇게 무서웠다고. 근디 일본놈한테 가게 햐? 못 가게 하지.
“한국사람[은] 배타는 사람, 포로 감독하는 사람, 군소꾸로 들어온 사람들, 이런 사람들 이따금 가다 두 명, 시 명 온다고.
“양○○이라고 … 한국사람인데, 포항 사는데, 그이도 군인이지. … 군소꾸. [그] 남자가 그렇게 봐 줬어요. 손님 받지 말고 나 올 때까지, 오거든 시간 마칠 때까지 손님 받지 말아라고 있다 가고 그랬는데.
“[해방 되면] 우리집에 가서 같이 살자구 그러더라구. 그래서 뭐 응, 그래 같이 살자구. 그동안 잘 해 준께 어떡혀, 안 살망정 살겠다구 했어. 그때만 해도 양심이 나쁘지.

매독

아픈 거는 어찌 됐든지 잘됐다 이거여.
“소독약을 줘요. 그걸로 소독을 하면 벌러지, 가늘-한 벌러지, 대가리 새까맣고, 바글바글 해. 물에 나와 가지고 바글바글 해. 삿쿠(콘돔) 있잖아요? 찌 가지고 하는 거 삿쿠. 그걸 안 낄라고 하는 사람이 많아요. … 소독약으로 씻고 그랬는데 씻으믄 뭐 햐. 아이가 또 들어섰네.
“애기 또 뱄어요. 애길 또 배 가지고 뭐 빼낼 데가 있어요, 그 전에는? 그래서 그냥 낳고 또 죽고, 죽고.
“어휴- 왜 죽었냐믄 내 생각은 그래. 약을 많이 하잖아? 소독약. 약을 많이 하고 주사도 맞고. 그런께 아이도 시원찮고 병도 올르고 그래.
“매독, 임질 걸려 가지고 죽을 뻔했어. … 뒤집어지는 것 같애 막. 아이구 내가 만주서 올라 가지고 … 만주서는 검사 갈 새가 없었어. 일 년 동안 있었어도 검사를 안 했어. … 그때는 몰랐지, 올른 거를. 차차로 가서 본께 죽겠드라고. 꼭 낙지발 같은 게 돋아 가지고 휘-떡 뒤집어졌어. 아이구- 시방도 근질근질 햐.
“[싱가포르에서] 검사하믄 606호 놔 줘. 병 검사하러 일주일에 한 번씩 꼭꼭 가거든. 그럼 병이 있단 말이여. 그럼 써 붙여, 손님 못 들어가게. 문 아케, 나 자는 방문 아케다가. 써 붙이면 인제 검사를 자꾸 댕겨야 돼.
“‘아이고 잘 됐다’ 아픈 거는 어찌 됐든지 잘 됐다 이거여, 내 맘에는.
“일본놈이 하나 오더니만 또 거시기 햐. ‘아 써 붙인 거 못 봤냐구’ 그런께, 삿쿠 끼면 되잖냐고 그래. ‘아 시방 나 아파서 안 된다구’[일본놈이] 지랄을 하고 나가더라구.
“그래 가지고 써 붙여 놓고 주사 맞으러 댕기는 거여.
“나으믄 또 받으라고 허고 [문 앞에 써 붙인 걸] 띠 간다고.

죽은 친구

‘내가 이런 디 있다가 집에 가면 무슨 소양이 있냐’
“우리 친구 하나는 약 먹고 자살했어. 나이 많이 먹었는데, 전라도 여잔데.
“‘내가 이런 디 있다가 집에 가면 무슨 소양이 있냐’ 써 놓고 죽은 거여. 아침 먹으라고 들어간께 뻣뻣하게 죽었더라고. 애핀, 애핀 있잖아? 손가락 짤라 가지고 지 피 빨아먹고 애핀 먹으면 죽어. 잠서 죽는다고. 그래 죽어버렸어.
“죽은 여자 아까와. 얌전하고 참 좋았는데, 인정 있고 이랬는데. 그 여자 죽고서는 우리 앉아서 사진 백힌 거 있어. 쭉- 앉아서 여기 꽃 달고 모도 앉아서. 그전에는 간호원들이 입는 옷 있잖아? 그거 모도 맞춰서 입었어. 하얗게 모도 입고 찍은 사진도 있고 그랬는데. [사진은] 일본놈들, 군인들이 와서 찍었지. 한 장씩 다 가지고 있었는데 … 난리 바람에 다 타고 없어, 집이 탄께.
“거기 또 더러 떨어진 여자 있을 거여. 내가 한국에 가서 무슨 환영을 받겄냐 하고 떨어진 여자들도 더러 있을 거여. [한국] 안 나온 여자들도 더러 있을 거여.
“해방된 거를 우리가 젤 먼저 알았는디. 와서 연락을 해 준께, 군인에 있는 한국사람이. 일본놈들은 몰랐다잖아. 난중에사 알았다잖아.
“마루가 큰-거 있잖아. 거기 다 모여 있었지, 우리는. 한국사람은 다 모여 가지고 있고, [일본 군인들은] 인제 한국사람이 어떻게 됐나 싶어 와서 가만히 보고 가고 이랬지.
“[한국사람들] 한 이십 명 내지 삼십 명 이렇게 있었을 거여. 남자들도 끼 가지고 있었어. 군소꾸로 들어간 사람들, 그 사람들 및이 끼어 가지고 있었을 거여.
“아-이 [해방되고] 바로 안 왔지. 거기서 전장이 나 가지고 서로 독립한다고 막 총으로 싸우고 있는데 그랬는데 금세 나올 수 있어? 거기서 및 달 있었지. 그 및 달 동안 밥 먹고 여럿이 잠만 자고 있는 거여. 거지 겉지 뭐. 허허.

고향으로

챙피시럽드라고, 자꾸 보는 거 겉고.
“애기를 거기서 서이 낳[았는데 다 죽고], 마지막에 가서 딸을 하나 낳았어. 낳아 가지구 그건 해방되고 [데리고 나왔지].
“나하고 딱 둘이, 하나는 아들 낳아 가지고 있고, 나는 딸 놓고. 아이 낳아 가지고 온 사람은 둘 뿐이여.
“지집아 거기서 돌 지내고 돌떡 해 먹었지. 도구통에다 찧어 가지고 떡 해 먹고 얼마 있다가 나왔어. 나왔는데 부산 와 가지고 밤에 온께 없잖아, 차가. 다 모도 고향 찾아서 [가야]하는데 돈이 없응께 길에서 잤잖아. [자고] 아침에 손에다 도장 찍어 줘 가지고 기차 타고 집으로, 고향으로 왔지.
“챙피시럽드라고. 차 타고 가는데도 챙피시럽고, 자꾸 보는 거 겉고. 아는 사람은 다 알지. 아이들은 몰라도, 젊은 사람은 책 보고 공부한 사람들은 다 알지. 그래 끌려갔다는 거. 챙피시럽더라고.
“고향으로 온께 어머니 아부지가 없어. 작은집으로 갔어. 어매 아버지 어디 갔냐구 [물어보니까], ‘너를 얼마나 찾은 줄 아냐-.’ 너 오거든 어떻게든 잘 좀 봐 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하고 갔다고 [그래].
“[가족이] 없은께 거기서 엉엉 울었어.
“[식구들은] 오빠가 만주로 들어가 가지고, 식구 다 덷고 가 가지고 만주서 고생하고 살다가 인제 그랬는가 봐. 나는 뭐, 내 없어지고 부모들이 [만주] 들어갔응께 모르지, 잘. 얘기를 들어서 대강 알지.
“사촌집에 이럭저럭 한 반 년 있었어, 몇 달 있었지. 있응께 눈치뵈더라고. 그래서 언니들 집에 가서 있다가.
“그걸 업고 간께 누가 좋아하것어? 즈그들도 못 먹고 사는데.

소문

가고 싶어도 소문이 나서 안 가잖아.
“양○○이 펜지를 써 주더라고. 내가 보믄 알아? 눈 뜨고 봉산데 뭐 알아? 그냥 넣어 가지고 자기 집에 찾아갔어. 포항 구룡포여, 구룡포. 거 갔는데 편지를 갔다준께 아-이구 우리 아들이 살아 가지고 이렇게 편지까지 와서 고맙다구, 날 보구 거기 있으랴, 아들이 올 때까정. 아이 나 못 있고 가야 한다고 그러는데 아휴- 그 남자가 뭐라고 편지 썼나 잡아. 친정 없으면 가 봐야 고생한께 여기서 살으라고 그랴. 그래서 방도 하나 주고 거기 있었어.
“일 년 있다가 [양○○이] 왔는데, 만내 가지고 반가운지 뭔지도 몰랐어. ‘왔는가부다, 나는 나물 뜯으러 간다’하고 나물 뜯으러 가고 그러는데 지 엄마한테 가서 그러드랴. 주 115
각주 115)
양○○의 어머니는 산 속 절에 들어가 있었다.
닫기
내가 왔는데도 반가워 하도 안 하고 그런다고. 그람서 [절에] 한 번 오라고 사람을 보냈더라고, 얘기나 좀 들어보자고. 들어볼 거 뭐 있어? 아-이, 들어 볼 것도 없고 안 갔어. 안 갔더니 [양○○이] 인제 동네 와 가지고 날 무슨 데 있었다고 슝을 봤다고. 그런께 그것도 나쁜놈이야. 그걸 끝끝내 거시기 했으면 했지 그걸 그 동네에 소문 내서 되겠어? 그래 그 동네에 가면 나 이런 데 있다는 거 다- 알거든. 알기 땜에 챙피시러워서 누구 찾아 볼려도 못 가잖아. 그래서 에이 이놈아, 너도 나쁜놈이다, 이왕 그렇게 생각했으믄 응 그런 얘기를 거기서 뭐 하러 하냐 이거여. 자기하고 안 산다고 그래 그런 얘기를 해서 되겄냐구.
“[포항에는] 가고 싶어도 소문이 나서 안 가잖아, 챙피스러워서. 자존심이 많아 나는 그렇게.

밥장사

이 기집애만 없으믄 남의 집에라도 들어갔지.
“내가 고상하고 댕길 필요가 뭐 있냐. 내가 벌어야것다 해 가지고 인제 벌기 시작한 거여.
“이 기집애(딸)만 없으믄 남의 집에라도 들어갔지. 남의 집에도 못 들어가고 시골로 갔어, 경상도로. 경상도로 가서 집을 인제 하나 얻어 가지고 밥장사를 했어.
“[딸을] 인제 핵교에 넣어야겠는데 호적이 없잖아. 그래 가지고 교장한테 얘기해 가지고 어떻게 넣었어, 핵교를. 국민핵교 댕기다가 내가 거기서, 시골서 도저히 살 수가 없잖아. 그래 가지고 나와서 장사할라고 나왔는데 시골서 집 하나 팔면 멫 푼 안 돼. 그치만 그때는 큰돈이여. 그것 팔아 가지고 인제 야를 데리고-.
“[밥장사를] 대전서도 하다가, 영등포서도 하다가. … 청송 주 116
각주 116)
경상북도 청송군.
닫기
보호원, 그리들어가 가지고 식당을 했는데 그렇게 잘 되야.
“그렇게 살다가, 거기서 조금 벌다가 딸이 죽기가 됐네. 그래서 서울을 올라왔어.

후유증

이 기운이 안 없어진 거야. 자식한테도 해롭댜.
“아이- 결혼해서 뭐 혀. 밑에도 개롭고(가렵고) 사람 미쳐나갈 뻔했어, 나. 밑에가 개로와서 막 피가 나도록 긁어도 막 이거는 미치는 거여. 어디 길에 가다가, 어디 골목에 들어가서 끍어야 가지, 미쳐 미쳐. 그렇게 죽을 뻔했어. 아-유 나는 참말로 그 얘기를 어디가 햐.
“피가 나도록 긁어도 개로와 그냥. 그러고 긁고 나면 오줌 누면 따갑고. 약 한 첩을 못 먹었어다구, 약을. 챙피스러워 [병원] 가 얘기도 못하고, 사 먹도 못하고. 아이고 그래 가지고 목욕 자주 댕기고 막 소금물로 씻고, 남 몰르게 씻고, 목욕탕에 가서. 꼭- 가을, 봄이면 그렇게 개렵더라고. 그 병이 가을 봄에 올르잖아, 대개 보면 매독이. 그래도 병원에는 내가 챙피시러워 못 간다고.
“거기(싱가포르) 있을 때는 약을, 주사 맞고 소독하고 그란께 덜 했지. [여기 와서는] 미쳐나갈 뻔 했닥 한께. 뜨거운 물에다 지져야 쪼금 잠을 잤어. 그 생각하면 아찔아찔 해. 그래서 내가 이 기운이 안 없어진 거야, 절-대 안 없어진 거야. 자식한테도 해롭댜, 자식 놓으믄. 그래서 시집을 안 갔다고 내가.
“딸도 [그것 때문에] 나쁘고 심장[병]이 걸렸겄지. 걸음도 여기서 이만치 못 걸었어. 클 때는 괜찮았지. 나이 조금 먹어 가지구, 스무 살에 그랬나 열아홉 살에 그랬나. 그거 점점 더 했던가 봐.
“미국 가야 고치지 여기서 못 고치잖아, 옛날에는.
“[딸이] 어머이 나는 여기선 도-저히 살 수가 없응께 미국 가면 고친닥 한께 나를 고쳐 달라구 그랴.
“‘아이 너 병 고친다면 내가 다 주지.’ 그래 가지고 장사 해 가지고, 식당해고 뭐 남의 집에도 살고 그래 가지고 벌은 돈, 천삼백인가 오백인가 줬어.
“혜화동 부잣집이여. … 돈을 오십 만원 현찰을 얻었어. 얻어 가지고 인제 딸 보태 가지고 보냈지, 돈이 적어서. … [그때가] 돈 많-이 받어야 이만 원, 만팔천 원, 그렇게 받을 때여.
“거기서 오십만 원 받아서 주구 인제 나는 [그 집에서] 식모살이 하는데.
“그래 가지고 [딸은 미국] 들어가 가지구 뭐 병들어 가지고 돈도 못 벌고, 나 버는 것 갖다 쓰고 살다가, 사람 만냈으면 안 죽었을 건데 혼차 있다가 사람을 못 만내 가지고 그만 죽은 거여. … 가서 일 년도 못 살고 죽었어. … 그래 [미국에서] 살림 살은 거 다 부쳐준다고 하더라고. 부쳐봐야 세금이 얼만데? 부쳐봐야 소용없다고, 싫다고 그랬어.

머슴아

내가 자식이 없어서 딴 사람들 손 붙잡고 댕기는 거 본께 부러워서-.
“상주 주 117
각주 117)
경상북도 상주시.
닫기
사는데 원호청 알지? 군인들 취급하는 데. 원호청에서 밥을 해 주고 내가 있었어.
“[중학교 다니는] 머슴아 하나, 즈그 어매 죽고 즈 아버지 죽었지, 갈 곳이 없어.
“나두 자식이 없은께 데려다가 나도 남 좋은 일이나 해 보자고 [데려다 키웠어].
“그게 자꾸 강패짓을 하네. 술집으로 가 술 먹고. [고등]핵교에서 그만 몇 달을 안 나간께 그어 버렸어(퇴학 시켜 버렸어). 그래 내가 가서 사정을 해 가지고 [다시] 댕기기 시작해서 졸업하고 이제 항공대학을 들어가게 됐어. 항공대학 있잖아? 무전 배우고 하는 데. 뱅기 배우는 사람은 그것 배우고 무전 배우는 사람은 아무 직장이고 금세 금세 들어가드라고. 그래 가지고 수원 직장에 들어갔어. 무전 그거 하는 데 들어갔는데 돈을 엄-청 벌었디야.
“그때는 내가 돈이 없어. [미국 간] 딸 다 주고 돈이 없어. ‘날 돈 십오만 원만 주면 변두리 얻을 수 있다, 전세. 봐 주면 내가 갚아주마, 벌어 가지고’ 그란께 이 새끼가 안 줘. 안 줘 가지고 인제 내가 한 달 월급 받아 가지고 방을 얻었어, 빈두리.
“[아들] 에편네가 도망을 갔댜, 기집애 둘 놓고. 도망가 가지고 다 팔아 가지고 갔을 것 아니여? 그런께 빈털털이여. 그래 [아들이] 아이 둘을 데리고 직장을 못 댕기지. 나한테 [아이 둘을] 기러 왔어. ‘넌 사람 새끼, 개만두 못 햐. 너 나 돈 없을 때 전세 하나 얻어 줬으면 느 아이 키워 주고 응, 다 할 거 아니냐. 세상에 너 그렇게 집이 몇 채 있으면서도 돈 십오만 원 달라고 하는데도 안 주고는. 필요 없다, 난 필요 없어. 너 같은 인간 난 취급하도 안 해’ 그라고 또 두 번 왔어. 또 와 가지고 사정을 하더라고, 좀 봐 달라고.
“내가 술장사 식당 하면서 얼매나 설움을 받고 살았냐고 말이야. 그것도 몰름서 니가, 내가 자식이 없어서 딴 사람들 [자식] 손 붙잡고 댕기는 거 본께 부러워서 너 갖다가 내가 인간 맹글어 준께, 시방 너 나한테 그 공 할려면 멀었어, 너 뭐 돈 그렇게 두고서도 안 줘? 나쁜놈의 새끼, 가, 꼴도 보기 싫어. 쫓아 버렸어.
“다시는 안 와. 그렇게 보내부렀어. 아주 꼴도 보기 싫더란께.

신고

‘이제 늙은게 챙피스러운 거 숨겨서 뭐 하것냐’
“시방 여기 데리고 있는 야가 … (작은 목소리로) 우리 [사촌]동상의 딸이잖아.
“갸가 세 살인가 네 살인가 그때부터 키웠어.
“[부모가] 병마, 시방은 암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뭔지도 모르고 그래 죽은 거지, 머리 다 빠져 가지고.
“[야가 호적이 없어서] 혼인신고를 못하잖아. [그래서] 내가 해 줬잖아, 나 앞으로 해 가지고. 그래 그걸 가지고 딸이라고 해 가지고 [돈이 지원이] 안 된대. 딸이 있어서 안 된대, 사위가 있어서 안 된다고. 그래서 에라, 내 챙피 불사하고 [위안부 신고] 한다고. 주 118
각주 118)
장점돌은 생활보호대상자로 월 30만원씩 지원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해 왔으나 2001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면서 호적등본에 양딸과 사위가 있다는 이유로 지원비가 8만원으로 줄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신고를 하게 되었다.
닫기
“친구들한테 내가 돈 이거 안 나왔을 때 참- 그때 설움 많이 받았어. 뭣에 설움 받았냐면 사람이 날 괄세해서 설움 받는 게 아니고 내 자존심에. 친구들이 옷도 사 가지고 오지, 이 저고리도 사 가지고 온 거야, 돈을 못 탄께. 팔만 원 타 가지고 먹는 것도 바뻐. 그러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에라- 이제 늙은게 챙피스러운 거 숨겨서 뭐 하것냐.’ 그래서 이거(신고) 한 거여.

눈물

나는, 울어본 적이 없어.
“나는, 울어본 적이 없어. 울음이 나와야지 울지. … 내 평상 눈물이라는 게 왜 그렇게-. 그것도 야속하대. 우리 작은아버지 돌아가셔도 눈물이 안 나온게 [사람들이] 안 운다고 뭐락 하지. 또 우리 형부가 죽었는데, 세상에 형부가 죽었는데 쟈는 울도 안한다고 그렇게 슝을 보지. 아이 눈물이 안 나오는 걸 어떻게 울어-, 응?
“요 테레비 나오는 거 있잖아? 자식을 두고 시집 간 사람 있잖아? 그라믄 새모(계모)가 들어와서 그-렇게 뚜들겨 패고 때리고 하는 걸 보면 눈물이 그렇게 쏟아져. 그거밲에 눈물이 쏟아지는 게 없는데, 내가 평생 나 가지고 나도 저런 짓을 안 해야것다, 이리 맘이 들면 눈물이 그냥 나도 모르게 쏟아져. 그런데 누가 죽었다 하면 눈물이 안 나와서. 아-이, 안 나오는 눈물을 어떻게 하냐구. 침을 갖다가 이렇게 발르구 하하하하. 하이고- 시방도 누구 죽었다 해도 이런 눈물 안 나와.
“마음은 아프지. 그렇지만 눈물이 주루룩 안 나와. 엉엉 그런 게 없어.
“내 친구 보고서 그랬어. ‘야 나는 어째서 눈물이 안 나오냐?’ [친구가] 넌 지독하게 살아서 그러나 보다고, 서럼도 받고.
“그만치 내가 지독하게 컸다는 거여, 무섭게 컸다는 거지, 안 나와.
“[딸 죽었다는 소식] 들었을 때도 딴 사람 같으믄 까무라치지. [소식 전해준 사람이] ‘에휴- 나는 아줌마 까무라칠까 봐 [소식] 안 줬는디’ 그래. ‘까무라칠 게 뭐 있어요?’ 죽은 사람은 할 수 없다고 그러고 말았어.
“눈물은 안 났닥 한께. 내가 거짓말 하나? 눈물은커녕 콧물도 안 나왔닥 한께. 나와야 울지.
“[위안소에서 친구가] 죽었을 때도 뭐 딴 사람은 잉-- 하고 울더라만 나는 그냥 뭐 ‘너 잘 갔다, 언니 잘 갔어. 복장 편하게 잘 갔어.’ 그라고 말았어. 우는 게 없어. 누구 반가운 사람 만내 가지고, 싱가포르에서 같이 있던 사람 만내 가지고, 우리 살던 생각, 나 아이 낳아 가지구 고생한 생각, 그 찬물을 먹어 가지구 이가 다 둘러 빠져분 그런 얘기하면서 참 눈물이 날라는 지는 몰라두. 아휴--.

  • 각주 112)
    충청북도 영동군. 바로가기
  • 각주 113)
    결혼 한 언니가 부산에서 살고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114)
    잠수함. 바로가기
  • 각주 115)
    양○○의 어머니는 산 속 절에 들어가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116)
    경상북도 청송군. 바로가기
  • 각주 117)
    경상북도 상주시. 바로가기
  • 각주 118)
    장점돌은 생활보호대상자로 월 30만원씩 지원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해 왔으나 2001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되면서 호적등본에 양딸과 사위가 있다는 이유로 지원비가 8만원으로 줄었다. 이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신고를 하게 되었다.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느그들이 와서 보상하고 우리한테 와 빌어라” 자료번호 : iswj.d_001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