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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기]참여기/이옥선의 귀향

 
  • 저필자오지연
 

이옥선의 귀향

 

유난히도 머리가 하얗게 센 이옥선 할머니는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띈다. 내가 2001년부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간사로 일하면서 처음 나갔던 수요시위에서 할머니를 본 첫 인상은 햐얗게 센 머리에 단정한 옷차림,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채 고요함을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수요시위가 시작되기 전, 정대협의 다른 간사로부터 그날 수요시위에 참석했던 십여 분의 할머니들에 대한 소개를 받았다. 그 중 중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되지 않은 이옥선 할머니는 남의 신세를 지는 것을 싫어하고, 조용하지만 늘 당당한 모습을 가진 할머니라고 했다. 과연 할머니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마침 수요시위에 참석한 모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정부에게 사죄와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아주 당당하게 했다. 평소 연민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일본군 ‘위안부’ 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생소한 모습이었다.

할머니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게 된 것은 2002년 5월에 미국의 플로리다 탬파에서 열리는 증언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할머니의 보호자로 동행하게 되면서부터였다. 할머니는 거의 이십여 시간에 가까운 비행시간에도 불구하고 아프다거나 힘들다는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할머니보다 훨씬 젊은 내가 비행기에 오랫동안 앉아있는 것을 고통스러워할 때도 할머니는 그저“다리가 좀 뻑뻑하구만”이라는 말 한마디만을 할 뿐이었다. 힘들다고 하거나 불편해 하면 함께 동행한 나에게 큰 짐이나 되지 않을까 걱정을 한 것 같다. 남에게 폐 끼치기를 싫어하는 이런 할머니의 성격은 할머니를 만나면 만날 수록 더욱 두드러졌다. 심지어 나에게 무언가 부탁을 하거나 도움을 받을 때면 항상 “오 간사, 그거 장부에 다 적어 놔”라면서 농담으로라도 빚진 것은 갚겠다는 표현을 꼭 했다.

또한 할머니는 늘 자신을 설명할 때“난 바보라서 아무것도 몰라”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그저 중국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낯설고 어려워서 그런 표현을 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미국에서 할머니의 ‘증언’을 들으면서 할머니가 스스로를“바보”라고 칭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매우 이중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스스로를“바보”라고 전제하면서 시작되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아주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고, 과거에 겪었던 ‘위안부’ 로서의 경험은 매우 상세하고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바보”라고 말하는 것은 혹시 있을 수 있는 자신의 실수에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2002년 8월 23일, 할머니를 인터뷰하기 위해 처음 방문한 날은 무척이나 더운 날씨였다. 외출에서 돌아온 할머니의 방에 들어가서 이번 구술작업에 대한 설명을 하고, 책 출판에 대한 동의를 구하였다. 할머니는 아주 흔쾌히 동의하였고, 해방 이후 중국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서도 아주 간략하게나마 이야기를 해 주었다.

할머니의 방에는 침대와 가전제품, 깨끗한 장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으며, 한 켠에는 성모마리아상과 성경책과 묵주가 놓여있었다. 방문 바로 옆쪽에는 거울이 있었고 거울 앞에는 할머니가 서툰 글씨로 쓴 ‘하루의 기도’라는 기도문이 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외출할 때마다 거울 앞에 서서 기도문을 외운다고 했고, 나와 함께 미국에 갔을 때도 새벽에 혼자 일어나서 기도문을 외웠다. 중국에서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한국에서 자유롭게 기도하고 성당을 다닐 수 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면서 살고 있었다.


나는 이후 더욱 효과적인 만남을 갖기 위해 이전에「경남정신대문제대책을위한시민연대모임」의 홈페이지에 나와있던 할머니의 ‘증언’과 1997년에 상영되었던 SBS 「사건과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이 두 가지 자료를 통해 할머니가 한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찾기 위해 귀국했으며,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굉장히 부끄러워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했다는 점에 대해 굉장히 의아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내가 본 할머니는 ‘위안부’로 다녀 온 사실이 부끄러운 게 아니고 오히려 일본정부에 그 책임이 있음을 당당하게 밝혀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에 한국으로 귀국하려고 했던 것이 가족을 찾는 개인적인 이유에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내가 살아있을 때 이 문제가 해결되야 한다”는 것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에 남겨진 식구들을 생각하면서 늘 기도한다는 할머니는 시간만 나면 나에게 가족들의 자랑과 그들에 대한 걱정을 했다. 할머니는 어렸을 때 귀수술을 해서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아들과, 너무 착한 며느리, 그리고 총명한 손자 두 명에 대한 기억을 마치 힘들었던 중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추억으로 그리며 살고 있었다. 사실 할머니는 자신이 너무 힘들어 죽으려고 했으나 아들 때문에 지금까지 살았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할머니와 나의 두 번째 만남은 2002년 9월 초순, 수요시위가 끝난 뒤에 할머니와 함께 정대협 사무실에서 이루어졌다. 할머니는 자리를 잡고는 당신이 살아온 인생의 순서대로 천천히 하나하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해방 이후로 넘어가면서 할머니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으며 감정의 변화도 다양해져 갔다. 해방 후 할머니가 첫사랑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가벼운 흥분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첫사랑과의 이별 후 재혼 이야기에 이르렀을 때는 나에게 당신이 겪었던 ‘대단한’ 시집살이에 대하여 일장 연설을 하기도 하였고, 결혼을 한 나에게 “요즘 결혼한 사람들 생활은 많이 편해졌다”며 그때의 어려웠던 생활을 강조하면서 가벼운 한숨도 내쉬었다.

인터뷰가 계속되면서 할머니는 재혼한 남편의 아들과 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자식들의 인상착의부터 성격, 그리고 병력에 이르기까지 꽤 자세하게 나에게 그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강인하게 보였던 할머니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더 깊은 법”이라며 당신이 중국을 떠나오기 전까지 아들을 어떻게 길렀는지, 그리고 그 아들이 당신을 얼마나 끔찍이 위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또 다시 회상에 젖었다. 또한 할머니가 한국에 귀국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한국에 그토록 오고 싶어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물론 이러한 사실들은 할머니가 보이는 당당함 뒤에 감춰진 사실들이기는 하지만, 할머니를 지금처럼 강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이기도 할 것이다.

지난 봄 대한여한의사협회에서 할머니들의 건강을 무료로 검진해주면서 한약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그때 할머니를 검진했던 한의사는 할머니께 약간의 풍기와 우울증 증세가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겉으로 보기에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어보였던 할머니께 내려졌던 증세 치고는 좀 과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나눔의 집에서 할머니들의 건강을 체크하고 있는 간호사 선생님은 요즘 할머니의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또 한편으로는 중국에 남아있는 손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하고 싶어하는 눈치가 보인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주었다.

공부하고 싶은 열망으로 몇 년을 울었던 소녀 이옥선의 삶은 이제 몇 십 년이 흐른 채 현재에 와 있다. 멀고 험난했던 역사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할머니는 자신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외면과 자신을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중국에 있는 가족들의 바람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재 할머니는 자신이 어렸을 때 하지 못했던 공부의 한을 풀기라고 하는 것처럼 공부에 열성이다. 자신의 ‘위안부’ 피해사실과 그로 인해 겪여야만 했던 몸과 마음의 상처에 대해 자신의 입으로 일본정부와 일본인들에게 ‘증언’하기 위하여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 또한 읽고 쓰지 못하는 한글공부에도 열심을 내고 있다. 이토록 적극적인 할머니의 태도가 결국 현재의 할머니를 만들었을 것이며, 현재를 살 수 있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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