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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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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기]참여기/헛기침

 
  • 저필자윤미향
 

헛기침

 

2002년 5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실무자들이 구술작업에 처음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할머니들에 대한 기초내용을 사무실에서 작성하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와 같은 지역인 수원에 석순희 할머니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갑기도 하고 그동안 왜 몰랐을까 하는 반성도 하면서 할머니의 삶에 대한 기초내용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할머니에 대해서 알아 낸 것은 주소가 수원이라는 것과 대인기피증이어서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 뿐이었다.

할머니와 관련된 자료는 한국 정부에 제출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신고서 한 장밖에 없었으며 그 신고 서류에는 다른 할머니들의 경우 기록되어 있는 ‘위안부’ 연행시기, 연행장소, 위안소 생활, 귀국상황 등이 모두 빈칸으로 남겨져 있었다. 할머니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집 전화번호도 주소도 없었으며, 수원시청 담당 공무원의 전화번호가 유일한 연락수단이었다. 더군다나 수원시청 직원과 통화를 하여 할머니에 대한 인터뷰 의사를 타진했지만 할머니는 그 공무원 외에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는다며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할머니의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석순희 할머니는 정대협에서 작성한 1차 구술자 명단에 포함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석순희 할머니에 대한 미련을 쉽게 떨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대인기피증’이라는 글귀가 나를 잡아 끌었다. ‘위안부’였다는 사실 때문에 해방 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편하게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할머니 개인의 고통으로 짊어지고 지내왔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비록 할머니의 삶을 책에 싣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우선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사실 그 때 나는 면접자이기 보다는 정대협 실무자로서의 책임감을 더 크게 느꼈었다.

수원시청에 할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하고, 담당 직원과 여러 차례의 전화통화 끝에 간신히 할머니의 집 전화번호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화번호를 확보하고도 거의 일주일은 망설임으로 전화를 걸지도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가 첫 통화에 거절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할머니와 첫 통화를 하던 날, 할머니는 그동안 이런 나의 걱정과 망설임을 무색케 할 정도로 반가운 목소리로 맞아 주었고, 오히려 관심을 가져줘서 고맙다며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답변을 주었다. 당연히 거절할 줄 알고 나름대로 어떻게 설득할지 열심히 고민했었는데 정말 뜻밖의 반응이었다.

그 날로부터 두 주 후인 2002년 7월 7일 일요일 오후, 처음으로 할머니댁을 방문하기로 약속하고 나름대로 방문 준비를 하였다. 첫 방문은 할머니에게 나를 소개하고 할머니들의 기록을 역사에 남기는 작업에 대한 설명과 이 작업에 대한 할머니의 동의를 구하는 것에 목적을 두기로 하였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도착한 할머니의 집은 수원 공군비행장과 인접한 기찻길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다세대주택 반지하였는데, 할머니는 그 곳에 방 두 칸짜리 전세를 얻어 조카(할머니 오빠의 큰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할머니의 방에는 텔레비전, 장롱, 냉장고 등 살림살이들이 벽 쪽으로 둘러져 있었고, 입구에는 염주, 약봉지, 약간의 화장품, 식당에서 모아온 담배 라이터가 가득 모아진 교자상이, 유리창가에는 할머니가 직접 담근 술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방안 분위기만 보아도 할머니가 바깥출입을 별로 하지 않고 방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시청 직원이 전화를 해서 잘 도와주라고 했다며 대화의 문을 먼저 열었다. 그때서야 대인기피증인 할머니가 낯선 외부인, 그것도 무엇인가 조사를 하겠다는 사람의 방문을 허락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할머니가 외부인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시청 담당직원이었고 그 직원이 만나서 도와주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방문을 허락한 것이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할머니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갈 때나 병원 진료, 약국에 갈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집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고 시청 직원의 전화와 방문이 외부인과 만남의 대부분인 것 같았다.

나를 소개하니 할머니는 고생이 많다며 TV에서 데모하는 할머니들을 봤는데 그 사람들도 다 거기 갔다 온 할머니들이냐고 묻기도 하였다. 할머니는 ‘위안부’였다는 것 때문에 사람을 만나기를 피하면서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줄곧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눔의 집을 불교에서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눔의 집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할머니의 증언으로 이어져 나갔다.“나도 중국으로 갔다 왔는데…” 질문도 없이 계속되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외출 나갔던 조카가 돌아오자 바로 중단되었다. 조카에게도 할머니의 역사를 스스로 이야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조카 내외가 일 나가고 없는 시간에 다시 찾아뵙기로 약속하고 첫 번째 방문은 그렇게 끝났다. 첫 방문에서는 인터뷰 목적에 대한 이해와 할머니의 동의를 얻는데 최선을 다하기로 했는데, 이런 나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한 셈이다. 할머니의 인터뷰 동의는 물론 언제, 어떻게 연행되었으며 어디로 갔는지 할머니의 삶에 대한 기초 조사는 해냈던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위안부’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두 번째 인터뷰 때부터는 말을 무척이나 아꼈다. 지난 삶에 대해 이야기 할 때에 불필요한 말은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았고, 더듬는다거나 한번 한 말을 되풀이한다던가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한번에 길게 이야기를 이어가지도 않았고, 할머니의 삶에서 고통스러웠거나 힘들었던 일들은 가능하면 이야기하지 않으려 하였다.

첫 번째 만남에서 인터뷰를 허락하였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는 것도 허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위안소 상황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말을 안 하고 싶어 하였다. 특히, 위안소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강간당한 날의 이야기를 할 때나 일본 군인들과의 관계 등 말하기 곤혹스러운 부분에 대해서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콜록 콜록 헛기침을 자주 하면서 말하기를 멈추었고, 가능하면 더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고 피하고 싶어 하였다. 해방 후의 삶과 현재 생활에 대해서는 중간에 질문을 하지 않아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술술 이야기를 하다가도, 과거로 돌아가 위안소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질문으로 들어가면“이렇게 입에 담기 민망스러운 일들을 왜 다시 말해야 하나”하며 한숨으로 대신하거나 짧은 답으로 말을 끝맺곤 하였다. 그만큼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경험은 고통스러웠고, 다시 꺼내기 싫은 이야기였으리라.

어떻게 하면 할머니의 과거를, 그리고 현재를 나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있게 할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약값 지출이 늘었다는 하소연이 떠올라 약값에 보태 쓰라고 미리 용돈을 준비하여 드리기도 하고, 고구마를 쪄서 갖고 가 할머니와 함께 먹으며 향수를 떠올리기도 하였다. 지팡이가 없어 우산을 지팡이 삼아 병원에 다닌다는 말씀에 지팡이를 사느라고 수원 시내에 있는 큰 병원 주변 의료기기판매점을 찾아 헤매기도 하였다.“친자식이라도 이렇게 하겠나”하면서 선물로 드린 지팡이를 짚고 방안을 한바퀴 돌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볼 때는 그 선물 뒤에 숨기고 있던 나의 의도가 오히려 부끄럽기도 하였다.

할머니의 닫힌 마음을 풀기 위한 이러한 나의 노력의 결과인지, 아니면 만남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할머니가 나를 신뢰하게 된 것인지, 혹은 꺼내기 어려웠던 말들을 가슴 속에서 풀어냈기 때문에 내가 편해진 것인지, 인터뷰 후반으로 넘어서면서 할머니는 표정도 처음 만남 때보다 많이 밝아졌고, 나를 대하는 표정도 사뭇 다정해졌다. 지난 삶을 이야기할 때 자주 내뱉는 헛기침도 줄어 들었으며 같은 경험을 가진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인터뷰를 모두 끝마칠 즈음에 가서는 정대협에서 주최한 할머니들의 인권캠프에 직접 참석하여 같은 아픔을 겪은 할머니들과 만나기도 하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할머니는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위안부’의 경험이 할머니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고, 그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서서히 외부와 닫혀 있던 마음을 열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이제 내 앞에서 방귀를 소리내서 뀌기도 한다. 가족에 대한 원망도 풀어내기도 한다. 그렇게 할머니의 대인기피증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듯 하였다. 그러나 위안소에서의 더 깊은 삶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은 여전하다. 나 이외에 다른 사람들이 할머니 집을 방문하는 것도 허락지 않으며, ‘위안부’ 할머니들 이외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기피하고 있다.

이 편집본을 만들면서도 아직도 위안소에서 할머니가 겪었던 일들의 세세한 부분과 해방 후의 생애에 대해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 마음이 개운하지 못하다. 과연 할머니가 평생 동안 침묵해 왔던 지난 삶을 엉킨 실타래에서 실의 줄기를 쭉 뽑아 올리듯이 편하게 술술 쏟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는 숙제이다. 끝나지 않은 그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할머니의 마음을 열어 가는 작업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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