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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어떻게 해야 이 웬수를 갚어?”

“어떻게 해야 이 웬수를 갚어?”

  • 년도
  • 나이
  • 내용
  • 1928년
  •  
  • 서울 마포에서 출생
  • 1941년
  • (14세)
  • 서울 마포구 복사골에서 연행, 중국까지 이동
    내몽고로 추정되는 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
  • 1945년
  • (18세)
  • 해방 후 8개월 간 북경에서 체류
  • 1946년
  • (19세)
  • 인천항을 통해 귀국
  • 1950년
  • (23세)
  • 한국전쟁시 대구로 피난
  • 1956년
  • (29세)
  • 강원도 식당에서 2년 동안 식당보조
  • 1959년경
  • (32세경)
  • 대구 왜관에서 식당 경영
  • 1992년
  • (65세)
  • 수원으로 이사
  • 1993년
  • (66세)
  • 일본군 ‘위안부’ 등록
  • 2004년
  • (77세)
  • 경기도 수원시에서 조카 내외와 살고 있음

서울 위치 →내몽고 위치 →북경 위치 →천진 위치 →인천 위치
“저놈들헌테 내가 당한 걸 생각을 허면, 내 참 그 아까운 청춘을, 이날 이때까지 그놈들 땜에 시집도 못 가고 그랬으니.
“해방이 되었고, 거기에서 돌아 왔어도 아직도 어리잖아. 결혼이라든가 남자라든가 이런 거는 생각하기도 싫었어. 한 번은 동네 아줌마가 소개로 해서 양복집 아들을 선을 봤는데, 그 남자가 내가 좋았던지 매일 아침 우리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너무너무 보기 싫었어. 남자라면 진저리가 쳐졌거든. 무조건 싫더라고, 징그럽더라고. 결혼이라든가 남자라든가 이런 거는 생각하기도 싫었어.
“글 않해도 죄 많아서 이렇게 참, 이런 일을 당하고 사는데 뭐 하러 또 더 죄 짓고 살 필요가 없잖아. 그만큼 내가 고통을 받고 못헌 일을 당하고 사는 데 시집가면 무슨 영화를 내가 보겠다고.
“그래도 인제 남 결혼해서 이러는 걸 보면 속이 아프지. 나는 그런 일을 당했는디 청춘이 다 지나가 버리고.

피신

오라버니를 안 끌려가게 하려고, 딸들은 또 저기 거시기 정신대 안 보낼려고.
“아부지는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어. 우리 어무니가 고생이 많았지. 열두 살에 시집와서 열일곱 살이던가 그때에 오빠를 낳고 그리고 스물아홉 살에 과부가 되셨지. 주 049
각주 049)
석순희의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1924년 생), 본인, 여동생(1934년 생)이었는데, 아버지는 1936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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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구 복사골에서 엄마가 작은 점빵을 했어. 뭐 잡화가게지. 구멍가게라도 뭐 참 정말로 먹고 살기 힘들었지, 고생도 많이 했고.
“여덟 살 되어서 학교 갔더니 너무 이르다고 안 된다고 하더라고, 섣달 초이튿날이 내 생일이거든, 한 해 묵고 오라고. 그래서 아홉 살 되어 가지고 학교에 가니까 또 너무 넘쳐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때, 그때만 해도 뭘 아나? 공부고 뭐고 그런 생각이 있어? 그냥 남의 집에서 일하면서 애도 봐주고 그랬지.
“왜정시대에 [오라버니가] 끌려갈 뻔했어. 그런데 우리 어무니가 오라버니를 안 끌려가게 하려고 오라버니 민적을 따로 독립시켜서 동민적으로 파내 버렸지.
“그래도 뭐 그렇게 해 놓고 이 아들 안 보낼려고 이불을 싸 놓고 그 뒤에 다 감춰 놓고 소변 대변 다 받아내고 뭐 뭐 참, 그렇게 그 이불 뒤에다 그렇게 감춰 놓고. 그래서 그랬는지 저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오라버니는 징용을 안 갔어.
“딸들은 또 저기 거시기 정신대 안 보낼려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그랬다가 헐 수 없이 할마시 앞으로 돌려 논거지. 주 050
각주 050)
어머니와 석순희, 여동생의 호적을 본가 호적에서 외가의 호적으로 이전시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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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나하고 육 년 차이야. 그러니까 지금 칠십 되었지. 근데 얘가 그러니까 원 성은 ‘석’가인데 안○○으로 되어 있거든, 어머니 성으로 따서. 나도 본적에 가면 안순희로 되어 있지. 그런데 주민등록을 대구에서 만들 때에 석순희로 만들었지. 동생은 여전히 안○○으로 되어 있어.

몸무게 달기

여자들을 나래비로 줄을 세워 놓고는 저울에 무게를 달았어.
“그때가 대동아전쟁이 터졌다고 하더만. (작은 소리로) 열네 살 때지. 그때 뭘 알아? 아무 것도 몰랐지.
“마포구 공덕동 복사골 그 안으로 들어가면 큰 쌀 찧는 방앗간이 있어.
“그때가 가을이었을거야, 초가을인지 그랬어. 동네에서 방송을 했는데 복사골 큰 방앗간 앞으로 모이라고 하더라고. 몇 살까지 여자들 다 여기로 나와 봐라 하는 식을 했지. 그렇게들 나오라고 하니까 부모네들이 따라 나왔었지, 왜 그러나 하고.
“그래서 나갔는디 동네 여자들을 나래비로(한 줄로) 줄을 세워 놓고는 쌀가마 무게를 재는 저울에 무게를 달았어. 거기에서 무게가 좀 나가는 실한 여자들은 바로 트럭에 싣더라고.
“총을 찬 군인도 있고, 한국사람도 있었어. 일본군인이야 여럿이 있었지, 민간인도 있었고. 그것들이 다 차 타라고 하고 끌어올리고 그랬어.
“내가 그때 오십오 키론가 육십 키론가 나갔거든. 지금도 그렇지만 덩치가 좋았지. 아 그놈들이 무게가 나가면 바로 트럭에 태우는 거야. 그래서 나도 그 길로 트럭에 실려 간 거야. 그래 갖고 강제적으로 차에다 싣고 그러니까 우리 오마니는 내 딸을 왜 끌고 가느냐고 막- 매달리고 울고불고 욕지꺼리를 하고. 그런덜 저 놈들이 그걸 들어? 웬만한 처녀들은 한꺼번에, 거기에서 한 열명쯤 끌려 갔을거야.
“[트럭 안에는] 총을 찬 군인이 한 사람인가 두 사람인가 있었고 앞에는 운전수하고 또 군인 한 사람이 타고 있었던 것 같아.
“뭐 껌껌하게 텐트를 이렇게 치고 가니깐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고.
“아이고 말도 마. 가슴이 벌렁벌렁 하더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아무 생각이 없었지.

흙집

다다미도 아니고, 온돌도 아니고 그냥 흙으로 바닥을 붙여 논 그런 집이었어.
“[얼마나 갔는지] 알 수가 있나. 타자마자 천막을 내리고는 계속 갔으니까. 참, 트럭이 가다가 어딘가 가서 또 여자들을 몇 명 태우고, 또 가다가 태우고 그러더만. 그런데 얼마를 갔는지 모르겠어. 한참 가다가 열차를 타게 내리라고 그랬어. 기차역이었는데 한강처럼 긴 다리 위를 기차를 타고 지났어. 근데 아주 그냥 다리도, 열차 다리도 엄청 길어.
“거기가 우리나라 땅인지 중국 땅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중국 땅이라대.
“아이고 말도 마. 산도 없고, 나무도 없고, 물도 없고, 사막 같이 누런 모래가 온통 뒤덮여 있더구만. 우리들을 그런 사막 가운데 덩그렇게 있는 어떤 집에 데리고 갔는데, 그 집은 중국인들이 살던 집인데 쫓아냈다고 하더라고. 방도 다다미도 아니고, 온돌도 아니고 그냥 흙으로 바닥을 붙여 논 그런 집이었어. 우리가 있는 그 집 주변에 드문드문 집들이 한 채씩 있었던 것 같아.
“텐트 안에서도 살았고, 집 허술한 데 그런 데 인제 손질해 가지고 그런데서 저- 했고 그랬지.
“맨 뭐 거시기 뭐 사막 같은 데, 허허 벌판 같은 데, 시베리아 벌판 같은 이런 데야. 또 어떤 데는 산 쪽에 그냥 산 속에 천막 쳐 놓고 그러고. 한 군데 가니까 보꾸고(방공호)를 막 파놨더라고. 그 안에 살고 그랬어.
“그러니까 이렇게 전시 때니깐 자꾸 전쟁이 들어가면 또 따라 들어가고 들어가고 그런 거지 뭐.
“우리는 한 열 명 정도 있었나봐. 나중에도 자꾸 더 들어오더라고. 처음에는 우리 한 오륙 명 있었거든. 나중에는 더 들어와서 열 몇 명 정도 됐어. 한 두 번 정도 더 들어왔어.

군인들

저놈들이 우리를 짐승처럼 대했지. 인간으로 취급 안 했어.
“니기 가덩마탕(가자 마자) 지랄들을 했지. 그 뭐 뭐, 천지 뭘 알아?
“낮에 밥풀떼기 두 개를 단 장교가 왔더라고. 그 장교가 와서 나를 살피고 가더니 저녁에 긴- 칼을 차고 왔더라고. … 요구를 허는 거를 안 들어 준다고 그냥 칼을 빼들고는 죽인다고 지랄을 하고. 아이고-- 그 도망질 해 가면서 어느 굴 속에 들어갔다가 또 그냥 무신 그 저, 거기는 이렇게 집이 이렇게 있는데 구들만 있고 불 때는 아궁이가 없어. 그냥 들어가고 나오고 그럴만한 구멍만 있었어. 그래가 그 밑에 세상에 들어가서 숨었다가 나왔다가 아유-- 이-.
“내가 저 놈들헌테 안 줄라고 허다가, 안 뺏길려고. … 아마 그 날 밤 내가 그 장교에게 잡혔으면 죽었을거야.
“어떤 언니가 와서는, 그 언니는 내가 가기 전에 먼저 온 여자였어. 그 언니가 와서는 그 사람들 말대로 들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산대. 나를 내주는 게 정말 싫어서 반항도 많이 하고 도망도 많이 다니고 그랬어.
“[나를] 야시다상 야시다상 그렇게 부르대.
“군인들이 항상 옆에 있었던 게 아니라 전쟁에 싸움하다가 오고 그랬는디.
“장교들은 가끔 자고 가고 그랬어.
“아침에는 조금 한가하고, 그 나머지는 낮도 밤도 없었어. 아침밥 먹자마자부터 들이닥쳤지. 그 잡놈의 새끼들이 그 죄를 다 어떻게 받을지. 그 당시 있었던 놈들은 다 죽었을거야.
“토요일 일요일에는 더 심했지. 그래 노는 날이잖아. … [평일에는] 한 열 명도 되었다가 열 명도 넘었다가.
“[삿쿠(콘돔)] 그런 거는 구경도 못 해 봤어. 그러고 그런 걸 할 시간이 어디 있어?
“시간을 딱 정해져 놓으니까 그놈들도 바쁘지. 시간을 몇 사람까지 딱 이렇게 저거하니까 바쁘지 뭐. 옷 벗을 여가가 어딨고 뭐가 어딨어. 몽딩이 그것만 내놓고 지랄을 껍쩍거리다가 그냥 나가고 모두 저희 놈들도 바쁘니까. 한 쪽에서는 총소리가 나고 대포소리가 나고 비행기소리가 나고 그 난린데, 그 언제 그러고 있어.
“좋은 일본 군인도 있더라고, 지금은 이름도 까먹었는데. 한 일본 군인은 들어와서는 손만 잡아주고 등을 쓰다듬으면서 불쌍하다고 아주 등을 두들기면서 가와이소(불쌍하다) 그러면서 그냥 나가는 군인이 있었어. 잠도 안 자고 그냥 나가고 그랬어.
“[월경을] 거기 가서 했어. 열여섯 살 때 했나 그럴 거야. 그래도 왔어. 그놈 새끼들이 월경을 하는지 뭔지 알아? 환장들을 해서 지랄들 하고 그랬지.
“주먹으로 쿡쿡 때리고 그랬지 행패 겉은 거는 없었어. 행패 부렸다가는 누구한테 맞아 디질라고? 장교들이 그냥 밖에서 다 지키고 있는데, 늘 버글버글 끓고 그랬는디. 말 안 듣는다고, 인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그런다고 지랄을 하지.
“임신한 여자를 두 명 정도 본 것 같애. 그런데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못 들었고 못 봤어. 아마 병원에서 어떻게 했다고 했지 아마.
“[군인들이 안 올 때에는] 그냥 엎드려 있거나 앉아서 노다지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거지 뭐, 괴롭고 힘드니까. 그러니까 아직 눈물이 안 말랐기에 지금도 이렇게 눈물이 나지.

애편

나도 그 여자 때문에 애편을 먹었지.
“세수도 어딨어, 세수도 며칠만에 하고 그랬지. [몸 씻는 거는] 형편없었지 뭐. 우야다가 저놈들이 인제 수돗물을 탱크 같은 데다 싣고 오면 그릇이 있나 뭐가 있나, 뭐 무슨 다라 같은 데다 막 부어 놓고 씻고 그랬지.
“팬티가 어딨냐, 팬티가. 그냥 바지 같은 것, 반바지 같은 것 그런 거나 하나 입고 그러고. 옷은 어떻게 됐는지, 옷은 입었어. 그러니깐 기모노 비스럼허니 앞에가 터졌고, 원피스 같이 그렇게 생긴 옷을 줬어.
“밥은 주먹밥을 주더만. 반찬이 뭐 있나, 그냥 주먹밥을 주면 그걸 먹고, 무슨 맛으로 먹었는지 모르겠어.
“민간인들은 전혀 없었어. 한국 사람은 전혀.
“[돈은] 없-어. 무신 돈이 있어.
“우리들끼리는 부를 것도 없고, 나이가 비슷하면 ‘친구야’ 하고, 나이가 좀 들으면 ‘언니’ 허고 뭐 그랬지.
“[한 언니는] 나보다 그 당시에 오 년인가 그렇게 더 많았지. 말은 충청도 말 비슷하게 하는데 얼굴은 좀 생생해. 지금 아마 죽었을거야, 애편을 많이해서 엉망이었거든. 나도 그 여자 때문에 애편을 먹었지.
“인제 하는 게 벌써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 같애. 그리고 그 왜놈들 쫄병 그런 것들이 막 욕지거리를 하고 그러면 나서서 그냥 같이 대항도 하고 그랬어.
“만날 내가 그렇게 울고 그러면 이거 한 번 피워보라고 이거 피면 잡맘이 없어지고 그런다고. 그래서 애편을 좀 폈어. 담배다가 넣어서 폈지. 그러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담배를 못 끊지. 담배를 톡톡톡 이렇게 두들기면 담배가 조금 들어가고 종이가 조금 나오거든. 그러면 여기다가 하얀 가루를 넣어 주더라고. 그래 가지고 피웠지.
“그 애편을 피니깐 아-무 감각이 없어. 사람이 처진 게 그냥 아무 재미도 무재미고 생각도 없고, 그냥 뭐 덤덤허니 사람이 무슨 반병신 모양으로 이상허대 이상했어, 약에 취해서 그런가. 그러니 그걸 씩- 빨아 가지고 코나 입으로 푸- 내 부면 안 된다고 막 샘키라고 막 가르쳐 주는 거여, 연기를. 그런데 아이구 샘켰더니 막 나중에는 구역질이 나고 사람이 막- 축- 널어져서 쓰러져서 뭐 뭐 죽을 뻔 했대니까, 처음에는. 아이구 무서워. 그래 가지고 몇 번 피다가 아이구 이거 안되겠다 해서 끊었지.

매독

밑에가 뒤집어지고 벌어지고 피가 나고 그랬어. 아이고, 생각만 해도 어이구-
“아휴- 밑이 뒤집어지고 상처가 나서 피가 나고 걸음도 허우적거리고 그러면 병원에 데리고 가거든. 치료받아 봤자 뭐, 그 당시에 무슨 약이 있겠어. 아까징크만 실쩍 이렇게 발라주면 치마 이런 데 겉으로 배 들어서 벌겋게 묻고 그랬지. (한숨을 쉬며) 내가 이래서 아무도 안 만날라고 그래, 이런 거 생각 안 하고 싶어서. 그래 이걸 내가 뭐 좋은 일이라고-.
“간 지 다음해 열다섯 살쯤이었던 것 같어, 반 년쯤 지나고 나서였던 것 같고. 성병이 걸려서 606호를 많이도 맞았어. 바이도쿠(매독)라고 그랬지. 아이구- 여기 아랫도리에 깨알 같은, 사마구 같은 게 나. 여러 개가 나. (손가락으로 성기 쪽을 가리키며) 아주 여기를 쫙 돌아서 아주 많이 나. 병원에 치료 갔다 와서 아퍼서 내가 만져 보면은 실 겉은 게 묶어 가지고 있고 그랬어, 실 겉은 게. 그래 가지고 그게 그냥 저절로 떨어지고 그러대.
“이- (정강이를 내보이며) 여기 여기. 주 051
각주 051)
인터뷰 당시에 석순희는 정강이에 움푹 패인 흉터 세 군데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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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아주 아주 병을 얻어 가지고 참 고생 많이 했네, 이것 때문에. 이게 막- 썩어 들어 가지고, 이것 봐 푹 들어갔잖아. 뼈까지 썩어 들어간다고 그랬었어. 아주 죽을 뻔 했어.
“[병원에는] 한두 명 정도 여자 간호부가 있었던 것 같고 다 남자였어. 병원은 천막 같은 것으로 쳐져 있었어.
“그냥 아까징크 발라 주고, 그러고 인제 노란 가루약 뿌려 주고 그러대. 왜 그런 게 났는지 몰라. 주 052
각주 052)
매독에 걸리면 다리에 종양이 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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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해방되어 나와서도 대구 있을 적인데 그렇게 안 좋아, 아랫도리가. 그냥 이렇게 건지럽고, 소금물에다 소금 타 가지고 해도 그냥 안 좋고.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606호를 맞아야 된다고. 그래서 병원에서 맞으라고 하니까 맞았지.

해방

한국사람이라고 누가 옆에서 통역을 해줘서 그렇지, 우리도 죽을 뻔 했대니깐.
“거기에서 해방되어도 해방된 건지 무언지 그런 걸 아나. 그 골짝에서 그런 것도 모르고 벌판 같은 데, 아주 사람 구경도, 왜놈들 아니면 사람 구경도 못헐 정도지, 군인 아니면.
“아 저놈들이 막 설치는 거여. 저놈들이 칼 들고 눈이 시뻘겋게 설치샀고 지랄을 하니까.
“나중에 외국 사람들이 막 오더라고. 중국인들이 들어오고 또 그때 양키 같은 사람도 들어오는 것 같으고 그래. 아구 징그러워. 그 생각만 하면 소름이 끼쳐. 일본군인들이 중국 사람들한테도 많이 맞아 죽는 걸 봤어.
“우리도 죽을 뻔 했대니깐. 그냥 몽둥이들을 들고서 그냥 데모 겉이 쫓아들 와 가지고 그냥 막 사람들을 [둘러] 싸 가지고 아이구-. [그런데] 저 여자들은 일본 사람이 아니고, 한국사람이라고 누가 통역을 해서 중국 사람들한테 매 맞아 죽는 걸 우리가 피했지. 처음에 죽는 줄 알았지. 그래 가지고서는 중국 사람들이 그냥 우리를 도와 가지고 숨겨주고 그랬지.
“그 언니래는 여자하고 이제 몇몇이서 막 도망을 댕기다시피 했지. 하여튼 차가 있나 뭐가 있나 밤새도록 어딘가 중국 놈들 따라서 인제 나온다. … 또 나오다가 아무 데 쓰러져 잠도 잤다가 또 한없이 밤낮으로 걷고. … 중국집이 있으면 그런 데 들어가서 밥도 얻어 먹어가면서 그래 가지고 북경까지 이제 나온 거여.
“밤낮으로 걸었더니 발이 불어 터 가지고 신발도 못 신고 그냥 맨발로 걸으니 그렇게 아플 수가 없고. 한 일주일 넘게 걸었던 것 같아.
“아고- 그 고생한 걸 생각하면 저 놈의 새끼들-. 세상에 좀 그 웬수를 갚아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이 웬수를 그래 갚어.
“[여자들하고] 같이 중간까지는 나오긴 했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뿔뿔이 다 헤어지고, 나는 그 길로 바로 우연히 광복군을 그냥 만나 가지고. 그 내외가 집이 어디냐고 묻고 우리헌테 잘 하더라고, 붙들고 울고 그러더라고. 북경에서 있는 동안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우리하고 같이 살자고 하고.
“집은 중국집, 중국 주인이 거기 살았어. 참 또 그 주인 중국 놈 아들이 막 지 곁에 시집오라고 날더러 막- 애원을 하는 거여. 그래 그 광복군 아저씨가 안 된다고, 얘는 좀 있다가 나가야 한다고. 그래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아고- 그때 중국놈하고 결혼했으면 아직도 나오지도 못하고 내가 중국에 있지 않았겠나. 그랬나 싶어.
“그런데 광복군들이 엄청 많더라고. 많이들 왔다갔다 하고. 군복 입고 있대. 그 모자도 그냥 군인들 장교들 쓰는 그런 모자들 쓰고 왔다갔다 했어. 무슨 일을 했는지 그냥 군인인갑다 싶었지. 무슨 말 될까봐 그랬는지 말을 해도 자기네들끼리 비밀로 하고 말이야.
“[나는] 거기서 그냥 집안 청소 해 주고, 밥도 해 먹고 그랬지. 그 광복군 부인이 그렇게 내게 불쌍타고 잘 했는데.

귀국

엄마가 내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나 봐.
“그러니까 팔월 달에 해방됐잖아. 팔월 달에 해방됐는데 북경에서 설 한번 쇠고 그 이듬해 사월 달에 나온 거야. 천진까지 가서 배타고 나온 거야. 천진에서 배를 일진, 이진 그렇게 나눠서 탔는데, 나는 삼진 차를 타고 나왔는데, 아 엄청나게 컸어, 배가. 그러니까 그때 얼핏이 내가 들은 소리가 삼천 명이 탔다고 그러던가, 그랬어.
“인천 바다에 도착해서 일주일을 배 안에 있었어. 거기서 일주일을 있다가 모두 내리라고 그러대. 내리니까 미군들이 이만썩한 뭔 기계를 갖다가 디디티(DDT)를 뿌리고 그 야단들을 하더니, 속에, 뭐 옷 속까지 디디티를 다 치더만.
“그때는 이 한국에 그 돌림병들이 퍼졌다나 봐. 그래 가지고서는 치고 나오니깐, 서서니깐(서 있으니까) 가지 말고들 서서라고, 한국말로 한국사람이 마이크로 하더만. 그래서 애들은 오백 원씩 줬는가 그러고 어른들은 천 원씩인가 주고 그랬는디, 나는 팔백 원인가 칠백 원인가 그렇게 받았지. 한국 사람이 주대. 그리고 나서 광복군 아저씨하고 헤어졌지.
“나는 서울 마포로 왔어. 어떻게 가야하는지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물어물어 걷다가 그때는 전차가 있었잖아. 전차 타서 마포 종점에 내려서 복사골까지 왔지. 복사골을 들어서니 엄마가 떡시루를 이고 내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나 봐.
“배 안에서 토하고 막 그랬었는데, 거기서도 아프고 그러더니 집에 오니까 맘을 놓아서 그런지 그래가 세상에 석 달을 앓았네. 말라리안가 뭔가 그거, 하루 아프고 하루 안 아프고 그러는 병. 아이고- 그때는 죽는다고 그랬어.
“한 달은 그러더니 그 다음 한 달은 또 계속해서 떨고 그랬어. 그 당시에 뭐 약이 있나 뭐가 있나. 약이라면 약초 같은 거 그런 거 엄마가 구해서 먹이고 그랬지. 엄마가 공을 들이고 그랬지.
“오마니는 [점빵은] 그만 두고 아들하고 행상하고 있었어. 그래 오마니 도움으로 우예우예 나았는데 나아 갖고는 돈을 벌어야 하니까, … 오빠도 그 당시에 각기병이 있어 갖고는 몸이 퉁퉁 부어 있고 그랬거든. … 남의 집도 살고 애기도 봐주고 또 부자집에 식모도 하고 안 한 일이 없지 뭐.

미군부대

거기에 미군 부대에서 엄마하고 내가 미군 빨래를 했는데.
“그러다가 전쟁이 터졌지. 난리를 피해서 대구 왜관으로 피난을 갔는데, … 좀 있으니까 미군부대들이 들어와 가지고 그때 낙동강 전투 때였어. … 그 낙동강 물이 전체가 뻘건 피로 막 인민군도 죽고 우리 한국군도 죽고 핏물이, 낙동강 핏물이 아휴 말도 못했어.
“거기에 미군부대에서 엄마하고 내가 미군빨래를 했는데, 앗따- 별의 별걸 다 주더만.
“그때 참 미군부대 안에 먹을 게 엄청 많았어. 뭐 초코렛또니 이런 막- 박스떼기로 갖다 놓고 그랬어. 그걸 열어 보면 그 안에 별의 별 게 다 들었어 그냥. 빵도 들고 껌도 들고, 별 놈의 사탕이 다 들고. 그런 것들도 얻어 먹고.
“그러니까 그게 알고 보니까 보급창고라, 보급부대. 쌀 같은 거도 싣고 오고 이불도 싣고 오고, 전방에 음식을 나르는 거 말야.
“그 군인들 덕에 참 잘 먹고 거기서 그렇게 잘 지냈지. … 그릇도 갖다 주고, 그냥 우리가 그릇이 있나 뭐가 있나. 그 미군들은 지금 생각허니 그릇이 참 좋은 스댄 그릇이여, … 그런 걸 갖다 주지. 권총 같은 것도 갖다 주지. 그런 게 나오면 놨두고 가고 그러면서 장에다가 갖다 팔어라고 그랬어. [권총은] 형사들 줬지 뭐, 우리가 그걸 뭘 헐 꺼야, 아이구-.
“그런데 참 내가 멍청해서 그랬지. 그런 것을 내다가 팔아서 돈을 만들어야 했는데, 그럴 줄을 몰랐어. 등신들이 참 그냥 누가 달라고 그러면 주고, 갖다 주는 거나 먹고 들어앉았고 그랬지.
“낙동강 전투가 웬만큼 끝나니까 군인들이 이제 가대. 가고 난 뒤에 이제 참 집이(집에) 있는 거 내다 팔고 이래 돈을 만들어서 조그만 가게를 냈지. 그냥 구멍가게 비스름하게, 오만거 다 파는 가게.

먹고살기

하루에 콩을, 흰 콩을 두 되씩 갈아.
“내가- 어머니 돌아가시는 것도 못 봤어. 어머니는 대구에서 돌아가시고, 나는 그때 강원도에 있었거든. 그러니까 그때 스물아홉인가 그때 돌아가셨어.
“강원도에 친구가 있었거든. 그 친구가 오라고 해서 갔어, 스물아홉에. 거기 간 지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어. 거기 가서는 인제 친구가 이- 식당 같은 것을 했는데 거기서 일했지. 일도 거들어 주고 그랬어. 밥도 팔고 술도 팔고, 대포집 같은 데 그런 데야. 한 이 년 있었나 봐.
“왜관에 미군부대가 있거든. 그 부대 종업원들 상대로 우리 오라버니, 그 때 6.25 그 당시 미군 8군 식당이 있어서 아는 사람들, 친구들이 있어. 그래서 이제 8군에 근무하다가 왜관에 나온 사람들 동정으로 그래서 인제 식당을 냈지.
“우리집에 이만한 맷돌이 있어, (손가락으로 옥상을 가리키며) 저기. 하루에 콩을, 흰 콩을 두 되씩 갈아. 그래서 이 팔이 이렇게 병들어서 쑤시고 아프지. 비지를 인제 비지탕을 만들어 가지고 … 그래 이제 저녁에 퇴근시간 네 시 반 다섯 시 반 이렇게 되면 우리 집에 자전차가 삼십 대 이십 대 이렇게 있었어. … 콩비지 먹으러들 오고, 그러고 동정을 해가 돈을 벌었지.
“아이고- 그런데 내 돈이 안될라고 그런 기라. 집을 하나 살라고 인제 참 계약까지 걸러 갔었는데, 이 사람들이 밭에 나가고 없더라고. 그래서 그냥 집에까지 왔다. [그런데] 어떤 노름쟁이를 인제 걸려 가지고, 그 당시에는 고깃간을 했었어.
“내가 늘 콩비지에 넣을려고 인제 돼지 등뼈를 사다가 허는 바람에 부꾸이가(친하게) 됐지. 저희 집에 물건 팔아주고 그러는 바람에 친허게 지냈는데, 그랬는데 노름쟁이인 줄도 몰랐지. 그 돈을 좀 빌려 달라는 거야. 그래 그 당시에 집 살라고, 그때 칠십 만원짜리 집이면 참 좋았어. 칠십 만원 이거를 다 줬네. 서른 살이었나 그랬을 거야. 서른두 살인갑다. 서른둘에 여기 왜관에 왔거든. 그래 돈 빌려 달라고 하면서 소도 사고 물건을 들여 놔야겠다고 빌려달라고 하는 거야. 그때 소 한 마리에 이십 만원 주면 엄청 컸었거든. 그 녀석이 아주 노름쟁이도 아주 큰 노름쟁이였어. 그래 가지고 그 돈 다 띠었지 뭐, 못 받고. 그런 돈을 싸그리 띠어 갖고.
“그러니까 내가 대포집을 그 당시에 한 십 년 했지. 십 년 했다가 그냥 또 나이도 참 이렇게 들고 몸도 안 좋고 그러니까 허다 말다 그러니까 잘 안되더라고.
“얘(큰조카) 동생이 고모님 이렇게 혼자 살지 말고 같이 살자고 해서 그래서 [수원에] 올라왔어. 주 053
각주 053)
석순희는 현재는 큰조카 내외와 함께 살고 있지만, 수원에 처음에 올라왔을 때에는 둘째 조카 가족과 함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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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얘 동생하고 그래 또 한 삼 년 한 집에서 같이 살았지. 그때 방 둘인데, 애들 둘이지, 저거들 내외 간 있지. 나는 손녀딸 둘 데리고 거실에서 자고 아들은(손자는) 인제 저 거시기 방 하나 주고, 공부방. 그때 [둘째 조카 아들이] 고2 고3 그랬으니까. 나보고 자꾸 큰방에 들어오라는 거여. 그래서 도저히 생각을 해도 저희 곁에 살 수가 없어서 그냥 내가 천만원 주고 방 하나 얻어 가지고 나왔지.
“[수원에] 처음에 와서는 취로사업 댕겼지. [하루에] 만 오천인가 그렇게 주더라고. 내가 동에 찾아 가 가지고 내가 혼자고 뭐 일이라도 해서 살아야 안 되겄나 도와 달라고 그랬더니 할머니 알겠다고 그러면서 취로사업을 하라 그러대. 그때 다리가 아파 가지고서는 다리를 질질 끌고 댕기면서, 지팽이를 짚고 댕기면서 취로 사업을 했네.

친정식구

이생에 태어나서 그만큼 봉사를 해라 그러고 태어났나 봐.
“이게 처음에 방송에 나올 적에 우리 집 막내 조카딸이 그걸 들었댜. 주 054
각주 054)
한국정부는 1992년 1월, 외무부 아주국장을 반장으로 17개 부처의 관련 과장들로 구성된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을 설치했다. 그리고 1992년 2월 25일부터 6월 25일까지 각 구청과 면사무소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신고 접수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들이 언론과 방송을 통해서 보도되었고, 이것을 석순희의 막내 조카딸이 보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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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관에 들어 앉아 있어 갖고 몰랐지. 그래 갖고 우리 막내 조카딸이 저희들은 이제 알지. 그래서 아부지한테, 우리 오라버니한테 물었는가 봐. 그래서 그 애가 신고를 한 거야.
“내가 참 친정하고는 어떻게 인연이 끊어질 수가 없나 봐.
“[오라버니는] 저렇게 놀아, 아무것도 안 했어. 그냥 놀아, 지금도. 아이구- 휴-.
“옛날 [대구에 있을 때 오라버니 식구들이랑] 한 집에서도 오래 살았고, 또 떨어져서 인제 나는 나대로 장사한다고 떨어져서도 살았고, 그러다가 또 같이 살기도 하고 그랬지. 그런데 [내가 집을 나와도] 찾았어, 오빠가. 편지를 해 가지고 돈 보내라 그러고, 방 얻어 달라고 그러고 그랬어, 아이고-.
“[조카들] 공부도 내가 다 가르치다시피 했어. 일이라곤 모르고 산 양반이여. 지금 칠십아홉인데 자기가 젊어서 벌어 논 돈도 없고 그러니 늙어서도 저러이 고생이고. 그래서 우리 여동생도 못내 어디로 자취를 감춘 거야. 주 055
각주 055)
여동생은 한국 전쟁 때 대구에서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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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술 먹고 그러니까, 오빠가 하도 그러니까. 그래 지금 자식하고 안 살고, 영감 할멈하고 단 둘이 살어.
“나 겉이 일을 참, 아이구- 어쩌면 그렇게 태어났는지 몰라. 이생에 태어나서 그만큼 봉사를 해라 그러고 태어났나 봐. 친정 이것들, 오남매 이것들, 그렇게 꼭 길을 가다가도 어디서 애 우는 소리가 나면 에고- 이것들 우는 소리 같고 신경이 가대, 그 이상하대.
“아이구- 내가 저거들한테 그렇게 했으니 저희가 내 곁에 이렇게 잘 허지. 그래도 참 내가 젊어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벌어서 한 푼이라도 벌어서 저희 먹이고 공부도 시키고 해 놓으니. 안 그러면 저거 부모들도 안 돌아보는 게 천지인데 뭐가 나를 뭐 지금 좋다고 하겠나.
“그러니 이 아바이가(큰조카가) 어릴 때부터 밤낮 ‘난 나중에 커서 고모하고 같이 살 거야, 고모 모시고 살 거야’ 그랬어. 그래 그게 이렇게 되나 봐. 아주 어릴 때부텀 그랬어.
“지금은 큰조카하고 여기서 같이 살아. 내가 몇 년 전에 당뇨 때문에 죽을 뻔 핸 적이 있어. 그래서 야들이 안되겠다 해서 같이 합쳤어.
“[조카는] 사업을 했었는디 거시기 그 아이엠에프 때 부도가 나서 구십 팔년부터 뚜렷한 직장이 없어. 마누라가 저렇게 식당에 일하러 다녀. 빚만 없어도 걱정이 좀 덜 되겠는데, 어디 취직이나 됐으먼 올매나 좋을까.

소망

이 역사를 책으로 꾸밀려면 한이 없다. 말이 쉬워서 이렇지.
“지금은 담배가 남편이고 자식이야. 지금까지 그랬어. 담배가 없으면 낙이 없어. 그때, 열여섯 살 때부터 그 언니한테 담배를 배워서 이렇게 담배를 못 끊고 있네.
“울기도 많이 울고, 집 서러움도 많이 받고, 노다지 눈물로 세월을 보냈지. 그래도 뭐 ‘힘든 것? 뭐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다 삼켰지 뭐.
“아침에 저거(염불) 들으면 참 맘이 편해. 나 가짜 신자야. 한 달에 한 번 정도 [절에] 가. 저기 남문 팔달산 주 056
각주 056)
수원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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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요즘은] 오전에는 테레비전도 보다가 오후에는 노인정에 나가서 십 원짜리 핫토도 치고 그러지. 또 어떤 때는 병원에도 가기도 하고, 주인집에도 가서 주인여자 하고도 십 원짜리 핫토도 치고.
“뭐니 뭐니 해도 아플 적에가 제일 서러워. 지금은 약으로 살지 뭐. 밥도 애들보다도 조금 먹는데, 한 숟가락 정도 먹거든. 그런데도 소화가 안 되어서 맨날 소화제를 먹어야 속이 좀 내려가. 가끔은 소다를 먹어서 소화를 시키지. 애들은 뭐라고 하는데, 그걸 먹으면 트림이 나오고 소화가 되니까 그걸 먹는 거야.
“당뇨가 있어서 약을 안 먹으면 안 돼. 이제 합병증이 와 가지고 발이 이렇게 저려. (발등을 꼬집으며) 이리 꼬집어도 내 발 겉지도 않고, 히마리가 없어서. 이리저리 팔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몇 년 전에는 큰 수술을 했어. 대장 수술이었는데, 대장에 혹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참 아주대학 병원에서 수술을 했지.
“[내 바램은] 그저 건강한 거 그거지 뭐. 죽는 날까지 폐 안 끼치고 사는 거. 쟤들한테 짐이 안 돼야지. 살다가, 건강하게 살다가 편히 죽는 거 그거지.
“참 그래도 지금은 세상이 많이 좋아졌지. 이렇게 좋은 날이 올지 몰랐어. 이렇게 수고해 주니까 너무나 고마워. 그 당시만 해도 누가 한 사람 나서서 한마디 말해 주는 사람 없고. 참 시국을 잘 못 만나서 전장도 여러 번 겪으고 고생도 많이 했고, 우리가 참.
“어휴 저놈들이 저희들이 스스로 반성을 해야 되는디, 저렇게 지랄을 하니 … 그놈들 웬수를 어떻게 해서 갚겠노. 빨리 해결을 잘 지어야 할텐데-.”

  • 각주 049)
    석순희의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1924년 생), 본인, 여동생(1934년 생)이었는데, 아버지는 1936년에 사망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50)
    어머니와 석순희, 여동생의 호적을 본가 호적에서 외가의 호적으로 이전시켰다는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51)
    인터뷰 당시에 석순희는 정강이에 움푹 패인 흉터 세 군데를 보여 주었다. 바로가기
  • 각주 052)
    매독에 걸리면 다리에 종양이 나기도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53)
    석순희는 현재는 큰조카 내외와 함께 살고 있지만, 수원에 처음에 올라왔을 때에는 둘째 조카 가족과 함께 살았다. 바로가기
  • 각주 054)
    한국정부는 1992년 1월, 외무부 아주국장을 반장으로 17개 부처의 관련 과장들로 구성된 정신대문제실무대책반을 설치했다. 그리고 1992년 2월 25일부터 6월 25일까지 각 구청과 면사무소 등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신고 접수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들이 언론과 방송을 통해서 보도되었고, 이것을 석순희의 막내 조카딸이 보았다는 것이다. 바로가기
  • 각주 055)
    여동생은 한국 전쟁 때 대구에서 실종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56)
    수원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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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이 웬수를 갚어?” 자료번호 : iswj.d_0006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