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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속에 파묻은 거를 말할라믄 내 가슴도 터져요”

“속에 파묻은 거를 말할라믄 내 가슴도 터져요”

  • 년도
  • 나이
  • 내용
  • 1928년
  •  
  • 경상북도 상주에서 출생
  • 1943년
  • (16세)
  • 집에서 일본군 ‘위안부’로 연행
    안동․신의주 경유-장춘-목단강 위안소로 이동
  • 1945년
  • (18세)
  • 초여름에 조선인에 의해 구조, 어룬춘으로 피신
    해방 후 길림시 근교 집안현에서 조선인과 초혼
  • 1946년
  • (19세)
  • 딸 출산, 곧 사망
  • 1949년
  • (22세)
  • 집안현의 개인 병원에서 간호사 생활
  • 1951년
  • (24세)
  • 길림시 제2병원에서 간호사 생활
  • 1955년
  • (28세)
  • 조선인과 재혼
    이후 2남 1녀 출산
  • 1988년
  • (61세)
  • 적십자를 통해 한국 방문
  • 1998년
  • (71세)
  • 한국 방문 뒤 국적 회복 시도
  • 2000년
  • (73세)
  • 영구 귀국 및 국적 회복
  • 2004년
  • (77세)
  •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

경북 상주 위치 →하얼빈 위치 →어룬춘 위치 →집안현 위치 →길림 위치 →경기도 광주 위치
“내가 순복음 교회 교원이거든.
“내가 중국에 없지만은 [하나님이] 우리 손자 손녀 공부하는 것도 다 지켜주고, 난 그래서 좀 안심되긴 되지.
“아무래도 또 과부고, 과부 자석들은 하나님이 영 관심을 많이 하잖아요. 과부는 동정하는 것도 대단히 그거하고, 잘 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돈을 많이 가져가도 그만큼 그렇게 관심 안 하지.
“내가 기도가 좀 많이 응답을 많이 받지요.
“지끔도 기도할 적에 어떨 적엔 그래요. 부모네도(부모님도) 같이 하나님 있는 데로 가게 해달라고.

막내딸

‘아이고- 어리광쟁이야. 그렇게 커서도 언니 등에 업고 댕기고-.’
“열둘에 막내라고 엄마한테 들었어요.
“열둘에 막낸데도 [엄마가] 영- 정이 간다 하지 뭐, 나한테.
“우리 아빠 수염이 (손으로 수염 모양을 묘사하며) 이만큼 되거든. 그러믄 우리 엄마하고 아빠하고 이제 장난하면서 나보고 ‘너 아빠 수염 이만큼 있는거 가서 잡아 댕겨라’ 그러믄 수염을 잡고 막 늘어졌지 뭐.
“그래면 우리 아빠는 아프다고 마-악 날 따라오지. 그래도 안 때리지. 나는 아빠한테 엄마한테 한 번도 안 맞았지 뭐.
“오빠들이 어데 갔다 올 적에는 저네 아들 해(몫)는 안 사와도 내 해는 사오지.
“우리 학교 댕기는 게, 산 넘어 가서 있거든. 그때 눈도 많이 왔어. 지금처럼 이리 안 덥고 막 눈이 와 가지고 나무를 붙잡고 올라가니까 쭉쭉 미끄러나지 뭐. 그래고 그꺼정 언니들이 업어다 주지.
“[소학교 동창이] 날 첨에 보고 그래. ‘아이고- 어리광쟁이야. 그렇게 커서도 언니 등에 업고 댕기고 그렇게 어리광하더니.’
“이학년 까정 조선 글 배와주고, 그 다음엔 못하게 하고 한국말도 못해. 하면 [일본인 선생님이] 막 귀통 때려.
“난 졸업 안 맡았는데.
“사학년, 졸업 못 맡고 갔어.

칼 찬 순사

막 무섭고 개 떨리듯 떨리고 허니꺼니 뭐 어쩐지도 몰라.
“이장이 벌써 그거 소문 다 내거든.
“위안부라고 안 그러고 공출이라 하지 뭐. 처녀 공출로 간다고.
“처음에 내가 딴 데 가서 숨었었잖아. 우리 엄마 친구 집에 내가 가서 좀 있었거든.
“막낸께네 엄마 저에서 맨-날 엄마 끌어안고 자고 젖 만치고 이랬거든. 그러니께 못 살 것 같애.
“그렇게 가서 있은께네 영 막 엄마 생각도 나고 울고 하니께네 그 집에서 연락 보냈지 뭐. 그랜께네 오라 하지 뭐. 그래서 왔어.
“왔는데 엄마 보지도 못했잖아.
“어른들은 집에 없거든. 우리 집이 쪼끔 외따리 있어요.
“일본 사람 하나 오고, 우리나라 사람이 하나 오고.
“그래해 가지고 칼 찬 놈(순사)이 하나 오고 또 누런 옷 입은 사람(군인)이 하나 오고 이랬지 뭐.
“무서워서, 아이고- 칼 찬 사람만 보만 무서워서 벌벌 떠는데 막 숨고 막 그랬는데 그때는. 순사를 영 무서버 했거든요.
“글자 하나 집안에 던져 놓고 갔어요. 주 033
각주 033)
연행시 순사와 군인이 강일출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방에 던지고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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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께네 조카가 말린께네 조카를 칵 잡아 뒤로 헐떡 자빠졌어요. … 어른들도 없는데.
“그래서 완 날로 그 날로 그렇게 됐지 뭐.
“오빠들은 하나는 우리 엄마가 쫓아내다시피 했는데 우리 [큰]오빠를 저 군대가 아니고, 뭐 딴 그거(징용) 있었대요. 거길로 보낼라 그러지. 우리 작은 오빠는 군대가라 하는 거 도망쳐서 일본에 가서 있었어. 그런께 일 없지. 그랜께 둘을 남자들 가게 됐는데, 그 담엔 내가 가게 돼. 주 034
각주 034)
강일출은 두 오빠가 집안에 없었던 탓으로 본인이 대신 끌려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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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간다고 첨에는 막 그 사람들은 말 안 하고 이장이 말하기를, 비밲 이는(베)도 짜고 이런 데 간다고 그러대요, 천 짜는 데 그런 데 간다고. … 우리는 뭐 하는지도 모르지. 그때는 어린께, 나[이]도 어린께.
“십육 세 되는, 열여섯 살에 갔다.
“상주 시내서 타고 가야 되는데 그때도 상주 시내거든요.
“차에 거 뭐여 짐 싣는 거 겉은 거 이런 데다가 싣고 갔어.
“그랬는데 어떤 여자들은 아픈지 어쨌는지 막 드러누웠었어. 아프고 놀래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몰라.
“그랬는데 김천에 가서 기차를 타게 됐어요.
“그거는 자리도 없는 데고 짐 싣는 데 그런 데다가 실어. 우리는 달아났다가 왔잖아요, 어데 숨었다가. 그랜께 대우가 영- 나쁘지 뭐. 그랜께 배낕에도 뭐 볼라해도 정- 힘들게 보지 뭐.
“쭈먹밥 같은 거 이렇게 해 가지고 일본사람 무시(무) 겉은 거, 그런 거나 내 받아 가지고 또 넘어가지도 안 해요.
“막 무섭고 개 떨리듯 떨리고 허니꺼니 뭐 어쩐지도 몰라. 배고픈 줄도 모르고 막 서로 치다보고 울기만 해지 뭐, 어디로 가는가.
“그래 저, 북한으로 신의주로 안동으로 그래.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어요. 어덯게 돼서 막 정신도 없이 거석해 가지고 쪼끔 내다 보니꺼니 막 중국 사람이고, 우리 한국 사람 아니고 쏼라 그러지 뭐.

장춘

거기서는 뭐 하는 것도 없이 뭐이 하는가, 빨래 해주잖아.
“처음에 가다가 또 장춘에 가서 좀 있었어. 한 스무 날 넘어 있었어.
“그때 우리하고 나하고 같이 여섯 사람이 갔어.
“그 안에는 군대들이 이렇게 서서 있지. 양 켠에 서서 있는데 어덯게 쪼끄만한 게 말도 모르는 게 어데 나가지도 못하지. 말이나 알먼 또 몰라. 또 오래 있으먼 나가갔다 하고 뭐 어떻게 했지만은, 주 035
각주 035)
장춘에 있는 군부대 안에서는 10일 내지 20일 정도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오랫동안 세탁 일을 한 여자들은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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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뭐 겁이 나서 막 죽을 지경인데 그 사람들 얼굴만 봐도 놀래서 자빠졌는데 할 수 없이 그렇게 살아난(살았었어).
“식사도 저거 뭐야, 옥수수 떡을 해거든요. 그런 거 주고. 우리는 뭐 처음에 먹으니꺼니 옥수수 떡이 뭐 맛있나. 저 입쌀(흰쌀)로, 쌀로 핸 게 맛있지. 그랜께 거 먹어도 먹어나 마나 하고, 국이나 멀-겋게 해 가지고 주고, 옥수수 떡이나 주고 이래지. 안 그러믄 수수밥 주고. 찰 거 아니래요, 중국에 치는. 중국에 치는 이거 메수수래요. 떡 해먼 차지지도 안해요.
“거기서는 뭐이 하는가[하면], 빨래 해 주잖아, 군대들. 거기 또 빨래도 같이 좀 남았는 사람들하고 같이 빨아주고 이래면서.
“군복 겉은 거, 양발 같은 거 그런 거지. 나는 널기만 했어요. [빨래는] 아주마이들이 해요. [아주마이들이] 한 열 사람 되대.

‘위안’ 생활

그래 막 찢어지고 아프고 그래. 찢어진께 아프갔지.
“그래 가지고 그 스무 날 있다가 그 다음에는 하루빈으로, 목단강으로 갔어.
“들어갈 적에는 여기는 팔월 달, 구월 달 가면, 고마 거기 눈이 오지 뭐.
“그때는 키도 안 크고 하니까니 학상으로 갔으니까니 그 뭐야, 저 눈 멀은 사람이 있잖아, 서이를 내가 봤지 뭐. 주 036
각주 036)
강일출은 목단강 위안소에 도착해서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하기 전에 시력을 잃은 일본 군인들을 간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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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 봤는데 또 한 사람 또- 한 사람 또 왔어. 그러니께네 너인께네 내 영- 보기가 힘들지, 내가. 그랜께 여자도 하나 보냈어. 그래 둘이 보다가, 또 [눈 먼 사람이] 한 사람 쪼끔 먼저 나가지. … 그랜께 서이 남은께 내 혼차 보래요.
“그랜께 다- 밥도 거석하고, 화장실에 가도 끌고 가고, 다 그래야 돼요. 그랜께네 옷도 다 거석하고, 밥도 영- 거석한 거는 밥도 멕이 줘야 돼.
“[눈 먼 환자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나서 위안부로 들어갔던 거야.
“해방되고 내 그거(월경) 있었어. [그 전에는] 없어서 몰라. 남자하고 같애, 몰라- 그런 거. 그때 나이가 어리고 또 그때 사람은 영- 어지잖아.
“어른 된거라 그때. 어른도 안된 게 뭘 알아요, 아무 것도 모르지. 그런께네 억울해서 그러지.
“그래 [성기가] 안 들어가도 뭐 그랜께네 거기 밑에가 잘못 되니꺼니 아프고 그렇지 뭐.
“그래 막 찢어지고 아프고 그래. 찢어진께 아프갔지.
“그래 [성병이] 오를까봐 주사 맞고. … 쿠-녕이라고 그래요, 606호를.
“또 씻는 것도 주고 이렇지, 미리. 그거 거석하면(약물로 안 씻어주면) 썩어 들어가서 잘 못 고쳐요.
“[약물] 색깔이 자주 색깔이 나나. 벌거무리한 색깔.
“또 나[이]도 어리고 금방 가고 허니꺼니 쪼끔 높은 사람이 들어오지.
“오래된 사람들은 병 오를까 봐 잘 안 간다고요, 높은 사람들은. … 그런 병 오르면 고치기 영 힘들잖아요.
“오래되고 이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한테는 웃대가리들은 안 가요. 다 남자들이 처녀하고 또 겔혼할라 그러지 저 시집갔던 사람하고는 싫어하잖아요. 처녀 장개가는 거 더 좋다고 두 번째 갈 적에 세 번째 갈 적에도, 안 그래요? 돈 있는 사람들은 이거 한가지지 뭐. 계급이 높으면 지 맘대로 할 수 있잖아.
“지 남자하고 같이 살아도 그래는 것도 싫을 적에 있잖아요. 그게 제일 힘드는 거지, 뭐 힘드는 거여.
“내가 여기(정수리 부분) 맞아 가지고 아-주 오랫동안 여기 머리가 안 났어. 지끔도 코피 나잖아 그래. … 막, 거저 죽는가 했어. 얼굴이 하얘지고 그래.
“그랬는데 방이 이렇게 쪼끄만 해. 쪼끄만한데 거기다가 탁 떠밀어서.
“무슨 이유가 있갔나? 조금 저네 하란 대로 안 하면 이래 때리지 뭐.
“어- 그러니께 여기가 피가 막 나고 이렇게 붓고, 얼굴에도 붓고 그래고.
“치료[하러] 병원에 가면 그 사람이 [계급이] 내려오지 뭐, 그 장관이라. (어깨를 가리키며) 여여 빌이 있는 사람이라. 별이 세 개 사람이고, 그 사람한테 맞았는게 그 사람 내려오게 되지요.
“그랜께네 큰 병원에 안 데불고 가고 간호사하고 의사만 오지 뭐.

“거 전사들도 표 쪼가리 가지고 와야지 접대해요. 안 가져오면 접대 안 하는 거여 그거는. 표를 거기서 사야지 들어올 수 있어요. 그 군대들 있는 데서 그래 팔지 뭐, 군대들이. 이렇게 [줄을] 섰던 사람도 표가 없으면 딴 방에 못 들어가요.
“많인 안 왔다 가지. 젤 많이 오는 [때는] … 늙은 사람 한 여덟 사람쓱 그래 와요, 하루에.
“돈 같은 건 거 조선 사람이 쪼끔씩 주지. … 일본 사람들은 나 때린 사람이 좀 줐어.
“뭐 십 원짜리도 있고 … 오 전짜리도 있고, 구멍 (각전 모양을 손으로 흉내내며) 이렇게 난 거.
“그땐 십 원짜리도 큰 돈이라.
“또 어떨 적에는 그래 맛있는 거 그거 좀 사다 주고.
“아무도 [돈을] 쓰도 못해. 어데 나가지도 못해.
“거기 철조망 다 해놓고, 또 나[이]도 어리고 오래 안되고 하니까 내보내지도 않지 뭐. 늙은 사람 일본 사람들이나 장관(장교)들이랑 같이 나가고 그렇지만, 우리는 나갈 생각도 못하지 뭐.

김씨

언제 만나갔는지 만날 거라, 내 속으로 언제라도 만날 것 같아.
“또 장질부사(장티푸스)가 들렸어.
“그 병 앓고 또 이 머리도 상했고 하니까니 내가 막 열이 많이 났지 뭐. 열이 나니까니 자꾸 물이 먹고 싶지 뭐. … 눈을 감고, 정신도 없어. 정신이 왔다갔다 하고 쪼끔 생각나면 물이 먹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야. 물을 먹으마 막 살 것 같지 뭐.
“장질부사라 사람이 오르는 거야, 전염병이고. 옛날에 한국에서도 그 병하면 동네 사람이 한 솥 다 죽어요, 죽어서 나가. 그런 병이지 뭐.
“막 열이 막 나거든. 그러니까 막 머리 빠지는 병 한다고. 그 사람들 및 사람하고 여덟 사람인가 차에 막 드러눈 사람도 있고 앉찬 사람도 있고 막 그래. 사람 태우러 가요.
“태운다고. 불에 태운다고.
“그래고 뭐 구더길 파고, 장재기를 놓고, 휘발유를 넣고 어디 막 타지 뭐. 그런 데 막 떤지지 뭐. … 나는 던진다는 거 제일 늦게 던진께니 우에 있었지. 주 037
각주 037)
1945년 당시, 목단강 위안소 안에서는 장티푸스가 돌았는데 일본군들은 감염자들을 불태우기 위해 트럭에 실어 산으로 이송해 갔다고 한다. 강일출은 일본군들이 이송해 간 사람들을 장작 위에 던지는 과정에서 자기를 가장 늦게 던져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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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걸린 사람들을 태우러] 니 사람이 갔어, 조선 사람 한 사람하고 [일본 사람 세 명이].
“우엣 사람 둘 인 안 살았어.
“그기 군대가 하나 우리 조선사람이 하나 있었어 주 038
각주 038)
강일출은 위안소 내에 김씨 성을 가진 조선인 군인이 독립군임을 숨긴 채, 위안소 간부로 위장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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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위안소에 있던 남자가 김씬데 그 사람이 독립군하고 연락해는 사람이지.
“이제 곧 해방이 된다, 이놈들(일본군들)이 지금 어떻고 어떻고 하지 뭐.
“그랬는데 그 사람(김씨), 일본사람 두 사람 때려죽였어. 때려죽이고 한 사람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 발길로 탁 찼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 뭐. 밑에 가서 톡 떨어진 거 봤다. 막 거 총질을 하고 그랬대. 그래도 우리는 몰라. 막 막 어디가 아프고 사십도나 나니께네.
“그랜께네 이 사람(김씨)이 [다른 독립군들에게] 연락이 있었지. 그래니꺼니 [연락 받고 온 독립군들이] 산에, 산굴에다가 막 우릴 업어다 놨는데. … 내 머리에서 피가 - 나가더래요, 막 총살터럼.
“그래 내가 좀 나아 가지고 물어보니께니 뭐라고 그러던가. [김씨는] 저 백두산으로 갔다 하지 뭐. 장백산이라 백두산이.
“장백산으로 갔다가 이제 미칠 안되만 온다, [돌봐 준 독립군들이] 나보고 그래요.
“그 사람이 그랬어. 이제 해방되먼 우리집에 와서, 거 우리 사는 데 상주 와서 살갔다고 그랬어. 그 사람이 나를 영- 생각했어.
“[김씨가] 이 놈들을 내가 언제라도 보복한다 이랬지. 보복한다 했는데 [그때는] 몰랐어. 무슨 뭐를 저렇게 보복한다. 이젠 알지.
“그 사람, 그래 장백산으로 가서 그 다음엔 못 만나 봤다고. 몰라요, 언제 만나갔는지 만날 거라. 내 속으로 언제라도 만날 것 같아.

“그놈(일본군)들이 대단하지 뭐. [독립군이] 일본놈을 죽였으니까. 그런께네 [일본군들을 피해서] 막 국경지대까지 갔던 거야, 어룬춘 주 039
각주 039)
중국 동북 흑룡강 부근 산림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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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는 데 거기.
“이런 손을 발을 막 신도 안 신고 댕기고. 이거 저 나무껍데기 벳껴 가지고 이렇게 옷터럼 해 입고, 그런 데꺼정 다 갔어. 거기 어떤 데는 그때 나와서 보니께니 이래 산골이 있는데 고기가 막 펄떡 펄떡 뛰지 뭐. 그래 가지고 그 사람들(독립군들)이 … 고기 잡아 가져오지 뭐.
“그래 가지고 좀 나아 가지고 저 그거 뭐여, 뭣도 갖다 조끔 날랐어요.
“쪽지를 내 몸에다가 넣어 가지고, 내 몸에다가 넣어 가지고 그렇게 해 가지고 거 저 외딴 집에 아버지하고 아하고 하나 사는데 그 집에 갖다 주믄 또 거기서 딴 데로 가져가고 그러지. 우리가 한 서너 달인가 그렇게 가져가곤 했어요.
“그랬는데 그걸 어떻게 놓는가 하만 거 호밋자루 있잖아요. 호미가, 꽤이(괭이)가 좀 큰 거 있어 이렇게, 이렇게 우그라진 거. 그거 안에 게다가 넣대요.
“그래 그 집에 가먼 닭 거 잡아 가지고 가면 먹고 또 그기다가 막 약뿌래기 같은 거 넣고, 약뿌래기 하는 것터럼.
“그래 수건을 이렇게 쓰고 남자하고 약 캐러 가는 것터럼 그렇게 갔다가 오곤 했어.
“석 달하고 있는 담에는, 그 담에는 해방됐다고 소식이 왔어요. 그랜께네 또 한국에 온다고 그 사람들(독립군들)을 그 우에 사람들을 찾아야 되잖아요. 찾았는지 안 찾았는지 몰라요. … 나오다가 길림꺼정 오면 한국 사람 많잖아요. 그래서 그기서 좀 멈쳤다가(지체했다가) 또 집안현이라는 데 오게 되면 강 건너만 저 북조선이라. … 그렇게 돼서 그꺼정 와 가지고 또 못 살아 가지고 집안현 칠구라는 데로 도로 들어갔어요. 그렇게 됐어.

첫 남편

이제 길만 터지만 나 데불고 우리 고향 와서 산다 하지 뭐. 영- 맘 좋아.
“그때는 가방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 보재기에다가 (주위에 옷들을 가리키며) 이런 거 같은 거 조금 싸가지 오고. 돈도 뭐 [얼마] 없었어. 그랬는데 그때도 어디다가 널데도 없고 하니께니 초마 입고 뭐 이렇게 오는데 그따가 돈도 조금 되는 거 … 헝겊쪼가리 이런 데다가 싸 가지고 … 이렇게 [헝겊 조각을] 비고 잤지 뭐. 언제 빼갔는지 일어나서 보니까 내 보재기에 싼 게 옷이랑 하나도 없지 뭐. 돈도 뭐 일전도 없어. 그랜께네 같이 오는 사람이 나를 또 나를 또 팔았어, 또.
“거 저, 노씨 노가라고 그런 사람한테. 그 집에 할매 북한사람이다. 이제 북한사람이래도 그 집에는 일제- 할매 때부터 중국에 가서 고향에 친척도 모르고 모 없대. 그랬는데 사람들은 다 북한 사람이지 뭐. 그 집에서 돈을 주고 나를 샀댄다. … 그 집에서 농사 지면서 삼 년, 그 집에서 밥 얻어 먹고 있었어.
“어쩌다 아들이 하나 있어, 그 집에. 일본 때 중학교 학생이라, 일본 학교에.
“그 사람 키도 크고 그 사람 인물도 영 좋은 거라. 그래 가지고 내가 그 사람한테 그렇게 거석했는데, 그 사람 영- 좋고, 이제 길만 터지만 나 데불고 우리 고향 와서 산다 하지 뭐. 영- 맘 좋아.
“그 집에서 결혼했어요. 주 040
각주 040)
강일출은 노씨 집에서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노씨의 맏아들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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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남자는 잘했어요. [시어머니가] 나한테 그래믄(홀대하면) 막 싫어하고 막 시어마이가 아-들하고 싸움하고 막 그래, 그랬지요.
“밥을 하는데, 밥이 끓는데 사람 데불러 못 가잖아요. [시아버지가] 술을 먹고 있으면서 문을 열고, ‘너 오마니 데불러 와.’ [시어머니를] 오마니라 해요, 저 평안도 사람. ‘너 오마니 안 데불고 오나, 안 데불고 오나’ 이래. 거기 뭐야, 저 일본 사람 신(군화), 그걸 가지고 그 구석에서 밥하는, 불 때는 [나한테 군화를] 칵 들어 가지고 안 간다고 날 때리 가지고 그때부턴 이빨이 이게 뚝 뿌러졌어. 그래 가지고 입이 (입술을 앞으로 내밀며) 이렇게 됐지 뭐. 그래 남자가 왔어. 어데 갔다와서 보고 ‘니 이빨이 왜 그래 닭나발이 됐는가’ 그래. 그래서 엄마 데불고 오라 하는 거 빨리 안 간다고 그랬다고, 밥이 끓는데 그걸 불을 어덯게 해 놓고 가야지 어덯게 가갔는가, 그래서 안 갔다고 안 데불고 왔다고 이랬다 하니꺼니 막 그래요, ‘빨리 가, 큰집에 가, 큰집에 가서 있어.’ 거 큰집이 젙에 있었어, 가라고 그래요. 그래서 밥도 상도 안 채리고 자꾸 가라 해서 갔어요. 그랬는데 저 엄마(시어머니)가 아들 업고, 그땐 시어마이가 서른 몇이래요. 젊어서 그래 아를 업고 오니꺼니 ‘막 사람을 저 신으로 저렇게 해 가지고 저거 보라, 동네사람[들이] 뭐이라고 그러갔는가, 부모 노릇하면 옳게 노릇하지 그 사람이 여기 아무 친척도 아무 것도 없는데.’ 지 자석 보다가도 더 잘해 줘야지 이 집이 잘 된다고, 왜 이렇게 해 놨는가 막 이래먼서 저 아버지한테 달게니까 저 엄마가 ‘이 개새끼야,’ 평안도 말은 개새끼라 해요, 이 개새끼야 술 먹은 사람한테 이 말이 뭐이가. 귀밑때기 여 피가 안 말랐다. … 나[이]도 어린 게 저 아가야한테 그런다고.
“가을도 안 된 담에 그 사람이 칠월 달에 군대 가게 됐어요. 안 가면 안 되요, 그거선. 장개석하고 공산당하고 막 싸움했거든. 주 041
각주 041)
1946년에서 1949년에 걸쳐 일어난 중국의 국공내전을 일컫는다.
닫기
“해방되고, 이래 또 중국에서 공산당하고 저, 저 대만하고 싸움하게 됐잖아요. 그때 나가서 죽었어요.
“아(첫 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병이 나서 거기서부텀(그때에) 우리 아가 주사 한 대만, 한 서너 대만 놔도 거 폐렴에 안 죽어요. 홍역하다 거 폐렴으로 들어갔거든.
“그래서 죽었잖아. 아 아픈데도 병원에도 못 가게 해, 돈도 안 줬어. 그랜께네 아가 … 막 죽을 적에는 아이스크리무도 하나 못 사다 줘요, 내가 돈이 없으니까니. 죽는 아래도 아-가 죽는지 안 죽는지 나가 어린께 모르지 뭐. [시어머니] 친정에, 한 동네 살아, 친정에 가서 깜깜해도 안 와요. 나도 밥도 안 했어. 아가 아픈데 뭐.
“이빨을 빠작빠작 갈아요, 아가. 그러더니 눈을 슥 감지 뭐. 죽은 거 그래 내 이거 이불로 이렇게 덮어줬어. 그래 시어마이가 지 아를 업고 들어오면서 ‘아는 어덯게 됐나?’ 내가 가마이 있었어. 시아버지도 그때 같이 들어와.

간호사

중국 사람 그 큰 병원에 내가 들어가서 눈 보는 데 있었지 뭐.
“이장이 ‘니가 이 집에 있다가 죽갔다. 일만 하고 여름에는 신도 없어서 맨발로 댕기고’ 이래먼서 내가 고생을 무척 했어요.
“그랬는데 여기로 말하만 뭐야. 어- 시골에 … 이장이 ‘내가 어데 소개해 줄께. 길림시에 우리 친척이 일하는데 쪼끄만 병원이라.’
“거 가서 이렇게 하고 하는데, 내가 하는데, 주사도 놨는데 첫- 번에 이거 찌르는데 다 놓지 뭐. 그 사람(목단강 위안소에서 눈 먼 사람들을 치료하던 의사) 하는 거 봤거든.
“개인 병원에 조끔 있다가 또 이래 하는 거 보고 하니꺼니 큰 병원에 그때 사람이 모지래서 큰 병원으로 갔잖아요.
“중국 사람 그 큰 병원에 내가 들어가서 눈 보는 데 있었지 뭐. 눈 보는 데 있다가 그 다음에는 또 여 치과에 그거 큰 병원이지만 치과에 같이 설립하는 병원이지 뭐. 거 우리 병원이 제2병원이라, 중국에 길림시에서.
“의사들이 안 오면 내가 병 다 보지. 그래 안과에 주임 … 눈 보는 주임, 또 귀 보는 주임, 또 치과에 주임이 거 한 사람[씩]이지. 그 주임이 우리 치과에 와서 이빨 못 뽑지 뭐, 치료 못하지 뭐. 그래도 난 눈썰미가 있어서 내가 다 뽑고 내가 다 어데 아프면 무슨 약 발라주면 다 발라주지.
“가지(갓) 졸업 맡안 사람들이 나하고 일 년 있으면서 이빨 뽑는다는 게 아픈 이빨 뽑았는데 안 아픈 걸로 뽑았대. 그랬는데 주임도 이걸 처리 못하는데 주임도 모르게 내가 처리했어요.
“환자한테 ‘나를 봐서래도 좀 참아달라. 이 사람은 젊은 사람이고 장래가 있는 사람인데 좋은 노릇을 하만 자석한테도 간다.’ 그랜께네 눈 감아 가지고 좀 이렇게 돈은 주지 않았어요. 나를 봐서래도 내 일처럼 좀 해달라고. 참 나한테 대단해요 그 의사가.
“간호장이거든 그런께 가네보다 높으지 뭐, 계급적으로. 내과에 의사, 주임 의사가 또 있거든. 그 사람들보다 돈을 더 받았어 내가. 대학생이 저 내과 주임되지 뭐. 우에는 원장이고 주임이고 또 간호장이 병실에 또 있고. 간호장이 한 사람만 아니지 뭐, 여러 사람이지.
“자기가 좀 잘하고 이- 뭐 주사 놓는 데도 딴 사람보다 잘 놓고 하면 또 그렇게 되지. 영도가 이렇게 능력이 쪼끔 있어야 돼. 일만 잘해 가지고 또 안 되지. 말도 잘 못하고 또 좀 거석 하면 거 못쓰지 뭐.
“아를 업고 댕기고 둘을 손잡고 댕기고, 주 042
각주 042)
강일출은 간호사로 재직하던 중 재혼을 했으며 1녀 2남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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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음판에 미끌아지먼서 넘어가먼서 영 멀어요. 차도 서이 너이서 못 올라가요. 차가 요만한 거 하나라. 오만 막 남자들이 막 대가리를 뚫고 올라가.
“그래니까니 내가 딴 사람보다 좀 많이 괴로벘어요. 딴 사람은 다섯 시 반에 가만 난 다섯 시는 거 도착해야 돼요.
“또 약재 같은 거 산에 가도 내가 아-들이 있고 좀 젖을 시간대로 멕이잖아요. 젖을 멕이기 땜에 아를 업고 가요. 또 쪼끄만 걸 또 데불고 가서 가네 (같이 일하던 간호사들)는 애기 보고 난 약재하고.
“내가 병원에 있고, 우리 딸이 내 대신으로 들어갔어.
“[딸 나이가] 열 아홉인가 됐갔다. 주 043
각주 043)
강일출은 1949년부터 딸이 19세가 되던 해인 1980년까지 병원에서 근무한 것으로 추정되며, 딸을 대신 취직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퇴직을 신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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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들은 [자식들이] 부모 … 대신으로 못 들어간다 해서 막 아프다 하고 그래 가지고 내가 우리 딸을 병원으로 들일라고 나갔다구요. 안 그랬으믄 한 삼사 년 더 해야 돼요.
“자기 자슥에겐 할 수 없어서 내가 나왔어. 그래먼 일도 없고, 인제 온 데 댕기다가 나쁜 사람 얻으면 어째갔나. 그랜께 내가 내 자릴 내주고.
“내가 그것도 아니면 돈 급수가 많아서 돈 많이 타지.

배신

나를 그렇게 배신하고 이런 거는 난 용납 못해요.
“그 병원에서 우리 저 거 뭐야 약방에 있는 여자가 소개했어.
“[두 번째 남편은] 한국 사람. 그 사람도 엄마 아빠가 없어서 놈의 집에서 컸대.
“우리 애기 아버지 영- 잘났어. 김일성 화상 안 봤지? 그 사람보다 이빨이 가뜩한 게 활짝 웃는 거 다 멋있다 해, 보는 사람마다 이쁘다 해. 그래도 이-거 인물값 하더라.
“미친 년이라, 미친 놈이라 그기, 모두 다 그래요.
“돈 벌어다가도 안 갖다 주고 거기 막 다 가서 저희끼리 밥 사먹고 놀러 댕기고 막 그래지. 내 그거에 대해서 많이 섭섭했지.
“술만 처먹고 친구만 좋다 하고 어데 가도 나보다간 난 사람을 얻으면 좀 낫갔는데 키도 쪼끄만한 게 얼굴이 새까만한 걸, 그런 걸 얻어 가지고 돌아댕기고.
“‘여자 보는 거는 괜찮은데-, 돈만 들이노면 괜찮다, 거 가서 살아라, 나는 아들이 서이가 있기 때문에 가네들 공부 시키야 된다, 가라-’. 이래도 가지도 않고 막 거기 가서 막 자고 한 다섯 시, 여섯 시 돼서 집구석에 오지 뭐.
“[결]혼식하고 애기가 들어서서가 있었고. 한 일 년 반만에 또 지 동생이 들어섰거든 남자 동생이. 그랬는데 그 여자[의 아이]가 또 저 우리 아하고 한 동갭인데 우리 아는 칠월 달에 났으면 가는 동짓달에 났어요. 남자 둘을 일 년에 봤지 뭐 그 남자. 그랜께네 얼마나 그래.
“그래도 아들 같은 거 보고 고칠까 고칠까 했더니 안 고치요. 그래 가지고 마지막엔 이혼했다구요. 지가 해 달라는데 해 줬어.
“그기 영- 난 지끔 꿈에 보기도 싫어요. 나를 그렇게 배신하고 이런 거는 난 용납 못해요.
“내가 얼마나 남자가 이러는데 이겨냈지. 또 거 처음에 거 시집에서 그렇게 그래는 것도 그것도 내가 이기고, 또 살 길을 찾았지. 그랜께네 혼차 있을 적에가 제일 편안한 것 같애.

귀국

여기 나와서 흙을 가지고 중국꺼정 들어갔어요. 꼭 한국 흙을 미고 댕깄어요, 내가.
“설 때 명절 때는 팔월 추석하고 저 설날하고는 자석들이 안 보는데 내 눈물 많이 흘려. 거 아들 보는데 어떻게 흘리나. 꼭- 그렇게 눈물나지 뭐. 그래고 내가 열둘에 막낸께네 영 곱게 크고 핸께네, 그때는 저 옷을, 비단장사가 오곤 해. 그러면 노랑 저고리에다가 새빨간, 그거 뭐이 끝에다가 새빨간 거 하고, 그래 초매 저고리 해서 새 것 또 해 주고, 설에 그렇게 한 번 또 해 주고 이래지 뭐. 그래먼서 우리 엄마가, 내가 철이 다 알았은께 그걸 기억하지, 날 업고, 우리 오빠 언니들은 다 바느질하지 뭐, 막 달이 밝은데. … 보름날에 막 동그랗잖아, 그때. 그런데 그 생각해서 나 한차 있을 적에도 이거 많이 울었어.
“팔팔 년도 한 번 나왔어. 그때는 홍콩으로 해서 왔어, 일로러(한국으로) [직접] 오지도 못하고. 적십자에서 오라 해서. 주 044
각주 044)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이전에는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한국 방문에 제한이 있었다. 이에 강일출은 대한적십자에서 실시하는 해외동포 모국방문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조카들의 요청에 의해 한국을 방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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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호적이 있잖아.
“적십자에서 이렇게 이산가족터럼 막 그래서 그거 힘을 내 가지고 이렇게 오게 됐잖아요.
“그래 가지고 어드로 나왔는가 하만 중국 광조라 하는 데하고 썬전 주 045
각주 045)
광조와 썬전은 홍콩과의 국경에 위치한 지역으로 행정구역상 광동성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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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하는 데하고, 그 건너 편에가 저거 홍콩 아니래요? 홍콩으로 해서 이래 돌아서 왔잖아요 그때도. … 외조카가 서울에 있거든. 조카가 나왔지.
“그때 올 적에도 오빠도 없고 그래 저, 부모네 다 돌아가셨은께 막 얼마나 울었는지 공항에서 첨으로 저렇게 우는 거 봤대.
“그래고도 여기 왔어도 중국사람이라고 중국에 가라하지 뭐. … 영- 거 그 생각하면 나 가슴도 아파져. 주 046
각주 046)
강일출은 1988년 한국 방문 당시 국적회복이 되지 않아 3개월의 체류기간 동안만 한국에 머물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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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나와서 흙을 가지고 중국꺼정 들어갔어요. 꼭 한국 흙을 미고 댕어요, 내가.
“구십팔 년돈가 그때 내가 나와서 도로 들어갔어, 나도 뭐 중국에서도 밥은 먹고 사니꺼니. 그래 가지고 도로 들어가 가지고 또 이래 신문에 났어요.
“내가 핸 게 아니고 우리 동창이 말했거든. 나하고 한 반에 있는 동창이. 주 047
각주 047)
1998년 한국 방문 당시 강일출은 소학교 때의 동창을 만났는데 그 동창의 제보로 조선일보에 국적 회복에 대한 바람이 기사화 됐다.(“중 거주 김말순 할머니 위안부 과거 고백”,『조선일보』, 1998년 4월 9일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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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기꺼정 나왔는데 알리는 게 좋갔다 이렇게 해 가지고. ‘이제 무슨 다 늙었는데 알리도 괜찮고, 니가 시집을 가갔나 뭐를 가갔나’ 그래요.
“방송국에다가 위안부로 그래 뽑혀갔다 그렇게 말하니꺼니 저 신문사에서 나왔더라고요. 그래고 사람이 하나 나와 가지고 거 신문에 났어요 여기.
“땅을, 삼천 만원을 보증이 있어야지 이 호적에 올라 갈 수 있어요.
“그 뭐여 저 우리 친조카보고 해달란께네 작은집에선 해주갔다 하는데 큰 집에선 안 된대요.
“이모 내가 해주께 걱정하던마. 이(외조카)하고 나하고 둘이 한다고 이래먼서 그래.
“그래 눈물이 어디서 비 쏘듯 오도록 나요. 왜 그래나 하믄 내가 우리 [큰]오빠가 벌어서 땅을 샀으면 절대 말 못해요. 나는 경우가 그래 무딘 사람 아니래요. 그랬는데 다- 우리 엄마 아버지가 삐 빠지게 벌어서, 이 집에, 강 서방네 집에 들어 올 적에는 우리 엄마가 정말 그릇 하나도 없이 바가지에 담아 먹었는데, 그와 같이 그런께네 내가 영 엄마 생각나서 그랬는지 막 울게, 울었어요.

한국 정부에는 왜 이렇게 이렇게 하는지 몰라, 어-.
“종군이[라고 하면] 안 돼요. 종군위안부라 하면 틀리는 거야, 그거는. 위안부라 해야지. 종군위안부는 지 발로 걸어갔어. 돈 벌러 간 사람이라. 우리는 강제적으로 막 끌리서 올라갔어, 그래. … 이거 막 강제로 끌리서 올라간 거는 그거는 위안부라. 그랜께니 이렇게 말하면 안 돼요.
“내가 힘이 있는 대로 해 가지고 이 문제를 우리네 살았을 때 올바로 해결해고 죽으면 내가 죽지만은 … 나라를 생각해야 돼. 우리가 고생하고 정말 불꾸데에꺼정 나는 들어갔다 완 사람이, 내 후손들 절대 이렇게 안 해야 돼.
“내가 말을 할 중은 모르지만은 한 마디, 두 마디래도 이런 실-지 [겪은] 말은 한단 말이다. 그래기 때문에 내가, 내 집은 없어도 되는데 우리나라 우리 부모들이 묻히고, 조상들이 묻힌 나라를 웬 외국사람한테 또 뺏기갔나. 한마디로 내가 그래서 나왔어. … 내가 어덯게서래도 이 나라를, 한 마디 말이래도 내가 씨가 들게 해 가지고 일본놈하고 외국놈들을 다시도 못 오게 할라고 내가 나왔어, 진-짜로.
“한국 나라를 영원히 우리 후세들이 지키고 있어야 돼. 난 한마디 말이래도 이- 한 사람이래도 새겨들으면, 나는 그거는 하나님한테도 정말 감사하고. 이- 우리나라 지킬 사람이 하나래도 있으믄 더 좋아. 나도 내 새끼들 정말 보고 싶어. 영- 전화 오고 하면 속이 막 타고 잠도 막 안 오고 그렇지. 그렇지만은 이거는 내 쪼끄만 가정이고 나라가 없으만 나도 없다. 나라가 없으만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슨 재미가 있나.

“내가 내번 달 주 048
각주 048)
강일출은 2002년 12월에 중국에 가서 2달여 동안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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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중국에 갈라고. … 이때꺼정 첨으로. 이제 첨으로 간다구요.
“안 두근거려요, 집에 가는데 뭐, 내 집에 가는데. 난 아들집도 아니래 내 집이래요.
“내가 공훈이 많잖아. 일한 지가 삼십이 년인꺼니. 그래니꺼니 집을 하나 탔어 내가. … 길림시에 영 좋은 데 있지 뭐. … 길림시에서 제일 큰 길이 있는데 우리집 앞이지 … 해방로라고.
“그랬는데 우리 아들, 딸이나 내 사는 데까지 좀 같이 젙에 있었으면 좋갔어요.
“내 살 동안에만 같이 있어도 내가 죽으만 눈을 감갔어. … 평생에 거저 피가 섞인 사람하고는 죽을 때 같이 못 있는 게 그기 영 한이래요 나는. … 우리 딸도 돈이 쪼끔 있거든요. 그래니꺼니 또 큰아들은 내가 쪼끔 더 보태고 지가 더 어덯게 해 가지고 하만 뭐 정부에 가서 거 곤란하다고는 안 그랠거고.
“이 정부를 위해서 아들 딸 놔두고 나도 여기 나와서 있어. 그랬는데 한국 정부에는 왜 이렇게 이렇게 하는지 몰라, 어-.
“그래 이거를 어덯게 했으먼 저 국회 여성부다가 어덯게 했으면 좋아요?”

  • 각주 033)
    연행시 순사와 군인이 강일출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방에 던지고 갔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34)
    강일출은 두 오빠가 집안에 없었던 탓으로 본인이 대신 끌려갔다고 생각한다. 바로가기
  • 각주 035)
    장춘에 있는 군부대 안에서는 10일 내지 20일 정도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오랫동안 세탁 일을 한 여자들은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36)
    강일출은 목단강 위안소에 도착해서 일본군 ‘위안부’로 생활하기 전에 시력을 잃은 일본 군인들을 간호했다. 바로가기
  • 각주 037)
    1945년 당시, 목단강 위안소 안에서는 장티푸스가 돌았는데 일본군들은 감염자들을 불태우기 위해 트럭에 실어 산으로 이송해 갔다고 한다. 강일출은 일본군들이 이송해 간 사람들을 장작 위에 던지는 과정에서 자기를 가장 늦게 던져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38)
    강일출은 위안소 내에 김씨 성을 가진 조선인 군인이 독립군임을 숨긴 채, 위안소 간부로 위장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바로가기
  • 각주 039)
    중국 동북 흑룡강 부근 산림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40)
    강일출은 노씨 집에서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노씨의 맏아들과 결혼했다. 바로가기
  • 각주 041)
    1946년에서 1949년에 걸쳐 일어난 중국의 국공내전을 일컫는다. 바로가기
  • 각주 042)
    강일출은 간호사로 재직하던 중 재혼을 했으며 1녀 2남을 낳았다. 바로가기
  • 각주 043)
    강일출은 1949년부터 딸이 19세가 되던 해인 1980년까지 병원에서 근무한 것으로 추정되며, 딸을 대신 취직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퇴직을 신청했다. 바로가기
  • 각주 044)
    1992년 중국과의 수교 이전에는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한국 방문에 제한이 있었다. 이에 강일출은 대한적십자에서 실시하는 해외동포 모국방문사업의 일환으로 1988년 조카들의 요청에 의해 한국을 방문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45)
    광조와 썬전은 홍콩과의 국경에 위치한 지역으로 행정구역상 광동성에 속한다. 바로가기
  • 각주 046)
    강일출은 1988년 한국 방문 당시 국적회복이 되지 않아 3개월의 체류기간 동안만 한국에 머물러야 했다. 바로가기
  • 각주 047)
    1998년 한국 방문 당시 강일출은 소학교 때의 동창을 만났는데 그 동창의 제보로 조선일보에 국적 회복에 대한 바람이 기사화 됐다.(“중 거주 김말순 할머니 위안부 과거 고백”,『조선일보』, 1998년 4월 9일자 참고) 바로가기
  • 각주 048)
    강일출은 2002년 12월에 중국에 가서 2달여 동안 머물렀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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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 파묻은 거를 말할라믄 내 가슴도 터져요” 자료번호 : iswj.d_0005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