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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내가 살아남은 게 꿈 같애. 꿈이라도 너무 험한 악몽이라”

“내가 살아남은 게 꿈 같애. 꿈이라도 너무 험한 악몽이라”

  • 년도
  • 나이
  • 내용
  • 1924년
  •  
  •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
  • 1941년
  • (18세)
  • 집에서 취업사기로 연행
    부산-시모노세키-대만-중국 광동-싱가포르-사이공-인도네시아 등으로 이동
  • 1942년경
  • (19세경)
  • 인도네시아 스마랑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
  • 1945년
  • (22세)
  • 해방 후 싱가포르에서 수용소 생활
  • 1946년
  • (23세)
  • 부산으로 귀국
  • 1947년
  • (24세)
  • 제 ○○와 결혼
  • 1971년경
  • (48세경)
  • 남편 사망
  • 1975년경
  • (52세경)
  • 김 ○○와 동거
  • 1992년
  • (69세)
  • 일본군 ‘위안부’ 등록
  • 2004년 2월
  • (81세)
  • 지병으로 사망

하동 위치 →부산 위치 →시모노세키 위치 →수마라이 위치 →싱가포르 위치 →부산 위치
“하나도 부끄러운 것이 없어. 왜냐하면 내가 부끄러운 짓을 했어야 부끄럽지. 내 사정을 고향에서 다 알고 있잖아, 어떻게 끌려갔는지. 나는 떳떳해. 긍께 위안부로 갔다와서 숨낀다, 부끄럽다, 천만에 말씀. 팔려간 사람들은 모르지, 부끄러운지 모르지만, 나 같은 경우는 그 부끄러울 게 뭐 있어. 대통령 자식이라도 거시기 하면 다 끌거 가는데.
“단 한 사람이라도 우리 이 문제를 더 알켜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알아야지. 참말로 증언 가서도 얘기했는데, ‘우리는 때를 잘 못 나서 희생자가 되었지만, 지금 자라는 애들은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하는 것을 주장한 사람이 내다. 항상 마음가짐은 그렇지. 아이구, 고만 저런 왜놈들 생각하면 어이구 참말로.

거짓말

센닌바리 맨드는 공장에 가서 … 고생하시고 나오시면 됩니다.’
“나는 [어릴 적에] 부모를 잘 만난 거시그로 고생을 안 했어. 순전히 우리는 거시기 했지, 농사만 전부 다 [소작] 내 줘서.
“내가 무남독녀 외딸이었어.
“학교도 안 갔어, 아버지가 몬 가게 하니깐. 왜놈들[한테] 뭘 배울 게 있냐구. 그래 가지고 인자 한문 선생, 그 사람한테 글공부했지.
“아버지가 창씨개명 그것도 안 하구 … 그래 하다가 왜놈들한테 밉뵈인거다. 아버지가 뭣에 트집을 잡혔냐면 그때 놋그릇을 바치라 그린 기라. 그랬더니 아버지가 막 이장을 뭐라 하는 기라. ‘전세 다 빼서 가고, 인자 받아 먹는 놋그릇까지 바치라고? 나는 죽을 때 [죽더라도] 줄 수 없다’ 그래 가지고 주재소에서 왔어, 놋그릇을 왜 안 바치냐구. ‘이놈들아, 날 죽이고 가지고 가거라. 나는 그것을 줄 수 없다. 필수품 쓰는 건 모르겠지만 그것 가지고 저 탄환 만들고 전쟁 도구로 쓸 물건을 와 우리가 주어야 되냐.’ 그래 가지고 [아버지가] 우리집에 일하는 사람들 데리고 논에 그걸 다 묻었어. 밤에 수 십 줄로 파 가지고 논에 묻었는 기라. 묻어 놨는 걸 누가 그걸 밀고를 했어. 그래 가지고 아버지가 잽혀 간 기라. 인자 얼마나 고문을 당했던지, 말도 몬 해. 이장을 따라서 내가 면회를 갔는데 아버지가 막 호통을 치는 거야, 네가 여기 올 자리가 아이니깐 다시는 오지 말라구, 인제는 와도 내가 보지 않을 기니깐 절대적으로 오면 안 된다구.
“[아버지가] 손에다가 전부 붕대를 감았더라구. 저놈들이 얼매나 무서운 고문을 했는지 몰라. 그래 가지고 (말을 잇지 못하다가) 메칠 후에 이쟁이 와 ‘아가씨, 일본에 센닌바리 주 023
각주 023)
일본어로 千人針. 복대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전쟁 시 적군의 총알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졌고 ‘무운장구’(武運長久: 일본군의 운이 영원하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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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드는 공장에 가서 한 일 년, 아니 이 년 내지 이 년 반만 고생하시고 나오시면 됩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가는 날 아버지가 풀리 나온다 이기라.
“그걸 믿었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아이고 그래 가지고 내가 자청을 해 갖구 간 기라. 공장에 가서 이 년이나 이 년 반 고생하면, 내 고생하고 나오면, 우리 가족이 모여서 행복하게 살 긴데 내가 그걸-.
“열네 살에 잡혀가서 동짓달에 갔어. 주 024
각주 024)
정서운은 1995년 인터뷰에서 18세에 연행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일본군의 인도네시아 점령이 1941년 12월인 점을 감안한다면 1995년 구술한 내용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연대기표에는 18세(1941년)로 연행시기를 표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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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모으기

배 기다리고 사람 모으고. 그래 모았던 모양이야.
“가는 날 [부산에서] 철선 바로 탔어, 연락선, 일본하구 부산 오가는. … 그냥 배를 태워 주니껜 탔는 기라. 그래서 인제 배 도착하니깐 그놈(일본군인)들이 나와 있더라구. 그래 시모노세키에 도착해서 큰 공장 같은 데, 커--. 그런 공장 같은 데 들어가라서 들어가 있으니 난중에 배에 같이 타고 온 처녀들도 있구.
“인자 배 기다리고 사람 모으고. 그래 모았던 모양이야. 시모노세키[에서] 그래다 보니깐 고만 열다섯 살 돼 버렸지.
“아이구-- 아이구 김밥 주먹밥이라구 해 가지구 삼시 세 때 주먹밥 … 그때 기가 차서 내 주먹밥 안 먹었어, 사흘을 안 먹었어. 지금도 깁밥을 안 먹어. 우리 집엔 일체 김이 없어. 지금도 김은 안 먹어. 그래 가지고 고만 나흘째 되니깐 배고파서 안 되겠더라구. 그래 먹었어.
“인자 어느 정도 모인다 보니껜 … 그때[까지는] 공장에 가는 줄 알았거든. 하루는 나오라구 하더라구, [다시 또] 모두 배를 타야 한다구. 그때 내 생각에 어린 나이에 되노니껜 몇 백 명, 몇 천 명 되는지 몰라. 열여덟 살, 열아홉 살, 열일곱 살, 열여섯 살 그리된 처녀들이라.

먼 나라

그때사 여기가 일본 땅이 아니라 먼 나라다 하는 걸 알았지.
“[또] 배를 타고 인자 가는데 (격앙된 목소리로) 처음 어디로 갔냐면, 대만.
“몇 십 명 내리라 그래 갖고 내리고 … 내 속으로 ‘아이구 세상[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큰 나라가 있는가 부다’
“누가 여기는 중국사람들이 바나나를 메고 막 다닌다구 그래, 얄구진 모자를 쓰고. 참 이상하다 일본 나라도 그런 게 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지].
“배 안에 있었어. 군인들은 내리는데 우린 안 내렸어.
“그래 가지고 이삼 일 데(더) 있다가 어디로 갔냐면 광동이라는 데 갔어. 근데 지금까지도 내가 기억에 남는 건 아이콩 호텔이라구.
“십육 층 건물인데, 그 호텔이 너무 너무 크니껜 배 안에서도 본 게지. 너무 커서 물어 보니깐 얘기해 주더라구. 거기서 [배 안에서] 며칠 있다가… 인제 또 싱가포르 갔다가 저기 사이공 갔다가.
“인도네시아, 거기서 다 내렸어. 전부 내려서 배치가 된 기라. 나는 자카르타에서 내려 가지구, 스마랑 주 025
각주 025)
Semarang. 인도네시아 섬 중 가장 가운데있는 자와섬 내에 있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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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데가 있는 기라. 스마랑 거그[서] 십삼 멩[이 내렸어]. 그래 가지고 갔다. 그래서 그때사 여기가 일본 땅이 아니라 먼 나라다 하는 걸 알았지.
“자카르타에서 내려 가지구, 병원 같은 데를 데리고 갔거든. 거기 가 가지구 자궁을 어떻게 돌려 부린가 봐. 애기 못 낳게 만들었어. 첨에 걸을 때 아프더라고. 어찌 된고 (배를 가리키며) 여기가 딱 끊어질라 그러는 기다, 배창수(배창자)까지. 그래 가지고 군인이 추럭이 와 가지구 우리를 싣고-.

스마랑

뭐 장례식이 어딨노. 그놈들이 우리를 갖다 개 취급도 안 했다.
“자카르타 소속이야. 스마랑이라고 아주 적은 [마을이지]. 도착하는 저녁부터 내가 반항을 하고 그러는데 칼로 채워(찔러) 갖구 (목과 턱의 흉터를 가리키며) 이 흉이 크다.
“처음에 인자 저녁에 장교를 넣더라구. 잔뜩 [술] 처먹고 오는 기라. 그러니껜 벌벌 떨릴 거 아이가. 그 간 디서 자부튼(어쨌든) 내가 제일 어렸어. 모두가 열여덟, 열일곱, 열아홉 모두 그랬다구. 그래 가지고 인자 강간을 당한게지. 그 이야기하면 전신이 … 아이구 말도 몬한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밤에 꿈을 꾼다구. 그래 가지고 내 몸에 상처가 전신에 난 거라구, 저놈들한테 맞아서. 그리 이리 벵이 있는 기라, 이 얼굴에도 상처 하나 없었는데, 이 칼자국을 날로 쳐서 아이구- 피 나온 거 말도 몬한다. 이 슝터가 이리 됐으니 얼마나 피를 흘맀다구.
“거긴 도망이라[는 것은] 없는 기라. 왜냐하면 첫째 거기서 나가면 배 타고 나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나? 거기서 도망가는 걸 [생각하지도 못하지]. 그러니껜 그런 건 안심빵이라. 도망가 봤자 부대 안으로 들어오는 기라. [부대가] 넓었어, 엄청나게 컸어, 산 밑에다가 부대를 전-부 점령해 가지구, 말하자면 집이 커, 부대가.
“그때는 저놈들이 전부 비밀이거든. 일급 비밀인기라. 그렁께 부대가 뭔 부대다 그것도 모르는 기라. 더 알려구 하지 않았구.
“모두 열네 명이라, 우리 한국사람(한국여자)은. 그 수마라이 주 026
각주 026)
정서운은 위안소가 있던 지명을 수마라이와 스마랑으로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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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데, 딱 우리 열네 사람밖에 없었어. [그 중에] 둘은 맞아 죽었다. 아이구 고만 개 한마리 죽으면 갖다 묻어 버렸지. 뭐 장례식이 어딨노. 아니 그놈들이 우리를 갖다 개 취급도 안 했다.
“위안소가 나래비처럼 지어 가지구 그래 한 칸씩 있었어. 하꼬방(단칸방) 집 같이 조그맣게 칸칸히 쭉-. [그렇게] 지어 놓구. … [방은] 쪼간해서, 야전용 침대 하나 하고 딴 건 아무 것도 없지. 그냥 뭐 우리한테 맞는 옷, 바지도 주고 치마도 주고. 나는 국자, 일본말로는 기꾸꼬. 이름을 그렇게 불렀어. 종치면 부대 식당에서 순 알량미(안남미) 밥에 된장국 먹구. 그래도 그게 꿀맛이라, 배가 고프니깐. 건빵[을] 군인들이 올 때 한 통씩 가지고 오는 기라. 내 그것 많이 먹었지. 그렇게 더워도 하루 한 시 되면 비가 와, 한 시간 동안. [그러면] 마룻문 닫고 자, 두 시까지. 그때만은 시원하지. 참 이상한 나라도 다 있지. 그리 덥다가도 비가 와, 또 그렇게 안 더웠고. [위안소 주변에는] 우릴 매달아도 될 굵은 나무들이 죽 늘어져가 있고 그 나무에 원숭이가 살아. 새끼를 낳아 갖고 젖을 늘어뜨리고 막 배에다 안고 저 나무에서 이쪽, 저쪽으로 왔다갔다 그리 댕겨.

무적한 놈들

아휴 무서라,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
“[고향 생각] 그런 거도 없고 저놈들이 올 때는 다 잊어버려. 그런 거 생각하고 할 여유가 어딨노. 아휴- 무서라,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 소름이 끼쳐. 근데 우리가 있었던 곳이 젤 무적한 놈들 있었다. 우리가 있었던 곳이 제일 일선이고, 그런 데 있었어.
“큰 연대거든. 대대에서도 오지, 소대에서도 오지. 일 중대, 이 중대, 그 중대가 있단 말이야. 그 부대에 군인들이 다 오는 기라. 아이구 그 말을 어디다 다 할꼬. 내가 살아 나온 것만도 다행이야. 멩은 내가 길 거야.
“아홉 시부터 저녁 아홉 시까지 졸병들 온다. 그러면 인자 저녁 여덟 시 정도 [되면] 싹 부대로 들어갔부리거든. 자부튼 아홉 시나 열 시 되면 그때는 장교들이 와. 아이구- 말도 마라.
“아주 말하자면 나쁜놈들이야. 사람을 개 취급 같이 해, 사람 취급을 안 해, 말 몬한다. 장교놈들이 술을 처먹고 와 갖고 그 긴 칼 있제. 질질 끗고 다닌다. 그래 갖고 지 하잔 대로 안하면, 뭐 그 지랄 하는 기다. 목이라도 쳐서 죽이겠더라고, 그놈들은. 아휴 아휴-- 그 말을 어디다 다-. 아휴- 쭉 그이 나래비로 서. 그래 가지고 옷도 안 벗어. 그 마, 푹 그 적(성기)만 빼 갖고 그런다고, 신발을 신은 채. 토요일하고 일요일날은 일찍부터 나온다고 그놈들이. 낮에도 와. 휴-- 무서운 사람들. 지 요구대로 안 해 준다고 때려. 아이구 칼을 쭉 빼가고 그런다.
“군인들 중에 한국 군인들이 조금 있었어. 먹을 거 갖다주고, 건빵 같은 거. 한국 군인들은 와도 상대 안 해, 시간만 보내다 갔어.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하러 가거든. 그 병원이 야전병원이거든. 밑에 보는 기라, 아래. 말하자면 병이 옮았는가 그런 거 보는 거. 나는 성병 같은 거에 걸려 본 적이 없었어, 전-부 삿쿠(콘돔)를 사용하기 때문에. 왜놈들이 [어찌나] 지네 몸 하나는 철저히 하는지.

중독

왜놈들이 그거, 거시기를 챙기기 위해서 남 몸에다가 이래 아편을 찔렀는데.
“가서 얼마 안 돼서 남자들 상대 안 할려구 내가 발악하구-.
“[어쩔 수 없이] 남자를 받았는데 피가 죽죽 나구 목간도 못 갔어. 나 살려달라고 그러니깐 나 살려 준다면서 그때부터 아편을 놓아 주는 기라, 그게 아편인 기라. 그 뒤 아편을 맞고 나면 아픈데도 모른 기라, 상대를 해도. 그래가지고 고만 일요일이나 토요일은 다섯 대씩 아편을 맞았다.
“기분 좋은 거는 모르고 아프지가 않아. 처음에는 하루에 한 대 맞구, 나중 가서는 한 대 가지고는 안 되거든, 그러니깐 두 대 맞고. 일요일 토요일 날은 다섯 대 맞구.
“매일 놔 줬다. 인자 주인[이] 놔 줘.
“모르지 아편 주사라는 걸. 내가 중독이 될 때 알았지. 하루 한 번 주던 게 아침에 주고 저녁에 주고. 그러고 이제 주사를 안 주면 아이고 맞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바로 중독 초기라.
“아편 주사는 몬 떨어져, 환자들 때문에. 말하자면 부상 당해 가지고 못 견뎌 할 때 놔 주는 거 아이가. 근데 그게 떨어지면 되나? 그 주사는 몬 떨어지지.
“[고향을] 열네 살에 떠나서 배 안에서 세월이 가구 열다섯 그때부터 군인을 상대하고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 스물둘 돼서 해방 되었거든. 세상에 그동안 아편을 맞았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아이구 말도 몬해, 내가. 왜놈들이 그거 거시기를 챙기기 위해서 남 몸에다가 이래 아편을 찔렀는데. 주 027
각주 027)
정서운의 오른쪽 팔뚝에는 아편 맞은 흔적으로 약간 부어있는 부분이 있으며 피가 맺힌 자국들이 돌처럼 굳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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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개락

‘나는 죽어야 되겠다’ 싶더라구.
“내가 거기서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지.
“금개락, … 말라리아 [걸릴 때] 먹는 거. 그 약을 내가 사십 알을 모다 놓고 한목 털어 죽을려구. 그런데 그것도, 죽는 것도 내 맘대로 몬 죽겠더라구.
“한국 사람이 거기 있거든 군의관으로. 그 사람한테 부탁을 했어. 한 번에 세 알도 얻고 네 알도 얻고 한 사십 알을 모은 기라, 그래서 털어 넣은 기라. 그때는 이렇게 사는 게 싫었어. 난중에 알았는데 밑으로 코로 입으로 전부 피가 터져 나왔다는 기라. 이틀만에 깨어났는데 사람 소리가 들려. 불쌍하다고 울고 군위관들이 왔다갔다 하고. 애들이 ‘아이구 살아났구나’ 그러면서 우는 기라. 그래서 내가 깨어났는지 알았지. 이틀만에 깨어났다. 아이구- 그래 막 호스로 여 갖구 막 씻어 냈다. 씻어 내두 독한 약이라 사지가 움직이지도 못하고, 깨워나지도 못하고, 정신을 차리기 어렵더라. 죽을려고 그래도 죽지도 못하구, 그러면서 내가 산 기라. 지금도 위가 안 좋은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난중에는 오래 되니깐 고만, 내가 자부튼 목숨만은 부지하자, 내가 이 정신으로 어떻게든 살아도 살아야지, 그래야 살아 나갈 수 있겠다, 내 육체는 니들이 다 가지고 가도 내 맴은 가져가지 못한다. 내가 결심을 했다 아이가. 어떻게 되더라도 살아야 해, 살아서 고향에 가야 해, 그래 그 생각으로 살았다 아이가.

포로수용소

배가 없어 못 나오고 근 일 년 가까이 있었어.
“도망을 갈 수가 없지, 도망 갈 데가 없는 기라. 지리를 알아야 도망을 가지. 그러니껜 지금까지 해방이 안되었으면 우리는 지금까지 거기 살아야지, 뭐 펜지 한 장을 전핼 수 있나. 대동아 전쟁이 일어났거든. 대동아 전쟁이 안 일어나도 고향에 펜지 하고 받고 그리 몬한다. 막 강금 당한 사람이나 매한가지다.
“[위안소에서] 인자 고향에 나갈 때는 [군표] 주겠다구 만날 그랬거든. 그러다가 갑자기 왜놈들이 손 들어 갖구 그래 내뿌리니.
“왜놈들이 손 들었단 소리도 우리는 몰랐는데 어찌 군인들이 안 오는 기다. 그래서 난중에 생각해 보니깐 손 든 기다.
“열세 멩이 가 가지구 거기서 세 명 죽고, 나머지 열 명은 인자 방공호 하나에 다 들어갈 수는 없었거든. 긍게 몇이만 뎁고 방공호로 [들어갔어]. 난중에 알고 보니 그기다 매장시켜 부렸던 기라. 우리를 내보내면 후환이 생길까봐 다 죽이라 그린 기라, 왜놈들이, 나쁜 놈들이. 그 중에서 내가 살은 기라.
“[위안소에 왔던] 한국군인이 해방 되구 나서 연합군에 편지를 써 보낸 기라. 장교들 빨래 가지러 오는 사람이 있어, 인도네시아인데, 그 편에다가 한국군인이 편지를 써서 보냈어, 빨리 연합군에게 전해줘라. [그래서] 연락이 된 기라. 연합군이 빨리 쳐들어 온 기라. 긍께 조그만 늦게 왔어도 우린 죽었어, 방공호에서.
“그래서 연합군이 극장 들어가는 마냥 두 줄로 세워 가지구 나오게끔 해 가지구 딱 적는 기라. 일본군인은 일본군인, 한국군인은 한국군인, 위안부 여자들은 여자들, 여짝으로 보내구, 한국 사람은 이짝으로 보내구. 이짝으로 보내면 연합군에게 끌려간 기라. 그래 가지고 다 나왔다, 죽은 사람도 있겄지만.
“그래 ‘살았다’ 그랬지. 아이고 처음에는 영국 사람들이 와서 그렁께 무섭더라고, 겁이 나고, 말도 몬 알아듣고. 한국군인들이 빨리 저 사람들 따라가야 된다고, 막 가자고 그러더라고.
“해방 되구 나서 얼추 일 년 동안 포로수용소에 있었거든. 싱가폴 수용소에서 배가 없어 못 나오고 근 일 년 가까이 있었어.
“[하루는] 방송을 하더라고, 간호사 할 의향이 있는 사람은 좀 나와 달라고. 그래서 내가 나갔다. 내 나가고 몇 사람 나갔다. 거기서 붕대 마는 것도 배우고 주사 놓는 것도 배우고 그랬어. 그래 지금도 내 붕대는 잘 맨다.
“[아편에 중독된 걸] 군의관이 알아, 내가 얘기해서. 그래서 내게 아편을 계속 찔러 주었지.
“그래 맞았는데 배를 타라구 유엔군에서 연락이 왔더라구. 배가 메칟날 출발한다구. 그때 군의관이 날로(나에게) 아편을 주더라구. 그 주사약을 그 근 어치로 주더라구.
“거기에 [수용소] 극단무대가 있어. 무대를 차려놓고 음악 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제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이 송낙천이라고 ‘물소리 구슬프다’ 그 노래 부른 사람이다. 그 사람이 군속으로 끌려 왔거든. 근데 그 사람이 지휘를 하고, 노래 부르고 싶은 사람 노래자랑 그리 하고. … 그 사람이 나를 참 좋아했어. 수용소서 한국에 나가서 자기하고 결혼할 수 없냐고 그러고. 안 된다고 그랬지. 아휴-- 뭐이 그런 사람들하고.

아리꽁 냄새

이빨에 힘을 주고 막 견디는 기라. 기둥을 붙잡고 정신이 나갈 때까지 그러고 있었는 기라.

“큰 배를 타고 나왔어. 그래 부산으로 도착했는데 또 한 달쯤 (목소리가 커지면서) 배 위에 있었어, 못 내리고. 한국에 호일제(말라리아)가 발생해 갖구. 배 위에서 한 달 동안 있었어.
“배 내리는 거기서 차표 같은 거 해 주대. 고향까지 다 가는 기라.
“그래 집에 나오니깐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만 흉가집이 되어 버렸더라구. 그리고 하인들도 전부다 뭐 다 뿔뿔이 다 흩어지구.
“내 나오고 나서 그랬나? 소작인들, 우리 논 붙이던 사람들[에게] 땅 권리가 그리로 다 가쁘렸어. 그렇게 만들었어 왜놈들이. 집만 남았지.
“집[도] 왜놈 간부들이 점령을 해 가지구 사무실 맨들고 별장으로 쓰다가, 얘기 들어 보니깐 손 들기 전에 그 골동품을 다 일본으로 보냈대.
“우리 아버지 지금까지도 생매장 해 놓고. 긍게 [아버지는] 주재소에서 죽었어.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셨으니 그게 걸려 가지고 내가 아버지 산소에 갔다오면 며칠 동안 벵이 나서 못 돌아다녀, 과거사가 떠올라서.
“과거에 고생한 것 그런 거지. 내 맘 속에서 항상 죄송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데 갔다오면 맴이 아파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그런 맴이 벵이 나.
“아버지가 엄마보다 정이 더 많았다는 것이 아니고 돌아가실 때 그렇게 험하게 돌아가시지 않았나, 그래 가지고 아버지 생각이 더 나.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한께, ‘내가 내 고행에까정 와 가지고 내가 [아편을] 몸에 여서야 되겄나’ 하는 결심을 한기라. 그래 거기서 가지고 온 주사기 다 뽀사라 버리고 내가 주사를 딱 띨라고 결심을 혔어. 아이고 맞을 시간이 돌아 온께 막 전신에서 경련이 나고 가렴이 나고 막 떨리고.
“이빨에 힘을 주고 막 견디는 기라. 기둥을 붙잡구 정신이 나갈 때까지 그러고 있었는 기라. 아이구 말도 몬 한다.
“그때 그 일은 죽어도 안 잊어버리질 께다. 그래 가지고 그걸 떼는데 한 사 개월 걸렸어. 나 혼자 뗐다. 그 아리꽁 냄새 주 028
각주 028)
정서운은 병원 소독약 냄새를 아리꽁 냄새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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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아편 떼면서 [얼마나] 욕을 봤던지 그만 진절머리가 나 갖고 병원 문 앞에도 가기 싫어.
“이장이 다 얘기를 했어, 어떻게 해서 내가 끌려갔다 왔는지. 고향 사람들은 다 알아. 그래서 날 무시할 사람 하나도 없어.
“상황이 다르지. 왜냐하면 그냥 무조건 끌끼간 사람두 아니구 난 오로지 아버지를 위해서 그래서 갔거든, 가두 공양한다 하구. 사람들은 그 당시 알아, 내 일본 갈 때.
“우리 고향에서 내를 다 알거든. 인자 우리 집안도 잘 알고, 소문난 집안인께. 또 어떻게 해서 갔다왔다는 걸 다 알기 때문에 저 보통 위안부보다는 층하가 있지.

정혼

결혼은 했는데 그 사람 역시도 날 못 잊었어.
“나는 한국에 나와 가지고 결혼한 사람, 그 사람 생각밖에 머리 속에 없었거든.
“어떻게 만났냐면 인자 자기 아버지하구 우리 아버지하구 친구[야]. 저거 아버지가 ‘자네 딸은 우리 며느리 삼아야 하겄다’ 그러고, 우리 아버지는 그 사람보고 ‘자, 우리 사우 삼아야겠다.’ 그리 그것이 있었는 기라.
“나와서 인자 한 일 년쯤 내가 아편을 뗀다구 나 혼자서 우리집에서 [있었거든]. 나는 악양 주 029
각주 029)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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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데고, 이 사람은 하동읍에 살았거든. 그래 매-일 오토바이 타고 오는 기라. 오토바이 타구 매-일 와서 저녁이면 가구 그랬어. 그 사람이 마누라가 있었거든. 내가 아무리 스물넷, 다섯 살 먹구 나왔는데 … 그러니껜 [그 사람이 벌써] 결혼을 했는데, 그 사람 역시도 날 못 잊었어. 그래 가지고 내가 나와 노니껜 그만 그 결혼한 사람과 이혼했어.
“얼마나 내가 반대를 허고 그리혀도 막무가내고 난중에는 자기 어무니가 다 올라 왔더라고. 나한테 ‘메느리 삼자. 속여도 아는 사람한테 속여야 안 되나.’ 그래 가지고 결혼이 된 기라. 내가 그런 데(위안소) 갔다왔다 그 소린 안 들을라고 내 자신이 빨래를 다리면 새벽 두 시 세 시까지 빨래를 다렸다. 그래도 한 가정 주부로서 내가 당차게 살았다. 그리해도 뭔가 날로 말로 보는 둥 주위가 이상하다 싶더래. 아는 사람은 알지만은 모르는 사람들은 팔려갔다 온 기라 그런다 말이다, 내보고는 직접 말은 안 하지만은. 그래 그런 수모를 내가 겪으면서 내가 살았다.

두 아들

‘와 때립니까, 당신이 날 낳은 생모 같음 그러겠습니까?’
“큰 놈이 여덟 살, 적은 놈이 열한 달. 주 030
각주 030)
정서운이 결혼할 당시 남편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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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핏덩이를 받아 키웠다. 내가 키웠다. 키울 때는 잘 키웠거든. 항상 사람 보면 인사성 빠지지 말구, 항상 내보다 약한 사람 도와라, 그런 교육을 시켰어.
“영감이 중풍에 들어 가지고 자석 대학 보낼 형편도 못되고, [내가] 큰놈을 데리고 서울에 올라갔다. 서울대학에 합격했는데 입학금이 있어야지. 영감 친구가 교복값 하라고 돈을 주더라고. 또 하동 국회의원이 입학금을 여 줬다. 아휴- 그래 가지고 저걸 학교로 여 놓고 교복비 대 준 그 돈을 가지고 서대문 영천에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 가지고, 일 학년 때부터서 삼 학년까지 내가 국화빵 장사를 해 갖고 공부를 시켰다.
“내가 너무 분해서. … 집 주인 조카딸과 그 둘이 연애를 해 갖고 학교도 안 가고 차비 주면 그 계집애 데리고 놀러가고. 여자한테 미친께 그러대. [하루는] 그 여자 몇 시에 만나자는 편지를 쓰고 있어. 세상에 내가 지를 공부시킬라고 이렇게 고생을 하는데 … 내가 ‘이놈의 자슥, 니 뭐하니.’ 내가 뺨을 한 대 쎄려줬어. 그렁께 ‘와 때립니까, 당신이 날 낳은 생모 같음 그러겠습니까’라고 그러는 기라.
“아이고 저게 저러는데 내가 살아있음 뭐 하니 싶대. 그냥 딱 그 길로 약방에 가서 금개락을 많이 샀어. 갖고 집으로 와서, ‘이놈아 네 혼자 힘으로 학교도 가고 그래라. 나는 이제 이 세상에 안 산다. 나 안 살고 싶다’, ‘맘대로 하쇼.’ 그래 그만 그 약을 탁 털어 넣어. 그래 가지고 병원에 가서 씻어 냈다 아이가. 씻어 내도 [이미] 위를 다 버렸다고 위를 조진 데다 위를 또 그래놨으니 어쩔 끼고. 그때도 막 귀로 코로 입으로 밑에, 아래 밑으로 막 쏟아지는 거 있제, 피가. 이제서야 그눔아가 ‘아이고 어머니, 엄마, 엄마’ 그러더라고. 이미 때는 늦었는데. 그래가지고 하동으로 내려왔다. 큰놈이 학교를 못가고, 일 년을 못 갔어.
“내가 몸이 회복이 되고, 국화빵 장사해서 손에 남은 돈이 있어. 그래 밀수를 시작을 혔어. 밀수를 시작을 해 갖고, 첨엔 조까씩 조깐씩하다 난중엔 크게 했다.
“일제 밀수로 들어오는 거 그때 옷이매 화장품이매 오만 거 다 있제. 진주서 도매상에다 막 내놓는 기라. 그린께로 내가 젊어서는 똑똑했다니깐. 그거 허면서 진주 역에 역장한테 부탁을 해 가지고 기차에 박스 한 둥치썩 가지고 나왔거던, 싹 내가 얻는 기다. 그거 한 박스에 얼마 그래. 역장 좀 주고 그러면 재수가 좋으면 그 안에 값진 물건이 많이 들었다. 녹용 같은 거 막 다 들었고.
“내가 돈을 벌어 갖고 그놈(큰아들) 서울로 올려보냈다 아이가. 그때는 하숙 시키 갖고 그래 공부를 다 마쳤다. 근데 이놈이 잘몬 풀렸어요. 참 머리는 천재라. 근데 알콜중독자가 돼 버렸어. 제법 됐지. 술을 글로 좋아하더라고. 지금은 소식이 끊긴지가 근 이십 년이 다 돼 가네.
“[둘째는] 공부를 안 할라코 해서 고등학교밖에 몬 나왔다. 그래도 지금은 야물딱지게 잘 살아.
“내가 그리 살면서도 참 내가 편한 밥 안 먹고, 몬 얻어먹고 그리 고생고생 살았다. 그런 데 갔다 온 소리 안 듣기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해 가지고 다 화목하게 살았다고.
“[담배를] 거기서도 안 피웠어, 한국 나와서도 안 피웠고.
“거기 가서 고생한 것 머리에 떠 오리면 울화가 올라오지. 영감 중풍 들어 가지고 말도 몬하고 수족도 못 쓰고 있는데 무엇이 마음이 편해. [그러다] 영감 돌아가셨지. 그러고 나니껜 속이 안 편다. 그때[부터] 내가 담배를 폈지.

영감

죽은 놈은 죽지만 불쌍해서 어찌 놔 두고 죽것나?
“내가 재혼을 안 할긴데 [자식들이] 결혼허구 나니깐 다른 기라. 하동서두 아주 소문이 났었다, 어찌 세상 모자지간에 저렇게 좋을 수가 있냐구. 남의 자식을 데려다가 키운 걸 어떻게 말로 다 해. 그런 자식이 결혼을 해서 싹 달라진 기라. 그래사 아- 남의 속으로 난 자식은 다 그런 거구나. 아이구 내 속으로 난 자슥도 부모 모린 체 하구 그러는데 남 속으로 난 자슥이 어련하겠나 싶어서 내가 모든 걸 다 이해하구.
“그래서 아- 내가 그냥 결심을 했기라. 모도 날로 갖다가 재혼하라구, 그까짓 자슥들 믿고 그래 살면 뭐 할 기냐구, 재혼하라 해도 내가 말로 안 들었는데 그 새끼들 그런 것 보니께로 만 정 다 떨어지지.
“하동서 내가 [교회에] 나가면서 목사님이 저 영감한테 나를 중매를 했어. 나도 외롭고 영감도 외롭고. 저 영감 만난 지가 지금 근 삼십 년이 다 돼 가는데. 그래 가지고 내가 저 영감과 인연이 된 거야.
“저 영감도 피해자다. 일본서 컸어. 여기서 태어나서 일본에 갔지. 일본서 중학교, 고등학교 댕기구 대학교도 다니구. 그러다가 졸업하자마자 징용갔어.
“[영감은] 자식은 없었는데 결혼은 했었지.
“내가 저 영감 만나 가지고 참, 내가 우리 영감 고생을 많이 시킨다.
“[영감한테 해준 게] 아무 것 없어. 영감이 생활력이 참 강한 분이야. 자기가 젊었을 때 부산서 병원을 하고 의사를 그리혀도 과거사는 다 묻어 버리는기다, 과거사는 다 필요 없는 일이라고.
“잘해 그래. 할아버지가 그리 마누라를 아끼고 술 안 먹지, 담배 안 태우지, 내가 담배를 피워서 그렇지. 서로가 자식이 없으니께 외롭다 아이가. 그래 둘이밖에, 영감밖에 모르는 기다. 밤중이라도 내가 ‘아, 야’ 하면 벌떡 일어나는 영감이다. 그래 내가 아프고 그럴 때면 ‘아휴, 내가 저 영감 두고 어찌 먼저 가노’ 그리 싶어 내가 눈물이 나고.
“나는 기도 할 줄을 몰라. [하지만] 맨날 우리 둘이 똑같이 불러주시라고, 몸이 이러니께 좀 낫게 해달라고 그리 기도하지, 서로가 불쌍해서. 죽는 놈은 모르고 죽지만 불쌍해서 어찌 놔 두고 죽것나? 영감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울화벵

긍께 내 죽어도 눈을 감고 못 죽지.
“나 북경 주 031
각주 031)
정서운은 1995년 북경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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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왜놈 장관하고 싸웠다. 그놈, 나 만나게 해주라고 그래서 밤 여덟 시에 만나기로 했다 아이가, 저거 묵고 있는 호텔에서. 그래 갔어. 권 목사 주 032
각주 032)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국제협력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있었던 권희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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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 같이 갔거든. 그리 어찌 내가 말을 잘 나오겄노. 그 날 저녁에 내가 뭐라고 막 했는데 그 말을 하고 속이 시원하더라고, 용건만 딱딱 말로 했거든. 어찌 당신네 정부는 입만 뗐다 하면 망발하고, 입만 뗐다 하면 망발하고, 여기서 금방 ‘네 그러겠습니다’ 그래놓고 돌아서면 딴말하고.
“일본정부만 나쁜 게 아니야. 우리 정부에서 이걸 좀 힘을 써서 빨리 매듭을 져야 하는데 우리 한국놈들은 다들 자리다툼 싸움하느라구 우리 문제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기 다 이가 갈리는 기라. 저그는 돈 삼천만 원 줬다구 다 됐다구 생각하겠지, 죽일 놈들. 저그들 한자리에 앉아서 담배값[도] 안되는 … 아휴 내가 죽기 전에 이 문제 매듭을 져주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내가 눈을 감고 죽을 거 아니냐. 내 죽기 전에 저가 사죄하구 단 일원 짜리 하나라도 좋으니 배상하라, 내 그것밖에 바라는 거 없어. 내 죽으면 한 줌 흙으로 가는데, 긍께 내 죽어도 눈을 감고 못 죽지.
“울화벵이 있어 엊그적에도 벵원에 밤에 쫓아갔다구. 확 올라오면 고만 집이 내려앉는 것 같구 몬 사는 기라. 막 불안하구 가슴이 뛰고, 그기 있어.
“내가 살아 나온 세월이 그리 고생 바가지로 그래 가지고 몸이 아파 가지고 이리 고생을 안 하나, 아이고.
“나는 병이 한 가지가 아니야. 이 심장 안 좋지, 또 당뇨 있지, 골다골증이 있어 가지고 전신이 아프지. 사진을 찍으니껜 뼈가 다 뻐금뻐금 [해].
“[작년에] 영양주사를 맞았는데 아마 병원에서 잘못 헌 기라. 간호사들이 주사를 잘못 놔서, 주사를 나쁜 걸 썼던지. 그때 코로 입으로 막 피가 쏟아 지더라니께. 그때 나는 몰라, 다 잊어버렸어. 의사가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영감이] 나를 싣고 큰 병원으로 가서 응급실에 갖다 놓고 … 그래 가지고 영안실까지 다 거시기 해 놓구. 그런데 깨났다. 영감이 나를 살린 기라 말이다. 그래 내가 이리 아플 때는 차라리 그때 내가 가쁘렸으면 나가 고생을 안 할텐데.
“[다시] 태어나서 뭣이 됐음 하는 그런 맘은 없어. 이 세상 사는 게 너무 허무하고 너무 가시밭길을 걷고 그리 살아왔는데 내가 나중에 [다시] 태어나서 무엇을 할 끼고. 내가 살아남은 게, 가만히 지금 생각해 보면 꿈 같애. 꿈이라도 너무 험한 악몽이라.”

  • 각주 023)
    일본어로 千人針. 복대와 같은 기능을 하는 것으로 전쟁 시 적군의 총알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여졌고 ‘무운장구’(武運長久: 일본군의 운이 영원하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고 한다. 바로가기
  • 각주 024)
    정서운은 1995년 인터뷰에서 18세에 연행되었다고 이야기했다. 일본군의 인도네시아 점령이 1941년 12월인 점을 감안한다면 1995년 구술한 내용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연대기표에는 18세(1941년)로 연행시기를 표기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25)
    Semarang. 인도네시아 섬 중 가장 가운데있는 자와섬 내에 있는 도시. 바로가기
  • 각주 026)
    정서운은 위안소가 있던 지명을 수마라이와 스마랑으로 혼용하여 사용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27)
    정서운의 오른쪽 팔뚝에는 아편 맞은 흔적으로 약간 부어있는 부분이 있으며 피가 맺힌 자국들이 돌처럼 굳어져 있다. 바로가기
  • 각주 028)
    정서운은 병원 소독약 냄새를 아리꽁 냄새라고 표현했다. 바로가기
  • 각주 029)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바로가기
  • 각주 030)
    정서운이 결혼할 당시 남편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바로가기
  • 각주 031)
    정서운은 1995년 북경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32)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국제협력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있었던 권희순 목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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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남은 게 꿈 같애. 꿈이라도 너무 험한 악몽이라” 자료번호 : iswj.d_0004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