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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증언자료

참여기/아리아드네의 실타래

  • 저필자
    차혜영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유난히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2002년 여름날, 첫 인터뷰를 하기 위해 김화자 할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이전까지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의 상근자로서 할머니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줄곧 정기적인 방문을 해온 탓에 남들보다 할머니에 대한 신상 정보를 많이 알고 있고 그만큼의 친분 또한 쌓여 있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말하지 않았던 것들도 나에게는 여러 차례 이야기를 해 주었기 때문에 첫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수월한 인터뷰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할머니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총기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평소 지나가는 말로 잠깐씩 들춰냈던 위안소 이야기도 상당히 구체적이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건재한 기억력은 인터뷰를 쉽게 끝내리라는 기대감을 주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어린시절 가족관계에서부터 시작되어 위안소로 가게 된 경위, 해방 후 귀국하기까지의 고생담, 그리고 결혼 후 양아들을 얻게 된 사연으로 이어졌다. 인터뷰는 귀국 후까지 이어지는 동안 시간의 뒤섞임이 없이 차례차례 순서대로 진행되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매 질문마다 막힘없이 털어 놓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치 엉킨 실타래가 풀어지는 듯 일사천리였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다른 할머니들의 토막난 기억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할머니는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위안소의 정확한 지명과 이동경로, 위안소 생활을 같이했던 여자들의 이름과 심지어 고향까지도 생각해 낼 정도로 기억력이 좋았다. 배 이름과 위안소 주인의 이름과 신상 등의 모든 것은 할머니의 뚜렷한 기억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배 이름과 위안소 생활을 같이했던 여자들의 이름, 위안소의 지명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일부로 외워두었다고 한다.
60년도 더 된 이야기를 아직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당시 알 수 없는 곳으로 가야했던 상황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동경로와 배 이름 등은 할머니에게 유일한 정보였고 할머니의 불안감은 이런 정보를 절대 잊어버릴 수 없게 만들었다. 그것은 마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잊지 않기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처럼 할머니 머리 속에 새겨 둔 표식이었을 것이다.
순조로운 첫 번째 인터뷰를 끝내고 그 이후 두 번, 세 번의 인터뷰가 추가로 진행되었다. 할머니는 그때마다 자신이 아는 것은 모두 이야기 해 주는 등 인터뷰를 거부한 적은 없었다. 거듭되는 인터뷰가 피곤해 보였을 뿐 할머니의 태도는 매우 협조적이었다. 다만 언뜻언뜻 내비치는 할머니의 속마음은 내게 약간의 마음의 부담이 되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증언이 앞으로 일본 정부에게 사죄와 배상을 받는 것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고 더 나아가 배상에 있어 작게나마 경제적 이득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 기대감으로 나에게“잘 되어서 쪼매라도 배상 받을 기미가 있나, 어떻노?”라며 슬며시 물어보곤 했다.
죽기 전에 일본에게 사죄받고 배상받는 것이 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이 되어버린 이유는 할머니의 일신의 욕심 때문은 아니다. 물론 사죄와 배상을 통하여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고 지금보다 좀더 경제적으로 풍족해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IMF 이후 가정형편이 어렵게 된 양아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주기 위해서이다. 할머니는 형편이 어려운 아들을 위해 자신의 생활비를 조금씩 아껴 아들에게 보내고 있고, 지난 2001년에는 수능준비를 하는 손녀와 함께 살며 학비를 대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들의 형편에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 안타까워한다. 일본의 배상금으로 더 늦기 전에 자신과 아들이 넉넉해지기를 바란다. 자신을 친어머니로 알고 있는 양아들은 할머니에게도 친자식과 다름없다. 집 벽면에 걸려진 흑백사진을 가리키며“이놈이 내 아들이다”고 알려주는 말 속에는 은근히 자랑이 섞여있다. 그 자랑은 늙어 자리에 눕기라도 하면 아들이 데리고 갈 것이라며 혼자된 다른 할머니들과의 비교로 나타난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양아들 뿐이라 생각하고 있다.
할머니는 가족과 양아들에게 기우는 마음 때문인지 평소 방송국의 촬영과 언론사의 인터뷰조차 얼굴이 공개된다는 이유로 극구 거부해 왔었다. 얼굴과 이름이 공개되는 취재는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거절해 왔다. 이번 인터뷰를 약속받으면서도 할머니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사전에 드려야했다. 이런 약속을 한 이후에야 할머니는 책에 자신의 이름대신 실릴 가명을 즉석에서 지어 보이는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위안소에서의 생생한 일상의 경험과 거침없이 표현되는 할머니의 감정 하나하나는 결국 가명이라는 틀이 할머니에겐 보호막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인터뷰가 끝이 날 무렵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책에 가명으로 해 줄 것을 부탁했다. 거듭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주위사람들이나 친척들에게 자신의 과거가 알려질까봐 신경을 쓰며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인 것을 모른 채 살고 있는 손녀, 아들, 그 외 친지들에게 이후에라도 자신의 과거가 밝혀져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며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싫다며 강한 뜻을 내보였다. 할머니는 나를 동네사람에게 독거노인을 돕는 자원봉사자로 소개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아직까지 피해자들 스스로가 직접 ‘위안부’ 경험을 드러내는 일이 얼마나 힘겹고 어려운 일인지를 느끼게 된다. 인터뷰를 하면서 과거를 극복하는 듯 하면서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드러내는 할머니의 고통을 보면서 나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만 드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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