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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기]참여기/검열과 거짓말

 
  • 저필자최기자
 

검열과 거짓말

 

누렇게 바랜 메리야스 사이로 드러난 공점엽할머니의 새까만 피부에서는 진한 가난의 냄새와 그 가난을 이겨내 온 끈질긴 생명력이 묻어 나온다. 나는 할머니가 빛 바랜 메리야스만 입고 마당까지 맨발로 뛰어나와 나를 반겨줄 때마다 할머니의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느끼게 된다.

할머니는 한반도 최남단, 땅끝마을이 있다는 해남에 살고 있다. ‘땅끝’이 주는 신비감과 설렘 때문인지 아니면 과거에 다른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을 만나보았던 경험에서 나온 여유인지, 해남까지 내려가는 긴 시간동안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는 ‘위안부’의 기억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이번에는 어떤 삶을 살아온 여성을 만날까’라는 기대감이 더 컸다. 과거에 다른 ‘위안부’ 여성들을 만났던 경험(2001년 풀빛에서 출간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공동작업에 참여했던 경험)은 ‘위안부’라고 불리우는 집단이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개개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고 또 다시 ‘위안부’ 여성들을 만나는 것을 두렵게 하기 보다 오히려 약간의 궁금증을 유발시켰다. 땅 끝에 살고 있는 할머니는 또 어떤 빛깔을 가지고 있을까.


할머니는 몇 해 전에 받은 국가보조금으로 새로 개조한 집에서 아들 내외, 손녀, 증손녀들과 함께 살고 있다. 집을 개조하기 전에는 너무 좁아 혼자 살아야 했는데 이제 이렇게 사는 게 좀 나아진 것은 다 그동안 당신이 거짓말하지 않고 착하게 살아서 “늙어서라도 복을 받는 것이다”라며 자화자찬하기도 하였고, 정부가 불쌍한 노인을 이렇게 도와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지 모르겠다면서 국가의 공으로 돌리기도 하였다. 이유야 어찌됐든 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이 더없이 좋은 것 같았고, 그것은 그만큼 할머니가 외롭게 살아왔음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아들은 개 사육을 하고 간간이 동네 대소사를 도와주며 일당을 받아오지만 생계에는 그다지 많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가족들은 일본군 ‘위안부’에게 나오는 국가보조금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할머니는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시도 쉬지 않고 개밥 주는 일, 깨 농사 등을 하며 대가족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굽은 허리와 새까맣게 탄 피부는 이러한 일평생의 고된 노동을 대변하고 있지만 당신 스스로는 눈도 안 멀고, 귀도 밝은 건강한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만큼 삶을 긍정적으로 살고 있다.

할머니를 담당하고 있는 해남군청 여성복지과 직원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에서 할머니를 방문하겠다고 전화를 했을 때 혹시 남자가 인터뷰를 하러 오지 않을까 무척 걱정을 하였다. 이유인 즉, 할머니가 처음 정부에 신고를 할 때 보건복지부 남자 직원들이 조사를 하러 나왔었다고 한다. 그때 할머니는 첫 강간을 당하던 날 하루저녁에 7명의 손님을“받았는데” 그 말을 남자 조사자들 앞에서 하려고 하니 얼굴이 후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3명만“받았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나를 처음 만나는 날에도“지금은 이렇게 여자들만 있으니까 그나마 내가 이 말을 한다”고 했지만 여자들끼리만 모인 그 자리에서도 부끄럽다는 말을 몇번씩이나 되뇌였다. 그리고 여성복지과 직원에게 지난번에 왔던 그 여자(2년 전 조사를 하러왔던 정신대연구소 연구원)는 처녀였는지 결혼 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 분은 결혼 한 사람이라고 대답하자“아이고 나는 처년지 알고, 그 소리를 할라고 하니 얼마나 민망시럽던지…” 하면서 기혼자라서 정말 안심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처녀요? 결혼했소?” 순간 나의 머릿속에서는 나의 정체성이 앞으로의 인터뷰 성패를 가릴 것이라는 계산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잠깐의 망설임 끝에 거짓 대답을 했다.“할머니 저 결혼했어요. 걱정하지 마시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후에 팀원들에게 활동보고를 할 때 나의 거짓말은 비난을 샀고 나는 꼭 인터뷰의 성공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할머니의 불안을 달래주기 위해 어쩔 수 없었노라고 애써 변명을 해야했다. 그 뒤 인터뷰가 거듭되는 동안 할머니는 남편의 성은 무엇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시집은 어디인지 집요하게 물어보았고 그럴 때마다 나의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런 나에게 당골을 했던 할머니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만날 때마다 열심히 빌어주기까지 하였다. 할머니가 이 참여기를 읽게되면 심한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거짓말 덕분이었는지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할머니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창을 하듯이 음률이 느껴지는 억양과 각양각색의 얼굴표정, 온 몸을 이용한 묘사, 풍부한 감정표현.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한편의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할머니에게 도취되어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눈물을 함께 흘리면서 이야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특히 60년이 훨씬 지난 위안소 생활에 대한 생생한 기억과 묘사는, 대부분의 ‘위안부’ 여성들이 과거의 경험을 자신의 기억 속에 꽁꽁 묶어두는 것과는 반대로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고 용감했다. 할머니와의 인터뷰는 매번 나의 질문이 거의 필요없을 만큼 할머니의 주도 하에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가지고 간 녹음테이프가 다 끝나야지만 이야기를 중단할 정도로 서너 시간을 쉼 없이 말씀하였다. 특히 첫사랑 남자와의 만남과 헤어짐은 한 시간이 넘도록 가슴 찡하게 이야기했으나 너무 많은 분량이라 편집본에서는 다 실을 수가 없어 못내 아쉽다.

그런데 이런 할머니 주도 하의 인터뷰가 마지막 인터뷰에서 장벽을 만나고 말았다. 할머니는 마지막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사실 처음부터 중국 위안소로 간 것이 아니라 평양에서 1년 반 정도 머물렀다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주로 듣고만 있던 인터뷰 태도를 바꿔 평양에서의 1년 반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혼동과 의문이 요동치고 있었다. 평양에서 있었던 일들은 일본군 ‘위안부’ 경험을 가지고 있는 할머니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할머니는 왜 아직도 평양이야기를 다른 이야기들처럼 적극적으로 구술하지 못하는 것일까? 할머니에게 스스로의 경험을 검열해서 이야기하도록 조정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할머니는 한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어떤 고정된 이미지들, 예를 들어 ‘강제로 끌려간’, ‘순결한 조선의 딸들’ 이라는 이미지들을 강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듯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 때문에 아버지에 의해 팔려 질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당신 스스로 인식은 하고 있지만 인정하기까지는 힘이 들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사람들이“공장에 가면 돈을 벌수 있다는 말에 속아서 따라가 보니 위안소였다”라는 식의 극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평양 직업소개소에서 1년 반 동안 여기 저기를 전전했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더불어 할머니에게 평양이야기는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공식적인 정체성’을 위협할 수도 있다라는 불안감도 작용하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할머니에게 평양이야기는 침묵해야만 하는 경험이었고 사회적으로 터부시 되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할머니가 마지막 인터뷰에서 평양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낸 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에 말을 걸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할머니의 평양이야기를 듣고 혼동과 의문이 요동친 것처럼 할머니도 자신의 경험을 검열하여 말하게 하는 ‘위안부’ 담론이 혼란스러워서 말은 꺼냈지만 그렇다고 상세하게 털어내 버리지는 못하는, 경험의 주체들이 담론의 주도권을 갖지 못했을 때 스스로의 경험을 설명할 언어도 함께 빼앗기는데서 오는 혼란이 할머니 내부에서 요동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편집본이 공점엽할머니만의 빛깔을 얼마나 잘 보여주고 있을지 자신이 없다.“그 징한” 경험들을 듣고 있는 내가 더 민망할 정도로 과감하고 상세하게 풀어 놓은 할머니지만 인터뷰가 끝나면 꼭 소주 한잔을 마시며 아픈 속을 달래야하는 고통이 있음은 편집본 어디에도 담아내지 못했다. 고생만 원없이 했다는 위안소지만 영원히 잊지 말자고 우정의 징표로 팔목에 문신을 했던 생사를 알 수 없는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할머니 기억 속에 공존하고 있다는 것도 담아내지 못 했다. 또한 갈 때마다 참기름을 직접 짜서 친정어머니, 시어머니 것까지 챙겨주시는 따뜻함도,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를 연상시키는 정겹고 유창한 노래실력도 할머니만의 빛깔임에도 불구하고 편집본에는 담아낼 수가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들의 ‘증언집’이라는 것이 한정된 분량 안에서 문자텍스트로만 개인의 경험과 기억들을 재현해야한다는 한계 때문에 할머니만의 빛깔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편집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부딪힌 더 큰 벽은 한정된 분량과 문자텍스트가 주는 한계가 아닌 일본군 ‘위안부’ 개개인의 경험과 기억들을 2003년 현재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몇 가지 틀로 한정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편집본을 만들기 훨씬 이전에 할머니의 평양이야기나 나의“결혼했으니 안심하라”는 자기검열과 거짓말들이 뒤섞여서야 한국사회에서 ‘위안부’ 여성들의 경험이 이야기될 수 있는 현실의 벽에 큰 상처를 받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학순할머니가 처음 증언을 했던 10년 전과 비교해서 한국 사회는 훨씬 다양한 빛깔들의 ‘위안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한계와 답답함을 인정하면서도 ‘위안부’ 여성들을 만나고 그녀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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