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역사넷

상세검색 공유하기 모바일 메뉴 검색 공유
닫기
리스트

고구려평양성

상세검색

닫기
제목
본문
역사이슈 열기
ID :NAHF.ispy.d_0005_0100IDURL
역사이슈 열기
  • 글씨크게
  • 글씨작게
  • 프린트
  • 텍스트
  • 오류신고

卯年 朝鮮 己子 元年

東史綱目

 
  • 출전東史綱目(동사강목)』 제1상 — 기묘년 조선 기자 원년(주(周) 무왕(武王) 13, B.C. 1122)
 

地理典故/摠地理

 

○ 전제(田制)를 정하고, 백성에게 전잠(田蠶)을 가르쳤다.
기자가 은의 전제를 쓰고, 백성에게 농사짓고 누에 치고 베 짜는 방법을 가르치매, 3년이 못 가서 백성이 다 향화(向化)하고, 예속(禮俗)이 행하여져서 흥작(興作)하여, 조야(朝野)가 무사하니, 백성들이 기뻐서 도읍의 강을 황하(黃河)에 견주고 도읍지의 산을 숭산(嵩山)에 견주어 곧 대동강(大同江)과 영명령(永明嶺)이다 노래를 지어서 그 덕을 기렸다.
한씨(韓氏) 백겸(百謙)는 이렇게 적었다.한국고전종합DB

“내가 평양에 가서 기전(箕田)의 유제(遺制)를 보았는데, 천맥(阡陌 밭사이의 길)이 다 남아 있어서 반듯반듯하고 어지럽지 않으니, 옛 성인이 경리 주획(經理籌畫)하여 오랑캐를 화하로 변화시킨 뜻을 오히려 상상할 수 있었다. 그 전형(田形)과 묘법(畝法)이 지금 《맹자(孟子)》에 거론된 정자형(井字形)의 제도와 같지 않다. 그 가운데에서 함구문(含毬門) 지도 과 정양문(正陽門) 지도 사이의 구획이 가장 분명한데, 그 제도는 다 전자형(田字形)으로 되어 있고, 전(田)에는 4구(區)가 있고 구는 다 70묘씩이다.
대로(大路)에서 안쪽을 가로 보면, 4전 8구이니, 4전은 사상(四象)을 본뜨고 8구는 팔괘(八卦)를 본뜬 것인가? 가로 세로가 8구이고 곱하여 64구로 네모 발라서 그 방법이 선천방도(先天方圖)를 본떴으니, 아! 이것이 아마도 은의 제도일 것이다.
《맹자》에 ‘은 사람은 70으로 조(助)하였다’ 하였는데, 70묘는 본디 은 사람의 분전(分田)하는 제도이고 기자는 은 사람이므로, 그가 들[野]을 가르고 밭을 나누는 데에 조국[宗國]의 것을 본받았을 터이니, 주의 제도와 같지 않았으리라는 데에는 의문이 없다. 다만 이 천맥이 수천 년 내려 오면서 바뀌어서 그 규격[尺寸]이 어김 없이 보존되기는 어려웠으나, 대략 너비 한 두둑의 길로 구(區)를 경계 짓고, 세 두둑의 길로 전(田)을 경계 지었다.
그 3방(方)에는 아홉 두둑의 큰길이 성문에서 영귀진(永歸津) 머리까지나 있는데, 이것은 왕래하기 위한 길이고 오로지 전 사이 천맥으로 하기 위하여 둔 것은 아닌 듯하나, 반드시 16전 64구를 1전(甸)으로 하였으니 또한 한계짓는 뜻이 없지 않다. 여기서부터 밖으로는, 전을 경계지은 길을 혹 개개어 밭갈이하여 옛 모양을 잃은 곳이 있으면, 후세 사람이 제작의 본의를 모르고 반드시 세 두둑을 기준삼아서 바루었으니, 다시는 대중(大中)의 분별이 없어서 팔괘의 법상(法象)을 찾을 수 없으나, 70묘를 1구로 하고 4구를 1전으로 하여 둘씩 아울러 가면, 한 들판이 다하도록 다 같다.
반사(班史 반고(班固)가 지은 역사책, 곧 《한서》)의 형법지(刑法志)를 상고하여 보면 ‘4정(井)이 1읍(邑)이 되고 4읍이 1구(丘)가 되고, 4구가 1전(甸)이 되니, 1전에 64정이 있다……’ 하였는데, 그 정ㆍ읍ㆍ구ㆍ전의 명칭은 주의 제도를 썼을지라도 4를 기수(起數 기본이 되는 수)로 하여 4와 4로 모[方]를 이룬 것은 이것과 합치한다. 반씨(班氏)의 학문은 매우 넓으니, 혹시 전례를 따른 내력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 지형이 뾰족하고 비끼고 기울고 치우쳐서 모를 이루지 못한 곳은 한두 전 또는 한두 구를 그 지세에 따라 더하였는데, 이것을 이 고장 사람들이 여전(餘田)이라고 전해 부른다고 한다. 주의 정전(井田) 제도에 있어서도, 그 땅이 곧고 평평하기만 할 수는 없으니, 제 모양을 이루지 못한 곳이라 하여 버려두고 쓰지 않을 수 없었다면, 아마도 그 제도가 이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공전(公田)과 여사(盧舍 사는 집)의 제도는 상고할 수 없으나, 그 제전(制田)이 이미 정자형(井字形)이 아니니, 《맹자》에 이른바 ‘가운데에 공전이 있고 여덟 집이 다 사전(私田) 1백 묘’라는 제도는 엉뚱하게 틀린 것이 되고 만다.
내 생각에는 이러하다. 은 때에 밭은 들에 있을지라도 여사가 반드시 밭 곁에 있지는 않고 성읍(城邑) 안에 모여 살았을는지 모르며, 공전도 모두가 한 모퉁이 땅에 있어 반드시 사전 가운데에 끼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밭에 거름 주고 갈고 김매고 거두어 들일 즈음에 거리가 같지 않아서 백성 중에는 그것을 괴롭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또 인문(人文)이 점점 갖추어지매 길례(吉禮)와 흉례(凶禮)가 번거로워져서 70묘로는 산사람을 먹이고 죽은 사람을 장사 지낼 자산이 모자라므로, 희주(姬周 주 왕실의 성이 ‘희’이다)가 천하를 차지하고서 천리(天理)와 인사(人事)에 따라서 1백 묘로 늘이고, 또 정전(井田)의 법을 만들어 여덟 집이 한 정(井)을 함께 하고 가운데에 공전(公田)을 두도록 하였다.”한국고전종합DB
 

태그 :

태그등록
이전페이지 리스트보기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