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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地理典故/摠地理

‘평양은 기자(箕子)가 도읍했던 곳으로 팔조(八條)의 정치와 정전의 제도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니, 지금의 외성(外城)[도성도 뷰어연계 023]이 그것이다. 그 후에 연 나라 위만(衛滿)에게 점거되었다가 또 고구려가 도읍한 곳인데, 그 국경은 남으로 한강에 이르고 북으로 요하에 이르렀으며 군사 수십만을 거느린 가장 강한 나라이었다. 고려에서는 서경(西京)을 설치하여 봄과 가을에 왕래하며 순유(巡遊)하는 곳으로 삼았으니, 지금도 사람과 물자가 풍부한 것은 모두 그 남아 있는 교화 때문이다. 영명사(永明寺)위치는 바로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이니 기린굴(麒麟窟)과 조천석(朝天石)이 있으며 영숭전(永崇殿)은 고려 장락궁(長樂宮)의 터이다. 도읍의 진산(鎭山)은 금수산(錦繡山)이요, 그 윗봉우리는 모란봉인데, 모두 작은 산으로서 송도와 한성의 주산(主山)처럼 웅장하거나 높지는 않다. 북쪽에는 내[川]가 없으므로 몽고 군사가 휘몰아 쳐들어왔고, 남쪽은 강이 둘렀으므로 묘청(妙淸)이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성문은 넓고 크며 누각은 높으며, 동쪽에는 대동문(大同門)위치ㆍ장경문(長慶門)위치의 두 문이, 남쪽에는 함구문(含毬門)위치ㆍ정양문(正陽門위치의 두 문이, 서쪽에는 보통문(普通門)위치이, 북쪽에는 칠성문(七星門)위치이 있다. 8도에서 오직 이 도읍터만이 서울과 서로 겨룰 만하다. 동쪽 10리 밖 구룡산(九龍山) 밑에 안하궁(安下宮)의 옛터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지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 별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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