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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平壤 西倉記

평양은 옛날 큰 도회였다. 지대가 띄엄띄엄 여러 갈래로 되어 있고 사람 사는 마을과도 거리가 너무 멀어서 부(府)로 무엇을 실어 나르려면 반드시 하룻밤을 지내야 비로소 닿을 수 있고, 장마철이나 눈 내리고 얼음이라도 얼면 마소가 여기저기서 많이 죽어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는 데도, 거의 몇백 년을 그대로 지내왔던 것이다. 박후 숙야(朴侯叔夜)가 그곳 소윤(少尹)에 임명되어 부임하자마자 즉시 장계를 갖추어 조정에 그 사실을 알리고는 부의 서쪽 감초리(甘草里)에 있는 나한사(羅漢寺) 빈터에다 큰 창고 하나를 세우고 이름을 서창(西倉)이라 하였다.
그 역사를 시작하려 할 때, 어려운 시기에 너무 호사스러운 일 아니냐고 말하는 자도 있었는데, 공이 역사를 맡은 자에게 당부하기를
“목재는 총사(叢祠)의 것을 쓰고 기와는 불당(佛堂)의 것을 쓰라.”
하였다. 왜냐하면 그 부의 풍속이 음사(淫祠)를 좋아하여 큰 나무를 심어 총사를 만들고 거실 바른편에는 불당을 세워 거문고 피리 소리가 그칠 날이 없고 남 뒤질세라 서로 몰려가 정성껏 받들어 모셨기 때문이었다. 처음 영(令)이 떨어지자 모두들 무서워서 감히 거행을 못하더니 후가 그 중의 한두 그루를 베게 하여 목재로 쓰자 그제서야 백성들도 모두 의혹을 풀고 서로 다투어 일에 종사하며 도끼질하고 벽 쌓고 서로 힐금힘금 보면서 시새워했기 때문에 겨우 5개월 걸려 공정이 끝나고 음사 또한 점점 없어져 갔다. 그리하여 그곳 부로(父老)들은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먹이기도 하였고 심지어는 감격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으며, 서쪽 성 아래 사는 백성들은 쌀을 사거나 팔거나 부까지 가지 않고도 장소가 있어 길이 그 전에 비하면 겨우 10분의 3, 4밖에 안 되도록 줄어들었기 때문에 사람들도 저녁밥을 두 번 지을 필요가 없고 마소 역시 땀 한 방울 내지 않고도 갑절이나 더 많은 양을 가져오고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원근에서 와 보고는 입을 모아 칭송하기를,
“몇백 년 묵은 폐단을 하루아침에 뜯어 고쳤으니 어쩌면 그리도 은혜스러우며,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하였으니 어쩌면 백성도 그리 번거롭게 안 했을까.”
하였다는 것이다. 동양(東陽) 신흠(申欽)이 그 소식을 듣고는 감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박후의 재주는 내가 알고 있지. 그는 일을 대하면 마치 장상군(長桑君)이 담을 보듯 훤히 알고, 일을 결정할 때는 포정씨(庖丁氏)가 칼 놀리듯 하며, 일을 하기로 들면 마치 터진 강물처럼 빠른 바람처럼 막을 길이 없는 사람이라서 침체된 것을 일으키고 폐단에 손질을 가하는 정도는 하나의 여사일 뿐 후를 위하여 이를 것이 못 된다. 그러나 백년 걱정거리가 후로 인하여 고쳐지고, 5개월 역사를 백성이 모르게 해치웠으며 한 가지 일을 하여 사교를 물리치고 실용성 있는 것으로 만들었으니 후 같은 사람이야말로 무엇을 먼저해야 할지를 아는 사람 아니겠는가. 그 재주가 빈틈이 없다는 증거가 더욱 뚜렷해진 것이다.
작년에 후가 소윤이 되어 나갈 때 흠이 그에게 준 말이 있었는데, 금년 봄에 내가 영위사(迎慰使)로 용만(龍灣)을 가면서 그 지방을 경유하게 되어 백성들에게 물었더니 백성들이 편하다고 했고, 관리들에게 물었더니 관리들도 안정된 자세였으며, 정사를 물었더니 정사도 잘 되어가고 있었다. 관우(館宇)ㆍ성벽(城壁)ㆍ저치(貯峙) 기계(器械) 할 것 없이 공과 사를 막론하고 백가지의 것이 모두 다 시원하게 새로와져 있어 흠 자신 주었던 말이 망령되지 않았음을 기뻐하였던 것이다. 그의 재주 쓰임이 어찌 평양에 그치고 말 뿐이겠는가. 그 다 기록으로 남길 만한 일들이었다. 박후의 이름은 엽(燁)이고, 금성인(錦城人)이며 때는 만력 34년 6월 하순이었다.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 판서 겸 예문관제학(兵曹判書兼藝文館提學) 신흠(申欽)은 기록한다.
平壤。古大都也。地澶漫旁出。人居踔遠。其委輸于府者必宿春乃至。値霖潦氷雪。則馬牛踣斃交道。民病之。而迨數百年不與易也。朴侯叔夜拜少尹。甫下車。卽具其狀聞于朝。得府西甘草里羅漢寺遺基。創一巨厫。名曰西倉。其起役也。有以擧贏言者。侯符尸役者曰。材則叢祠。瓦則佛堂。蓋府俗好淫祠。植大樹爲叢祠。起佛堂於居室之右。絃管幡幢不絶。犇走敬奉恐後。令初下。咸畏忌毋敢擧。侯遽命取一二爲材。於是民胥祛惑。競勸趨事。斤斧版築。顧盻以辦。纔五月而工訖。淫祀亦漸廢。其父老至有持牛酒來饋。感 而流涕者。民之在西堧者。糶糴有所而不之府。折其程。僅十之三四。人不再飧。馬牛不汗膚。而所致者倍焉。遠邇來覯。合辭而稱曰。一朝而革數百年之弊。何其惠也。爲之而不識其所以爲。何其不煩民也。東陽申欽聞而歎曰。朴侯之才。我知之矣。其遇事也。猶長桑君之見垣也。其斷事也。猶庖丁氏之游刃也。其就事也。猶江河之決。風雷之迅。而莫之閼也。興滯補弊。特其餘爾。非足爲侯道也。然其百年之患。待侯而革。五月之工。使民不知。一擧事而闢左敎爲實用。若侯非知先務者耶。其才之全。益可驗矣。去歲侯之出尹也。欽嘗贈之以言矣。今年春。以迎慰使赴龍灣。路出其境。問民則民安。問吏則吏戢。問政則政擧。以至館宇城壁。貯峙器械。若公若私。百爲之具。罔不噲然鼎新。欽自喜贈言之不妄。其才之所逮。豈止於平壤而已。斯可紀已。朴侯名燁。錦城人。時萬曆三十四年六月下浣。資憲大夫兵曹判書兼藝文館提學申欽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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