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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城大同門樓記

東文選

 
 

平壤城大同門樓記

 

평양은 국가의 큰 진읍(鎭邑)으로 사신이 다니는 길이요, 군사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런데 그 성이 무너져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아직 수축을 못하였으며 동쪽 성문은 대동문(大同門) 지도 이라 하고, 남쪽 성문은 함구문(含毬門) 지도 이라 하는데 역시 모두 신축년 난리에 불타 버려서, 방비가 튼튼하지 못하니 참으로 염려되는 일이었다. 홍무(洪武) 임신년 가을에,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자 중추부(中樞府)의 신하 조온(趙溫)을 명하여 평양윤(平壤尹)으로 삼았는데 이듬해에 정사가 시행되어 송사가 공평히 처리되니,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하게 되었다. 그 해 가을에 왕명을 받아 비로소 옛 성을 수축하고 또 다음해 봄에 새로 두 문을 지었다. 가을에 공사를 마치고 글을 급히 나에게 보내어 기문을 청하며 말하기를, “평양은 군사와 백성들의 일이 고되고, 풍속이 사납고 미련하여 옛날부터 다스리기 어렵다는 곳인데, 내가 자격도 없으면서 다행히 개국하는 초기에 욕되게 중임을 맡게 되니, 이곳에 부임하면서 주야로 한결같이 방위를 굳건히 하려고 성은 농한기에 쌓고, 성문은 중들을 시키니 모두들 나와서 조력하여 3계절 만에 이룩하였소. 문루가 장엄하고 성의 둘레도 완전하게 되어 비로소 나라의 울타리가 되는 곳이라고 할 만하나, 이것은 내가 능한 것이 아니라 왕의 덕이니, 그대는 그 사실을 적어 성문의 대들보에 걸어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일으킨 유래를 알게 하여 주시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평양은 곧 고조선 기자(箕子)가 도읍하였던 곳이요, 구주(九疇)는 천인(天人)의 학설이고 팔조(八條)는 아름다운 풍속이니, 진실로 우리 동방 수천 년 예의의 교화를 이루게 한 것이다. 아아, 아름다운 일인데, 위만(衛滿) 때부터 고구려에 이르는 동안 오로지 무력만을 숭상하여 그 풍속이 크게 변하였고, 고려 때에 와서는 요(遼)ㆍ금(金)ㆍ원(元) 나라와 국경이 서로 이웃하게 되니, 오랑캐 풍속에 물들어서 더욱 교만하고 사납게 되었다. 이것은 저 기 ㆍ 풍(岐豊)의 땅을 주(周) 나라는 사용하여 인후(仁厚)한 교화를 일으키고, 진(秦) 나라는 사용하여 용맹하고 사나운 기풍을 생기게 한 것과 같은 일이다. 대개 그 백성들의 천성이 중후하고 질박하여 선(善)한 일로 인도하면 따라 화하기 쉽고, 사나운 것으로 몰고 나가면 역시 부강한 사업을 이룰 수 있다.
삼가 생각하면, 명(明) 나라에서는 황제로 천하를 차지하여 지극한 정치를 천명하는데, 우리 전하께서는 대국 섬기기를 성심으로 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임하기를 너그러움으로 하며, 황제의 명을 받아서 조선이란 국호를 회복하게 되었소. 그런데 공이 어질고 화락한 자질로 제일 먼저 막중한 소임을 지고 이 도읍지에 부임하였으니, 반드시 덕화를 선양하여 백성을 선한 일로 인도하며, 이전의 교만하고 사나운 풍습을 변화시켜 예의의 교화를 일으켜서 그 풍속을 다시 순박하게 하였다. 훌륭한 시대 유신(惟新)의 정치에 협찬하게 됨이 사실은 여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니, 어찌 다만 성곽의 굳건함과 문루의 웅장함이 옛날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하니, 이 문루에 올라 긴 강을 굽어보면 넓은 들판이 멀리 임하여 아침 햇살과 저녁 달빛의 천태만상인 경치가 모두 난간 아래 가깝게 모여드니, 멀리 수레나 말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서도 부벽루(浮碧樓) 지도 에 올라가서 한 지역의 뛰어난 경치를 모두 얻게 될 것이다. 후일 내가 문루에 올라 구경할 수 있게 된다면, 마땅히 먼저 백성들을 위하여 황극(皇極)의 펴신 말씀을 강론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기자의 은택이 점점 동방 나라에 젖어드는 것이 매우 깊어 만대에 이르러도 꺼지지 않으리니, 지금 천자께서 국호를 주신 은혜와 전하께서 옛 터전을 회복하신 덕이 실로 무왕(武王)이 기자를 봉하고, 기자가 조선을 다스림과 동일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야 하겠소. 또 백성들로 하여금 본디 타고난 천성은 중국과 오랑캐가 다름이 없음을 알게 하고 또 진실로 노력하여 황극(皇極)의 가르침을 쫓는다면 신(神)과 사람이 조화되고, 자손이 길하게 되어 대동(大同)의 뜻에 맞는 것을 알게 하겠소. 그런 후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바람을 쐬이며 강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둘러 보고, 가슴 속의 흥취를 풀어 노닐면서 또한 공을 위해 시 한 편을 지어 칭송하며 옮겼소.” 하였다.
홍무 27넌 갑술 9월 일.
 
 
생각열기
平壤。國家之巨鎭也。使命之所塗。師衆之所會。而其城堙缺。歲久未修。其門東曰大同。南曰含毬。亦皆燬于辛丑兵燹。強圉不固。誠爲可慮。洪武壬申秋。殿下初卽位。迺命中樞臣趙溫。以尹平壤。越明年。政修訟平。民以安業。其秋承王命。始修舊城。又明年春。新作二門。迨秋訖功。走書請記於予曰。惟平壤。軍民務劇。俗悍而騃。古稱難治。我以不材。幸際開國之初。忝承重寄。來莅于玆。夙夜專心。欲固封守。城則築以農隙。門則役以髡頂。人趍附功。三時而就。譙樓旣壯。襟抱斯完。始稱其爲藩維之地。非我之能。惟王之德。請子筆其事。以揭于門之楣。俾後人。知其起廢之所由也。予曰。平壤卽古朝鮮箕子之所都也。九疇天人之學。八條風俗之美。實基我東方數千載禮義之化。猗歟休哉。自衛滿歷高氏。專尙武強。其俗大變。逮夫王氏之世。遼金與元。境壤相鄰。熏染胡俗。益以驕悍。是猶岐豐之地。周家用之以興仁厚之化。嬴秦用之以有勇悍之氣。盖其民性。厚重質直。以善導之。易於從化。以猛驅之。亦足以成富強之業者也。欽惟皇明帝有天下。以闡至治。而我殿下事大以誠。臨下以寬。膺受帝命。以復朝鮮之號。而公以仁明愷悌之資。首荷重選。來尹此都。其必能宣敭德敎。以導民善。丕變舊時驕悍之習。以興禮義之化。使其風俗復淳。以贊盛世惟新之治。實自玆始。豈特城郭之固。門樓之壯。爲勝於舊哉。予想夫俯瞰長江。遠臨曠野。朝暉夕月。千態萬景。悉萃於軒楹之下。指顧之閒。不必遠勞車騎。以陟浮碧之樓。而盡得一方之勝槩也。他日儻獲登覽。當先爲民。講論皇極之敷言。使其民。知箕子之澤。漸漬東方者甚深。雖至萬世而不泯。今天子錫號之恩。殿下復舊之德。實與武王之封箕子。箕子之治朝鮮。同一揆也。又使民知秉彝之性。初無華夷古今之異。苟能勉力以遵皇極之訓。則神人協從。子孫逢吉。可以稱夫大同之旨矣。然後與二三同志。把酒臨風。顧瞻江山之美。舒暢性情之興。亦當爲公一賦詩。以頌詠之矣。洪武二十七年甲戌九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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