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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平壤箕城圖의 변화

平壤箕城圖의 변화

『關西地圖』의 箕城圖는 영조대 1769~1776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기성도는 평양성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라보는 시점으로 행정지도로 제작되었다. 주요 지형과 관아 뿐만아니라 부속건물이 표시되었다. 규모가 과장된 외성에 정전의 구획이 표시되었고 箕子井과 함께 1740년에 부임한 감사 서종옥이 지은 三益齋가 확인된다. 그러나 1776년 서명응이 지은 五詢亭이 없으므로 정전은 1725년 이정제가 정비한 모습까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조대에 이르러 정조 6년(1782) 10월 22일에는 平壤圖와 道內의 城圖를 병풍으로 제작하도록 지시하였고, 정조 18년(1794) 1월 7일에는 화성 건설을 앞두고 전국의 城址를 검토하기 위해 평양과 각 도의 병마사들에게 城圖를 그려 올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城圖는 병풍으로 제작되었고, 그 후 『華城城役儀軌』와 화성 건설을 기념하여 제작된 「華城全圖」 등에 반영되었다. 현존하는 평양기성도 병풍은 正祖 재위기 특히 1776년을 전후해 확립된 도상을 바탕으로 정형화 되었으며, 그 후 목판본으로도 제작되었다. 대량 복제된 목판본은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그 후 19세기에 이르러 행렬이나, 石戰 장면 등이 첨가된 기성도 병풍은 수요층이 확대되면서 공공 목적의 지도 외에 개인적 기념물로 변이되는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육군박물관 소장 기성도는 기성도의 초본으로 보이는 송암미술관 소장본과 멀지 않은 시기에 제작되었다. 국민대학교박물관의 ‘평양성도’와 비슷한 18세기말에서 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모두 8폭으로 병풍 제작 도상 성립기의 원형으로, 그 후 이를 바탕으로 육로 혹은 강상의 행렬이 더해진 서울대박물관의 열 폭 병풍과 서울역사박물관의 8폭 기성도도 변형작으로 볼 수 있다. 기성도에는 8폭의 긴 화면에 걸맞게 평양성과 대동강 그리고 인근의 산악 풍경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고, 대폭의 화면에 다양한 경물을 표현하였고, 주요 지형지물에 명칭이 부기되었다. 묵서된“宣化堂”이라는 명칭대신 “觀察營”이라 쓴 점, 군사시설은 물론 “三登倉”, “中和倉”등 군현의 창고를 명확히 해 둔 점으로 보아 공적인 용도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동쪽에서 서쪽을 내려다보는 俯瞰視가 적용되어 전체 형국이 한눈에 조망된다. 화면의 구성을 살펴보면, 대개 제1~2폭에는 永明寺와 浮碧樓가 위치한 北城과 그 너머 북쪽 연봉이 담겼고, 화면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제3~5폭에 內城, 즉 평양시가지를 포치하였다. 이어서 제6폭에 中城을, 제7~8폭에 기자정전의 遺墟가 자리한 外城을 담았다. 견고한 석축에 감싸인 내성은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대로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구획되었으며, 주요 관서와 누정, 민가 등이 밀집되어있다. 가옥의 형상은 철선묘로 간결명료하게 묘사했는데, 관청이나 누정건물은 흰색·홍색·녹색의 眞彩로 건축부재까지 표현하였고, 지붕은 기왓골없이 먹선염으로 처리하였다. 성벽은 지붕과 마찬가지로 담묵으로, 성가퀴는 흰색 호분으로 처리했다. 그 밖의 지역은 자연지형 위주로 산언덕과 수목 건물 등이 어우러진 형상이다. 하단에는 평양성을 휘돌아 서해로 흘러드는 대동강과 十里長林이 이어지며, 강 가운데 羊角島와 綾羅島가 보인다.
19세기 이후 기성도는 기성도 병풍에 대한 수요층이 확대되면서, 평양이라는 주변 경관과 기록 혹은 기념을 목적으로 한 회화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기존의 기성도에 행렬이나, 石戰 장면 등이 첨가된 대규모 병풍 형식으로 꾸며지면서 의장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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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壤箕城圖의 변화 자료번호 : ispy.d_0004_002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