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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고구려 장안성의 가로구획 복원

고구려 장안성의 가로구획 복원

현재 고구려 장안성의 가로구획(街路區劃)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방(坊)의 형태와 규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관련 문헌자료와 외성의 실측자료를 비교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장안성의 가로구획은 외성이 둘러진 제한된 공간 안에서 시행되었고, 외성의 형태도 방형(方形)이 아니었다. 따라서 〈기전도〉(箕田圖)주 010
각주 010)
『久菴遺稿』. 上, 箕田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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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종합DB에 보이는 대로로 구획된 나머지 공간에 장방형이나 정방형 가운데 어느 한 형태로만 방 전체를 완전하게 전개시키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 결과 연구자들의 해석이 분분해 혼란이 가중된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백겸은『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주 011
각주 011)
『久菴遺稿』. 上, 箕田遺制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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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종합DB에서 함구문(含毬門)과 정양문(正陽門) 사이의 유적이 가장 선명하다고 하면서, 〈기전도〉에 그 구획을 장방형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1930년대 평천리 일대에 남아 있던 방의 형태는 분명 장방형이 아닌 정방형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한인호의 견해처럼 장방형과 정방형의 방이 적절하게 배합되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즉 고구려 장안성에는 부정형의 평면 형태에 외곽성이 둘러진 제한된 공간에 가로구획이 시행되어 크기가 다른 장방형과 정방형의 방이 포치(布置)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장방형 방의 남북 길이와 정방형의 한 변 길이가 같으므로, 둘의 일정한 연관성 아래 두 가지 형태의 방이 배합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방의 규모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북한학자들이 시도한 산출 방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 자료의 한계 때문에 〈기전도〉에 보이는 방․도로의 수와 그 배치 상황을 바탕으로 현재 구할 수 있는 구간의 실측치를 활용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다만 외성 자체가 네모반듯한 방형이 아닌 데다, 도로의 규모 또한 중로․소로의 경우에는 실측치가 나오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오차는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연구자들에 따라 다양한 수치가 제시되고 있으나, 정방형 한 변의 길이와 장방형의 남북 길이는 대략 168~178미터로, 장방형의 동서 길이는 240미터로 그다지 큰 차이는 없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방의 분할방식에 대해서는 전자형(田字形)의 4분할법이 적용되었다는 데 별다른 이견이 없다. 한백겸의『기전유제설』이나 그가 그린 〈기전도〉를 보면, 격자형 도로망에 의해 매개 구획이 전자형으로 분할되어 1방(田)이 4구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즉 고구려 장안성의 1방은 십자형(十字形)의 소로(小路)에 의해 4등분되는 4분할법이 적용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가로구획의 분할선이 도로중심선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이다. 즉 고구려 장안성의 가로구획은 등간격(等間隔)으로 토지 분할한 뒤 도로를 내고 있어, 도로폭에 따라 방과 택지의 면적이 달라지는 특징을 보인다. 물론 고구려 장안성의 경우는 실측조사에서 확인된 대로 외에 중로와 소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정확한 가로구획 방식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러나 북한 학자들이 일련의 연구에서 보여준 방의 크기는 방과 방, 구와 구 사이의 도로폭을 밝히고 도로의 중심축을 분할축으로 하여 설정된 것이다. 실제 도로의 중심축을 분할선으로 하지 않고서는 방의 크기와 택지의 규모를 일정한 체계로 유형화시키기는 어렵다.
따라서 고구려 장안성에서는 본래 도시를 계획할 때, 우선 1방의 규모를 일정한 면적으로 구획하고 여기서 도로폭을 제외시킨 나머지를 주택구역으로 삼았기 때문에, 1방을 구획한 데서 4구의 면적과 4구의 동서남북에 만들 도로폭의 반을 낸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이에 따라 사방의 도로면적에 따라 방내의 실제 택지 면적도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한편 한백겸의『기전유제설』에 따르면, 고구려 장안성에는 방을 4분할하는 십자로인 소로와 방과 방 사이를 구획하는 방간로(坊間路)인 중로, 방보다 큰 대구획을 구획하는 대로가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도로체계의 양상은 〈기전도〉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고리문(古里門)에서 다경문(多景門)을 연결하는 동서대로와 거피문(車避門)으로 통하는 남북대로, 북쪽으로 각각 함구문과 정양문으로 통하는 남북대로가 외성 안의 기본도로이며, 이러한 대로를 중심으로 중로와 소로가 격자형으로 배치되어, 동서로는 15개의 중로와 17개의 소로를, 남북으로는 13개의 중로와 12개의 소로를 내어 정연한 도로체계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대로의 경우는 1953년에 이루어진 북한의 현지조사와 그 이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실측조사로 실제로도 확인되었으나, 중로의 경우는 〈기전도〉에 따르면 함구문 남북대로와 정양문 남북대로 사이에 남북으로 세 갈래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지만, 20세기 초의 지적도에 따르면 남북로는 두 갈래밖에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소로의 경우는 실제로 확인된 바가 없어, 〈기전도〉와 실제 도로체계 사이의 오차에 대한 검증은 일정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구려 장안성의 도로가 대로, 중로, 소로로 유형화된 것은 사실로 보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확인된 대로의 실측치는 다음과 같다. 먼저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도로의 폭을 정할 때 도로 네 귀퉁이에 세웠던 법수(法樹) 사이의 거리를 고구려척으로 실측하여 대로가 40자(약 14m)임을 확인하였다. 이는 비록 발굴조사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도로 네 귀퉁이에 세워진 법수 사이를 실측하여 도로폭을 추출한 방법은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조사했던 당시 도로의 흔적이 한백겸이 확인했던 17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 데다, 당시의 석표가 고구려시기에 도로를 구획하고 세운 네 귀퉁이에 그대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가 추출한 대로(법수 간격)의 수치는 1950년대 북한학계가 확인한 수치와 같다.
1953년에 북한 중앙력사박물관이 현지조사에서 확인한 거피문을 통과하는 남북대로의 법수 폭은 13.8~13.9미터였으며, 함구문을 통하는 남북대로의 법수 폭은 13.9~14미터였다. 이와 함께 1954년에 김책공업대학 건물 기초공사를 하는 중에 드러난 고리문에서 다경문을 연결하는 동서대로의 폭은 12.6~12.8미터였고, 도로 양쪽에는 약 60~70센티미터 폭의 배수로(側溝)가 확인되었는데, 이 배수로까지 합한 폭은 약 13.8~14미터로 실측되었다.
이처럼 외성 안의 대로가 실제로 확인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중로와 소로의 도로폭도 함께 추산되었는데, 북한 학계의 연구자들은『기전유제설』에 보이는 1․3․9묘(畝)로의 도로가 3배수로 확장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중로․소로의 도로폭을 추산하였다. 즉 배수로를 포함하지 않은 대로의 폭이 약 12.6~12.8미터이므로, 중로는 4.2미터, 소로는 1.4미터로 산정하였다. 이는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실제로 확인된 수치는 아니므로 실제 수치와 어느 정도의 오차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장안성의 조영은 물론 가로구획의 기준척으로는 고구려척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척이 장안성의 기준척으로 사용된 사실을 가장 먼저 확인한 연구자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이다. 그는 현지조사에서 실측한 법수의 간격을 바탕으로 고구려 장안성이 35.6센티미터를 단위 길이로 하는 동위척(東魏尺; 고구려척)을 기준으로 구획되었음을 확인하였다. 비록 그는 고구려척이 동위척에서 기원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였으나, 실측조사를 바탕으로 외성 안의 대로가 40자[尺], 그리고 1방의 1변 길이가 500자(도로 포함 600자)로 구획된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고구려 장안성의 측도 기준과 고구려척의 실재 가능성에 대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였다.
실제 고구려 장안성의 대로와 각 성문․성벽 사이의 실측치를 살펴보면 35센티미터를 단위 길이로 하는 고구려척의 완수치(完數値)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외성 안의 대로는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고구려척으로 40자(14m)라는 뚜렷한 완수를 얻을 수 있으며, 배수로를 제외하면 36자(12.6m)이므로 배수로 또한 2자(0.7m)의 완수를 얻을 수 있다. 대로를 통해 추산된 중로와 소로 역시 12자(4.2m)와 4자(1.4m)라는 완수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확인 가능한 외성 안의 각 실측치도 마찬가지다. 먼저 함구문과 정양문의 중심간 거리는 약 980미터이고 이 구간의 남북거리는 약 700미터로 확인되는데, 각각 고구려척으로 2,800자와 2,000자라는 뚜렷한 완수를 얻을 수 있다. 정양문 중심에서 거피문 북향대로의 중심선까지의 거리는 약 1,050미터로, 역시 고구려척 3,000자라는 뚜렷한 완수가 확인된다. 거피문에서 중성 남벽까지는 약 2,100미터로 확인되는데, 이 역시 고구려척 6,000자라는 완수를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함구문에서 외성 동벽까지의 실측치는 약 260미터로, 고구려척으로 환산하면 약 742.85자로 이 구간만 완수를 얻을 수 없으나, 외성 동벽 구간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강기슭을 따라 안쪽으로 휘어들기 때문에 현재의 실측치나 고구려 당시의 척수에도 일정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구려 장안성의 외성 안의 각 구간은 고구려척에 의해 일정한 단위로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완수로 된 단위척 체계에 의해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외성 안 각 구간의 실측치와 〈기전도〉에서 확인 가능한 방의 개수를 바탕으로 추산된 1방의 규모를 고구려척으로 환산해 보면, 정방형 방의 경우 대략 500자, 장방형 방의 경우는 대략 700자의 완수를 확인할 수 있다.
평양성 외성 가로구획

  • 각주 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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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久菴遺稿』. 上, 箕田遺制說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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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장안성의 가로구획 복원 자료번호 : ispy.d_0003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