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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도로구획에 대한 제설

도로구획에 대한 제설

도로구획과 관련하여서는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 먼저 관야정은 평지인 평양성 외성 안에 바둑판 모양으로 남아있던 종횡으로 난 도로가 기자의 정전유지가 아니고, 고구려 도성의 도로유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사람이다. 도로의 네 귀퉁이에 돌을 세운 것은 도성을 설계할 때 도로의 폭을 결정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고, 고구려가 이곳에 도읍을 정할 때 도로의 폭을 정하고 석표(법수)를 세운 것으로 보면서, 석표의 가장 오래된 것은 후세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최희림은 기초공사장에서 드러난 동서대로의 폭이 12.6∼12.8m였고, 도로의 좌우측에 약 60∼70㎝ 폭의 검은색 감탕흙층이 도랑자리로 보이기 때문에 좌우측의 도랑까지 포함한 폭은 13.8∼14m이고, 1953년에 실측한 남북대로에 있던 법수의 폭도 약 13.8∼13.9m였으며, 함구문에서 남북대로에 통하는 법수의 폭도 13.9∼14m이기 때문에 9무로의 폭이 12.6∼12.8m라면 3무로는 1/3인 4.2m이고, 1무로는 1/9인 1.4m가 되어, 고구려척으로는 9무대로는 36척, 3무로는 12척, 1무로는 4척으로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리화선은 『기전유제설』주 009
각주 009)
『久菴遺稿』. 上, 箕田遺制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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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전종합DB에서 작은 방인 구의 소로는 1무, 방 사이의 중로는 3무, 리 사이의 대로는 9무의 폭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므로, 1무로 1.19m, 3무로 3.57m, 9무로 10.72m가 되며, 이 폭들은 도로의 양쪽에 있던 도랑의 폭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였다. 즉, 대로 40척 폭의 도로를 기준하여『기전유제설』의 1무, 3무, 9무로의 비례로 도로의 폭을 고구려척으로 환산하면, 소로 4.5척, 중로 13.5척, 대로 40척이 된다고 하였다. 또『과농소초』에서는 소로 6척, 중로 6척×3=18척, 대로가 6척×9=54척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주척으로 환산하면 소로 0.2m×6=1.2m, 중로 0.2m×18=3.6m, 대로 0.2m×54=10.8m가 되며,「기전도」나『기자지』의「정전도」등에 보이는 소로 1무, 중로 3무, 대로 9무를 작은 방인 구의 길이를 83.5m로 보고 계산하면, 1무는 100평방m이기 때문에 소로 폭은 1.19m가 되고, 이를 기준으로 3무, 9무를 계산하면 중로는 1.19m×3=3.57m, 대로 1.19m×9=10.71m로 되어, 결국 주척으로 계산한 경우나 무로 계산한 경우를 막론하고 도로의 폭은 모두 비슷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실측치와는 차이가 있는데, 이는 도랑의 폭을 도로의 폭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리와 리 사이의 대로 양쪽에는 폭 0.6∼0.7m의 도랑이 나 있었기 때문에 도랑의 폭을 포함하면 고구려척으로 대로 40척, 중로 13.5척, 소로 4.5척이 되고, 이 중에서 대로는 모든 리와 리 사이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고리문에서 다경문을 연결하는 동서대로, 함구문과 정양문을 연결하는 남북대로, 동서대로에서 거피문 사이에만 존재하였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한인호, 리호는 도로의 대로가 14m로 측구를 뺀 도로면은 12.6m(고구려척 36척)이고, 도로의 계획은 3이 확대단위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중로는 4.2m(12척), 소로는 1.4m(4척)이 된다고 보았으며, 귀전박은 도로의 폭을 대로(구무로) 약 14m, 중로(삼무로) 약 5m, 소로(일무로) 1m 정도로 보았다.

  • 각주 009)
    『久菴遺稿』. 上, 箕田遺制說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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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구획에 대한 제설 자료번호 : ispy.d_0003_002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