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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의 축조형식

중성의 축조형식

평양성 중성의 발굴지점은 네 군데이지만 성벽돌들이 가장 잘 남아 있고 매 시기 성벽의 층위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은 첫번째 발굴지점이므로 첫번째 발굴지점의 층위관계와 성벽축조형식을 기본으로 하면서 두번째와 세번째 발굴지점의 성벽축조 형식을 참고하여 중성의 축조형식을 설명하려고 한다.
중성의 축조형식을 층위관계에 따라 크게 윗성벽과 아래성벽으로 갈라 서술한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본 것처럼 중성의 성벽발굴결과 서로 다른 문화층이 크게 두개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윗부분의 돌성벽층에서도 능성 윗부분의 둔덕에 쌓인 돌과 그 앞에 쌓인 퇴적흙층에서 나온 흑회색기와조각 등으로부터 미루어 보건대 이 돌성벽과 그 아래부분 붉은기와조각과 회색벽돌이 나온 돌성벽층은 서로 시기를 달리하는 돌성벽층이고 돌성벽밑 기초부분아래에 청회색석비레와 누런 진흙이 엇갈려 층층이 쌓여진 성벽은 또 그 윗부분의 돌성벽보다도 이른시기의 것으로 보이지만 이 성벽층들과 그 아래 막돌과 진흙이 섞여 다져진 층 사이에 검은색의 흙과 재가 섞인 문화층(간층)이 존재하므로 크게는 두개로 갈라 윗성벽층과 아래성벽층으로 갈라보게 된다.
우선 윗성벽을 보면 그것은 위에서도 본 것처럼 다시 3개의 성벽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편이 상 윗성벽층에서 능선 위의 둔덕부분과 그 앞에 퇴적된 흙층을 상층으로, 정연하게 가공된 돌이 쌓여진 부분을 중층으로, 그 아래부분 석비레와 진흙이 엇갈려 층층이 다져 진 흙층을 하층으로 부르려고 한다.
윗성벽의 상층은 지표면 15cm 정도 아래에서부터 110cm가량의 깊이까지의 부분에 해당된다. 성벽은 검은색과 누런색이 섞인 흙층을 일정하게 고루고 그 윗부분에 성돌들을 차곡차곡 쌓은 것인데 성바깥면에는 성벽이 흘러 내리지 않도록 뿌리부분이 납작한 단면 삼각형모양의 돌을 놓고 그 위에 길이 30cm, 두께 20cm 정도의 다듬은 성돌들을 두겹으로 쌓았다. 성바깥면과 접한 성안쪽의 성신에는 그보다 작고 납작한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는데 4단정도로 추정된다. 뒷부분인 성안쪽은 진흙으로 다져 진 것으로 보아 흙으로 된 내탁을 붙였던 것으로 인정된다. 성 앞의 퇴적된 흙층에서 나온 흑회색기와가 매우 굳고 두드리면 쇠소리가 나며 기와겉면에 고려시기의 특징적인 기하학적무늬와 전나무잎무늬가 새겨 진 것으로 보아 이 성벽은 고려시기의 성벽으로 추정된다. 즉 이 시기의 성벽은 본래 있던 돌성벽위에 일정한 정도로 진흙을 깔고 그 바깥면에 다듬은 성돌을 면과 선을 맞추어 쌓아 올렸으며 바깥성돌과 연결시켜 두세겹으로 되는 성신돌들을 쌓아 바깥성벽과 성신이 하나로 연결 되도록 하였다는 것과 성안쪽은 진흙으로 다지면서 내탁을 붙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성벽이 거의 다 무너진 관계로 바깥성벽을 몇 단으로 쌓았고 그 높이가 어느 정도였으며 이 성벽너비는 몇 m에 달했는가 하는 것은 잘 알 수 없다. 다만 본래 성벽의 높이가 높았으므로 고려시기에 그 위에 덧쌓은 성벽의 높이가 그리 높지 못 햇을 것이며 따라서 성벽의 너비와 그 규모도 그리 높지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상층성벽의 아래층인 중층성벽은 발굴정형에서 구체적으로 본 듯이 정연하게 쌓은 돌성벽층이다. 상층에서 고구려시기의 전형적인 붉은기와가 매우 다량으로 출토되므로 이 성벽층은 고구려 시기의 성벽층으로 인정되고 있다.
성벽의 기초를 보면 하층의 석비레와 진흙을 번갈아 층층이 쌓아 올린 성벽을 수평으로 일정하게 깎거나 약간 경사지게 내려 파고 다시 기초시설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발굴 첫번째 지점에서는 석비레진흙층을 거의 수평으로 깎아 내고 잘 고룬 다음 그 위에 진흙과 작은 조약돌, 그리고 기와조각을 섞어 기초시설 굳게 다지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린 것이었다. 그러나 두번째 지점과 세번째 지점의 단면을 보면 석비레와 진흙 섞인 층(윗성벽 하층)을 약 40도 정도의 경사로 비스듬히 내려 파고 밑 부분은 약간 평평하게 고룬 다음 그 위에 기초로 되는 성돌들을 차곡차곡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번째 지점에서도 성벽 앞부분의 기초는 매우 굳게 다진 층이었고 앞에서부터 4m 정도 들어 간 성 안쪽의 2~3m정도의 성신이나 내탁으로 인정되는 부분에서는 기초를 진흙으로만 약하게 다졌다. 이것은 성을 쌓는데서 당시 사람들이 성바깥면을 잘 쌓는데 특별히 큰 관심을 돌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성벽을 보면 우선 바깥성벽의 제일 밑부분에는 네모나게 잘 가공한 큰 화강암성돌을 두줄로 나란히 놓고 그 안쪽으로 그보다 좀 작은 대충 다듬은 성돌들을 3~4줄기정도(약1.2m폭)로 놓아 성신벽을 마련했으며 그 다음 안쪽으로는 납작납작한 돌들을 진흙과 섞어 다지면서 4m정도 폭으로 쌓아 올렸다. 납작한 성신돌가운데는 회색벽돌도 3~4장 정도 끼워 있었다. 벽돌은 낙랑일대의 별돌무덤에서 나온 벽돌과 색깔, 재질이 유사한 것이었다.
성벽기초돌 위에는 길이 60cm 너비35cm 높이(두께) 30cm 정도의 큰 성돌을 올려 놓았는데 제일 바깥성벽의 돌을 흘러 내려 유실되었고 그 다음 부분의 돌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윗부분의 성벽들도 모두 없어 졌는데 성이 폐성으로 된 다음 다 무너져 내렸거나 고려시기 성을 보축하면서 그 윗부분의 성돌로 이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성심 안쪽으로는 비교적 큰 돌들과 작은 돌들이 진흙과 섞여 쌓아졌는데 붉은 기와조각이 드문드문 섞인 이 층은 매우 굳게 다져 졌고 안쪽으로 4m 들어가서부터는 비교적 흙이 약하게 다져 졌다.
성벽안쪽으로 2.5m 가량 들어 간 돌성벽의 제일 윗층에 비교적 성돌들이 잘 맞물려 쌓아 진 부분을 볼수 있는데 바깥 성벽들의 높이는 약40cm정도 성벽의 너비는 1.1m 정도로 쌓아져있다. 윗부분의 성돌은 밖으로 경사지게 놓여있는데 비교적 잘 다듬은 성돌들이고 그것들은 앞으로 나가면서 차츰 높아져있다. 또 제일 바깥부분 성돌들은 거의 수직에 가깝게 3~4단으로 쌓아져 있다. 이 돌시설물의 고구려 때의 성벽성심부분에 해당한 것인지 아니면 성벽이 무너지면서 성벽제일 윗부분에 있던 성가퀴 부분이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주저 앉은 상태인지는 확인 할 수 없다. 형태는 성벽(성신)위의 성가퀴와 비슷하다고 인정되지만 성벽층에서 지나치게 아래로 내려와 있고 또 제일 바깥성벽에서도 너무 들어와 자리잡고 있는 감이 든다. 그 윗부분은 전부 검은 흙과 진흙이 뒤섞인 퇴적된 흙층으로 덮여 있으므로 나머지 성벽들은 모두 밖으로 흘러 내린 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본래 성벽은 제일 바깥면에 잘 다듬은 기초돌(장대석)을 놓고 그 위로 올라 가면서 다듬은 성돌들을 면을 가지런히 맞추면서 쌓았으며 바깥성벽면으로부터 4m부분까지 돌과 진흙 기와조각들을 섞어 다진 성심을 잘 축조하면서 성심을 쌓아 올렸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벽안쪽은 드문드문 돌들을 섞으면서 기본상 진흙으로 다졌는데 모두 안쪽 성벽의 내탁으로 인정된다.
위에서 본 고구려시기의 성벽축조형식은 이미 1950년대의 건설과정과 유적발굴과정에 드러난 평양성중성의 성벽축조형식과도 같다.
당시 안산 동남쪽과 남쪽에서 고구려시기의 평양성중성벽을 발굴한데 의하면 이 지대는 대체로 기초지반이 암반이 아니므로 일정한 정도로 경사지의 흙을 파고 기초부분에 진흙과 작은 막돌들을 섞어 굳게 다진 다음 그 위에 길이 50cm 두께 30cm 정도의 큰 장대석들을 한줄로 놓고 다듬은 성돌들을 그 위로 선과 면을 맞추어 어긋 물리면서 쌓아 올렸다. 성벽기초의 안쪽벽과 바깥벽사이부분(기초심)에는 보통 판돌을 평평하게 구들모양으로 깔고 사이사이에는 자갈에 진흙을 섞어 다지면서 번갈아 쌓았다. 안산 동남쪽의 중성벽 기초 및 기저부를 보아도 진흙과 자갈을 섞어 다지고 그 윗부분에 큰 장대석을 두겹으로 쌓았으며 그위로 계단식 굽도리를 조성하면서 잘 다듬은 성돌들을 쌓아 올렸다. 안산남쪽의 경사면에서의 성벽축조형식을 보면 밑에 큰 돌로 장대석을 놓고 그 위로 바깥면을 따라 4각추형의 다듬은 성돌들을 뿌리가 안쪽으로 가도록 가지런히 쌓아 올렸으며 바깥성들과 잘 맞물리도록 성신부분의 돌들을 빈틈없이 쌓아 바깥성벽과 성심돌들이 한덩어리가 되도록 하였다. 성벽안쪽의 2~2.5m 까지는 성심돌들을 차곡차곡 쌓았고 그 안쪽은 흙을 다져 성의 내탁을 이루도록 하였다.
성벽 제일 윗부분은 이전시기에도 발굴된 것이 없고 이번의 발굴에서도 나타난 것이 없으므로 서술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도 안산 능선을 따라 고구려시기의 붉은 기와가 많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아 성벽위에는 성가퀴를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얹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으로 윗성벽의 하층에 대한 축조형식을 보기로 한다.
돌성벽의 기초시설 아래부분은 청회색이 나는 석비레층과 누런색이 나는 진흙층이 서로 엇바뀌어 층층이 쌓아 진 성벽이다. 석비레의 진흙이 서로 바뀌어 쌓아진 층은 모두 8~10개 층에 달한다. 성벽의 범위를 보며 첫번째 발굴지점에서는 깊이 2.2m에 너비 7m정도, 두번째 발굴지점에서는 깊이 2~2.1m에 너비 5m 정도에 달한다. 매 석비레층과 진흙층의 두터이는 발굴정형에서 구체적으로 보았으므로 생략한다.
이층에 해당한 성벽의 축조상태를 보면 제일 바깥성벽에는 길이 35cm 두께20cm 정도의 큰 돌들을 두 겹으로 쌓아 올렸다. 그 위로 올라가면서 성돌들이 본래 한겹 정도로 쌓아져 있었다고 짐작된다. 성안쪽으로 4m정도 들어와 다듬지 않은 막돌들을 쌓은 층이 있는데 두께 60cm 길이 3m 에 달한다. 그 위로 진흙과 석비레를 번갈아 가며 쌓아 올렸다. 먼저 진흙을 잘 다지면서 쌓고 그 위로 석비레를 쌓았으며 이렇게 돌성벽의 밑층까지 차례차례 번갈아 가며 성벽을 쌓아 올린 것을 복수 있다. 성벽축조방법은 기본적으로 판축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벽축조방법은 기본적으로 판축법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의 성벽높이는 비교적 높았다고 인정된다. 성벽의 일부를 깎아내고 그 위의 기초시설을 한 다음 다시 돌성벽을 쌓았으므로 이 토성벽은 돌성벽보다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인정된다. 이층에서는 고구려시기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 기와조각들과 회색벽돌조각들이 많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 붉은 기와조각들과 회색벽돌조각들을 진흙이나 석비레와 함께 다져 진 것이 아니고 막돌충과 일부토성벽에 드문드문 박혀 있던 것으로서 성벽축조 시에 흙에 끼어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있는 것은 붉은 기와의 표면에 끼어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흥미 있는 것은 붉은 기와의 표면에 찍힌 무늬가 고구려시기의 전형적인 사선격자무늬가 아니라 노끈무늬가 많이 찍혀 져 있었으며 일부에서는 무늬가 전혀 없는 기와류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또 회색 또는 청회색을 띄고 있는 벽돌조각들이 낙랑벽돌무덤의 것과 유사한 것도 주목되는 문제점이다.
마지막으로 아래층성벽의 축조형식을 보기로 한다. 앞에서 본 것처럼 윗성벽 밑의 검은색진흙과 재층이 섞인 간층밑부분에서는 윗성벽에서 볼 수 있었던 돌성벽이나 퇴적된 검은 흙층 그리고 황색진흙층과 청색석비레층이 엇갈려 쌓였던 흔적이 완전히 없어지고 윗층과 전혀 다른 성토층으로서 검은 진흙과 막돌을 막 섞어서 쌓은 새로운 성자리가 드러났다.
아래성벽의 축조형식을 구체적으로 보면 제일 밑층은 자연적인 암반이다.
이 자연적인 석비레암반을 잘 깎아 내고 그 위에 막돌과 진흙을 섞어서 다지면서 막쌓기방법으로 축조되었다. 경사가 급한 암반바닥을 깎아 낸 정형을 보면 우선 성벽 밑의 기초암반이 성바깥쪽으로 심히 경사진 곳에서는 80cm~1m 간격으로 암반을 계단식으로 다스려 내어 바닥면이 비교적 수평면에 가깝도록 잘 긁어냈다. 그리고 계단이 이루어 진 끝 부분에는 깊이 20cm 너비 30cm 정도의 가는 홈을 파냄으로써 암반위의 토성벽이 경사면 아래로 밀려 내려가지 않도록 하였다. 성벽축조에 쓰인 막돌의 크기는 직경15cm 이하의 작은 깬돌들이다. 진흙은 검붉은 색깔이며 이 진흙과 깬돌들이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섞여있었다. 그것이 두번째 발굴지점과 세번째 발굴지점에서는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첫번째 발굴지점에서는 아주 명백하게 나타난다.
즉 암반위에는 약20~30cm정도의 두께로 깬 막돌을 위조로 하여 진흙을 섞어 다진 층이었고 그 위로는 약 40cm정도 두께로 검은 진흙만 성토한 층이었다. 그 위에는40~60cm정도 두께로 막돌층이 있고 다시 진흙층이 있으며 또 막돌층과 진흙층이 엇갈려 있다. 여기서 물론 막돌층이라고 하면 그것은 전부 막돌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막돌이 좀 많이 섞인 진흙층이며 또 진흙층에도 막돌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드문드문 박혀있다. 그러나 이렇게 막돌과 진흙의 섞임비fp가 전혀 다른 층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성벽을 축조함에 있어서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된다.
아래성벽의 성벽축조방법은 성토법에 의한 축조방법이라고 할수 있으며 이것은 윗성벽에서 볼수 있었던 석비레와 진흙이 엇갈려 쌓아 진 판축 방법, 토축과 석축의 결합방법, 순수석축방법보다 더 발전된 축조형식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성축조형식은 최근에 발굴된 고조선의 토성들인 지탑리토성 아래성벽이나 성현리토성, 청암동토성의 아래성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고대시기의 일반적은 성축조형식이며 따라서 중성 서남벽 아래성벽은 고대시기의 성축조방법에 의하여 축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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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성의 축조형식 자료번호 : ispy.d_0002_0030_0020_00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