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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성의 축조형식

외성의 축조형식

평양성 외성의 축조형식에 대하여서는 네개 지점에서의 발굴결과가 거의가 같기 때문에 첫번째 발굴지점의 성축조형식을 기본으로 보면서 나머지성벽들의 발굴정형을 참고로 하여 밝혀 보려고 한다.
우선 성벽의 기초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성벽에서 기초는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성벽의 기초는 성벽자체의 경고성을 보장하고 그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기본담보로 되기 때문이다.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면 성벽이 무너지던가 성돌들이 흘러 내리게 되며 성이 자기의 사명을 다할 수 없다.
성벽의 기초는 또한 적들이 성 밑을 뚫고 들어 올수 있으므로 그로 인한 적들의 침입을 막고 성벽의 파괴를 방지하는 기능도 수행한다.
평양성 외성의 성벽 기초는 앞에서 본 것처럼 원토바닥을 일정한 깊이로 파고 그 위에 작은 자갈을 섞은 진흙을 고르게 고루고 그 위에 기초성돌을 놓는 방법으로 쌓아 졌다.
자갈 섞인 진흙층은 장대석 앞부분의2.5~3m정도까지 앞으로 나와 있었으며 그 앞부분에 기초바닥이 밀려 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보통강의 범람으로 인한 침식을 방지하기 위하여 길이 40~60cm 너비30cm 두께20cm 정도의 가공한 큰 돌들이 성벽중기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만수대등성이와 같이 지반이 암반인 경우를 제외하고 은밀해, 칠성문 일대와 같이 그 기초지반이 비교적 견고한 지질층인 경우에는 능선 바깥면을 수직으로 깊이 파고 바닥에 약 50~60cm 의 두께로 자갈과 진흙을 섞어 다진 다음 좀 거칠게 다듬은 장대석을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지형과 지질조건이 위와 비슷한 평양성 중성남벽들인 창광산 남쪽경사면과 내성의 산등재, 남산재에 쌓은 성벽들의 기초도 이와 같다.
평천구역일대와 보통문부근과 같이 대동강과 보통강의 범람과 황토의 충적으로 말미암아 지반이 진흙으로 형성되어 있는 곳에서는 약6~7cm 너비에 3~3.5m 깊이로 성벽이 놓이지 지면을 내라 파고 맨 밑에 자갈과 진흙을 섞어 다진 다음 바닥돌을 놓고 그 위에 성돌들을 정연하게 쌓아 올렸다.
이번에 발급한 평양성 외성의 기초부분인 자갈과 진흙을 섞어 다진 층 위에 놓인 기초성들은 그리 크지 않다. 을밀대, 칠성문 일대의 성벽 기초돌은 길이 58~60cm 정도이고 두께가 39~41cm 정도로서 비교적 큰 돌인데 비하여 외성의 성벽기초돌들을 길이 25cm정도, 두께 20~25cm 정도로서 비교적 작은 돌이며 대신 4각추뿌리부분의 성벽안으로 막히는 부분이 75~80cm 정도로서 매우 길다.
이 기초들은 윗부분의 성돌들보다 그리 크지 않으며 어떤 것은 윗부분의 성돌이 더 큰 것도 있다. 이것은 이전의 성벽기초와 약간 차이 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초심부분(성벽기초의 안쪽벽과 바깥벽사이 부분)은 넓적한 대충 다듬은 돌들을 이용하여 쌓았다. 강자갈처럼 무질서하게 쌓지 않고 평평하게 돌이 놓이도록 쌓은 다음 돌 사이사이에는 작은 자갈과 진흙을 섞어 굳게 다지면서 번갈아 쌓아 올렸다.
성 안쪽부분인 내탁의 기초에는 역시 밑부분에 잔돌과 진흙을 섞어 다지고 그 위에 누런 진흙을 잘 정선하여 매우 굳게 다졌다. 내탁의 제일 끝쪽인 성안쪽 가장자리에는 큰 돌들을 성줄기를 따라가며 놓았는데 이것은 내탁의 흙이 안으로 밀려 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성벽안쪽면을 구획짓는 경계선으로도 되었다고 인정된다.
성벽기초쌓기에서 이러한 형식은 성벽의 견고성을 보장하는 적합한 형식이었다고 불 수 있다. 즉 평지의 축적된 황토층을 일정하게 내리 파고 밑부분을 잔돌과 진흙을 섞어 다진 다음 그 위에 성돌을 차곡차곡 쌓는 것은 기후조건을 고려하여 매해 동기(어는 철)와 해빙기(얼음석이철)에 주기적으로 오는 지동과 부풀음현상으로 인하여 성벽이 기울어지거나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하며 성곽자체의 사명으로부터 출발하여 성벽 밑을 뚫으려는 적들이 기초부분을 파거나 갈퀴 같은 것으로 기초들을 뽑아 낼 수 없게 함으로써 성벽의 안정성을 보장할 수 있게 한 매우 합리적은 성축조방법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벽축조형식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성벽을 쌓는데서 나서 기본요구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성벽을 아주 든든하고 견고하게 쌓음으로써 적들의 공격이나 자연재해로 인하여 성이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둘째로는 성을 지키는 아군의 전투활동에는 편리하고 성을 공격하는 적군의 전투활동에는 불리하도록 성을 쌓는것이다.
평양성은 위에서 본 성벽축조의 기본요구를 두 측면에서 모두 받아 들여 높은 수준에서 구현한 성벽이었다고 할 수있다.
평양성 외성은 우선 성벽 바깥면을 잘 가공한 성돌들로 선과 면을 맞추어 정연하고 견고하게 쌓아 올렸다. 성돌은 위에서 본 것처럼 4각추형의 뿌리가 긴 성돌들로 바깥면을 쌓으면서 성돌의 뾰족한 부분이 성심돌에 의하여 단단히 맞물리도록 하였다.
평양성 외성의 성벽은 대체로 외면축조방법으로 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는 평양성 외성은 평지성이므로 모두 양면쌓기방법으로 축조되었다고 보았다.
또 실제로 이전에 외성서벽을 발굴한 자료에 의하면 흙이 쌓인 속에서 드러난 돌성벽이 양면으로 쌓아 진것도 있었다. 이것은 평천구역 정평동지역의 성벽발굴과정에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종전에는 양면축조방법이 성벽의 안팎을 다같이 성돌로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서 평지성이나 산골짜기부분에 성을 쌓을 때 이용한 방법이었고 외면축조방법은 산등성이나 능선을 이용하여 성을 쌓을 때 이용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내성의 을밀대, 만수대, 산동재, 남산재, 등 산등성이와 능선 중성 남벽의안산, 창광산, 해방산 등의 언덕경사면과 북성의 모란봉 경사면과 같은 산둥성이 경사면 등에서 모두 외면축조방법으로 성이 쌓아 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천리마동상이 있는 부근의 산경사면이 급한 내성북쪽 땅속에서는 조선혁명박물관을 건설할 당시 성벽너비 6m 이상에 달하는 완전히 양면축조 된 성벽이 나온 실례가 있다.
이것은 급한 경사면이라고 하여 다 외면축조방법이 쓰인 것이 아니라 지리지형상 특성에 따라 외면쌓기방법이 많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이번 평양성 외성발굴 시 네개의 발굴지점에서 모두 외면쌓기로 축조된 성벽을 발굴한 것은 평양성의 평지성부분들이 대부분 외면쌓기방법으로 축조되었다고 볼 수 있게 하는 확고한 자료로 된다.
위에서도 본 것처럼 평양성 외성은 바깥면을 잘 다듬은 성돌로 외면으로만 쌓아 올렸으며 성벽돌과 성심돌사이에 길죽한 돌을 서로 맞물려 누르고 그 사이에 길죽 한 돌을 서로 맞물려 누르고 그 사이에 짬이 없이 작은 조약돌과 진흙을 다져 넣어 쌓은 성이었다.
그리고 성 안쪽으로는 진흙을 굳게 다지면서 내탁을 붙여 쌓았다.
이것은 성벽돌이 성신에서 점차 벌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어긋누르는 힘에 의하여 성벽과 돌들을 서로 연결시키며 성벽이 앞으로 밀려 나와 무너지는 것도 방지할 수 있게 한 합리적인 축조방법이었다. 이렇게 쌓여진 성벽은 일부 성벽돌들이 뽑아진다고 하여도 성벽은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성벽 쪽에 붙인 내탁은 아군이 성안에서 성벽위로 자유롭게 오르내리면서 전투활동에 편리하도록 만든 것으로서 아군의 활동에 유리하고 적의 공격에 불리하도록 만든 성벽축조의 기본 요구에 알맞은 성벽축조방법이었다.
내탁은 그 너비가 7.5~8m 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료에 의하면 평지성에서의 내탁의 너비는 17m에 달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내탁부분의 흙은 진흙을 잘 정선하여 굳게 다 진것인데 이것은 흙을 구워 쌓은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흙이 아주 부드럽고 또한 매우 굳은 층이어서 삽과 곡괭이도 잘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옛 기록에도 평양성이 “흙을 구워서 쌓았다고 하는데 지금 성벽 바닥을 파보니 그 흙이 도끼가 아니고서는 팔수 없고 나무뿌리도 깊이 들어가지 못하게 굳으니 옛날 흙을 구워 쌓았다는 전설이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고 쓰여 있으며 고구려성은 아니지만 같은 시기의 백제에서 "나라 사람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 누각, 정자들을 지으니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흙을 구워 성을 쌓는 방법이 이 시기에 적용된 일반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외성의 현존높이는 6.88m 윗너비는 1.8m 아래너비는 15.7m 에 달하지만 성벽을 발굴한 후 돌성벽의 현존높이는 3.2~3.6m이고 윗부분 성벽 5단이 무너진 층은 높이가 80cm이다. 따라서 돌성벽이 남은 현재 높이는 4.4m에 달한다. 밑너비는 7.5~8m 이고 윗너비는 윗성벽이 무너진 관계로 확인할 수 없다.
성벽의 본래 높이가 얼마였겠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없으나 대체로 7~9m로 추정된다.
모란봉과 만수대와 같은 산등성이와 능선을 따라 쌓은 성벽의 4~5m이고 밑너비가 6m 윗너비는 약 2.5~4m이며 평지대의 성벽 밑너비가 약 6~8m 윗너비가 4~6m 인 것을 참고하면 대부분 성벽의 밑너비와 높이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외성의 본래 높이도 밑너비에 따라 7~8m로 추정되며 만수대창작사 북쪽부분의 평지성은 발굴지점의 현존높이보다 2~3m 가량 더 높으므로 대체로 7~9m 정도로 보려고 한다.
성벽의 경사도는 약 82도~83도로서 거의 수직선을 이루고 있다. 이것은 산능선지대에 쌓은 성벽에 비하여 경사도가 훨씬 급한 것으로 된다.
성벽윗부분이 다 무너져 내렸으므로 성신 위에 있어야 할 눈썹돌을 찾을 수 없었으며 성가퀴도 알아 볼 수 없었다. 다만 성이 흘러 내린 경사면에서 고구려시기의 붉은 기와조각들이 대량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성가퀴 윗부분에 기와를 얹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평양성의 의성축조형식을 통하여 고구려사람들이 평양성을 쌓는데서 독특하고 고유한 축조원칙을 가지고 면밀한 설계에 기초한 시공방법을 적용하였으며 지리지형 및 지질조건에 따라 그에 맞는 축조방법을 적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사람들은 우선 지형과 지질조건에 맞게 성벽의 기초를 쌓음으로써 자연적인 지동과 눈, 장마 등으로 입을 수 있는 피해로부터 성벽을 보호할 수 있도록 건축역학적으로 잘 타산된 설계와 시공방법을 적용하였다.
다음으로 그들은 일정한 형태로 돌을 다듬어 벽돌을 쌓듯 어긋물려 면과 선을 정연하게 맞추면서 성돌들을 맞물려 쌓아 기초에서부터 성신에 이르기까지 전체 성벽이 한덩어리가 되도록 함으로써 성축조에서 견고성을 확고히 보장하였다.
이러한 견고하고 든든한 성벽은 옛날 성축조에서 사각(죽음의 각)이라고 하던 적들의 위력적인 공성무기에도 끄떡하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되었다.
또한 성벽바깥면을 경사가 급하게 쌓고 성안쪽에 경사가 완만하게 내탁을 붙임으로써 아군의 활동에 편리하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아군의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없도록 함으로써 방어력이 매우 강한 성으로 되게 하였다.
이상의 사실은 고구려사람들이 전투활동에 편리하고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성벽을 쌓기 위한 성건축의 기본요구들을 원만히 충족시키는데 세심한 주의를 돌리고 우수한 성축조기술과 방법을 널리 적용하였음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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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성의 축조형식 자료번호 : ispy.d_0002_0030_0020_004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