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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성과 그 주변의 발굴정형

외성과 그 주변의 발굴정형

평양성 외성의 발굴은 구체적인 성벽축조형식과 축조시기를 재확인하면서 성벽기초부분과 그 밑부분에 고구려 평양성축조시기 이전의 어떤 성곽유적이나 문화층이 존재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밝히기 위한 목적에서 진행되었다.
성벽에 대한 발굴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안산기슭에서 서남쪽방향으로 뻗어 나간 외성성벽가운데서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은 성벽부분을 골라 너비 4~5m 폭으로 성벽을 잘라 내는 방법으로 발굴하였다.
첫번째 발굴지점은 안산 서쪽 250m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평양전기전문학교 서쪽마당과 인접한 성벽에서는 윗부분의 흙층 너비 6m 정도, 깊이 0.3m정도 파고 다시 너비 5m 폭으로 파내려 가면서 성벽의 단면을 확인하였다.
성벽 제일 윗부분의 폭은 1.8m였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잡초와 함께 모래, 진흙, 탄재, 돌 등이 질서 없이 섞여 있는 현시기 퇴적층이 두텁게 덮여 있었다. 윗부분에서부터 1.8m 정도 깊이 되는 곳까지는 막돌과 진흙, 일부 모래가 혼재되어 있는 퇴적층이였고 그 아래부분에서부터 돌성벽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깊이 1.8m 되는 곳까지 쌓여져 있는 막돌 섞인 모래진흙층은 성벽 앞부분 경사면에도 두께 0.5m 정도로 덮여 있었고 뒷부분 경사면에도 0.3m정도의 두께로 쌓여져 있었다. 이 층은 고구려 이후 고려, 조선시대로 오면서 오랫동안 성벽위에 덧쌓여진 퇴적층이라고 볼 수 있었다.
퇴적층 아래인 성벽중심부분 1.8m 깊이 되는 곳에서부터 큼직큼직한 막돌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그 밑부분에서 성벽중기방향으로 성돌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나타났다. 성돌은 잘 다음어진 화강암, 사암질의 성돌이였으며 고구려 평양성축조에 이용된 전형적인 4각추형의 성돌이었다. 성돌의 크기는 대체로 너비와 높이가 20cm 정도이고 길이가 30cm이며 성돌 뿌리부분의 길이는 50cm정도에 달하였다.
첫번째의 성돌줄기 밑부분에서 다시 성돌들이 성벽줄기방향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돌줄기의 폭은 55cm정도이며 그 아래부분 돌줄기는 두번째 돌줄기보다 102cm정도 앞으로 나와 있었다.
세번째 돌줄기는 두번째 돌줄기보다 26~30cm 정도 앞으로 나와 있었다.
이렇게 성벽의 돌줄기는 5줄로 되여 있었으며 그것은 계단식으로 차례차례 나와 있었다.
그 경사도는 약 40도의 완만한 경사도였다.
5줄로 된 성벽의 높이는 0.8m이고 그 평면 상에서의 폭은 3.2m이었다.
첫번째 단과 두번째 단의 돌줄기사이에는 많은 돌과 진흙이 섞여 있었으며 세번째 단과 네번째 단의 성돌들은 서로 어긋물려 있었으므로 본래 성벽이 무너지면서 그대로 주저 앉은 것이라고 인정된다.
네번째와 다섯번째 성돌줄기는 그 아래성벽층의 바깥쪽으로 훨씬 앞으로 밀려 나간 상태였다. 즉 5단으로 된 성벽이 무너질 때 다섯번째와 네번째단의 성돌들은 앞으로 밀려 나가고 그 윗돌들이 내려 앉게 되었다고 확인되었다.
다섯번째 단의 성돌 밑부분, 다시 말하여 맨 윗층에서 2.6m되는 곳으로부터 정연하게 쌓아 진 성벽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성돌들은 매 성돌의 가로줄을 맞추면서 아래 위의 성돌들이 한줄로 합쳐 지지 않도록 정확히 6합식으로 잘 어긋물려 쌓아 졌다. 성벽면은 매우 고르게 되어 있었다.
맨 위의 성돌로부터 밑부분 기초석까지의 성돌은 모두 18단이였다.
맨 윗단으로부터 8단까지의 성벽은 1.8m에 달하고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아 졌으며 그 아래부분의 10단의 성벽은 1.4m정도이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쌓아 졌다.
현재 축조되어 있는 성벽의 현존높이는 3.2~3.6m정도이다.
기초성벽에서부터 윗부분 성벽의 수직선차이는 50cm정도로서 경사도는 약 83도 정도이다.
바깥면의 성들은 4각형의 앞면을 고르게 다듬은 성돌이지만 그 안의 성돌 즉 성심돌들은 넓적한 돌들을 빈틈 없이 빼곡히 쌓아 올린 것이었다. 윗부분에는 약 0.7~1m 너비로 성심돌이 깔려 있었고 그 밑으로 내려 가면서 점차 그 폭이 1.5m까지 넓어 졌다.
성벽안쪽은 누런색이 나는 굳은 진흙층이였다.
모래와 돌이 섞여 있지 않는 황색진흙을 잘 정선하여 굳게 다진 이 흙층은 성 안벽에 붙인 내탁으로 인정된다.
내탁이란 산성에도 있지만 주로 평지성에 많이 만들어 붙인 것인데 성안에서 성벽 위로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전투활동에 편리하도록 흙을 다져 만든 부분을 말한다.
내탁은 성 안쪽에 굳은 황색진흙을 다지며 쌓아 올린 것이다. 그 상태는 보면 먼저 황색진흙을 다지면서 토성벽을 쌓고 그 토성벽의 바깥을 약간 경사지게 깎아 내린 다음 거기에 의지하여 돌로 된 성심과 바깥성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방법으로 쌓았다고 인정된다. 즉 석축과 토축이 결합된 축조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토성벽의 진흙층은 매우 굳기 때문에 삽과 곡괭이로도 잘 팔 수 없었다. 이 토성 벽속에는 회색이 나는 도기 조각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는데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토성을 다질 때 깨진 도기 조각들이 섞여 들어 갔는지는 알 수 없다. 황색진흙다짐의 토성벽은 성벽 맨 윗부분의 현대퇴적막돌층 밑에서부터 성안쪽으로 전면다짐되어 있는데 현존토성벽의 규모를 보면 윗너비 2.5m정도, 밑너비는 7.5~8m정도이다. 이 토성벽에서는 어떠한 간층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성벽 바깥부분에는 누런 황토층이 두텁게 깔려 있었다. 황토층 아래로 두께 약 0.5cm 정도의 문화층이 나타났으며 그 아래 부분에는 돌성벽과 수직되게 앞으로 돌출시켜 쌓은 돌시설물이 드러났다. 돌시설물은 돌성벽 윗부분에서부터 약 1.6m정도 떨어진 곳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성벽돌처럼 잘 다듬은 돌이 아니라 대층 다듬은 돌들을 너비 40cm 폭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이었다. 이 돌시설물은 성벽 밖으로 길게 나와 있었는데 그 길이는 4.5m정도에 달하였고 성벽과 맞닿는 부분에서 돌시설물의 높이는 1.45m정도였고 성벽 밖으로 나가면서 높이가 점점 낮아져 성벽 밖 2m되는 지점에서는그 높이가 1.1m정도로 되어 있었다.
돌시설물은 원래 높이 쌓아졌던 것으로 인정되며 바깥면의 다듬은 성돌들은 다 무너져 유실되고 안쪽의 돌들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돌시설물의 윗부분과 동쪽부분에서는 두께 10cm정도의 문화층이 쌓여 있었으며 이 문화층위에는 두께 약1.3m에 달하는 누런 황토층이 덮여 있었다.
퇴적된 황토층은 고구려 평양성이 페성된 후 고려, 조선시대에 강이 범람하면서 쌓인 감탕퇴적층이거나 후세에 외성을 복구하면서 강바닥 흙을 날라다가 성토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돌시설물의 위에 덮인 두께 10cm정도의 문화층은 고구려 멸망직후에 쌓인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이문화층에서 고구려의 붉은색 기와편들이 다량 출토되었고 그와 함께 불탄 재와 숯들이 여기저기 묻혀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 문화층은 성벽 앞으로 4.6m 되는 구간까지의 넓은 면적에 걸쳐 깔려 있었다.
여기에서 드러난 많은 붉은기와조각들은 성벽 위에 성가퀴가 무너지면서 성가퀴에 있었던 기와들이 떨어져 깔린 것들로 인정되며 숯과 재는 성벽위에 문루나 기타 목조건물들이 성이 무너질 때 불타면서 기와와 함께 흙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
돌성벽과 돌시설물, 성벽 안쪽부분의 토성벽 밑에서는 성벽의 기초시설들이 드러났다.
기초부분을 보면 진흙과 강자갈돌을 섞어 두께 20cm정도로 다지고 그 위에 놓은 성돌들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성벽의 밑부분 기초인 자갈과 진흙을 섞어 다진 층은 성벽 밖으로 2.5m 정도까지 연장되어 있었고 기초시설 바깥부분에는 성벽이 놓인 방향을 따라 가면서 크고 넓적한 돌들이 놓여 있었다. 이 돌의 크기는 너비 30cm정도, 길이 40~60cm정도, 두께 20cm정도이다 돌의 두께와 성벽기초시설의 두께는 같다. 이 기초돌들은 성 밖이 보통강과 면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큰물에 의한 성벽기초시설의 침식과정을 방지하며 기초시설이 밖으로 밀려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보강시설로 인정되거나 혹은 성 밖에서 성벽을 관리하기 위하여 오가던 사람들이 이용한 인도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성벽기초시설 밖으로는 역시 돌과 진흙을 섞어 다진 층이 일정한 면적에 걸쳐 깔려 있었다.
성벽안쪽의 토성벽인 내탁 밑부분 기초시설은 돌성벽 바깥면에서 성 안쪽으로 7.4m정도 들어 온 부분에서의 발굴과정에서 드러났다. 기초시설은 역시 강돌과 진흙을 섞어 굳게 다진 것이었다. 그 바깥면을 따라 넙적넙적한 돌들을 성벽줄기방향으로 깔아 놓은 것이 보였는데 이 상태는 성벽 바깥쪽의 그것과 꼭 같았다. 성 안쪽 기초시설의 폭은 약3.5m정도이며 그 두께는 2.5m 정도로서 매우 두껍게 깔려 있었다. 기초돌들은 성 안쪽지표면에서 1m 정도 되는 깊이에서 드러났다. 이 기초돌들은 성의 내탁이 밀려 나가지 않도록 든든히 박아 넣은 것이였다. 기초돌들이 있는 곳이 곧 성 안쪽부분(내탁)이 끝나는 곳이다. 고구려시대에 이 기초돌들이 겉면에 드러나 있었다면 그것은 성 안쪽을 순찰하는데 필요한 인도로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 밖(외벽)과 성 안(내탁)의 밑부분 지면차이는 2m정도로서 성 밖이 성 안쪽보다 2m정도 더 낮다.
현재 토사를 다 처리하고 난 후 성벽의 밑부분 너비실측치는 15.5m에 달하였으며 남아 있는 현존 돌성벽의 높이는 5.7m였다.
성벽기초시설밑에서 그 이전시기의 다른 문화층이나 유적관계를 확인하기 위하여 2m정도의 깊이로 시굴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시굴구덩이에서는 감탕이 쌓여 굳어진 층과 진흙층 그리고 일부 막돌들이 드러났을 뿐 고대시기의 성곽유적이나 문화층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평양성 외성의 두번째 발굴지점은 첫번째 발굴지점의 서쪽으로 성벽을 따라 200m 되는 곳을 선택하였다. 이곳은 만수대창작사 앞도로에 의하여 외성이 끊긴 동쪽부분의 성벽에 해당되는 곳이며 도로에는 낭랑-서평양 궤도전차정류소가 있고 그 맞은 편에는 국보유적표식과 함께 평양성에 대한 해설문이 쓰여 있는 표식비가 서 있다. 발굴지점은 궤도전차정류소 옆 인도로의 옹벽에서부터 동쪽으로 약 7m정도 떨어 진 곳이었다.
발굴은 첫번째 지점에서와 같이 너비 약 4m 폭으로 성벽을 세로로 자르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제일 윗층은 여러 가지 잡초와 흙, 모래 막돌들이 섞여 있는 현대의 퇴적층이었고 지표면 20cm정도 아래에서는 고려, 조선시대에 퇴적된 문화층들이 드러났다.
고구려의 돌성벽층은 지표면에서 약 1m 정도 깊이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부분의 돌성벽층은 성벽축조상태와 성벽 안쪽 및 바깥쪽 문화층의 상태, 그 두께정도가 첫번째 발굴 지점의 것과 같았다.
제일 윗단의 바깥성벽면의 성돌은 3개가 떨어 져 나가고 나머지 돌들은 줄이 바로 맞추어 지지 않은 채로 있었으며 밑단의 성돌들보다 앞으로 약 5cm 가량 밀려 나와 있었다. 두번째 단의 성돌들은 제대로 열이 맞추어 져 있었으나 역시 성벽이 무너지면서 성심으로부터의 중압에 의하여 원래의 자리에서 3~5cm 가량 앞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 그 밑부분 세번째 단부터는 성돌들이 비교적 제자리에 맞물려 져 있었다. 성벽바깥면의 성돌은 위로부터 여섯번째 단까지 거의 수직으로 쌓아졌으며 그 아래부분 4개단의 성돌들은 밖으로부터 안으로 약간씩 들어가면서 쌓아졌다. 성돌들이 이렇게 안으로 조금씩 들어가면서 쌓아진 굽도리계단상태는 첫번째 발굴지점의 밑부분 굽도리성벽보다 현저하게 나타난다. 기초부분은 강돌과 진흙을 섞어 잘 다짐한 것이었고 성벽면 아래단에서 약 50cm 정도 앞부분에는 기초돌로 놓았다고 인정되는 큰 돌들이 놓여 있었다.
첫번째 발굴지점에서와 같이 성벽 앞부분에 성벽과 수직되어 쌓여 있던 돌시설물을 여기서는 볼 수 없었다. 또 성벽밑부분의 기초시설 아래부분에서는 고대시기의 성곽 유적이나 문화층을 찾지 못하였다.
첫번째 발굴지점에서와 같이 성벽앞부분에 성벽과 수직되어 쌓여 있던 돌시설물을 여기서는 볼 수 없었다. 또 성벽밑부분의 기초시설 아래부분에서는 고대시기의 성곽유적이나 문화층을 찾지 못하였다.
세번째 발굴지점은 첫번째 발굴지점의 동쪽 150m정도의 거리에 있는 평양장철구상업대학 기숙사 바로 앞부분이였다. 첫번째와 두번째 발굴지점에서와 마찬가지로 성벽을 너비 4m폭으로 잘라 보는 방법으로 발굴을 진행하였다.
맨 윗층의 퇴적층아래에서 고구려의 붉은 기와편들이 많이 나왔으며 1.5m정도의 깊이에서 고구려 평양성 외성의 돌성벽층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성 바깥쪽의 문화층은 매우 두텁게 깔려 있었는데 첫번째 발굴지점의 성벽 앞부분에서와 같은 황색진흙층으로 된 퇴적층은 얼마 없었고 오히려 붉은 기와편들과 함께 불에 탄 숯과 재, 막돌들이 섞이여 있는 검은색간층(문화층)이 근 1m정도의 두꼐로 깔려있었다.
돌성벽층의 맨 윗단 성돌은 4개 정도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흘러 내렸다. 그 밑단 성돌들은 기본적으로 제자리에 맞물려 있었는데 동쪽으로부터 네번째 성돌과 맨 서쪽의 성돌이 바껴있었다. 세번째 단부터는 성돌들이 빠짐없이 나란히 어긋물려 정연하게 쌓아진 채로 드러났다. 이러한 정연한 성벽은 밑부분 기초시설까지 무려 15단이나 남아 있었다.
위에서부터 다섯번째 단까지의 성돌들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86~87도 정도의 급경사도로 쌓아 졌으며 그 밑부분의 10단에 달하는 성돌들은 83도 정도의 경사각도를 이루면서 비교적 경사가 약간 느리게 축조 되었다. 특히 맨 아래부분의 5개단의 성돌들은 밑으로부터 한단씩 올라오면서 2~3cm정도씩 안으로 들여 쌓아졌다. 즉 성벽 밑부분은 계단식굽도리성벽으로서 전형적인 고구려 성벽굽도리형식으로 되어있다.
성돌들은 모두 꼭 같지는 않았다. 밑부분에는 비교적 큰 돌들이 있고 위로 올라가면서 조금씩 작은 돌들이 쌓여졌지만 때에 따라서는 아랫단 성돌이 작은 것도 있고 윗단의 성돌이 큰 것도 있다. 제일 아래에서 두번째 단의 동쪽 성돌들은 비교적 작고 네번째 단의 일부 성돌들은 너비가 60~70cm정도로 길지만 높이는 오히려15cm 정도밖에 안되는 납작한 돌이므로 서쪽부분에는 두께 35cm정도의 큰 돌들이 두단으로 쌓아졌던 것이다. 맨 위로부터 세번째 단의 성돌들중에도 밑 부분은 성돌들처럼 큰 것들이 들어 가 있었다.
성벽기초는 첫번째나 두번째 발굴지점의 성벽기초와 마찬가지로 강돌을 섞은 진흙으로 굳게 다졌으며 그 위에 진흙을 고르게 펴고 성벽 밑부분에서 앞으로 2.5cm정도 나온 곳에는 기초 시설이 강물에 의해 침식되지 않도록 큰 돌들을 성벽줄기방향으로 가지런히 쌓아 놓은 것이 보였다.
성벽 밑부분에서는 이전시기의 문화층과 성곽유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네번째 발굴지점은 첫번째 발굴지점으로부터 동쪽으로 250m정도 떨어진 곳으로서 이 지점은 봉학동 안산동을 연결하는 도로를 건너 평양성 외성과 중성이 연결되는 안산 능선 위에서 50m정도 내려온 경사지였다. 경사면의 흙을 벗기면서 파 내려가니 역시 돌성벽이 산경사면에 의거하여 축조되어 있는 것이 드러났다. 성벽의 축조형식과 방법은 다른 발굴지점의 그것과 같았다. 성벽 밑부분은 경사가 심한 관계로 하여 그리고 그 윗부분에 있는 중성벽을 기초까지 파면 이 부분의 기초구조도 자연히 알 수 있으므로 발굴을 중지하였다.
평양성 외성의 성벽 발굴 외에 성벽안쪽의 지층조사를 위하여 봉학고등중학교 운동장 뒷부분의 한 개소의 대한 시굴을 진행하였다. 시굴지점은 외성 서북벽에서 동남쪽으로 약 25m정도 떨어진 평탄한 지점을 선택하였다. 표토층으로부터 깊이 65cm정도까지는 막돌들이 드문드문 섞인 검은 흙층으로서 근세와 현대의 퇴적층이라고 인정되었다. 그 밑으로 약 15cm정도 깊이까지는 석탄재층이 까려 있었다. 탄재층 아래의 60~65cm정도의 깊이까지는 모래질과 누런 진흙층이 섞인 황토층적층이였다. 이 층은 보통강이나 대동강이 범람하였을 때 흘러들어 온 황토가 몇 차례에 걸쳐 퇴적된 층으로 보였다.
그 밑부분 약 60cm 정도 깊이까지는 검은색이 나는 굳은 진흙층으로서 이 부분에서는 흑회색기와와 회색기와조각들, 붉은기와조각들이 많이 드러났다. 흑회색기와와 회색기와는 능형구획 안에 가는 선들이 배열 된 무늬가 찍혀진 것들로서 고려시기의 기와들로 보이며 붉은 기와는 무늬가 없는 민기와로서 고구려시기와 기와들로 인정되었다. 질그릇조각들도 많이 나왔는데 오지그릇조각과 독조각들이였다. 질그릇의 태토(바탕흙)는 잘 정선된 진흙으로 된 것이고 경도가 매우 굳은 것으로 보아 이 질그릇들은 고려시기나 그 이후의 그릇들로 보여진다. 따라서 이 층은 고려시기와 그 이후시기의 문화층으로 인정 되었다.
검은 진흙층 밑부분에는 약 85cm정도 깊이까지 모래질과 진흙으로 이루어 진 층이었으며 여기에서는 고구려의 붉은 기와조각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붉은 기와와 함께 회색도기조각과 흑회색도기조각들도 섞여 있었는데 도기의 질은 고구려질그릇의 그것과 같은 것이었다.
고구려 붉은기와조각들이 깔린 층의 아래부분 1.5m 깊이까지에서는 붉은색과 누런색의 진흙층이 깔려 있었다. 특별한 유물은 나타나는 것이 없었으며 진흙은 비교적 부드럽고 윗층의 진흙보다 굳지 않았다. 이층은 고대로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퇴적된 제일 밑층의 층적토층으로 볼 수 있었다.
시굴은 깊이 4.5m까지 진행하였다.
지층조사를 위한 시굴을 통하여 외성 성벽 안쪽의 평천지역 충적토층이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고구려,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면서 매 시기의 문화층이 60~80cm정도의 두께로 차례차례 깔려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층조사에서도 역시 고대시기의 유적이나 유물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이 지역 즉 봉학고등중학교 운동장부근으로부터 만수대창작사에 이르는 평천구역 성안동지역에 고대시기의 토성이나 문화층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고조선사람들이 이 부근에서 거주 및 정착생활을 진행하였다고는 보기 어렵게 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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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성과 그 주변의 발굴정형 자료번호 : ispy.d_0002_0030_0020_003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