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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경위 및 발굴지점

발굴경위 및 발굴지점

평양성은 지금까지 고구려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안학궁성에 도읍하였다가 6세기 모란봉으로부터 평천일대를 포괄하는 넓은 지역에 새로운 수도성을 쌓고 586년에 도읍을 옮긴 장안성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평양성은 현재 북한 서북지방의 중심부에 해당하며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평양성의 동쪽과 남쪽에는 낭림산에서 발원하는 대동강이 흐르면서 자연적인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평원군에서 발원하여 서평양을 지나 흐르는 보통강은 보통문부근에서부터 평양성의 서쪽과 서남쪽방향을 돌아 대동강과 합류되는 지점까지 자연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평양성의 북쪽방면에는 대성산, 아미산, 감북산, 장산 등 대체로 100~300m 정도의 해발고를 가진 산들로 둘러 막혀 있고 서쪽은 낮은 구릉지대이며 동쪽과 남쪽에는 비옥한 평야가 펼쳐 져 있다.
평양성은 평양의 한가운데에 높이 솟은 모란봉과 을밀대, 만수대의 높고 험한 등성이를 북벽으로 이용하고 동, 서, 남면은 대동강과 보통강기슭의 언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따라서 성의 둘레는 모두 산과 강으로 막혀 있으며 성안은 대부분이 평지대이고 중성과 내성에 남산, 해방산 창광산, 안산 등에 의하여 이루어 진 구릉지대가 있다.
평양성의 윤곽을 보면 모란봉을 최북단으로 하고 서남쪽으로 을밀대, 만수대 마루를 타고 내려가면서 보통강 동쪽언덕을 따라 안산에 이르며 여기서 다시 서남쪽으로 뻗어 보통강과 대동강이 합수되는 평천구역 정평동에 이르고 동쪽으로 휘돌면서 대동강 서안언덕을 따라 대동교, 대동문을 거쳐 을밀대남쪽의 동암문으로 올라 간다. 여기서 동쪽으로 청류벽 마루를 타고 나가다가 부벽루를 끼고 모란봉중턱을 감싸고 돌았으며 그 동북쪽으로 또 길게 철성이 놓여 있다.
그중에서 내성은 만수대 서남단으로부터 남쪽으로 구릉을 따라 나가다가 신암동(정해문터부근)에서 동쪽으로 또 돌아 대동강기슭의 동벽에 이르는 지역으로서 만수대 을밀대 이남지역을 포괄한 성이다. 중성은 내성 남벽 남쪽에 동서로 나란히 놓여 있는 해방산(서기산), 창광산, 안산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대동교 부근에서부터 안산까지 동서로 가로 질러 막은 성의 북쪽부분에 해당하며 외성은 중성의 남쪽인 중구역의 일부와 평천구역 일대를 포괄한 성이다. 북성은 을밀대에서 북쪽으로 모란봉의 문봉을 감싸고 동남으로 부벽루를 거쳐 전금문을 지나서 청류벽 마루를 따라 동암문에 이르는 성이다.
고구려 평양성은 이와 같이 모란봉의 산악지대와 만수대와 청류벽 등 절벽을 따라 북쪽을 둘러 막고 동, 서, 남 3면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해자처럼 두르고 앉은 성으로서 절벽, 강기슭, 언덕지대를 능숙하게 이용하고 강에 막혀 있는 평지대의 유리한 지형조건과 절벽을 이룬 산지대의 자연지대를 종합적으로 이용하여 축조된 독특한 형식의 평산성이다. 따라서 남쪽에서 보면 웅대한 평지성이고 서북쪽에서 바라보면 높은 산성을 방불케 한다.
평양성은 성벽자체도 높고 견고하게 쌓아 졌으며 총체적으로 한 개의 성으로 되어 있지만 내성과 중성, 외성, 북성의 네개 부분으로 구획되어 있었으므로 2중 3중성으로 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평양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23km에 달한다.
그러나 평양성발굴은 여러 가지 난점들이 제기되는 어려운 발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평양성이 매우 큰 성이기는 하지만 현재로서는 성벽이 남아 있는 구간을 찾아 보기 대단히 힘든 사정과 관련된다.
평양성이전의 고대토성이 있었다면 그것은 고구려 평양성과 같은 큰 규모로 건설된 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고대토성이 단군조선 시대의 것이든, 조선시대의 것이든 관계없이 오늘의 평양시 중심부를 다 포괄한 대도시성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명백한 사실이며 국가성립초기로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그 규모는 더 작아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 학계에서 단군 조선초기의 수도성으로 비정해 보려고 하고 있는 청암동토성의 경우가 그것을 말해 주는 단적인 실례로 된다. 청암동토성의 둘레는 3,450m 정도이지만 이것도 고구려 때 성의 길이이며 고대시기의 토성은 이보다 작으며 작았지 결코 클 수 없었다.
따라서 고대토성의 유적을 찾아 내려면 어차피 평양시 중심부의 높고 낮은 구릉지대에서 고대시기의 성을 쌓기에 적합했다고 인정되는 구역을 골라 발굴대상으로 하여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그러한 대상으로 정할 수 있는 구역들인 모란봉과 문수대, 장대재와 남산재, 해방산, 창광산 등에 기념비적 건축물들과 청사, 고층살림집들이 들어차고 또 유원지도 건설 되었으므로 여기에 명백히 고대성곽유적이 있다는 근거가 없는 이상 무턱대고 발굴지를 선정할 수는 없었다.
고대시기의 성곽유적이 평지성이라고 하여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고구려평양성의 인구가 당시21만여호였고 성곽안의 면적이 약 12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이지만 고대시기의 성곽은 그렇게 클 수 없었으므로 그 안에서 평지성을 찾아야 하지만 대건축물들이 조밀하게 밀집된 이 지역에서 현재로서는 발굴단서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고구려시기에 성을 쌓으면서 현재의 평양성 구획 안에 있었던 고대 및 고구려 초기의 산성이나 평산성, 혹은 평지성들을 포함 또는 연결하면서 자연지세에 맞게 넓은 구획으로 축조했을 것이라는 가정은 해 볼 수 있다. 고대토성이 축조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으로서 우선 모란봉 을밀대로부터 만수대를 거쳐 그 아래부분에 해당한 구역을 들 수 있다.
그 구역은 고구려시기 평양성의 내성에 해당된다. 북성이 있는 구역은 고대토성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된다. 북성은 모란봉의 문봉(현재의 최승대 가 있는 모란봉의 최정점)과 그 동북쪽에 있는 봉우리를 감싸고 빙 돌아서 부벽루와 전금문을 거쳐 동암문에 이르는 성으로서 이 구역은 모란봉일대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지만 궁전, 관청 등이 자리 잡을 수 있는 평야가 매우 제한되어 있고 대동강에 면한 방향의 방어력이 약하므로 여기에는 독립적인 성곽이 자리 잡을 지세가 되지 못한다고 인정된다.
금수산 주봉 중의 하나인 해발 96.1m의 을밀대가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남쪽으로 청류벽의 절벽을 타고 경상골의 대동강호안절벽으로 내리 뻗은 능선과 서쪽으로 산마루를 타고 만수대 언덕으로 뻗은 능선 사이의 골짜기는 고대성곽이 자리 잡을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만수대와 을밀대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사방이 탁 트여 평양시를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이며 을밀대에서 경상골에 이르는 골짜기는 아늑하고 수원도 풍부하여 성곽을 축조하기에 매우 적합한 고로봉형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만수대에서 정해문을 거쳐 남산재 마루를 타고 주작문과 대동문에 이르는 현재의 중구역 대동문동과 서문동, 경상동지역은 고대성곽이 자리 잡기에 편리한 곳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 지역은 현재 대기념비적 건축물들과 고층 및 다층 살림집들 그리고 대유원지가 펼쳐 져 있어 발굴사업을 할 수 없으며 대동강 호안과 청류벽 절벽의 복구된 고구려평양성성벽들은 재발굴하기 대단히 곤란한 곳이다.
다음으로 중성은 내성남벽남쪽에서 동서로 나란히 놓여 있는 해방산, 청광산, 안산 등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대동교로부터 안산까지 동서로 가로 질러 돌려 막아 쌓은 성으로서 칠성문으로부터 보통벌에 이르는 지역과 대동강에 면한지역에서는 대성곽 축조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 해방산과 창광산, 안산과 같은 비교적 산줄기들이 연결된 구릉지대에서 그 적합한 성자리를 찾아 볼 수 있으나 이 지역도 건물들이 조밀하게 집중된 곳으로서 고대성곽의 흔적을 찾거나 발굴사업을 진행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1950년대의 평양시 복구건설과정에 드러나거나 조사 발굴된 중성성벽이 주로 안산지대에 있으므로 발굴지점은 이 일대에서 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이 지역도 안산공원과 주택지구들이 밀집되었으므로 발굴대상으로 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이밖에 외성은 중성남벽을 북쪽 경계선으로 하고 그 남쪽부분을 포괄한 평지대이다. 고대성곽이 평지대에도 적지 않게 축조되었지만(그러한 실례로 황해남도 봉산군 지탑리토성, 황해남도 신천군 청산리토성 등을 들 수 있다) 평천벌을 포괄하는 고구려 평양성 외성의 큰 지역이 다 고대성곽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이 지역이 규모 상으로 볼 때 매우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고대시기는 대동강의 수면이 현재보다 높았으므로 이 지역의 일부가 물에 잠겨 있었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지질학부에서 작성한 5,000년 전의 지형도에 의하면 당시의 대동강수면 강폭너비는 현재의 2배에 달했던 것으로 확증되어 있었다.
한편 평천구역 일대도 공장, 기업소와 주민지구가 조밀하게 밀집된 지역으로서 여기에서 그 어떤 성곽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고려시기의 평양성성벽이 남아 있는 곳은 평천구역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성안동지구의 토성벽과 평양화력발전소를 둘러 싸고 있는 방수성남쪽에 일부 남아 있는 토성벽 뿐이다. 따라서 이 지역을 발굴대상으로 정하고 그에 대한 조사사업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평양성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를 통하여 발굴지점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정할 수 있었다.
우선 평양성 중성 서남벽이 남아 있는 안산지역을 발굴지점으로 선정하고 재조사사업을 진행하였다.
안산에는 안상공원의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주택지구의 잠장 서쪽 능선방향으로 고구려시기의 붉은 기와조각들이 많이 널려 져 있었다. 이 능선은 만수대창작사에서 동성교 방향으로 통하는 차도로에 의하여 끊겼는데 중성의 성벽은 도로 북쪽부분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중성서벽이 남아 있는 구간은 약 300m정도이지만 성벽을 발굴 할 수 있는 구간은 150m정도밖에 되지 못하였다.
다음으로 이 중성서벽의 중간부분에서 서남쪽방향으로 뻗어나간 외성부분에 대하여 재조사를 진행하였다. 외성이 중성에 연결된 부분은 약간 두둑하게 남아 있으나 그 주변에 다층주택이 들어서고 봉학동에서 안산동으로 통하는 차도로가 지나가므로 성벽은 끊어져 있다. 도로를 건너 만수대창작사에 이르는 500m정도의 구간에 현재 평양성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성벽은 겉으로 보기에는 토성처럼 보인다. 성벽은 1,500여년의 오랜 세월이 흐르는 과정에 많이 흘러 내려 성벽 윗부분의 본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현존하는 토성의 지형을 보면 성 안쪽인 봉학고등중학교가 있는 쪽의 지면은 비교적 완만하게 경사져 있고 성 바깥쪽인 평양전기전문학교와 성안인민학교가 있는 쪽의 지면은 약간 가파른 경사면처럼 이루어져있다. 성벽의 현존높이는 안산 쪽에서는 4~5m정도, 만수대창작사 앞도로주변의 성벽은 7~8m에 달하며 성벽 윗부분의 너비(폭)는 1.8m~2m정도이고 밑부분의 너비는 15~18m정도이다. 성벽은 성안인민학교 뒤마당 부근에서 인도에 의하여 6~7m정도 끊겼으며 그 동쪽 약 10m 지점에는 성벽이 없는 자리가 있는데 이곳은 본래 성문이 있었던 자리였다고 인정된다. 만수대창작사 앞도로에 의해서도 성벽은 약 25m 정도 끊어져 있다.
외성벽은 만수대창작사 북쪽담장 옆으로 계속 뻗어 나가다가 서북쪽을 싸고 돌면서 남쪽방향으로 뻗었는데 200m정도 더 나가서 끊어졌다.
그다음 평양화력발전소 남쪽 평천화물역 방향으로 뻗은 철길뚝 옆으로 150m정도의 외성벽이 남아 있었다. 현재 성벽의 높이는 약 4~5m정도이고 윗부분의 너비는 1.5m정도, 밑부분의 너비는 10m정도이다. 성벽의 윗부분은 많이 흘러 내리고 흙으로 덮여 있지만 성벽 중간부분에는 고구려의 성들이 많이 널려져 있었으며 일부 돌성벽이 축조된 채로 남아 있는 부분도 간혹 있었다.
발굴지점은 평양성 외성벽에서 4개지점, 중성의 서남쪽인 안상능선에서 4개지점을 정하였고 그밖에 지층조사를 위한 발굴을 진행하였다.
외성성벽의 첫번째 발굴지점은 안산에서 서남쪽으로 약 350m정도 떨어진 현재의 평양전기전문학교(당시 전기단과대학)운동장 서쪽모서리부분과 인접해 있는 성벽으로 정하였다. 두번째 발굴지점은 첫번째 발굴지점의 서쪽방향으로 성벽을 따라가다가 200m 떨어 진 곳인 만수대창작사 앞도로 동쪽성벽에 정하였다. 세번째 발굴지점은 첫번째 발굴지점의 동쪽 150m 정도거리에 있는 성벽으로 정하였으며 네번째 발굴지점은 첫번째 지점에서 동쪽으로 200m정도 떨어진 중성과 외성이 거의 합쳐지는 쪽의 성벽으로 정하였다.
외성성벽발굴과 병행하여 외성 안쪽인 봉학고등중학교 운동장에서 지층조사를 위한 발굴을 진행하였다. 발굴지점의 위치는 외성서북쪽의 첫번째 발굴지점에서 동남쪽으로 20~25m정도 떨어 진 봉학고등중학교 운동장 뒤부분이다. 길이 3.5m 너비 2.5m 깊이 4.5m정도의 시굴구덩이를 파는 방법으로 진행하였다.
평양성 중성의 발굴지점도 4개지점으로 선정하였다. 첫번째 발굴지점은 중성성벽과 외성성벽이 잇닿는 곳에서부터 동북방향으로 약 30m정도 떨어진 곳인데 산능선을 가로 자르는 방법으로 전면발굴을 진행하였다. 두번째 지점은 첫번째 지점으로부터 남쪽으로 50m정도 떨어 진 곳이며 세번째 지점은 첫번째 지점으로부터 북쪽으로 50cm정도 떨어 진 곳이다.
네번째 지점은 세번째 지점에서부터 또 북쪽으로 20m정도 떨어진 곳을 정하여 발굴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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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경위 및 발굴지점 자료번호 : ispy.d_0002_0030_0020_0030_0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