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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성벽의 특징

성벽의 특징

고구려 평양성 성벽의 특징으로는 첫 번째, 지질과 지형조건에 알맞게 성벽의 기초를 쌓음으로써 자연적인 지동과 눈, 장마 등으로 입을 수 있는 피해로부터 성벽을 보호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두 번째 일정한 형태로 돌을 다듬어 벽돌을 쌓듯 어긋 물려 면과 선을 정연하게 맞추면서 맞물려 쌓아 기초에서부터 성신에 이르기 까지 전체 성벽이 한덩어리가 되도록 함으로써 허물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적들이 노리는 성돌들 사이의 틈을 없이 하고 반면에 아군의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모퉁이가 없게 하였다.
이상에서 평양성을 구성하고 있는 외성, 중성, 내성, 북성 등 네 개의 부분 성들의 성벽축조형식이 그 성돌의 형태와 다듬은 수법에서부터 쌓은 방법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돌성이라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현재 평양성 외성의 일부는 돌성이 아닌 토성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성의 축조형식에 대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81년에 쓴 동국여지승람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평양조에 의하면 “외성은 당포 위에 있는데 돌성의 주위는 8,200자이고 토성의 주위는 1만 205자로 그 높이는 모두 32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외성벽의 단면과 전구간의 축조형식 및 재료를 보면 외성은 본래 흙으로 쌓은 토성이 아니라 돌성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런데 현재 외성이 외견 상 토성처럼 보이는 이유는 돌성벽이 파괴되고 흙이 덮힌 위에 잡초가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돌성벽의 윗 부분은 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보기에는 완전히 토성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토성 속에서는 돌로 정연하게 쌓아올린 돌성벽이 조사된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는 돌성벽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이렇게 고구려 평양성이 토성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668년 고구려의 멸망 이후 신라의 지배 하에 속하게 되면서 평양지방에 대한 관심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10세기 초에 “평양의 옛 도읍지는 가시넝쿨이 무성하여 여진인들이 거기서 사냥을 하고 있다”주 004
각주 004)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高麗史』. 卷1. 世家1 太祖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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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데이터베이스 라는 기록까지 등장한다. 938년 고려는 평양을 중요시 하여 제2의 수도로 인정하고 평양의 성들에 대한 복구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때에 이미 무너져 내려 성돌들이 많이 없어진 외성성벽부분을 돌로 쌓지 못하고 흙으로 쌓게 되었다고 생각되며 그 뒤에도 흙으로 보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2세기 이후에는 내성과 중성 만을 서경성으로 이용하였다. 더욱이 17세기 이후에는 평양성의 내성만을 보수하여 이용하였으므로 외성은 완전히 방임상태로 두게 하였다. 그리하여 홍수가 나면 성돌들이 유실되기도 하고 흙과 모래가 일부 성벽에 쌓였다. 고려 중엽 이후 외성은 방어적 기능을 수행하는 성으로 보다는 대동강과 보통강의 범람에서 오는 홍수 피해를 막는 기능을 수행하는 방수성으로 변하였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따라서 동국여지승람의 제작시기에는 외관에 보이는 대로 토성이라고 기록하였으며 그 이후 기록들이 모두 이것을 그대로 옮겨 기록함으로써 토성으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다. 외성이 처음에는 돌성이었는데 후세에 와서 그 위에 흙을 덮었다는 것은 무너진 돌성 벽 위에 덮은 점토흙무지 속에서 고려 및 조선시기의 유물이 나온 것으로도 알 수 있다.

  • 각주 004)
    平壤古都, 荒廢雖久, 基址尙存. 而荊棘滋茂, 蕃人遊獵於其間, 因而侵掠邊邑, 爲害大矣.
    『高麗史』. 卷1. 世家1 太祖 1년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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