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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평양성

방리의 명칭과 방장

방리의 명칭과 방장

실제로 고구려 평양성에서 행정단위로 이방제가 실시되었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의 례를 참고하여 연구자들이 붙여 놓은 것에 부과하다. 신라왕경의 행정단위로는 부, 리, 방, 항이 있었다. 여기서 항은 최근에 밝혀진 것이다. 즉, 월성해자의 발굴조사에서는 목제류는 목간을 포함하여 5∼6종에 약 30점이 출토되었다. 그중 목간은 월성 북쪽“다”지역의 뻘층에서 출토되었는데, 보존처리중에 있어서 보고서에는 수록하지 못하였다고 하며, 이중에는 7세기 전반 경으로 추정되는「제팔항…」이라는 명문이 있는 목간이 있다고 한다. 이곳의 항은 리·방의 하위 행정단위 명칭이 아닌가 보고 있다. 이는 왕경내의 최말단 행정단위로서 백제 사 도성의 부항제와는 차이가 있다. 한편 전기 평양성에서는 대구획을 방이라고 부르는 반면, 후기 평양성에서는 소구획을 방이라고 부르는 등 연구자들에 따라 차이를 보여 혼선을 초래시키고 있다. 북위의 낙양성과 일본의 평성경에서는 사방 1리(1,800척)를 방으로 규정하데 반하여, 신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소구획을 방이라고 보고 있다. 고구려 평양성의 도시유적에서도 부 밑에 이방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신라의 례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라왕경의 황룡사지 동남편 S1E1방에는 방장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담장은 20∼30cm 크기의 냇돌과 깬돌을 이용하여 80∼140cm 폭으로 량면을 맞추어 정연하게 쌓았으며, 1∼3단 정도만 남아 있었고, 그 사이는 20cm내외 크기의 돌들을 채워 넣었다. 이 방장은 통일신라 중반에 전면적으로 개축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또 동천동 7B/L내 도시유적에서도 방장시설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담장의 기초만 남아 있었으며, 축조방법은 돌로 쌓았고 거의 대부분이 물림쌓기공법을 응용하여 왕경 중심지인 선덕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증축부지에서 보이는 수직쌓기공법으로 된 것과는 차이가 있어, 동천동 방장시설이 시기적으로 늦은 것으로 보인다고 하며, 담장의 하폭은 가장 넓은 것이 95㎝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고구려 평양성의 도시유적에서는 보고된 것이 없어 방장의 상황을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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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리의 명칭과 방장 자료번호 : ispy.d_0001_004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