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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발해 문화유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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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스트여닫기 중국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 지역 중국 요녕성 환인현 지역은 고구려 국가 초기 건국자인 주몽(朱蒙)이 북부여에서 남하하여 근거지로 삼은 졸본(卒本) 지역이다. 여기에 대해서 광개토왕릉비문에는 홀본(忽本),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졸본’이라고 하였으며, 『위서(魏書)』 「고구려전」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되어 있다. 모두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지금의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지목된다. 주몽왕이 비류수(沸流水) 골짜기의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수도를 정한 곳으로, 혼강(渾江)을 끼고 있는 비옥한 충적지대이다.

  • 리스트여닫기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 지역 중국 길림성 집안현 지역은 고구려 유리왕대부터 장수왕대까지 425년간 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지역이다. 이곳에는 수도성으로 존재했던 국내성(國內城)이 있던 지역이며, 고구려 초기부터 전성기까지 수많은 전란을 겪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즉 고구려는 집안 지역에서의 성장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 패권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국내성 시기는 그 발전이 평탄하지만은 않은 시기였다. 동천왕 때는 위나라의 위협에 시달렸고 고국원왕 시기에는 선왕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대비가 납치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수림왕대 국가체제의 재정비를 거쳐 광개토대왕 시기에 이르러서야 정복국가로서 그 위용을 동북아시아에 떨치게 되었다. 국내성이 위치한 현 길림성 집안시 지역에는 약 1만 2천여 기의 고구려 무덤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한국 고대사 연구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의 무덤으로 비정되고 있는 장군총, 고국양왕 혹은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측하고 있는 태왕릉, 미천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는 서대총 등 왕릉급 묘제들이 존재한다.박혁문, 『고구려 발해 역사기행』, 정보와사람, 2007.혼강 유역의 졸본(환인)에서 압록강 유역인 국내(집안)로의 천도는 고구려사의 발전 방향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고구려는 경제·군사적인 측면에서 여건이 좋은 압록강변의 국내로 천도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아울러 대외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였다. 중국 한나라 군현 세력으로부터 보다 멀어짐으로써 국가의 위기를 최소화시키는 한편 압록강 유역을 장악하여 그 주변에 산재해 있던 여러 세력을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가 있었다. 이는 곧 국가체제의 정비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동옥저(東沃沮) 지역을 비롯한 주변의 곡창지대로 진출하기 위한 육로와 수로망을 장악하여 고구려가 태조왕 이후 비약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 리스트여닫기 북한 평양 지역 북한의 평양 지역은 고구려 장수왕대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 멸망 때까지 수도였던 지역이다. 장수왕은 427년에 도읍을 남쪽의 평양으로 옮겼다. 이때 천도한 곳은 대동강 연안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은 고조선 이래 선진문화가 발달해 왔던 지역이기도 하다. 이때의 왕성은 이전의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의 왕성구조를 재현했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즉 평지성과 산성의 양성 구조를 옮겨서 대성산성(大聖山城)과 청암동토성(淸巖洞土城)을 중심으로 하여 왕도(王都)를 구성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는 국내외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4세기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고구려는 인구와 영토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귀족세력 기반을 약화시키고 보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필요성 때문에 새로운 도읍의 건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아울러 장수왕 재위기간 동안의 국제정세는 주변세력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있었는데, 특히 백제, 왜, 신라로 이루어진 고구려의 남쪽 방면에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정치·경제적인 체제의 정비를 가져왔다. 천도 이후 고구려는 한동안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중국의 북위(北魏)는 외교사절 가운데 고구려를 또 남제(南齊)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정치세력으로 인정하였다. 한편 고구려의 천도는 남쪽 백제, 신라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후 475년 장수왕의 한성 함락과 한강유역 장악은 백제의 웅진천도(熊津遷都)로 이어졌고, 이에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평양천도를 통해 강성한 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나 삼국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양상을 맞이하게 되었다.대성산성복원된 대성산성 남문청암동토성 위치도청암동토성 안의 금강사터 건물 주춧돌(ⓒ『조선고적도보』 I)

  • 리스트여닫기 북한 기타 지역

  • 리스트여닫기 대한민국 지역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정복사업을 크게 일으키고 백제를 침공함으로써 한강 유역을 둘러싼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본격화된 것은 광개토왕 다음 왕인 장수왕 때로, 장수왕은 427년(장수왕 15)에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기고 남하정책을 단행하여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장수왕이 군사 3만명으로 침입하여 왕도 한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성문을 빠져 나와 달아나다가 고구려군에게 살해당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왕도 한성은 함락되고 한강 유역은 고구려에게 점령당하였다. 고구려는 이곳에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고 북한성(北漢城)에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여 별도(別都)를 삼아 뒤에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길 때까지 77년간 영토로 삼았다.아차산 일대 보루군(阿且山 一帶 堡壘群) 발굴현장아차산 4보루 온돌 세부 모습이처럼 남평양 일대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의 상징으로, 호로고루성(瓠蘆古壘城)이나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堡壘群) 등 당시의 군사적 상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백제와 고구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례대로 점령하면서 삼국의 유물과 유적이 고루 분포해 삼국시대의 생활상과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 일대가 지닌 위상을 여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