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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전해 준 우리문화

고구려와 일본의 교류

고구려와 일본과의 관련성은 백제 또는 신라, 혹은 가야에 비한다면 다소 관련이 없어 보이는 듯싶다. 이는 고구려와 일본의 물리적 거리가 양국의 교섭에 장애로 작용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구려의 문화가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직접 거기에 가서 실제로 그 시대의 고구려 문화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는 국제 관계의 어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본열도에는 고구려의 유적이나 유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은 곧 고구려와 일본 사이에도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일본 간의 교류는 승려들이 중심이었다. 영양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영양왕 때 일본에 건너간 혜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혜자는 일본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담징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담징은 유교의 5경과 그림을 가르쳤으며, 종이와 먹의 제조 방법까지 전해 주었다. 대표적으로 호류지 금당벽화는 이 담징의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또 영류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영류왕 때에는 혜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혜관과 도징이 일본에 건너가 삼론종을 전하였다.
혜자(惠慈, ?-622)는 595년(영양왕 6) 일본에 건너가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의 사부가 되고, 이듬해 대신(大臣)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세운 호코지(法興寺)가 낙성되자 백제의 승려 혜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혜총과 더불어 그 사찰에 있으면서 포교에 힘쓰다가, 615년 쇼토쿠 태자가 지은 소(疏)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621년(영류왕 4), 쇼토쿠 태자의 부음이 전해지자 재(齋)를 올려 명복을 빌며 이듬해 2월 5일에 자기도 죽으리라 예언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자신도 죽었다. 수의술(獸醫術)에도 능통하여 그 방면으로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담징(曇徵, 579–631)은 일찍 출가하여 스님이 됐는데 불교의 경전에 밝았을 뿐 아니라 그림을 잘 그렸으며 다재다능하였다. 담징이 신라에 머물고 있을 때 이 명성을 들은 일본의 쇼토쿠 태자는 당시 일본에서 제일 큰 호류지의 벽화를 그리기 위해 담징을 모셔 가려고 사람을 보냈다. 백제를 거쳐 일본에 도착한(610) 담징은 스님들에게 불교의 경전을 가르치며 절이 완성되기를 기다렸다. 담징이 그린 호류지 금당벽화는 ‘인류문화사를 빛낸 명화’로 손꼽힐 만하다. 이 그림은 석가·아미타·미륵·약사여래로 구성된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로, 안타깝게도 1948년에 불탔다. 1989년에는 같은 호류지 5층탑 벽화의 덧그림 밑에서 그가 그린 화려한 ‘관음보살상’이 1,300년 만에 발견됐고 지금은 컴퓨터로 재생돼 그의 솜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호류지 금당 벽화
- 진품은 화재로 인해 소실되고 현재는 복원한 벽화가 전시되고 있다.
스이코(推古) 천황 18년(610) 3월에 고구려왕(영양왕)이 승려 담징과 법정(法定)을 바쳐 올렸다. 담징은 오경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림에 능했으며, 종이와 먹을 만들었고 또한 물레방아 맷돌을 만들었다. 
이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 스님이 일본에 종이와 먹, 물레방아, 멧돌 만드는 법을 전하고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유교경전을 가르쳐 일본의 문화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후 일본에서는 담징 스님을 종이와 먹의 시조로 삼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 나라현 아스카의 기토라 고분위치과 다카마스총위치에서 발견된 벽화는 고구려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고분 내에서는 사신도와 천문도 등의 벽화가 발견되었고, 특히 기토라 석실 고분에서 출토된 천문도는 고구려의 영토인 평양성 부근에서 관측된 별자리를 바탕으로 고구려계 화공들이 그린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주 004
각주 004)
KBS 역사스페셜, 「기토라의 고분 고구려의 하늘을 품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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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당시 고구려의 천문 관측기술이 일본에 전래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고구려의 음악(고려악) 에 관한 기록이 서기 684년, 고구려가 멸망한 지 16년 이후에 기록이 나타난다. 이때는 고구려악과 백제, 신라악이 모두 연주되었다고 한다. 그 후, 삼국의 음악은 발해악을 흡수하면서 고려악으로 통일되어 궁중음악인 가가쿠(雅樂)의 한 장르로써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일본의 가가쿠는 제도상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전체적으로 규모도 축소되었다. 현재의 고려악곡이 전래 당시의 양상을 어느 정도 남기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음악적으로 당악과는 다른 고려악만의 특징이 있는데, 그러한 점이 어쩌면 당시의 모습을 어느 정도 나타내고 있는지 모른다. 고려악에는 당악과 구별되는 중요한 관악기로 고마부에(高麗笛)가 사용된다. 이것은 삼국악이 통합되기 이전의 고려악, 즉 고구려악에서 사용되었던 횡적(橫笛)을 가리킨다. 이 악기는 집안 제17호분 벽화에 보이는 횡적과 같은 종류의 고구려 관악기로 7세기 이전부터 고구려음악의 주요 선율악기로 쓰였을 것이다. 이 고구려의 횡적을 일본에서 고려악생이 연주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적이란 의미에서 고마부에(高麗笛)이라고 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서기』 스이코(推古)기 26년(고구려 영류왕, 618년)조에는 수 양제두산백과〉양제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패한 사실과 또 고구려가 북 등의 악기와 큰 활(화살 돌을 연달아 쏠 수 있는 무기)·대포 등을 일본에 선물로 주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고구려 음악은 대개 춤을 위한 반주곡으로 쓰였고, 고구려 춤은 일본에서 4인무(신토리소, 시키테), 6인무(고토리소) 등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 왕릉의 벽화로 확인된 것만 봐도 독무·쌍무·군무·탈춤·북춤·칼춤·창춤 등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고구려 춤의 특징은 부드러운 동작도 가미되어 있지만, 대체적으로 씩씩한 상무(尙武: 무를 숭상함) 정신이 넘치는 세로 춤꾼들이 칼·창·북 등을 들고 있어 전투적 기상이 강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카마쓰 고분(高松塚古墳) 고분 전경
다카마쓰 고분(高松塚古墳) 고분 전시관 입구
일본 다카마쓰 고분 벽화

  • 각주 004)
    KBS 역사스페셜, 「기토라의 고분 고구려의 하늘을 품다」, 2010.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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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일본의 교류 자료번호 : iskj.d_0003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