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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성

비아랍성(費阿拉城)

신빈현(新賓縣) 영릉진(永陵鎭) 이도하자촌(二道河子村) 동남쪽에자리잡고있다. ‘구로성(舊老城)’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들어서 비아랍성이라는 만족식(滿族式) 명칭으로 바뀌었다. 이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소자하(蘇子河)를 따라 평지가 펼쳐져 있으며, 환인과 심양으로 연결되는 도로들이 지나고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다. 요동지방을 두고 고구려와 대결하였던 중국 측은 이곳에 현도군(玄菟郡)을 두어 전진기지로 삼고자 하였다. 이 제2현도군을 무순 방면으로 몰아낸 고구려가 이 지역을 관장하기 위해 쌓은 성이 구로성이었다. 최근 이 성을 남소성(南蘇城)으로 보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다.
해발 375m의 최고봉을 중심으로 이어진 5개 봉우리를 남쪽에 두고, 북쪽으로는 두 개의 골짜기를 품고 있어 전체 둘레가 5,660m에 이르는 대형 산성이다. 외성(外城)과 내성(內城)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벽은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성토하여 축조하였다. 일부 구간에서는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기도 하였다. 외성에는 5곳, 내성에는 6곳의 성문이 만들어졌는데, 외성의 북동과 서남벽 그리고 내성의 성문 모두에서 옹문을 확인할 수 있다. 성문 부근의 성벽을 안쪽으로 비스듬히 쌓은 다음 좀 더 들어온 곳에 문을 설치한 것이다. 또한 외성과 내성 사이에는 동북-서남방향의 성벽이 별도로 세워져 있어 차단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중성(中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누루하치가 이 성을 다시 활용하여 본거지로 삼았는데, 이곳을 방문한 조선사신 신충일(申忠一)이 남긴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 당시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현재 내성 서북쪽에 남아 있는 ‘한왕대(汗王臺)’라는 건물터가 이와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이밖에도 영릉진의 동남쪽, 농토 한가운데에는 토성이 하나 남아 있다. 영릉남고성(永陵南古城)이라 부른다. 본래는 제2현도군의 치소였지만, 군현이 쫓겨나간 뒤에는 고구려의 평지성으로 활용되었다. 영릉남고성에서 보아 서쪽, 연돌산(烟突山) 줄기의 끝자락에는 각이찰성(覺爾察城)이 자리잡고 있다.
비아랍성의 전경(북→남)
외성의 바깥 성벽
비아랍성 단면도
외성 북벽의 동북문터
성 안에서 바라본 외성 동북문터
외성 안의 전경
내성의 동북문터
내성의 성벽
내성 동북문의 서쪽 구간
성벽의 축조 방식Ⅰ
성벽의 축조 방식Ⅱ
성벽의 축조 방식Ⅲ
외성에서 바라본 내성 성벽
성 내부와 영릉진 일대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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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랍성(費阿拉城) 자료번호 : iskc.d_0004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