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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성

국내성(國內城)

압록강 유역에서 가장 너른 평야인 통구通溝 분지 서부, 현 집안시에 자리잡고 있다. 국내성의 북쪽과 서쪽 산기슭에는 12,000여 기를 헤아리는 돌무지무덤과 돌방흙무덤이 펼쳐져 있고, 동편으로는 저 유명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국내성은 평원에 자리잡은 평지성으로 다듬은 쐐기형 돌로 성벽의 안팎을 축조하였다. 평면의 형태는 네모꼴로 둘레 길이가 2,686m에 이른다. 최근의 복원 공사로 인해 성벽의 전모가 잘 드러나 있다. 전체적으로는 북벽이 가장 잘 남아있고, 남벽의 서쪽 부분도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성벽의 축조방식은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안으로 물리면서 쌓아올렸는데, 북벽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다만 국내성은 고구려 이후 청(淸)나라와 민국(民國) 시기에 현성(縣城)으로 재사용되어, 남아 있는 성벽을 모두 고구려의 것이라 볼 수는 없다. 특히 성돌을 가지런히 쌓아올렸고 성돌 간의 틈새가 균일하며 넓적한 면이 바깥으로 튀어나온 부분은 고구려 시기의 축성구간이지만, 성돌의 크기가 일정치 않거나 쌓아올린 층이 정연하지 않으며 틈새를 작은 돌로 메운 곳은 후대에 개축한 부분으로 보아 틀림없다.
국내성에는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해자를 둘렀다. 북벽과 동벽 바깥에는 폭 10m 전후의 해자가 마련되어 있었고, 서와 남쪽으로는 성의 동북에서 서남으로 흘러가는 압록강과 성의 서쪽으로 지나는 통구하를 천연의 해자로 활용하였다.
성문은 남벽과 북벽에 각각 한 곳, 동벽과 서벽에 각각 2곳이 있었다. 북문에서 남문으로 연결되는 현재의 동성가(東盛街), 동서를 가로지르는 단결대로(團結大路)와 승리대로(勝利大路)는 고구려 시대 이래의 옛 도로에서 유래한 것으로 도로 양끝의 성문터도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각 성벽 구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도읍으로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만큼 성 안의 여러 구역에서는 당시의 각종 건물터들이 발견된 바 있다. 또한 ‘태녕4년(太寧四年)(325)’의 연대가 기록된 명문기와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물들이 나오고 있다.
한편 국내성 북쪽 2.5km의 거리에는 환도성(丸都城)이 자리잡고 있다. 평상시의 왕성으로 국내성에 거주하다가, 유사시의 방어용 거점으로 산성을 활용하던 고구려 도성제의 특징이 여기에서도 확인된다.
국내성 서벽의 북쪽 구간
국내성 단면도
태왕릉에서 바라본 용산(龍山) 아래의 전경. 전각이 세워진 광개토왕릉비의 뒷편, 서북쪽으로 장군총이 보인다.
칠성산에서 본 집안시의 북쪽 시가지
국내성 서벽 남쪽과 치
북문터와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로
국내성 서벽의 배수구
국내성 남벽
북벽 석축의 예전 모습(1997)
북벽 안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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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성(國內城) 자료번호 : iskc.d_0002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