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일본의 산업유산, 왜곡의 현장과 은폐된 진실

5-1-3 고등교과서

고등학교 일본사 (A)4종, (B)4종
 
2016·2017년 3월 검정 통과, *2017·2018년부터 사용
*메이세이샤 明成社 일본사B 2012년 검정 통과 2013년부터 사용
 
'황민화'정책
일본사A
약 70만 명의 조선 사람들이 조선총독부의 행정기관이나 경찰의 압박 하에 일본 본토로 강제 연행되어, 가혹한 조건에서 위험한 작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전쟁말기에는 징병제도 실시되었고 또 많은 여성이 정신대로 모집되었다. 타이완에서도 황민봉공회가 결성되어 징병제가 도입되었다.
 
일본의 식민지와 점령지에서는 조선인과 중국인ㆍ필리핀인ㆍ베트남인ㆍ네덜란드인ㆍ일본인 등 다수의 여성이 위안부로서 전쟁 지역으로 보내졌다. 위안소는 중국ㆍ홍콩ㆍ싱가포르ㆍ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본의 오키나와 제도ㆍ홋카이도ㆍ가라후토(사할린) 등에까지 미쳤다.
- 『일본사A-현대로부터의 역사』, 도쿄서적東京書籍, 132~133쪽
국민생활의 붕괴
일본사A
또한 수십만 명의 조선인과 점령지역의 중국인 등을 일본 본토 등으로 강제 연행하여 광산과 토목공사 현장 등에서 일을 시켰다. 1)
 
1) 조선에서는 1943(쇼와 18)년, 타이완에서는 1944년에 징병제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미 1938(쇼와13)년에 지원병제도가 도입되었고 식민지에서도 병사를 모집하였다. 또한 전쟁 지역에 설치된 ‘위안시설’에는 조선ㆍ중국ㆍ필리핀 등에서 여성이 모집되었다(이른바 종군위안부).
- 『일본사A(개정판)』, 야마카와출판사山川出版社, 166쪽
 
‘황민화’정책과 강제연행
일본사A
일본 정부는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약 80만 명의 조선인을 일본 내지나 가라후토(사할린)의 군수공장이나 탄광 등에 강제로 연행했다. 또한 중국인도 강제 연행되었다.
 
식민지 주민을 전장에 동원하기 위해서 조선에서는 1938년부터 타이완에서는 1942년부터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었다. 지원병으로서 출병하는 것은 ‘명예’이며, 식민지인들이 일본 군인이 되는 것은 ‘훌륭한 일본인’이 되는 지름길이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게다가 징병제가 조선(1943년), 타이완(1944년)에서도 시행되어 많은 식민지 주민이 강제적으로 전장에 보내졌다.

또 조선과 타이완,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네덜란드 등의 다수의 여성이 일본군의 관리 하에서 병사의 성(性) 상대를 하는 ‘위안부’로 전쟁터에 보내졌다.
 
* 강제 연행·강제 노동
조선에서는 1939년부터 집단 모집이 시작되고 1942년에 관 알선, 1944년에는 국민징용령에 의해 많은 조선인이 내지·가라후토(사할린) 등으로 연행되었다. 또한 1942년의 도조 내각의 각의 결정으로 약 4만 명의 중국인도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 『신일본사A(신정판)』, 짓교출판實敎出版, 104~105쪽
대동아공영권의 실태
일본군의 병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지원병제도를 만들고, 더욱이 지원병제를 실시했다.(중략)
 
국민징용령을 적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탄광 등으로 강제 연행했다.6)(중략)
 
식민지와 점령지에서는 일본군도 설치와 감리에 관여한 위안소에 조선인을 중심으로 중국인ㆍ인도네시아인ㆍ필리핀인ㆍ네덜란드인 등 다수의 여성을 일본군 병사의 성(性) 상대인 위안부로 동원했다.
 
6)노동력 부족을 채우기 위해 1939년부터는 집단모집으로, 42년부터는 관알선으로, 44년부터는 국민징용령에 의해 약 80만 명의 조선인들을 일본 내지와 가라후토(사할린)ㆍ아시아ㆍ태평양 지역 등에 강제 연행하였다. 또 같은 기간에 415만 명의 조선인들을 조선내의 광산과 공장에, 11만 명을 군대 내의 노무요원으로 강제 연행하였다. 게다가 약 4만 명의 중국인도 일본으로 강제 연행하였다. 지나치게 가혹한 노동 속에서 많은 사망자가 나왔고 하키타 현에서는 중국인의 봉기도 일어나 약 42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하나오카 사건).
- 『고교일본사A(신정판)』, 짓교출판實敎出版, 125쪽
 
국민생활의 궁핍
일본사B
병력과 노동력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 1943년에는 조선에, 1945년에는 타이완에도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또한 국민징용령으로 조선과 타이완에서 또한 중국의 점령지로부터도 많은 사람들이 노동력으로서 일본으로 연행되었다.1) 이런 사람들은 일본의 군수공장이나 광산 등에서 가혹한 노동조건 하에서 노역 당했고, 힘든 생활 속에서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1) 징용령의 실시에 앞서 1942년 이래 집단적으로 데려올 수 있던 조선인은 약 70만 명이라고 한다. 또한 위안부로 전쟁지역에 보내진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도 적지 않았다.
- 『신선일본사B』, 도쿄서적東京書籍, 228쪽
 
국민생활의 붕괴
일본사B
또 수십만 명의 조선인과 점령지역의 중국인을 일본 본토 등에 강제 연행하고 광산과 토목공사 현장 등에서 노역 시켰다. 2)
 
2) 조선에서는 1943년, 타이완에서는 1944년에 징병제가 시행되었다. 하지만 이미 1938년에 지원병제도가 도입되어 식민지에서도 병사를 모집하였다. 또 전쟁지역에 설치된 ‘위안시설’에는 조선ㆍ중국ㆍ필리핀 등에서 여성이 모집되었다(이른바 종군위안부)
- 『상설일본사B(개정판)』, 야마카와출판사山川出版社, 365쪽
 
전쟁 국면의 전환과 점령지 지배 실태
일본사B
4) 또한 아시아ㆍ태평양전쟁 하에서 일본 본토에 연행되어 강제노동을 당한 중국인은 약 4만 명으로 그 중 7,000명이 사망했다. 또 1945년 6월 아키타현 하나오카 광산에서 혹사를 견디지 못한 중국인 노동자가 봉기했는데, 잔혹하게 진압 당했다(하나오카 사건).
- 『일본사B(신정판)』, 짓교출판實敎出版, 317쪽
 
군인(군속)의 동원과 강제 연행
일본사B
아시아·태평양전쟁 하에 일본은 식민지 사람들을 군인이나 노동자로서 동원하고 물자를 수탈했다. 1943년 3월, 조선에서 징병제가 시행되었고 다음 해부터 징병 검사가 시작되었다. 패전까지 약 11만 6,000명이 군인으로서 징집되었고 이외에 약 12만 6,000명이 군속으로서 일본군에 징용되었다. 그들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억지로 가담하여 5만 명 이상이 전사했다. (중략)
 
조선인의 일본으로의 도항은 1920년대 후반부터 늘어나고 있었지만 1939년 7월 이후 모집 형식으로 연행이 시작되었고, 1942년 3월부터는 관 알선에 의해 명실상부하게 강제 연행이 시작되었다. 1944년 7월에는 국민징용령의 개정이 공포되어 일본의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이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었다. 그 수는 전체 약 80만 명에 달했다. 또한 1944년 이후 수천 명의 조선인 여성이 근로정신대로 일본의 공장에 보내졌다. 더욱이 다수의 여성이 일본군 병사의 성(性)을 상대하는 위안부가 되어 중국, 필리핀, 인도네아시아 등의 전선과 오키나와 등으로 연행되었다.
- 『일본사B(신정판)』, 짓교출판實敎出版, 323쪽
 
동원과 봉사
일본사B
국내에서도 노동력 부족이 심각한 광산과 토목 건축업에서는 다수의 조선인과 더불어 점령지역의 중국인도 강제 연행해 혹사시켰다. 1)
 
1) 패전까지 조선인은 약 80만, 중국인은 약 4만의 사람들이 일본에 연행되었다. 1945년 6월에는 아키타현 하나오카 광산에서 강제 연행된 중국인 약 900명이 봉기하여 420명 학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 『고등학교 일본사B(신정판)』, 시미즈서원淸水書院, 228쪽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5-1-3 고등교과서 자료번호 : isjs.d_0005_0010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