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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산업유산, 왜곡의 현장과 은폐된 진실

2-2 일본 산업유산 속 강제노동 역사

2-2-1 야하타제철소
야하타제철소는 일본 최대 철강회사였습니다. 일본은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든 청일전쟁 배상금으로 이 제철소를 지었습니다. 당시 청이 지불한 배상금 2억 량은 일본의 4년치 국가예산과 맞먹는 큰 금액입니다. 일본은 그 가운데 80%를 군사력 확충에 쏟아 부었고, 나머지 20%를 관영 야하타제철소 건설과 철도, 전신·전화 사업에 썼습니다. 야하타제철소는 일본의 “산업혁명”이 주변국을 침략한 전쟁으로 성공한 근대화였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야하타제철소의 성장을 떠받친 노동자의 생활은 열악했습니다. 1차 세계대전 후 세계에서 민주주의, 인권과 평화 의식이 높아지면서 야하타 노동자들도 권리 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1919년 이후 노동자들의 파업은 계속되었고, 노동조합도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침략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노동운동을 억압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전쟁 수행을 위해 ‘산업보국회’를 만들고, 노동자와 자본가가 일치단결하여 전쟁 협력의 길로 나가도록 압박했습니다. 노동현장에서는 노동자의 인권과 권리 대신 ‘산업전사’들에 의한 ‘근로보국’의 구호가 외쳐졌습니다.
 
1934년 일본 정부는 거대 독점기업인 일본제철을 설립했고, 야하타제철소는 일본제철 산하 제철소가 되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철강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일본제철은 증산 태세를 갖추고 그곳에 많은 한국인들을 강제동원 했습니다. 또한 중국인과 연합군 포로도 강제노동에 투입했습니다.
 
세계유산이 된 야하타제철소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청일전쟁 배상금에 의한 건설, 조선과 중국에서의 자원 수탈, 노동자의 역사, 그리고 강제노동의 역사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러한 역사를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야하타제철소 옛 본사무소(2017.9. 촬영,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2-2-2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
개항 당시 에도막부는 네덜란드의 지도를 받아 일본 최초의 함선수리공장 나가사키용철소(熔鐵所, 1857)를 설립했습니다. 이것을 메이지 정부가 관영 나가사키 조선국(造船局)으로 운영하다가 1884년부터는 미쓰비시가 나가사키조선소로 이름을 바꾸어 위탁 경영하고 1887년에 불하받았습니다. 그 후 미쓰비시는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을 이용해 해운, 석탄, 조선업으로 이익을 올리면서 ‘재벌’로 성장했습니다.
 
1934년에 설립된 미쓰비시중공업(주)은 군함과 항공기 생산을 담당하는 일본 최대의 군수기업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조선업의 거점이 나가사키조선소였습니다. 중국·동남아시아·태평양으로 전쟁이 확대되자 미쓰비시는 아시아 각지에서 자원을 수탈하였고, 현지 민중을 혹사시켰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에는 약 6,000여 명의 한국인이 강제동원 되었고, 연합군 포로도 동원되었습니다.
 
메이지 시대부터 원폭이 투하된 날까지 나가사키는 무기 생산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지금도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에서는 해상 자위대의 이지스 함 등 군수물자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나가사키조선소 제3도크(2018.6. 촬영,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2-2-3 미쓰비시 다카시마·하시마탄광
다카시마탄광에서는 다카시마와 하시마 두 섬이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의 구성 자산입니다. 그런데 ‘산업혁명 유산’ 시기를 1910년까지로 제한했기 때문에 다카시마에서는 홋케이정갱(北渓井坑) 터, 하시마에서는 메이지시기 수직갱(竪坑) 터와 해안 방파제 유구(遺構)만이 세계유산에 해당합니다. 다카시마도 하시마도 섬 전체가 ‘산업혁명 유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카시마탄광은 바다 밑 지하에 갱도를 개발한 해저탄광입니다. 18세기 초부터 석탄이 채굴되었는데, 1868년 사가번(佐賀藩)과 함께 다카시마탄광을 경영했던 글로버상회가 서양식 채탄기술을 도입하면서 다카시마탄광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1874년에 관영(官營)이 된 다카시마탄광은 죄수들을 동원해 채굴했습니다. 1881년에 미쓰비시가 다카시마탄광을 인수했고, 1890년 하시마까지 사들였습니다.
 
다카시마탄광에서는 많은 노동자들이 죽었습니다. 미쓰비시가 경영하기 시작한 뒤 패전까지 산업재해나 병으로 사망한 노동자가 1,000명을 넘을 정도였습니다. 형편없는 위생 상태에다 작업 중 사고, 노동자 폭행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카시마탄광은 1880년대 이미 노동자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폭력적인 노무관리 속에도 노동자들은 저항의식이 생겨 1897년에 다카시마와 하시마에서 파업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보수중인 다카시마 홋케이정갱 유적(2019.10 촬영,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하시마는 군함처럼 보인다고 하여 일명 ‘군함도’로 불립니다. 하시마도 바다 속 곳곳에 갱도가 펼쳐져 있습니다. 1887년 사가번이 제1수직갱을 파기 시작했고, 1890년부터 미쓰비시가 탄광 경영을 맡았습니다. 탄광 시설 확충과 함께 하시마의 매립과 해안 방파제 공사가 진행되었습니다. 하시마의 석탄은 야하타제철소의 제철용 원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1939년부터 다카시마탄광(다카시마·하시마)에는 4,000명 정도의 한국인이 강제동원 되었습니다. 하시마에 강제동원 된 한국인들은 북향 4층 건물 등에 수용되었습니다. 강제동원 생존자는 “너무 힘들어 섬을 나가려고 신체 절단까지 생각했다”고 증언했습니다. 탈출은 어려웠고, 끌려간 이들에게 하시마는 쇠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지옥섬’, 공포의 노동 현장이었습니다. 다카시마탄광(다카시마·하시마)은 중국인 강제노동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2-2-4 미쓰이 미이케탄광
미이케탄광은 일본 최대의 탄광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미이케탄광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죄수를 이용하여 운반, 채굴을 했습니다. 1883년 미이케탄광 전용 감옥이 설치되었고, 죄수들은 노예와 다름없었습니다. 1889년부터 미이케탄광을 인수하여 운영한 미쓰이는 1931년까지 죄수노동을 계속했습니다. 미쓰이는 일본 정부 정책에 적극 협조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1차 세계대전, 1930년대 이후 침략전쟁 등 전쟁을 통해 경영 규모를 확대했습니다. 주요 광구는 만다갱(万田坑), 미야우라갱(宮浦坑), 요쓰야마갱(四山坑), 미카와갱(三川坑) 등 입니다.
미이케탄광 만다갱(2017.9. 촬영,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20세기에 들어서자 미이케탄광에서는 일반 노동자가 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친 후 노동자들의 권리의식도 높아졌습니다. 1918년 쌀소동 당시 미이케탄광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습니다. 만다갱을 중심으로 파업이 확대되자 군대가 출동해 탄압했습니다. 1924년에는 미이케제작소, 미이케염료, 요쓰야마갱, 만다갱, 미야노우라갱 등 미이케에 있던 노동자 19,000명 중 6,800명이 파업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미쓰이는 이 파업을 진압한 뒤 노동자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습니다.
 
탄광은 노동 강도와 사망률이 높은 작업장이었습니다. 1939∼1945년 일본 본토에 끌려간 한국인의 약 40%가 탄광에 배치되었습니다. 미이케탄광에 강제동원 된 한국인은 9,000명을 넘습니다. 미이케탄광은 수많은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가 강제동원 된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미이케 관련 회사인 미이케염료, 전기화학공업 오무타공장, 도요고압공업(東洋高圧工業) 오무타공업소 등에도 한국인이 동원되었습니다. 전기화학공업 오무타공장에는 연합군 포로도 동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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