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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산업유산, 왜곡의 현장과 은폐된 진실

2-1 전쟁과 산업화, 그리고 일본의 산업유산

2-1-1 일본 근대화의 출발
일본은 19세기 중반 메이지유신을 통해 막부와 번이 통치하던 정치체제 대신 새로운 중앙집권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안으로는 식산흥업과 부국강병의 슬로건을 내세운 근대화를 추진하는 한편, 밖으로는 류큐, 타이완, 대한제국을 침략했습니다.
 
일본의 ‘산업혁명’은 청일전쟁, 러일전쟁과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일본은 청나라에게 배상금을 받아 금본위체제를 확립했으며 야하타제철소를 건설했습니다. 일본의 산업유산은 비서구권에서 최초로 성공한 산업혁명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850년대부터 1910년에 이르는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은 근대화의 성공이라는 메이지의 밝은 면뿐만이 아니라 아시아를 향한 침략의 어두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또한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산업유산 가운데 주목해야 할 유산이 있습니다. 야마구치 현 하기시에 있는 쇼카손주쿠(松下村塾)입니다. 이곳은 일본의 군비 확장과 대외침략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주재했던 사설학당입니다. 그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메이지 정부 안에서 ‘정한론’이라는 조선침략론이 등장했습니다. 정한론은 이웃 국가를 침략하는 전쟁론으로 운요호사건, 청일·러일전쟁, 한반도의 강제점령으로 현실화했습니다.
 
2-1-2 강제동원·강제노동의 역사
일본은 1931년 만주침략에 이어 1937년 중국 본토를 전면적으로 공격하는 침략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일본은 한국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황국신민화정책을 추진했고, 사람과 물자를 총동원하기 위한 체제를 강화해 갔습니다. 1938년 5월 식민지 조선에서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고 1939년 10월부터 「국민징용령」을 시행했습니다. ‘총력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일본인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한반도에서도 동원계획이 세워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광업, 토목건설 등에 ‘모집’ 방식으로 노무동원을 시작했습니다. 모집이었지만 지역별로 모집인원을 할당하고 행정력을 이용해서 강제했습니다. 1940년부터는 군수산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을 징용하여, 그 현장에서 이동할 수 없도록 하는 ‘현원징용’이 시행되었습니다. 1942년 2월부터는 노골적으로 조선총독부가 지방 행정기관과 경찰 등 공권력을 활용하여 ‘알선’하고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노무협회를 이용하여 동원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계획한 인원을 채울 수 없는 경우가 많아지자 1944년 8월부터는 ‘징용령’에 근거하여 청장년들에게 법적인 의무를 지워 무차별 노무동원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집’, ‘관알선’, ‘징용’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동원이 강제되었고 때로는 동시에 병행되기도 했습니다. 강제동원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위한 국책의 요구에 따라 시행된 것입니다. 기업은 식민지 현지에서 직접 동원 과정에 관여했고, 그러한 동원은 지원 강요, 사기, 폭력이 수반된 것이었으며, 당연히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불법노동이었습니다.
 
일본으로 동원된 한국인 노무자 수는 약 80만 명입니다. 이들은 일본 각지의 탄광, 광산, 토목공사현장, 군수공장, 항만 등으로 끌려가 폭력적 감시 아래에서 행동의 자유도 없이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생활을 강요당했습니다. 가혹하고 열악한 환경 아래에서 일하며 심각한 민족차별을 받았습니다. 배고픔에 시달렸고, 또 계약기간이 만료되어도 귀국이 허락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일본이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 가운데 후쿠오카 현의 일본제철 야하타제철소, 나가사키 현 소재 미쓰비시중공업(주) 나가사키조선소, 다카시마탄광, 하시마탄광, 후쿠오카 현과 구마모토 현에 걸친 미이케탄광 등 5곳 7개 관계시설은 한국인 강제동원·강제노동의 현장입니다.
 
2-1-3 중국인, 연합군 포로의 강제노동
일본이 세계유산으로 등재시킨 일본의 산업유산 시설 가운데 야하타제철소, 나가사키조선소, 다카시마탄광, 하시마탄광, 미이케탄광 등 관계시설은 중국인, 연합군 포로가 강제동원 되어 노동을 강요당한 현장이기도 합니다.
 
일본은 침략전쟁의 장기화와 확대로 부족해진 노동력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강제동원 했습니다. 일본은 중국인을 포로로 취급하지 않고 ‘공출’이나 ‘모집’의 형태로 계약을 위조해 연행하였습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일본이 점령한 만주에서는 수백만 명의 중국인이 연행되었습니다. 각 지역에 있는 수많은 노동자의 유해가 매장된 ‘만인갱’은 노동의 혹독함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일본이 동남아시아, 태평양 각지에서 포로로 삼은 연합군 관계자는 35만 명이나 되며, 이 중 유럽과 미국인 포로가 약 15만 명이었습니다. 이들 연합군 포로들은 태면철도 건설을 비롯해 아시아 각지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일본 국내로는 유럽과 미국인 포로 약 36,000명이 연행되었습니다. 일본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으며, 강제노동 현장은 약 130개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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