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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한자 : 伊藤博文, 이명 : 利助, 春畝, 滄浪閣主人, 시호 : 春畝公

 
  • 저필자박광석(성균관대 교수)
  • 생몰년 생년 : 1841년 10월 16일 ~ 몰년 : 1909년 10월 26일
  • 발행일2010년 8월 25일
  • 분류정치가
 

이토 히로부미, 조선 침략이 포함된 ‘근대 일본’의 설계자

 

올해는 일본에 의한 한국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해로 한국병합의 기반을 마련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1907년 헤이그사건 이후 ‘정미7조약’을 강요하고 고종을 퇴위시키는 등 일본정부를 대표해 한국침략을 진두지휘하다 안중근에 의해 사살당한 ‘침략의 원흉’으로 기억되고 있다. 반면 일본에서는 당대 최고의 정치적 실력자라는 막연한 인식만이 퍼져 있을 뿐 구체적인 사실에 대한 파악은 도외시되고 있다. 이글에서는 이토가 정치적으로 어떻게 성장했으며 일본근대사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 지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토 히로부미는 농민 출신에서 수상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무사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이토라는 성을 쓰고 무사신분을 얻어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조슈번(長州藩) 출신이라는 점도 이토가 출세하는데 유리한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번벌(藩閥)이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그가 젊은 나이에 고위 관료가 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에도막부 말기 이토는 존황양이론(尊皇攘夷論)에 경도되어 친막부적 국학자를 암살하거나 영국공사관에 방화하는 등 테러리스트로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한 데는 주선가(周旋家, 협상가)로서의 기질이 크게 작용했다. 1871년의 폐번치현(廢藩置縣) 과정, 1873년의 ‘정한론(征韓論)’정변과 1875년의 오사카(大阪)회의 등에서 이토는 각 세력의 의견을 조정하며 자파에 유리하게 일을 성사시켜 유력자들의 신임을 얻었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와 ‘침략의 원흉’사이

 

이토는 정치가로서 추진력과 유연성을 겸비하고 있었다. 1881년 정변에서 오랫동안 뜻을 같이 하며 개혁을 추진해온 동료 오쿠마 시게노부(大重信)를 과감하게 축출하고 사쓰마-조슈 번벌정권을 규합하였고, 1887년 민권파의 지도자인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가 민권론의 입장에서 백작작위를 거부하자 천황의 권력까지 동원하며 집요하게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켜 이타가키를 굴복시켰다. 또한 한국침략과 관련해 회유와 협박을 통해 강경한 방식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자신과 생각이 다르더라도 필요할 경우 반대파와 타협하거나 능력 있는 인물을 발탁해 활용하는데도 능했다. 1880년을 전후해 활발히 전개된 자유민권운동의 국회개설 요구에 정면으로 대응해 국회개설조칙을 반포하게 했으며, 1890년대 실시된 입헌정치가 정당과 정부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자 정당내각제를 부정하는 ‘초연주의(超然主義)’를 포기하고 정당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주었으며, 1900년에는 자신이 직접 입헌정우회라는 정당을 만들어 그를 바탕으로 내각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치자세의 배경에는 자신의 능력과 식견에 대한 자신감이 깔려있었다. 일찍이 1863년 22세 때 영국으로 가 서양학문을 습득했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미국으로 파견되어 화폐제도, 은행제도를 조사해 귀국 후 일본의 금융제도를 정비했으며, 1882년에는 정부 최고지도자의 지위에 있으면서 입헌제도조사를 위해 직접 유럽에 장기간 체류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근대국가체제 수립을 위한 풍부한 서양 지식을 흡수했고 그 지식을 자산으로 삼아 다른 관료들을 압도하며 지도자의 위치를 굳혀나갔다. 특히 영어실력이 뛰어나 많은 해외서적을 섭렵했을 뿐 아니라 해외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며 국제정세도 민첩하게 파악했다고 한다.
이토는 40년 가까이 일본정부의 핵심에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쌓았다. 그 중에서 ‘근대일본의 설계자’라고 불리게 된 가장 큰 업적은 헌법을 비롯한 일본의 근대국가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1884년 독일과 영국의 귀족제를 모방하여 화족제를 개혁하고 작위제를 실시했다. 천황에게 충성하는 보수적인 정치세력을 조성해 안정적인 정치운영을 하려는 것이었다. 1885년 태정관제를 개혁해 근대적 내각제도를 수립하였으며 1888년 천황의 자문기관인 추밀원을 설치하였다.

 

 민중 억누른 근대개혁의 한계, 군부 독주로 귀결

 

또한 헌법제정과정을 주도했다. 1888년부터 시작된 추밀원의 헌법심의에서 이토는 자신의 헌법구상을 관철시키는 한편 이토는 천황제를 국가체제의 중심에 편입시켰다. 헌법상 국가의 대권을 천황에게 집중시키고 정치적 위기 시에는 천황의 조칙을 이용하는 등 천황을 정권의 보호막으로 삼았다. 19세기 말 이후 교육칙어, 국가신도와 결합되어 천황제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데 그 기틀을 마련한 것은 이토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과정에 이토가 끼친 영향은 다대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토의 업적이 반드시 긍정적 평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행한 많은 근대적 개혁은 민중을 억누르고 지배층 위주로 진행되었으며, 정교하게 만들어진 ‘제국헌법체제’가 정치적 민주화를 가로막고 1930년대 이후 군부의 독주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대외정책의 측면에서 이토는 팽창주의자 또는 ‘대국주의자’로 분류할 수 있다. 1873년의 ‘정한론’정변에서 ‘내치파’에 속했지만 대외팽창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으며 1874~75년의 타이완침공과 강화도사건에서도 정부의 방침을 추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관련해 1884년의 갑신정변과 1895년의 명성황후시해사건에 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국과 싸운 청일전쟁은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 외상과 함께 직접 도발한 것이었다. 20세기 초 이토는 대러시아 외교에서 ‘문치파’로 불리며 전쟁 보다는 협상을 우선시하는 측면을 보였지만 대륙으로 팽창하려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노선을 기본적으로 지지하였으며, 통감으로서 한국의 식민지배의 실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토는 뛰어난 식견과 정치력으로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으나, 일본의 국익을 최우선의 가치관으로 삼고 주변 약소국에 피해를 강요한 국가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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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히로부미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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