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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시간의 기억

일본군 위안부 동원사례

 
손기자 :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 경기도 광주에 있었군요.
윤선생 :
그래요. 여기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가 있어요.
이곳이 세계 최초의 성노예 주제 인권박물관이거든요. 영면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추모비가 있기도 해요.


손기자 :
헌화하고 싶으셨군요.
윤선생 :
그래요. 오랜만에…
윤선생 :
삼가 명복을 빕니다.
손기자 :
명복을 빕니다.
윤선생 :
이제 일본대사관 앞에 세운 소녀상을 보러 가지요.
운전하면서 녹음할 수 있죠?
손기자 :
네, 그럼요!
윤선생 :
가면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어떻게 동원되었는지 들려줄게요.


윤선생 :
현재 발견된 자료들을 보면 일본군 위안부의 동원방식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전후로 하여 변했어요.
그 이전까지는 동원명령은 내리되 동원과정에서는 일본군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도록 조치했었는데 태평양전쟁 발발 후 전선이 넓어지고 전황이 긴박해지면서 위안부의 동원방식이 조금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바뀐 거예요.
하지만 증거가 드러나지 않도록 일본인 ‘업자’들은
힘들지 않게, 쉽게 돈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면서 일하러 갈 여성들을 모집했어요.
박영심의 증언에 따르면…
17세에 빈곤한 가정형편에 평양의 양품점에서 식모로 일하던 중, 돈벌이가 있다는 그 업자의 말에 속아 중국 난징의 위안소로 갔어요.
‘제4차위안단’의 700여 명 중 한 명이 된 것이었지요.
버마의 라시오를 거쳐 중국 라멍의 위안소로 가자 그곳엔 이미 위안소 두 채가 있었대요. 그곳에서 성병 검진을 받는 굴욕을 당해야 했고요.
그 뒤 1955년에 중국군에게 발견되기까지,
같이 끌려갔던 위안부들은 폭격에 죽고, 맞아 죽고, 병 걸려 죽었다고 해요.
돈벌이가 있다는 업자의 말에 속아서 상상도 할 수 없는 폭행을 당하고
가족의 우편물도 받아보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죽어 돌아오지 못한 거지요.


윤선생 :
손기자도 이 지도를 본 적이 있을 거예요.
손기자 :
네… 일본군 위안소 지도네요.
윤선생 :
이 지도는 피해여성과 구 일본군 병사·군 관계자, 현지인들의 증언과 공문서, 군 관계 자료, 군부대 기록물, 전쟁기록, 서적과 재판자료 등 간행물을 근거로 일본군이 설치했던 위안소가 있었던 지점을 표시한 거예요.
위안소 지도를 보면 일본군이 침략, 점령한 방대한 지역에서 위안소를 설치하여 얼마나 많은 여성들을 성노예로 만들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손기자 :
돌아오지 못한 여성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요?
윤선생 :
평화롭게 쉬길…
손기자 :
교수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윤선생 :
그러고 보니 교수직에서 물러난 게 오래 전인데 아직도 교수라 불리니 옛날에 일본군 위안부 강연을 하고 수요집회도 했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손기자 :
저도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었잖아요.
교수님, 제겐 교수님은 제가 이 일에 관심을 갖게 하신 스승이자 영원한 교수님이세요.
윤선생 :
나도 손기자가 자랑스러워요. 계속 취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세요.
손기자 :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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