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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멸망과 부흥운동

발해의 멸망과 부흥운동
▶ 발해가 거란의 요에게 멸망당하였으니 발해사는 중국사다. ▶ 옛 발해의 영토 여기저기에서 부흥운동이 이어졌으며, 발해 유민의 고려 이주가 200년간 지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발해 유민을 수용한 고려는 발해 계승의식을 보여주었다.
중국학자들은 발해가 요(遼)에 망한 뒤, 유민 대부분이 요의 백성으로 살아갔고 고려(高麗)로 들어간 이들은 소수였다는 점을 들어 발해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한다. 발해가 요에게 망하였고 거란의 요는 현재의 중화 민족으로 융화되었으니 발해사는 중국사라는 입장이다.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大諲譔)이 요에 항복하였지만, 발해인들은 부흥운동을 일으켜 요의 지배를 거부하였다.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 살펴보아도 후발해(後渤海)·정안국(定安國)·흥요국(興遼國)·대발해(大渤海) 등이 있고 후발해와 정안국의 존속기간은 수십년을 넘고 있다. 발해 유민이 요의 지배에 거세게 항거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발해의 세자 대광현(大光顯)두산백과 이 수만 호의 백성을 이끌고 고려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발해인들이 고려를 어떻게 여겼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려사(高麗史)』 기록에는 대광현 이외에도 발해 유민의 고려 이주가 예종 11년(1116)까지 이어지고 있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의 집단적 이주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고려의 발해 유민에 대한 처우는 발해와 고려의 계승관계를 잘 보여준다. 발해 멸망 후 고려 태조는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고 하였으며, 대광현에게는 왕씨 성을 내려주고 조상의 제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한편 요가 사절을 보내오자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고 하고 수교를 거부하였다. 유명한 만부교 사건이 이때의 일이다.
▼ 발해의 석등
▶ 발해의 영광탑
만부교(萬夫橋)사건
고려 태조 25년(942) 요 태종이 사신을 보내오자, ‘거란은 구맹(舊盟)을 돌보지 않고 발해를 쳐서 멸한 무도한 나라이므로 결연할 수 없다’고 하고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보내고 선물로 가져온 낙타는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다.
▲ 러시아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발굴된 온돌
- 발해가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였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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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멸망과 부흥운동 자료번호 : iscd.d_0003_0040_0040